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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열일곱 살 우리가 폭발물이면서도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것은, 도화선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모든 것을 실천에 옮길 만한 기회와 행동력과 돈과 시간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분노와 불안을 극한까지 상상할 수있는 안전장치다.
p.14
- 내가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그게 관계를 가볍게 만들어주거든. 누구나 짐을 지는 건 싫어하니까. 연우야. 이건 중요한 문제야. 약간 멀리 있는 존재라야 매력적인 거야. 뜨겁게 얽히면 터져. 알았지?
p.47
나는 결혼한 뒤 완전히 내가 싫어하고 경멸하는 타입의 여자가 됐었어. 그러지 않으면 실패자가 되는 길밖에 없었거든.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 되거나 실패자가 되거나. 사람들은 그런 걸 불행이라고 말하지. 나 자신이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남들 대하는 게 더 겁나더라. 타인과 나를 조율하는 일은 정말 어려워. 서툴다는 걸 남들이 다 알아봐주는 것도 아니고.
p.65
하고 싶은 것만 해도 되긴 하지. 근데 그게 훨씬 더 어려울걸. 내가 남하고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 그거 몹시 힘든 일이야. 모든 게 다 자기 책임이 되거든. 안전한 집단에서 떨어져나와 혼자여야 하고, 정해진 가치에 따르지 않으려면 하나하나 자기가 만들어가야 해. 또 무리에서 떨어져나가면 끊임없이 자기에 대해 설명해야 해. 경쟁을 피하는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 남과 다른 방식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일이라면 말야.
p.171
이기적이고 변덕스럽지만 반성과 결심도 잘하는 몸. 약해져 있다가도 원하는게 생기면 힘을 낼 줄도 안다. 스스로 불완전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포기도 잘하지만 결국은 나를 따라준다. 몸이야말로 온전히 내 것이기 때문에. 물론 궁극의 목표는 살아남는 것.
p.269
- 어쩌면 사람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실수를 하는 건지도 몰라.
p.355
은희경, <소년을 위로해줘> 中
+) 열일곱 살 고등학생 소년 '연우'의 시선으로 이 소설은 전개된다. 이혼한 엄마와 둘이 살면서 엄마에게서 삶의 방식들을 배우게 된다. 열일곱이 되면서 엄마가 마냥 가르쳐주던 것들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서 소년은 정신적인 성장을 이룬다. 또한 소년이 친구들을 만나면서 우정과 사랑에 대해 생각하며 때로는 설레고 때로는 고민하며 사람과 삶을 알아가게 된다.
이 소설 속 엄마는 보수적인 사회에서 상처받은 여자다. 하지만 보수적인 사회의 분위기에 적응하는 만큼 제법 거스를 줄도 안다. 삶을 쿨하게 사는 법을 아프게 배운 여자, 그 여자가 아들에게 하는 인생에 대한 충고는 이런 것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며, 그 상처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는 '관계' 앞에서 최대한 가볍고 쿨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그러다보니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에도 쉽게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합리화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굉장히 공감되는 부분이었는데 나도 사람이나 사물에 특별히 애착을 갖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건 처음부터 그랬던게 아니라 살면서 그렇게 변한 것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애착을 지닐수록 더 큰 상처를 받게 된다는 점을 안 순간부터, 어쩌면 나도 연우 엄마처럼, 연우처럼 스스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청소년들이 읽기에도, 어른들이 읽기에도 참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연우의 '달리기'처럼 인생에서 성실하게 달려야하는 순간은 꼭 한번쯤은 있다.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의 기분, 그런 기분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이 한 권의 소설을 통해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따뜻한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