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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오래전에 끓어올랐던 증오는 끓어오른 채 그 자리에 멈춰 있고, 오래전에 부풀어올랐던 고통은 부풀어오른 채 더이상 수포가 터지지 않았다.
아무 것도 아물지 않았다.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다.
p.62
아름다운 사물들은 믿으면서 아름다움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은 꿈을 꾸는 상태에 있는 거라고 플라톤은 생각했고, 그걸 누구에게든 논증을 통해 설득해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세계에선 그렇게 모든 것이 뒤집힙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오히려 모든 꿈에서 깨어난 상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현실 속의 아름다운 사물들을 믿는 대신 아름다움 자체만- 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만을- 믿는 자신이.
p.93
네가 나를 처음으로 껴안았을 때, 그 몸짓에 어린, 간절한, 숨길 수 없는 욕망을 느꼈을 때 , 소름끼칠 만큼 명확하게 나는 깨달았던 것 같아.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살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p.123
한강, <희랍어 시간> 中
+) 이 소설은 눈을 잃어가는 한 남자와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그들이 '희랍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한 자리에 있게 된다. 남자는 여자가 말을 못하는 것을 모르고 다가섰고, 여자는 남자가 보지 못하는 것을 모른 채 외면했다. 하지만 결국 둘은 한 공간에서 만난다. 그리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알게 되면서 서로에게 작은 배려를 시작한다.
여자는 처음부터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여자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일들이 그녀의 말을 거둬간 것이다. 남자는 눈이 멀꺼라는 병원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안경을 쓰고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 소설은 말을 잃어가는 사람과 눈을 잃어가는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그린다. 여자에게 분노 표출의 수단이 될 수 있었던 말이, 아이를 되찾을 수 있도록 시도해볼 수 있었던 말이, 그녀의 마음과 달리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남자에게 평생 한번쯤은 만나고 싶었던 사람과의 재회를 이룰 수 있는 눈이 마음과 달리 낫지 않는다.
'삶이란 결코 견디는 일이 되어선 안된다'는 여자의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연상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삶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걷는'것이 되어야 한다. 여자는 시끄러운 음악이 가득한 거리를 걷고 또 걸으며 말이 아닌 다른 방식을 선택하고, 남자는 안경이 깨져버린 어두운 계단에서도 손을 더듬으며 빛을 향해 한발 내딛는다.
이 소설은 읽기에 쉬운 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한강 소설의 매력은 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문장이다. 명문장들. 그건 수식어의 쓰임에 국한되지 않고, 단어 하나하나에도 신중하게 생각해서 선택했을 작가의 정성이 확인되는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