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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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벗이여, 내 자네와 약속하지. 나는 이제부터 내 자신을 개혁하겠어. 운명이 우리들에게 던지는 사소한 죄의 대가를 지금처럼 언제까지나 되돌아보고 생각하고 하는 따위의 일은 이제 그만두겠어. 나는 현재를 즐길 거야. 과거는 과거로서 묻어버리겠어. 자네 말이 옳아. 아무 걱정이 없는 현재를 걸어가기보다는, 지나가 버린 고민의 추억을 자아 내려는 상상력으로 해서 공연히 애를 먹는다는 거 말이야.

  - 1771년 5월 4일

   

"제가 이야기하려고 한 것도 바로 그겁니다. 도대체 우울이라는 것은 태만과 같은 성질의 것이지요. 그건 태만의 일종이에요. 대체로 인간의 성질은 거기에 있는 거에요. 그러나 일단 부르르 떨치고 일어나서 기운을 내면, 일이 척척 진척되어 가고. 더구나 그 일 속에서 참다운 쾌락을 발견하게 되지요."

- 7월 1일

 

“아뇨. 그렇지가 않습니다. 만약에 그 우울이 자기를 해치고, 나아가서는 남한테까지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면 그것은 비로소 죄악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란 서로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죄가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의 마음속에서 남몰래 다소곳이 즐기고 있는 쾌락마저 빼앗으려고 해서야 되겠어요? 밤낮 우울한 기분으로 혼자서 그 울적한 마음을 꾹 참아 내면서 주위의 즐거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할 수 있을 만한 너그러운 분이 이 세상에 있다면 그런 분의 성함을 좀 알고 싶을 정도입니다. 대체로 우울한 기분이라는 것은 자기의 무가치에 대한 내심의 불평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보잘것없는 허영심에서 일어나는 질투심과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감이 서로 뭉쳐져서 생겨난 것이지요. 정말 자기의 불쾌감을 죽이고 명랑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분들을 보면, 이쪽도 영 참고 보기가 괴롭습니다.”

- 7월 1일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中

 

 

+)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를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물론 간혹 지루하고 고루한 것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게중에 가슴을 울리는 작품들이 꽤 많다. 너무 오래된 고전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차피 그 시대의 사람들이나 현재의 우리나 인간이라는 점에서는 같고 그렇기에 문학은 인간의 이야기라는 것에 다른 점이 전혀 없다. 따라서 세계문학전집을 읽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괴테가 쓴 이 책을 오랜만에 다시 보면서 베르테르의 감성이 알베르트의 이성과 대립되는 구도가 꽤 흥미로웠다. 이성적인 시각이 주를 이루었던 봉건 사회에서 이성주의자 알베르트에 대립하는 감성주의자 베르테르의 대화는 읽는 이에게 판단을 맡긴다. 약혼자(알베르트)가 있는 리테를 사랑하는 베르테르는 사회 윤리에서 어긋나는 사랑을 시작하여 괴로워한다. 그것은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데 도시라는 공간은 그 시대, 그러니까 봉건적이고 전통적인 사회를 상징한다.

 

결국 도시의 구속과 억압에서 벗어나 자연을 선택한 베르테르는 그곳을 자유의 공간으로 인식한다. 베르테르의 사랑은 사회의 관습과 윤리, 규범, 이성과의 갈등을 벌이며 그가 죽는 것을 선택하는 순간까지 대립한다. 비극적 결과로 끝나지만 새삼스럽게 인간의 감성과 사랑, 그리고 형식적인 절차나 틀에 박힌 시선에 대해 씁쓸한 생각을 되새기게 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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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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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역사는 규제자들의 편이다. 오늘날의 부자 나라들 대부분은 자국이 투자를 받는 입장이었을 때는 외국인 투자를 규제했다. 그 규제의 정도가 매우 가혹한 경우도 있었는데, 핀란드, 일본, 한국 그리고 (특정 부문에서의) 미국이 그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p.151

 

물가 상승은 우선 사람들이 힘들게 번 수입을 부당하게 강탈해 가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세금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통화주의자였던 밀턴 프리드먼은 “물가 상승은 입법 과정을 거치지 않고 부과할 수 있는 유일한 세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물가상승을 통한 세금’의 부당성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분배의 불공정‘은 문제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p.208

