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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1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너는 마치 발 없는 나무토막 같아. 네 발로 걷는 게 아니라 그저 물결에 떠내려가는 것 같아."
민화는 무심히 그런 말을 했을 테지만 운형은 깊이 은폐해 온 비밀을 간파당한 것 같아 가슴이 썰렁했다. 그때 민화는 이미 운형의 여러 기질들, 무심함이거나 허무함, 무기력한 기질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그저 인생의 봄날에 느끼는 춘곤증과 같은 나른함이라 생각했던 태도가 실은 우유부단함이거나 비겁함이었다는 사실을 운형은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 1권 p.23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떤 선택을 한다 해도 인생은 별반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 그게 가장 큰 원인일 겁니다.
- 1권 p.36
이제부터 하기 싫은 일은 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만 하세요. 자신의 내부에 있는 악의나 파행성을 인정하세요. 정신적인 수행과 병행되지 않은 금욕은 본성을 갉아먹고 기어이 광기로 폭발하고 맙니다. 우선 사직서를 제출하세요.
- 1권 p.37
"난 어렸을 때, 어른이 되면 이름을 바꾸는 줄 알았어. 어른들 이름은 다 어른스럽고 우리 친구들 이름은 다 애들 이름 같았거든. 또 태어난 날이 저마다 다르듯 친구들의 띠라는 것도 다 다른 줄 알았어.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내 친구들이 모두 용띠라는 걸 알았을 때 이상한 실망 같은 걸 느꼈었어. 뭐랄까.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단순한 거구나. 재미가 없겠구나..... 열 살 무렵이었을 거야. 건방졌지."
- 2권 pp.99~100
김형경,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1, 2권> 中
+) 이 두 권의 소설은 청춘의 아련한 기억을 어렴풋이 되살린 작품 같았다. 비겁하게 보일 정도로 감정 표현을 자제한 운형과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아픔을 간직한 채 사는 은혜, 억울하게 살아가는 노동자들을 위해 정의롭게 살고자했으나 실패한 민화, 그리고 민화의 죽음을 도울 수 밖에 없었던 형조, 세상의 모든 인연을 가볍게 만드는 시현까지,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젊은 영혼들의 이야기이다.
정의를 위해서 열정적으로 살았던 청년들이 사회에 나가 부당함과 비겁함을 경험하며 때로는 아파하고, 때로는 저항하며, 때로는 침묵한 채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만약 내가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면 한 갑은 거뜬히 피웠겠구나 싶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하고 울렁거렸다. 소설 속의 상황이 지금과 뭐가 다르겠는가.
정의와 진실이 통하는 세상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하나씩 하나씩 좀 더 발전하고 나아가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중 인물들처럼 사회와 시대에 관심을 갖고 내 일처럼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한데, 나부터도 많은 반성이 요구된다. 바쁘게 사는 삶이지만 모처럼 민중을 위한, 작품을 맛보았다는 생각에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