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마무리
법정(法頂) 지음 / 문학의숲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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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자신의 꿈과 이상을 저버릴 때 늙는다. 세월은 우리 얼굴에 주름살을 남기지만 우리가 일에 대한 흥미를 잃을 때는 영혼이 주름지게 된다. 그 누구를 물을 것 없이 탐구하는 노력을 쉬게 되면 인생이 녹슨다. 명심하고 명심할 일이다.

p.15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에 대해 감사하게 여긴다. 내가 걸어온 길 말고는 나에게 다른 길이 없었음을 깨닫고 그 길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긍정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과 모든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에게 성장의 기회를 준 삶에 대해, 이 존재계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근원적인 물음,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묻는 것이다. 삶의 순간순간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하는 물음에서 그때그때 마무리가 이루어진다. 그 물음은 본래 모습을 잃지 않는 중요한 자각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나를 얽어매고 있는 구속과 생각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 삶의 예속물이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거듭난다. 진정한 자유인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마무리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또한 단순해지는 것. 하나만으로 만족할 줄 안다. 불필요한 것들과 거리를 둠으로써 자기 자신과 더욱 가까워진다.

pp.22~26

 

언젠가 우리에게는 지녔던 모든 것을 놓아 버릴 때가 온다. 반드시 온다! 그때 가서 아까워 망설인다면 그는 잘못 살아온 것이다. 본래 내 것이 어디 있었던가. 한때 맡아 가지고 있었을 뿐인데. 그러니 시시로 큰마음 먹고 놓아버리는 연습을 미리부터 익혀 두어야 한다. 그래야 지혜로운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이런 일도 하나의 '정진'일 수 있다.

p.33

 

깨어 있고자 하는 사람은 바로 그 순간을 살 줄 알아야 한다. 좋은 친구란 주고받는 말이 없어도 마음이 편하고 투명하고 느긋하고 향기로운 사이다. 그 밖에 또 무엇을 찾는다면 그것은 헛된 욕심이고 부질없는 탐욕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p.176

 

법정 스님, <아름다운 마무리> 中

 

 

+) 법정 스님의 책을 읽다보면 언제나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 말을 참 좋아하는데 과거나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사는 것이 행복한게 아닐까 싶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없다. 그 말은 곧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곧 아름다운 시작이고 마무리라는 말이다. 수행자로서의 삶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지루함을 벗어나게 하는 방법은 늘 그 순간을 새롭게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어렵겠지만 시도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산에서 혼자 사는 삶을 상상해본 적이 있다. 그것은 고독과 자기와의 싸움이지 않을까. 스님은 이 책에서 혼자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게으름은 큰 적이라고 말씀하셧다. 게으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조차 수행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말에 큰 감명을 받았다.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타인과 경쟁하면서 살아가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라. 실상 가장 큰 적은 내 안의 나가 아니겠는가.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죽으면서 웃을 수 있을꺼라 생각한다. 또한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마무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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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척 시작시인선 82
길상호 지음 / 천년의시작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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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질의 본능'

 

사과 껍질을, 배의 껍질을 벗기면서

그들 삶의 나사를 풀어놓는 중이라고

나는 기계적인 생각을 돌린 적 있다

속과 겉의 경계를 예리한 칼로 갈라

껍질과 알맹이를 나누려던 적이 있다

그때마다 몇 점씩 달라붙던 과일의 살점들,

한참 후 쟁반 위 벗겨놓은 껍질을 보니

붙어 있는 살점을 중심에 두고

돌돌 자신을 말아가고 있다 알맹이였던

그녀의 빈 자리 끌어안고 잠든 사내처럼

버려지고도 제 본능을 감당하고 있다

이미 씨앗은 제 속을 떠났지만

과일 빛깔은 살갗에 선명하게 남았다고

그 빛깔 향기로 다 날릴 때까지

안간힘 다하고 있는 껍질들,

너무 쉽게 변색되어 갈라지던 마음을

저 껍질로 멍석말이 해놓고

흠씬 두드려 패고 나면 다시 싱싱해질까

말려진 껍질 속에 드러눕고 싶었다

 

