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59
송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5월
평점 :
만년필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 대가리 눈 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의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 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 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 -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 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中
+)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꽃과 꽃 사이에서 노닐고 있다. "도대체 그에게는 삶에서의 도망이란 없다 / 다만 꽃에서 꽃으로 / 유유히 흘러 다닐 뿐" ([나비] 부분)이다. 꽃밭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나비처럼 시인은 삶의 어느 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이곳으로 넘나든다.
그런데 그것은 혼자만의 생이 아니다.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 한 그루의 주변에서 벗을 찾아내고, 반달곰 한 마리에게서 벗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찾아내는 것이다. 아니, 찾고 싶은 것이다. "그게 그게 우리 눈에 딱, 걸렸는 기라 / 서로 가려운 곳 긁어주고 등 비비며 놀다 들킨 것이 부끄러운지 / 곰은 산벚나무 뒤로 숨고 산벚나무는 곰 뒤로 숨어 / 그 풍경이 산벚나무인지 곰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 우리는 한동안 산행을 멈추고 바라보았는 기라" ([늙은 산벚나무] 부분)
이 시집에서 시인이 소망하는 생은 소박하면서도 진실하다. "하얗게 물을 뿜어 올리는 화분 하나 등에 얹고 / 어린 고래로 돌아오는 꿈"을 꾸는 시인, 그에게 "커다란 꿈은 이미 존재하지도 않"는다. ([고래의 꿈] 부분) 잘 살아보겠다는 거창한 꿈 따위 생각하지도 않는다. "소나기 한줄금 시원하게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시끄러운 소리"로 연명한 삶을 반성한다. 그리고 꿈꾼다. "고요히 적막 한 채 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소나기] 부분)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꽃, 나무, 비, 고양이, 코끼리 같은 생명들을 중심으로 시선을 맞춘다. 그들을 통해 삶의 부분들을 확인하고 또 그것이 곧 전체가 된다. 지금 돌아보니 시인에게 삶이란 부분이 곧 전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