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1987년 제1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이문열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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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며 축적이란 말도 그에게는 익숙한 것이 아니었고, 권력욕이나 명예욕 같은 것에 몸달아 본 적도 없었다. 언뜻 보기에는 분방스럽고 다양해도 사실 그가 취해온 삶의 방식은 지극히 단순했다. 자기를 사로잡는 여러 개의 충동 중에서 가장 강한 것에 사회적인 통념이나 도덕적 비난에 구애됨이 없이 충실하는 것, 말하자면 그것이 그를 이해하는 실마리이기도 한 그의 행동 양식이었다.

- [금시조]

 

하지만 싸운다는 것도 실은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먼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가 그러했고, 누구와 싸워야 할지가 그러했고, 무엇을 놓고 어떻게 싸워야 할지가 그러했다. 뚜렷한 것은 다만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뿐- 다시 한 번 어른들 식으로 표현한다면, 불합리와 폭력에 기초한 어떤 거대한 불의가 존재한다는 확신뿐- 거기 대한 구체적인 이해와 대응은 그때의 내게는 아직 무리였다. 솔직히 털어놓으면, 마흔이 다 된 지금에조차도 그런 일에는 온전한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그가 내게 바라는 것은 오직 내가 그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 그리하여 그가 구축해 둔 왕국을 허물려들지 않는 것뿐이었다. 실은 그거야말로 굴종이며, 그의 질서와 왕국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전제와 결합되면 그 굴종은 곧 내가 치른 대가 중에서 가장 값비싼 대가가 될 수도 있으나 이미 자유와 합리의 기억을 포기한 내게는 조금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이문열, <이문열 문학상 수상 작품집> 中

 

 

+) 이문열이란 작가의 행적에 대해 말이 많고, 그의 소설에 대한 평자들의 판단도 극과 극을 달리며 논란이 많다. 그러나 나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재미있는 만큼 치열하게 글을 쓴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한 인간이 어떻게 권력에 순응하여 가는지 철저하게 분석한 소설로서 권력과 순종, 타협과 비굴, 반항과 순응의 논리를 잘 보여준 작품이다. 초등학생 교실을 배경으로 초등학생인 석대와 병태의 지배 구조는 사회의 지배 구조와 흡사하다.

 

그 속에서 권력이 무엇인지, 권력의 힘과 단맛 그리고 쓴맛까지 모두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그 어떤 사회학적 이론보다도, 어른들의 사회에서 보게되는 장면보다도 정확하게 우리의 머리에 새겨진다. 학생들이 읽어도, 어른들이 읽어도 충분히 공감가는 작품이다. 이 외에 <금시조>, <시인>, <시인과 도둑> 등의 작품은 당시 작가가 짚어주는 당대의 문제점을 보게 된다. 작가에 대한 여러가지 평들을 떠나서 일단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권력자와 그 아래 소시민들의 구도를 잘 제시한 작품으로 수작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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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랜덤 시선 9
안현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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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물회'

 

말린 물고기만 씹으며 겨울을 난 사내가

물고기를 물에 말아 알뜰하게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있다

사랑할 때 애인의 몸을 뜯어 먹는 여자처럼

 

시든 언어만 씹으며 늙어가는 여자가

언어를 언어로 꿰어 멸망한 부족의 목걸이를 만들고 있다

죽을 때 스스로의 몸을 깊은 숲에 두는 족장처럼

 

사위어가는 것들의 모든 우울함으로 꽃은 피고

우울한 물고기의 이름은 우울한 물고기다

그것이 한계다

 

한계와 임계 사이에 언어가 있다

언어는 우울한 물고기 이름이다

이를테면 제대로 실패한 자만이 실패를 싱싱하게 맛볼 수 있다

 

 

안현미, <곰곰> 中

 

 

+) 안현미의 시는 도발적이고 관능적인 상상의 세계로 꾸며졌다. 그것을 환상의 표상들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그 근원에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시인은 서정적인 틒 안에서 도발적인 시적 혁명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에 근접한 것임에도 불구고하고 시인의 작법은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의 세계로 인간의 가장 오래된 서정을 끌어들인다. 그것을 이해하느냐 혹은 이해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안현미의 시를 극과 극으로 판단하는 결과가 나온다.

