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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우리 모두는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가는 여행자일세. 그러나 물살이 거세기 때문에 그냥 건너갈 수는 없어. 우리는 무엇엔가에 의지해서 이 강물을 건너야 해. 그 무엇이 바로 여러분이 하고자 하는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들이기도 할 테지. 지금 여러분은 당장 그것이 여러분을 태워서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게 해주는 배나 뗏목이 되어 줄 것으로 생각할 거야.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이 여러분을 태워 실어나르는 게 아니라 반대로 여러분이 그것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p.62
내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본다.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들만 떠오른다. 진실과 선함의 기준은 무엇인가. 올바름과 정의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폭력적이거나 부패한 사회는 상호간의 소통을 막는다. 소통을 두려워하는 사회는 그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다. 나중엔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찾아 더 폭력적으로 된다.
p.183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가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 만큼 밖에는 담지 못하지.
p.241
내가 윤이랑 명서 학생보다는 이 세상을 조금 더 살았으니까..... 이런 식으로 말해도 된다면, 인간이 가장 고통스러울 때가 생각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때라고 생각해요.
p.286
산다는 것은 무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지닌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끝없이 변하는 한 우리의 희망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p.291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절망할 줄 모르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다만...... 그 절망에 자네들 영혼이 훼손되지 않기만을 바라네.
p.341
살아 있다는 것은 곧 다른 모양으로 변화할 것을 예고하는 일이고, 바로 그것이 우리들의 희망이라고 했던 윤교수.
p.347
신경숙,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中
+) 이 소설은 비극적인 시대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청춘들의 모습을 통해 사랑과 젊음의 의미를 탐색한다. 본인들이 선택한 시대 현실이 아니나 그 한 가운데 존재하는 그들의 정신적인 방황기라고 해도 좋다. 어찌보면 그들의 성장소설이기도 하고, 청춘소설이나 연애소설 같기도 하다. 인물들 각자가 간직한 가슴 깊은 상처에 대한 기억이 그들을 엮고 있는데,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에게 조차 상처를 남길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이기적인 면모가 기억에 남는 소설이다.
자유와 열정을 꿈꾼 청춘들의 방황 속에서 친구를 잃고 언니를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읽기도 하는 사람들. 그들의 쓸쓸한 모습은 내일에 대한 희망 보다 '오늘을 열심히 살자'는 것에 더 잘 드러난다. 신경숙 작가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가 안개 같이 뿌연 시대상황의 배경과 잘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절망할 줄 모른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윤 교수의 대사에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당연한 것인데, 왜 얼른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영혼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임을 모르고.. 그렇다고 이 소설이 잃어버린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잃어버린 상처를 간직한 인물들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지, 어떻게 내일을 생각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모처럼 성의있는 소설을 읽었다. 나는 이렇게 소설의 대가라도 한 편의 소설을 쓸 때마다 성의있는 태도를 유지하는 작가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