 

그러나 우리에게 참된 희망을 주는 것은, 나쁜 사마리아인들 가운데 대다수가 탐욕스럽지도 않고 편협하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쁜 일을 할 때는, 그 일로 엄청난 물질적 이득을 얻는다거나, 그 일에 대해 강한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그것이 가장 쉬운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

p.334

 

장하준, <나쁜 사마리아인들> 中

 

 

+) 국방부 지정 불온서적 리스트에 오른 책 중의 하나가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다. 국방부가 이 책을 불온 서적으로 정한 것에 대해 또 한번 웃어버렸는데(하긴, 그 불온서적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습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몇몇의 윗분들로 인해 별의별 리스트가 다 만들어지는 것 같아서 씁쓸하게 웃었다. 도대체 그들이 금하는 것이 무엇인가.

 

장하준 교수에 따르면 세계 경제는 나쁜 사마리아인들(강대국, 그의 언급대로라면 부자 나라가 되겠다.)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들이 만든 규칙과 전략 속에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개발도상국) 틀에 맞춰 따라가고 있는 셈이다. 신자유주의가 반드시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장교수의 생각이다.

 

이 책이 쉽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좀 생각이 다르다. 이 책은 개념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학문적 글, 소위 말하는 논문로 글을 써온 교수가 아니겠는가. 아무리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학술적 에세이 형식으로 바꾸었다고 해도 천천히 곱씹어 읽어야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지루한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우리에게 생각할 꺼리를 제공하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세계가 맞물려 돌아가는 상황에서 이런 책을 읽으며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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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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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이란 무의식 중에 행하는 행동을 뜻한다. 폭력이 몸에 밴 사람은 폭력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그 '인식하지 못함'이 그가 속한 세계를 폭력적으로 만든다. 그런 세계에서는 제아무리 비폭력을 주장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그들의 몸은 폭력보다 비폭력을 더 불편해한다. 그걸 가리켜 현실감각이라고 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p.102

 

나를 구한 건 "자기 자신이 되어라"라는 마지막 문장이었다. 인생은 자기 자신이 지배하는 것이다. 너의 인생을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 무엇보다도 네가 선출한 지도자에게는 맡기지 말라. 자기 자신이 되어라.

p.124

 

나는 행복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행복을 찾기 위해 나는 온세상을 떠돌아다녔으니까. 거기가 환하다는 이유만으로 마당에서 잃어버린 바늘을 찾는 물라 나스루딘처럼. 찾아내는 순간, 그간의 모든 노력이 무가치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그 보물을. 찾아내는 순간, 나의 인생이 더없이 짧다는 사실만을 가르쳐줄 뿐인 그 보물을. 그리하여 내가 찾는 진정한 보물이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만을 가르쳐줄 뿐인 그 보물을. 어떻게 된 일인지 내 소망이 녹아들었음에도 그 꿈이 내게는 슬펐다.

pp.214~215

 

우리는 인생을 두 번 사니까. 처음에는 실제로, 그 다음에는 회고담으로. 처음에는 어설프게. 그 다음에는 논리적으로. 우리가 아는 누군가의 삶이란 모두 이 두번째 회고담이다. 삶이란 우리가 살았던 게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며 그 기억이란 다시 잘 설명하기 위한 기억이다.

p.384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中

 

 

+) 이 책은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 속에서 한 젊은이의 방황과 꿈이 가족사와 얽혀 펼쳐지는 소설이다. 그러면서 그는 '정민'이란 여자친구를 만나면서 소년에서 남자로의 변화를 일으키고 내면적인 성장의 발걸음을 내딛는다. 작중화자는 1991년 여름 이른바 '5월투쟁'이 끝난 후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던 대학생 '나'이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의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인물이라기 보다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인물이다.

 

 작가는 역사적 사건들 사이에 얽허 있는 개인의 진실을 파고들어, 인간 본연의 내면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서술자('나')가 방북학생으로 독일에 가게 되었을 때 거기서 만난 인물들의 이야기가 작품 중반부터 같이 서술되고 있다. 살짝 지루한 감이 있지만 그것은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이기에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나의 목소리를 빌어 한 인물의 정체성 찾기의 과정이 서술되어 있는 책이다.

