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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11년 3월
평점 :
"어쨌든 이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거야."
진이가 말한다. 그리고 내가 그 말을 잇는다.
"어쨌든 심장 뛰는 일을 하면서 사는 거야."
p.41
비밀을 나눠갖는 것이 관계를 공고히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가까운 사람들만이 비밀을 공유할 수 있으며, 비밀의 공유 여부가 관계의 척도라고 믿었다. 하지만 비밀이 때때로 폭력이 된다는 것도 잘 알았다. 비밀을 공유하자는 것은 무거운 짐을 나눠지자는 것이었다. 짐을 나눠들자고 덤벼드는 비밀은 너무나 일방적이어서 원하지 않아도 짐을 질 수 밖에 없었다.
p.136
비겁하다. 진짜 나쁜 사람은 당신 같은 사람이야. 강한 사람한테는 꿈쩍도 못하면서 약한 사람들한테만 신경질 부리는 사람. 경찰도 아니면서 경찰 노릇 하는 사람. 자발적으로 완장을 차고 위원장 노릇 하는 사람. 그러면서 뭔가 하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하는 사람. 억압받고 상처받은 자의 숭고한 얼굴을 하고 진실이니 사명이니 정의니 외치는 사람. 자기의 희생을 남에게 전가하려는 사람.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고 강요받은 것도 아니면서 추적하고 고발하고 차단하려는 사람.
p.181
천운영, <생강> 中
+) <생강>은 '한 고문기술자와 그의 딸'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잘 알려진 고문기술자를 둘러싼 역사적 사실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실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소설로 옮기는 대신, 고문기술자 아버지와 그 딸이라는 두 인물의 관계와 그들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남자의 직업은 고문기술자인데, 그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조직과 조직의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런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자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비난한다. 처음에 인정하지 않던 그도 조직의 아버지의 배신에 철저히 무너진다.
그의 딸은 아버지가 늘 당당하고 멋진 경찰이라고 믿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의 직업을 알게 된다. 아버지를 찾으며 비난하는 사람틀 틈에서, 아버지에게 고통당한 사람들 틈에서 딸은 혼란스러움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증오로 바뀌고, 아버지가 떳떳하게 자수하기를 바란다. 자신의 아버지가 비겁하고 비열하다고 느끼면서 딸은 점점 방황하게 된다. 물론 그들 사이에 어머니가 있다. 남자의 아내이자 딸의 엄마인 여자는 처음에는 아버지를 맹목적으로 따르지만 현실적인 문제들을 접하고 세상의 외면을 받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녀도 점차 지쳐간다.
이 작품은 단순한 가족사의 이야기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과 뒤섞여 살고 있는 우리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선'이라고 믿은 것이 '선'이 되지 않을 때의 당혹스러움, '악'임에도 불구하고 '악'이라 믿지 않을 때의 당황스러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우울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꼼꼼한 서사가 쉼없이 책을 읽게 만드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