 

나는 개인적으로 시인이 환상적인 표징들보다 좀더 서정에 공들였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 상상의 세계에서 찾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시, 시인, 혹은 언어, 인간 등등 뿌리는 그것에서 시작하여 지나치게 많은 가지를 치고 만들어졌다. 시인은 자기만의 세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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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고래
김형경 지음 / 창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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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젠가 위인전 속 인물들을 만나면 꼭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진짜로 그 어린 나이에도 자기가 하는 행동에 확신이 있었는지. 겁나거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지. 냉동창고 담벼락에 기대앉아 속엣것을 올리면서 나는 반드시 유관순 언니를 만나봐야겠다고 다짐했다.

p.69

 

"글을 쓰다 보니 마음이 이상해지더라. 그냥 글자만 쓰는 거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더라. 마음을 깊이 뒤집어 밭을 가는 것도 같고. 맘속에서 찌개를 끓이는 것도 같고."

p.137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 정해둔 규칙 같은 건 있어. 징징거리지 않기. 변명하지 않기. 핑계대지 않기. 원망하지 않기. 그 네 가지만 안해도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하지."

p.220

 

나는 이제 어른이 된다는 것의 핵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나이를 먹고 몸이 커지고. 고래배를 타거나 시집을 가는 것 말고. 엄살, 변명, 핑계, 원망 하지 않는 것 말고 중요한 것이 그것 같았다. 자기 삶에 대한 밑그림이나 이미지를 갖는 것. 그것이 쨍쨍한 황톳길을 땀흘리며 걷는 일이든, 미끄러지는 바위를 한사코 굴려올리는 일이든. 푸른 하늘에 닿기 위해 발돋움하는 영상이든,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p.256

 

 

김형경, <꽃피는 고래> 中

 

 

+) 김형경의 소설을 읽다보면 감정의 절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느끼게 된다. 이 소설에는 한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등장한다. 순진한 마을 사람들은 외지인들이 공장을 지을 때까지 자신들의 바다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몰랐다. 어느 순간 바다에서 수영을 할 때마다 이상한 냄새가 난다. 그들은 그렇게 바다를 잃었다. 외지인들이 등장하면서 할아버지는 고래를 잡을 수 없게 된다. 그들의 공장을 반대하면서부터 나라에서는 이상한 법을 만들어 고래잡이를 금지시켰다. 졸지에 할아버지는 고래를 잃고, 자신의 삶을 잃었다. 주인공인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교통사고로 잃게 되고 한순간에 홀로 남게 된다.

 

그렇게 한 순간에 많은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이 소설에서 그 잃어버린 것을 단 한번이라도 느껴보고자 기회를 만든다. 할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은 고래를 잊지 않기 위해 고래 박물관을 만들고,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고래 잡이 배를 몰며 바다로 뛰어든다. 그것은 할아버지의 열정이며 삶이며 희망이다. '나'는 잠재된 분노를 친구에게 터트리고 정신적인 성장의 고통으로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나 그것도 할아버지와 고래잡이 배를 경험하게 되면서 깨닫게 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삶에 대한 밑그림이나 이미지를 갖는 것이라는 걸. 누구도 확신이 있어서 자신의 길을 걷거나 꿈을 갖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기들이 상상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고 시작한다. 설사 그림이 좀 달라지면 어떤가. 여러번 고쳐가야 완성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법이다. 그것처럼 삶도 많은 수정을 거쳐야 완성을 향해 가는 것이다. 김형경은 이 모든 이야기를 감정을 싹 뺀 절제된 어조로 그린다. 그것이 오히려 더 슬프고 안타까움을 유발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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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롯 - 2007년 제3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신경진 지음 / 문이당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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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좀 진부한 것 같아. 처음엔 꽤 재밌었는데 이것저것 사려다 보니 뭘 아는 게 있어야지. 돈을 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
 "예를 들면?"

" 음........ 서울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옷 가게도 그렇고 자동차도 그렇고. 뭐 그런 거지. 세금을 어떻게 빼돌릴지도 잘 모르고."

 수진은 불분명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부정적인 웃음이 아니란 거였다.

 "그래서 오빠는 부자가 못 되는 거야. 부자들은 돈을 쓰는 것보다 돈을 버는 데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거든."

p.86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예전에 없던 새로운 버릇이 생긴 건 확실해. 이를태면 한 문제를 놓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는 거야. 아침에 출근하는 동안 내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거지.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하고, 결국은 시간 낭비일 뿐인데도 집착하게 돼."

