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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퇴근 후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면 이상한 자부와 불안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어딘가 어렵게 도착한 기분. 중심은 아니나 그렇다고 원 바깥으로 밀려난 건 아니라는 안도가 한숨처럼 피로인 양 몰려왔다. 그 피로 속에는 앞으로 닥칠 피로를 예상하는 피로, 피곤이 뭔지 아는 피곤도 겹쳐 있었다. 그래도 나쁜 생각은 되도록 안 하려 했다. 세상 모든 가장이 겪는 불안 중 그나마 나은 불안을 택한 거라 믿으려고 애썼다.
8% [입동]
사진 찍을 때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무척 평범한 사람,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날은 자주 오지 않는다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까 그런 순간을 만났을 땐 잘 알아보고, 한곳에 붙박아둬야 한다는 걸 알 정도로..... 나이 든 사람 말이다.
55% [풍경의 쓸모]
ㅡ그죠? 그게 젊음이지. 어른이 별건가. 지가 좋아하지 않는 인간하고도 잘 지내는 게 어른이지. 안 그래요, 이선생?
이럴 땐 뭐라 해야 하나. 그렇다 하면 위선자 같고 아니라 하면 점잔 빼는 것처럼 보일 텐데..... 갈등하는 사이 곽교수가 말을 이었다.
ㅡ호오가 아니라 의무지. 몫과 역을 해낸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사람 재는 자가 하나밖에 없는 치들은 답이 없어요. 아주 피곤해.
60% [풍경의 쓸모]
고집스러운 얼굴로 이상한 식탐을 부리고, 비위를 맞추면 반말하고, 사무적으로 대하면 훈계하고, 식사 후 아무 할 일도 없으면서 새치기하고, '찬밥도 위아래가 있다'는 장유유서 정신을 강조하는 분들이 정말로 많다.
ㅡ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가진 도덕이, 가져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
72% [가리는 손]
김애란, <바깥은 여름> 中
+) 꽤 오랜만에 읽은 소설이다. 김애란 작가의 필체가 이랬던가. 너무 오래 전에 작가의 소설을 읽은 탓에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감탄했다. '와, 어떻게 이런 느낌을 이렇게 쉽고 일상적인 언어로 쓸 수 있지? 게다가 논리적으로 말야. 진짜 논리적인데 쉬워. 어떻게 이렇게 쓰지?' 이 책을 처음부터 반 정도 읽었을 때, 나는 내가 진짜 오랜만에 소설을 읽어서 이렇게 재미있고 설레는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나머지 반 정도를 마저 다 읽고서야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나는 어느새 이 작가의 문장들에 계속해서 감동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인물들의 섬세한 심리를 일관된 어조로 표현해내는 그 힘은 정말 타고난 소설가구나 싶다. 저자의 문장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물들의 심리나 생각은 읽을수록 깊이가 있다. 만연체로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 같은데 한 눈에 쏙쏙 들어오는 문장들이 정말 맛있다.
아들의 죽음을 겪은 부부의 이야기를 다루는 [입동]은 상처입은 부모의 마음을 일상의 저항으로 표출하고, [노찬성과 에반]은 자기 곁에서 벗이 되어준 유기견의 병을 고칠 것인지 최신 핸드폰을 살 것인지 고민하는 아이의 이야기로, 어린 아이가 갖고 있는 욕망을 제시한다. 결국 사람의 욕망이겠지. 그리고 교수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권력자의 치졸한 면모를 제시한 [풍경의 쓸모], 다문화 가정이자 한부모 가정의 아이가 갖고 있는 상처가 또 다른 상처를 만드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등등
이 소설집은 소재면에서도 다양한 인간의 군상들을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오랜만에 설레는 문장들을 여러번 읽게 해준 저자에 감사하다. 이제 슬슬 문학에 다가 서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