 

길상호, <모르는 척> 中

 

 

+) 젊은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대세를 이루는 환상적이고 형식파괴적인 시를 쓰지 않았다는 점에 우선 좀 새로웠고, 기존의 전통 시학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에 좀 당황스러웠다. 그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전통시학을 구성하는 젊은 시인 한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게 된 듯 하다. 시인은 "몇 개 상처를 정강이에 새기며 / 오래오래 걸은 후에야 / 집 하나 겨우 얻"은 것처럼 시를 썼고, "불안한, 너의 생을 눕혀놓고서 / 살살 다독이고 싶었"던 간절함으로 시를 썼다.  왜냐하면 "상처는 상처로 치유될" 것 같았기에 그에게 상처는 시를 태어나게 하고 시로 그것을 감싸게 만든다. ([물의 집을 허물 때] 부분)

 

우리는 누구나 "한 마리 이무기였다 / 천년을 기다려야 여의주 물고 / 승천할 수 있다는 불완전의 생"을 살아간다. "온몸으로 부딪히며 저 완고한 바위를 깎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걸어야 할 수많은 고난과 시련의 생이 완전을 꿈꾸는 것은 아니겠으나, 걸으면서 살아가면서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넘어가는 희열을 맛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강에서 시작된 수 천리 길, / 숱한 상처들 힘이 되어 / 여기 와 꿈틀대는 것이리라"고 시인은 믿고 있다. 그것은 곧 "나의 길이 될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다. ([탁족은 뜨거워라] 부분)

 

그렇게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인연들, 사람 혹은 사물 그리고 자연까지, 그것이 무엇이든 시인에게는 소중한 것들이다. 아니, 그 인연과의 만남을 만들어가고 지켜가는 것이 더 소중한 것이다. "이제 인연 하나 더 쌓는 일보다 / 사람과 사람 사이 벌어진 틈마다 / 잔돌 괴는 일이 중요함을 안다 / 중심은 사소한 마음들이 받칠 때 / 흔들리지 않는 탑으로 서는 것,"이므로. ([돌탑을 받치는 것] 부분) 흔들리는 않는 생과 흔들리지 않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다.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사람 그리고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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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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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행복, 또 다른 구매리스트 하나

 1. 오두막 한 채.

 2. 우정.

 3. 우월감과 거만함, 내분, 경쟁 등을 피하는 것.

 4. 사색.

 5. 조바니 벨리니의 <성스러운 대화>.

p.116

 

이를테면 발을 밟히는 것에서부터 뜻하지 않은 죽음까지 좌절의 영역은 엄청나게 넓을 수 있지만, 모든 좌절의 핵심에는 우리의 희망과 그 실현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 사이에 빚어지는 갈등이라는 기본적인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p.129

 

 전통적인 위로의 형태는 당사자를 안심시키는 것이다. 근심하는 사람에게 그가 느끼는 두려움은 지나치게 과장되었으며 문제가 된 일들은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풀려나갈 것이라고 설명하면 된다.

p.154

 

 물론 끔찍한 곤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모든 삶은 다 힘겹다. 그리고 그들 중 몇 명은 완성된 삶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달려 있다. 모든 고통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희미한 신호다. 그런 고통도 당하는 사람의 정신력과 현명함의 정도에 따라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하고 나쁜 결과를 낳기도 한다.

p.353

 

알랭 드 보통,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이 책에는 소크라테스, 에피쿠로스, 세네카, 몽테뉴, 쇼펜하우어, 니체의 철학을 중심으로 그들의 사상을 바탕으로 삶에 대해 조망하는 시선이 유지된다. 작가는 이 여섯명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통해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난해하게, 또 때로는 진지하게 살아가는 자세를 논의한다. 철학 입문서로 분류하자면 너무 딱딱한 생각이 들고, 그렇다고 교양서적으로 분류하기에는 좀 어려운 측면도 있다. 그러나 차근차근 읽어보면 철학에 대해 어려움을 갖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 정답게 다가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 책으로 보인다. 또한 독자들이 철학에 대해 어려워하지 않도록 여러 사진과, 그림, 그리고 철학자들에 얽힌 일화를 소개한다.

