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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 Run Away ㅣ K-픽션 23
조남주 지음, 전미세리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8년 11월
평점 :
"결혼하기 전까지는 아버지가 네 보호자다. 내가 우리 딸 지금처럼 티 없이 지켜줄 거야."
"저도 곧 스물아홉이고 사회생활이 오 년 차인데 제가 정말 티끌 하나 없을 것 같으세요?"
아버지는 내가 티끌 정도가 아니라 움푹움푹 옹이투성이이며 스스로 그 옹이들을 별로 대단치 않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16쪽
남들은 미쳤다고 하겠지만 나는 그게 아버지가 보내는 메시지인 것 같다.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이곳은 경치가 좋구나. 너무 걱정 마라. 엄마에게 말하지 마라. 지리산을 오르고 제주 바다를 구경하고 테이크 아웃 커피를 마시며 젊은 사람들이 많은 거리를 걷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미안하지만 아버지 없이도 남은 가족들은 잘 살고 있다. 아버지도 가족을 떠나 잘 살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언젠가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면 아무 일 없다는 듯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35쪽
조남주, <가출> 中
+) 단편 소설들을 좀 읽어봐야지 싶다가 정말 우연히 'K-픽션' 시리즈를 접했다. 한국 소설들을 영어권 독자에게 소개하는 시리즈인지, 한글로 단편 소설을 싣고 영문 번역본을 같이 담고 있는 책이다. 아이디어가 좋은 것 같아서 관심이 생겼다. 그리고 그 책들 중에서 또 정말 우연히 이 소설을 선택했다.
짧은 단편 소설이라서가 아니라 책을 집어 든 순간 나는 순식 간에 소설에 빠져들었다. 이 소설은 한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가 가출을 하게 되면서 두 아들 내외와 막내 딸, 그리고 어머니의 반응을 담고 있다. 처음 어머니가 자식들을 불러 아버지의 가출을 알리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그때 그런 상황임에도 자식들이 평소 좋아하던 청국장으로 식사를 준비하는 어머니. 어쩌면 그 어머니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가부장적 세대 속의 수많은 어머니일지 모른다. 결혼해서 출가하거나 독립한 자식들은 처음에는 아버지를 찾고자 전단지도 붙여보고 아버지의 가출을 큰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차차 아버지의 가출은 가족들이 모이면서 걱정하는 하루 이틀 정도의 일, 즉 일상적인 일이 되어 간다.
어머니는 가족들이 모일 때마다 자식들을 위한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놓고, 자식들은 그것을 먹으면서 자책감이 들었다가 곧 익숙해진다. 어쨌든 밥은 먹어야 하니까. 아버지가 사라지면서 이 집안에서 어머니의 지위는 변한다. 아니다. 그건 변한 게 아니라 새로 발견하는 것이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말에 늘 순종적인 어머니의 목소리가 이제 자식들에게 들리게 된다. 어머니는 그동안 목소리를 안냈던 걸까, 못냈던 걸까.
저자는 이런 장면들을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그려낸다. 가족들의 반응을 보며 나는 우리나라에 뿌리 깊히 박힌 전형적인 가부장적 가족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들의 사연은 뻔하지만 이들의 모습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살아왔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구나. 당연한 것이 이제는 당연하지 않고, 이미 당연했어야 하는 것이 이제와서 당연해지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아버지의 가출은 막내딸이 내뱉은 말처럼 '아버지의 생에서 책임감이라는 티끌로 뭉친 옹이'를 풀어내는 일종의 독립이라고 생각한다. 막내딸이 독립할 때 기를 쓰고 반대하는 전형적인 아버지. 우리의 아버지 세대들을 꼭 닮았다. 그런 분들이 70대가 되어갈 때 느끼는 허무감이랄까 헛헛함을 이 집안의 아버지는 가출로 보여준 것이다.
그러니 그 가출은 표면적인 의미의 가출이 아니라 아버지 자신에게도 가족에게도 새로운 출발이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삶의 모습들을 각자 접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아버지에게 준 막내딸의 신용카드 사용 문자가 딸에게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모습으로 재현된다. 이 가족들은 이제 새로운 모습에 각자 적응하며 지내고 있는 모습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그것이 잘 적응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새로운 변화라는 것이 의미있는 것 같다.
이 소설을 다 읽고 잘 쓴 소설 같아서 작가가 누구인지 찾아보았다. 내가 요즘 너무 책을 안읽었나 싶을 정도로 익숙하지 않은 작가였다. 누구지? 하고 찾아보다가 알게 되었다. 꽤 유명한 작가구나.. 한동안 언급이 많이 된 소설책을 쓴 사람이었다. (사실 <82년생 김지영>을 아직 읽지 않은 상태라 그 책의 작가가 누구인지 몰랐다. 책 제목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근데 그분이었다.)
어쨌든 모처럼 흡인력 있는 소설을 읽은 것 같고, 앞으로 저자의 작품들을 두루 읽어봐야지 싶다. 그리고 이 시리즈, 좀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