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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평점 :
어떻게든 좋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외톨이로 돌아가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외로움이란, 외롭지 않았던 적이 있는 자만이 두려워하는 감정이라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놈이 원하는 것도 나의 패인만큼이나 분명했다. 내 삶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 오만 가지 변덕과 의미없는 요구로 끝임없이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하는 것.
pp.52~53
"미치광이는 미쳐야 사는데, 못 미치게 하니까 미쳐버린 거야."
p.130
"나, 미스 리 선생님 좋아해. 정말로. 주제넘은 말이지만 선생님 볼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짠하고. 그러면서도 참 이상스러웠어. 이런 사람이 이런 데서 왜 이러고 사나. 그래서 원주에 시험 치러 갈 때 최기훈 선생한테 물어봤어. 미스 리 선생님은 도대체 무슨 병이냐고. 도망치는 병이라고 그러대. 그땐 최 선생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 그저 무식한 놈 소견으로 그러고 말았지. 자꾸 병원에서 도망쳐서 아버지가 이 산골짝에 가둔 거구나. 내가 거꾸로 생각했다는 걸, 이제 확실히 알겠어.“
우울한 세탁부의 다음 말은 통렬하게 가슴을 찔렀다.
“세상에서 도망치는 병이야. 자기한테서도 도망치는 병이고. 그렇지?”
pp.290~291
"아니, 내가 벼랑에 발끝으로 버티고 서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게. 인정하면 선택해야 할 테니까. 발을 떼버리거나, 그날 밤을 끌어내서 진실과 대면하거나.“
p.324
정유정, <내 심장을 쏴라> 中
+)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중에 '미침' 혹은 '돌아버림'의 근성이 없는 인간이 있을까. 과격한 용어를 사용해서 좀 그렇지만 사이코나 사이코패스가 늘어가는 현실은 앞의 질문에 대한 답을 보여준다.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미침의 근성을 키우며 살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미치는 걸까. 작자의 말대로 미쳐야 사는데 그렇게 못하게 하니 미쳐버린 걸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욕망때문이 아닐까 싶다.
욕망의 발현이 문제가 아니라 욕망의 표출을 자제하는 억제가 문제다. 스스로 억제하는 것이든 타인이 억제하는 것이든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하는 것때문에 사람들은 미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고 싶은 것은 모두 다 해도 되는 것일까. 거기서 바로 나와 타인 사이의 이기적인 면모가 발견되는 법인데,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이 글의 목표가 아닌 것 같다.(이 문제에 대해 그 끝까지 가보기에 늘 근원이 걸린다. 개인과 사회 사이의 선이 말이다.)
이 소설은 정신병원에서 탈출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환자들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정상인같지 않은 면모를 보인다. 가위 알레르기가 있어서 발작을 일으키는 환자를 굳이 가위와 바리캉으로 위협하는 사람이 과연 정상일까. 우리 사회에서 정상은 없지 않을까. 정상이라 규정하는 것은 또 어떻게 정해진 것인가. 병자보다 더 미친 것처럼 보이는 정상인을 볼수록 입안이 깔깔해지는 맛을 느꼈다. 오히려 작가는 지독하게 냉소적인 사람은 아닐까.
미친 사람과 미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신념의 차이다. 나는 오히려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는 환자들에게서 생에 대한 의지와 삶에 대한 끈기를 보았다. 도박이나 하고 환자를 폭행하는 정상인(의사, 간호사, 보호자 등)에게서 광기를 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 의지에 대한 위협을 느끼면 생존본능이 작동하는 법이다. 나를 억압할수록 상대에 대한 저항은 더욱 강해지는 법이다. 그런데 과연 그 상대는 누구일까.
초반의 지루함을 견뎌내면 제법 알찬 소설 한 권을 접할 수 있다. 마지막의 반전까지 접하면 솔직한 인간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어 씁쓸하면서도 시원한 작품이다. 인간의 거대한 고민들을 유머러스하게 다루고 있지만 그 무게만큼은 묵직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