 

무엇보다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우리가 삶에 대해 갖고 있는 고민들을 같이 공유하기에 충분하다. 그리하여 돈의 결핍, 사랑의 고통, 부당한 대우, 불안, 실패에 대한 공포와 순응에의 압력 등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에 대해 소크라테스, 에피쿠로스, 세네카, 몽테뉴, 쇼펜하우어, 니체의 처방전이 소개된다. 그것을 실행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중요한게 아니라, 적어도 그런 고민을 갖고 있는 이들과 그것을 해결하려는 이들이 있었다는 점에 우리는 위안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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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출근길
법륜스님 지음 / 김영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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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괴로움의 원인을 찾아보겠다고 마음먹으면 후회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하나의 해결책이기는 하지만, 망설이는 사람일수록 그만두면 괜히 그만뒀다고 곧 후회하게 됩니다. 그러니 지금의 직장에 그냥 다니면서 이제부터 수행을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직장에 다니면서 수행해서 자신의 마음이 편안해지는지 먼저 점검해 보십시오. 직장은 마음이 편안해진 뒤에 그만둬도 됩니다. 그러면 직장을 그만둔 것에 대한 후회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결혼 문제로 고민하거나 이혼을 망설이고 있을 때에도 먼저 정진부터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괴로움은 결혼을 안 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결혼생활 때문에 오는 것도 아니며, 자신의 무지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정진을 해서 지혜가 좀 생기면 후회하지 않는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을 수 있고, 결혼을 결정한 후에도 함께 살면서 더 많은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 항상 할지 말지에 대한 결정을 내려 달라고 말합니다. 하고 안하고는 여러분 개인의 선택입니다. 망설여지는 선택은 이렇게 선택해도 후회가 되고 저렇게 선택해도 후회가 됩니다. 그래서 그 선택을 하기 전에 정진부터 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고 자유로 가는 길입니다.

 

 고민하느라 머리가 아프면 그냥 놔두십시오. 어리석은 생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내려놓으십시오.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정진을 하면 마음이 밝아지면서 저절로 결정이 나게 됩니다.

pp.19~20

 

제가 아는 분 중에 의사 선생님이 계신데, 늘 환자를 만날때마다 심리적 압박을 받습니다. 환자를 치료할 때 혹시라도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부담이 많았는데, 이분이 법문을 듣고 나서 '내가 최선을 다하는 것은 내 일이고, 낫고 안 낫는 것은 그의 일이다. 또 안 나았다고 누가 항의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이것을 낫게 해줘야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두려운 겁니다. '난 사실 그를 위해서 아무것도 해 줄 게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그분은 오히려 더 훌륭한 의사가 되었습니다.

p.86

 

인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만 깨어 있으면 됩니다. 이 순간에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일어나는 겁니다.

p.117

 

법륜 스님, <행복한 출근길> 中

 

 

+) 스님의 법문을 생생하게 들은 것처럼 고개가 끄덕여지는 책이다. 직장생활에 대한 고민을 상담해주는 글이 전체 틀이나, 막상 읽으면 지금 우리네 살아가는 모습의 어느 부분에 끼워넣어도 전혀 다름이 없다. 그만큼 우리 삶은 특별한 분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내가 삶의 어느 지점에 서 있더라도 당당할 수 있다. 또 그 당당함은 바로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최선의 대안이다.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정진하는 마음의 자세가 모든 것에 앞서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음을 수양하는 일, 그것은 정신적인 부분 만이 아니라 운동이나 취미 생활 같은 것으로 스스로 행복함을 가꿔가고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추구하는 일이다. 그런 소중함이 스스로를 넉넉하게 만들면서 모든 선택에 앞서 단호한 결정을 내리게 만드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좀 더 단단해져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남을 원망하기에 앞서 나 스스로 욕심을 버리고 당당해진다면 세상은 훨씬 행복해질텐데. 현대인이 잊어버리고 있는 그 점을 깨우쳐 주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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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의 장례 문학과지성 시인선 194
김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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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安靜寺(안정사)'

