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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구십년대
공선옥 외 지음, 민족문학연구소 엮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그곳이 사람을 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괴롭히고, 나아가서는 파괴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설이라는 것이 날이 갈수록 더욱 분명해졌으나, 그것 역시 문제라고까지 할 것은 없었다.
차라리 문제는 그곳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는 점, 그리고 고통을 가하는 병사들이나 고통을 당하는 수용자들이나 마찬가지로 사람들이라는 점, 처음에는 병사들에게는 수용자들이, 수용자들에게는 병사들이 사람이 아니라 괴물, 악마, 나찰, 짐승, 그리고 벌레들로 보였으나, 날이 갈수록 서로의 눈에 서로가, 즉 서로를 짐승으로 생각했던 짐승들이 서로에게서 사람을, 그 사람이 사악하냐 착하냐, 나약하냐 강하냐 따위와는 관계없이, 사람을 발견하기 시작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서로에게서 사람을 발견하기 시작하면서 수용자와 병사들이 이제 각기 상대방에게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짐승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 최인석, [노래에 관하여] pp.140~141
"사랑하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구?"
"그래, 만약 결혼해서 그 사람이 불행해지면 그걸 어떻게 견딜 수 있겠니?"
그녀의 오른쪽 엄지와 중지가 왼손가락의 반지를 잡고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결혼한 사람은 모두 불행을 견디고 있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견디기에 가장 어려운 것은 불행이 아니라 권태야. 하지만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에 현상을 바꿀 의지 없이 그럭저럭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 권태의 장점이지.
- 은희경, [그녀의 세번째 남자] p.231
미타심 보살의 말에 따르면, 백팔번뇌의 108은 사람의 여섯 가지 감각이 여섯 가지의 번뇌를 일으킬 때 과거, 현재, 미래가 있어 그것들을 곱해서 나오게 된 숫자라고 했다. 여섯 가지 번뇌에는 좋음, 나쁨, 즐거움, 괴로움 뿐 아니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음'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음'도 들어 있었다. 그 말을 들으니 그녀는 자기를 떠나오게 한 것이 무엇인지는 알 듯도 싶었다.
- 은희경, [그녀의 세번째 남자] p.260
공선옥 외, <소설 구십년대> 中
+) 90년대 단편 소설들을 선정한 이 책은 다양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최인석의 [노래에 관하여]는 80년대의 문학이 갖고 있던 역사적 흔적을 90년대에 되살린 작품으로 삼청교육대의 폭압 행위를 세세하게 보여준다. 그 사이에서 수용자들의 노래는 개인의 감각을 되살리고 수용자 뿐만 아니라 군인들에게까지 같은 '사람'임을 제시하는 소재가 된다. 모든 것이 부정적이고 억압적이며 고통의 시간 속에서 그들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노래이며, 그로 인해 그들은 서로를 돌아보게 된다.
김종광의 [전당포를 찾아서]는 80, 90년대를 잇는 학생들의 데모와 일반인들의 데모까지 이야기되고 잇다. 데모가 이루어진 안타깝고 처절한 상황보다 그 속에서 젊은이들의 행동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김종광이라는 소설가만이 해낼 수 있는 개성이라 생각된다. 그것이 오히려 더 분노와 비판의 시선을 갖는 것은 아닐까.
80년대와 90년대를 역사/일상, 남성/여성, 외부현실/개인적 내면 등으로 구분 짓는 논리 때문에 80, 90년대 서사를 거대 서사와 미시서사로 구분하게 된다고 하는 평자의 지적에 공감한다. 그런 이분화된 태도로 90년대 문학을 새로운 혁명처럼 받아들이는데 그것은 옳지 못한다. 그것들은 이분화할 수 이는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중첩되는 부분들이 되지 않을까. 유기적인 과정에서 이해되어야 옳다. 역사적인 개인의 일상이 개인적 내면 심리를 꿰고 있음을 보여주려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