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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의 제왕
이장욱 지음 / 창비 / 2010년 4월
평점 :
다행히 유끼 역시 서울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끼는 그 도시의 어떤 땀냄새 같은 것 ....... 커다란 목소리들 ....... 잠시 상념에 잠겼다가 깨어나면 어디서든 밀려드는 소음 ........ 희박하고 후덥지근한 공기 ....... 전단지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밤거리 ...... 그런 것들을 좋아했습니다. 모든 것이 불규칙하고 모든 것이 예측불가능한 게 매력이라고 하더군요. 도시 자체가 생물처럼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고 했어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도시를 좋아하는 유끼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내가 보기에 그 도시의 삶이란, 그저 맹목적으로 들끓는다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었으니까요. 미친 듯이 서로에게 욕을 해대고, 미친 듯이 사랑을 하고, 또 미친 듯이 자신이 올핟고 주장해야 하는 도시 ...... 어지럽게 변하고, 어지럽게 무너지고, 어지럽게 거대해지는 ........ 그런 도시 말입니다. 계획도 아량도 없는 공간, 내게는 그게 서울이었습니다.
p.26 [동경소년]
죽음에게는 죽음만이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 죽음은 삶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건 아닐까. 죽음은 죽음 자체를 밀고 나가는 힘으로만 충만한 것은 아닐까. 이상하게도 이 의문은 고희성의 머리에 접착제처럼 달라붙어 떠나지 않았다. 고희성은 중얼거렸다. 죽음에게만 관심이 있는 죽음이라니. 죽음으로만 충만한 죽음이라니.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 쓴다는 건 허망한 일이 아닌가. 삶으로 회귀하지 않는 죽음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고희성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p.186 [곡란]
이장욱, <고백의 제왕> 中
+) 소설가 이장욱 보다 평론가 이장욱, 시인 이장욱을 생각하게 된다. 시와 소설, 평론까지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있는 재주꾼인데, 이번 소설을 읽으면서 글쓰기에 갖고 있는 특유의 자신감 같은 것이 작품에서 녹아나는 것을 느꼈다. 짧지만 현장감이 느껴지는 문장들이 기발한 내용을 힘있게 뒷받침했다. (특히 [변희봉] 같은 작품은 깔깔거리면서 그 씁쓸함으로 눈물짓게 만드는 소설이었는데 기발한만큼 그 능청스러운 어조가 인상깊었다.)
[동경소년] 한편의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는데, 시종일관 안개 같이 탁한 분위기가 그런 생각을 더하게 만들었다. [고백의 제왕]은 예전에 어떤 소설집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참 재미있고 독특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와서 보니 이장욱의 소설이었다. 고백의 제왕으로 불리는 사내가 고백을 하면 할 수록 사람들은 그를 더 멀리하게 되는 소설인데, 무엇이 진짜 진실이고 허구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 작품이었다. 아니, 진실과 허구를 분리하는 것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할까.
어쩌면 거짓과 진실 사이의 경계에서 작가는 양쪽 모두를 둘러보며 아슬아슬한 스릴을 즐기는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이쪽 혹은 저쪽으로 가른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던져주는 소설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