 

안정사 玉蓮庵(옥련암) 낡은 단청의 추녀 끝

사방지기로 매달린 물고기가

풍경 속을 헤엄치듯

지느러밀 매고 있다

청동바다 섬들은 소릿골 건너 아득히 목메올 테지만

갈 수 없는 곳 풍경 깨어지라 몸 부딪쳐 저 물고기

벌써 수천 대접째의 놋쇠 소릴 바람결에

쏟아 보내고 있다

그 요동으로도 하늘은 금세 눈 올 듯 멍빛이다

이 윤회 벗어나지 못할 때 웬 아낙이

아까부터 탑신 아래 꼬리 끌리는 촛불 피워놓고

수도 없이 오체투지로 엎드린다

정향나무 그늘이 따라서 굴신하며

법당 안으로 쓰러졌다가 절 마당에 주저않았다가 한다

 

가고 싶다는 인간의 열망이

놋대접풍으로 쩔렁거려서

그리운 마음 흘러 넘치게 하는

바다 가까운 절간이다

 

 

김명인, <바닷가의 장례> 中

 

 

+) 얼마전 다녀온 바다의 차가운 해풍이 기억난다. 처음 이 시를 접했을 때 오랜만에 경이감을 느꼈다. 가고 싶다는 인간의 열망이 만들어낸 꿈, 그 꿈처럼 어딘가를 향해 지느러미를 움직이는 놋쇠 물고기. 나는 절에 갈 때마다 대웅전 처마 밑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그 소리가 마치 나를 반기는 듯 하고 나의 영혼을 깨우는 듯하여 어느 절이라도 늘 풍경을 찾곤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풍경안에서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다는 상상을 해본 적은 없다.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수천 갈래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줄 미처 몰랐다.

 

이 시집에서 시인의 상상력은 길 위의 여행으로 전개된다. 그것은 곧 삶의 여행이기도 하다. 육체의 동적인 이미지와 정적인 이미지를 아우르는 것. 정신적인 성장까지 포함하여 시인은 길 위를 걷고 있다. "누구의 가담 없이도 우리 중심은 / 어느 틈에 변경된다, 시간을 건너지 않고서 무엇으로 / 우리가 늙는다 하겠느냐"([비오기 전에-인환에게] 부분) 화자의 걸음걸이는 공간의 이동 뿐만 아니라 시간의 이동까지 묘사한다. 그런데 독특한 것은 그 여정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가슴에 와 닿는 것이 먼저라는 점이다.

 

"너는 희망을 말하지만 / 나는 가정의 한 끝을 지적했을 따름이다 / 길이 닫히고 / 길 밖에서 서성거리던 풍경들 지워진다 / 누구나 고단하게 저의 행로를 끌고 간다면 / 오늘 잡은 물고기들 다 놓아주리라," ([내 물길로 오는 천사고기] 부분) 아, 화자의 여행에서 여정보다 감상이 먼저 와 닿은 이유는 바로 화자의 길이 예정된 것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스스로 길 위의 것들을 '가정'하는 것. 사실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은 것을 임시로 정하여 길을 걸을 때, 그 사람에게서 우리는 다음 걸음의 풍경을 보게 된다. 내면 풍경이든 길의 흔들림이든.

 

"그러나 돌아가는 것이라면 언제나 죽음은 / 예고된 저녁의 짧은 어스름을 거쳐가야 하는 것이리라"([부활] 부분) 시인에게 삶과 죽음은 예고된 것처럼 다가온다. 놀랍고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는 분명 스스로 짐작하던 바였을 터. "내 걸어온 버릇으로 어느새 들길 그 어귀쯤에 닿았습니다"([수레국화 가을로 굴러가고] 부분) 라는 화자의 고백이 그를 증명한다. 물론 그것이 길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다.

 

하지만 그의 발자국마다 그가 살아온 경험과 앞으로 겪계될 일들이 새겨진다. "세상은 경험만큼 확실한 것이다"([겨울비] 부분) 화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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