 "그건 프로그래머가 아니라도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하는 거 아냐?

 "그렇지. 그런데 문제는 단순한 가정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일을 실제로 준비하고 대비한다는 거야.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상황에서는 그런 태도가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겠지. 가령 태풍이 들이닥치거나 낙뢰가 내리칠 때를 대비한 행동 요령을 숙지하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인간관계에서는 그런 태도가 비상식적으로 여겨진다는 거야. 인간은 이상하리만치 신뢰나 믿음에 의지하려 들거든."

 "당연한거 아냐?"

 "그래. 그 당연한 인식이 내게서 사라지고 있는 거야."

p.115

 

 

신경진, <슬롯> 中

 

 

+) 심사위원들의 지적대로 이 책은 매우 잘 읽히는 장점이 있으나 오문이 있고 도박사들의 정보를 인용하여 전달하는 형식이 상투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도박을 반복하게 되면 그것이 곧 일상이며 그것에서도 지루함을 느낄 수 있다는 주제의식의 전달은 새로웠다. 하지만 나는 정보 전달과 서술에 의존하고 있는 소설의 형식이 작품의 진지함을 떨어뜨린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좀 더 현실적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정보 전달자를 제3의 인물로 선정하고 진행했다면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좀 더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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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없는 세상 - 제6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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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잘 잡는다고 했던가. 이 말은 새에 관해서만 부분적으로 맞다. 일찍 일어나는 벌레는 고작해야 먹이가 되려고 일찍 일어난 것이란 말인가. 똑같이 일찍 일어났는데 누구는 하루 밥벌이를 하는데 반해 바로 그 밥벌이 때문에 다른 누구는 생명을 잃는다. 그렇다면 일찍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새로 태어나는가 혹은 벌레로 태어나는가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사자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p.8

 

십 년 동안은 우선 네가 무얼 하고 싶은지 찾아보는 데에 써봐. 그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일이야. 또 너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해.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다는 것은 모든 것에 관심이 있다는 얘기하고 비슷해.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쓸데없는 일인데 그런 쓸데없는 공부가 인문학이고 그런 걸 공부하는데가 대학이야.

p.142

 

- 뭐든지 하고 싶었던 그때에 해야 되는 거야. 시간이 지나면 왜 하고 싶었는지 잊어버리게 되거든. 나한테 미대는 그래. 이제 와서 가면 뭐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고등학교 때처럼 강렬하게 가고 싶은 생각도 없고 말이지. 뭔가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 하지 못하면 나중에는 왜 하고 싶었었는지에 대해서조차 잊어버리게 되거든. 자꾸 그러다보면 결국에는 하고 힢은 것이 없어져버려. 우물이라는 것은 퍼내면 퍼낼수록 새로운 물이 나오지만 퍼내지 않다보면 결국 물이 마르게 되잖니. 그런 것처럼 욕구라는 것도 채워주면 채워줄수록 새로운 욕구가 샘솟지만 포기하다 보면 나중에는 어떤 욕구도 생가지 않게 되어버리는 거야. 그러니 너도 쉽지 않겠지만 하고 싶은 것을 자꾸 만들어서 해봐.

pp.153~154

 

박현욱, <동정 없는 세상> 中

 
 

+) 하하하, 이 책에 대해 거대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한참을 웃었다. 이 책은 수능을 본 고등학생인 나와, 미용실을 하는 엄마와, 서울대 법대를 나와서 만년 백수로 지내는 삼촌의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인공 '나'는 여자친구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면서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그럴듯하게 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고교생들이 고민하고 궁금해하는 것들을 쓰고 있다.

 

박현욱은 <아내가 결혼했다>를 쓴 소설가이다. 그 책을 읽으면서 무척 재미있게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 책은 그를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하게 만들었다. 이 소설은 일상적인만큼 누구나 거쳤을법한 성장기, 그 시기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무엇보다 나의 오해는 동음이의어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는데, 설마 하고 처음 몇 장을 넘기며 크게 웃었다. 이 소설가다운 재치다. 하나의 맥락으로만 살펴보면 살짝 싱거운 맛이 있지만, 폭넓게 확대하여 본다면 인생 전반부의 호기심과 두려움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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