 

나는 무엇보다 이 책을 과감히 시대적 혼란기에서 성장하는 한 개인의 성장소설(내면적 성장)이라 칭하고 싶다. 주인공 '나'가 깨달아가는 삶에 대한 진실, 사람에 대한 진심, 그리고 시대를 살아가는 용기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술자의 언급되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좀 더 진솔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인류의 역사적인 의미와 인간 개인적인 의미 모두를 되새길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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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 2009년 제3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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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내부에는 그의 코끼리와 같은 것들이 하나씩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혼자 산책하는 일을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오랑우탄이나 코뿔소, 토끼, 어쩌면 매머드나 티라노사우르스 같은 것들 말이다.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그가 잠들 때, 코끼리도 잠들었다. 물론 잠들려고 누워 있으면, 거기 심장에 와서 닿는 코끼리의 발이 느껴졌다. 언젠가 다시 코끼리는 발에 힘을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또 그때가 되면 그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스핀이 먹힌 서브를 바라보는 심정이 되겠지만, 어쨌든 그건 그때 가서. 지금은 우선 산책부터. 걸어갈 수 있는 곳까지 걸어갈 수 있다면. 그는 적절하게 피곤한 상태로 잠들 수 있었고 그걸로 족했다.

p.29  - 김연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옴 샨티 샨티 옴. 갈라 페스티벌에서 인사말을 하던 사람들마다 마무리할 때 쓰던 진언. 그 뜻을 알려준 사람은 앨리스였다. "옴 샨티는 '모든 인류에게 평화'를 뜻해요. 그걸 세 번 반복하는 건, 정신의 고통과 육체의 고통, 그리고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 때문에 생긴 고통에서 풀려나 마음의 평화를 얻으라는 뜻이지요."

p.111 - 이혜경, [그리고, 축제]

 

그녀는 보송보송 마른 빨래를 걷는다. 반나절 만에 빨래를 말린 성급한 바람처럼 그녀의 팔십 년도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누군가 그녀의 세월 밖에서 그녀의 한 삶을 지켜보고 있다가 빨래를 걷듯 목숨줄을 휙 걷어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란 것은.

p.115 - 정지아, [봄날 오후, 과부 셋]

 

"긴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것은 입 밖에 내지 말어. 알았지? 왜냐하면, 확실허지 않은 것을 말허면 아부지 어무니가 피해를 본게."

p.145 - 공선옥, [보리밭에 부는 바람]

 

 

김연수 외,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中

 

 

+) 올해의 이상문학상 선정 경위에 '무게 있는 중편소설'의 후퇴가 지적되었다. 그만큼 현대 소설이 장편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출판 산업이 주춤하고 영상 산업이 확대되면서 '책'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고로 선택한 것이 장편소설 문학상을 만들어내 출판사의 상업적 전략에 빠지고 있다. 물론 장편 소설 문학상을 지정한 것은 배고픈 작가들과, 좋은 작품에 목마른 독자들을 대상으로 긍정적인 의미도 있겠으나 한편으로 중편소설이나 단편 소설의 위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염려되기도 한다.

 

2000년대 들어 시와 소설 모두에서 환상적인 문학, 그러니까 현실을 벗어난 비현실적이고 포스트모던한 작품들이 증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독자와의 소통을 간과하는 불친절한 작가들을 싫어하나,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오고가는 쏠쏠한 재미를 주는 작가들은 반기는 편이다.

 

어찌되었든 이번 이상문학상 수상집에 실린 작품들은 제법 '무게 있는 단편소설'들로 구성되었다. 대상을 수상한 김연수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의 경우 인간 내면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성찰적 자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혜경의 [그리고, 축제]는 여성으로서 겪기 힘든 상처를 안고 아파하며 그 고통의 깊은 곳까지 드러내는 것이 일품인 작품이었다. 정지아의 [봄날 오후, 과부 셋]은 봄날 오후, 노년의 과부 셋의 일상을 그려낸 작품이다. 무협소설 형식을 빌려 현재의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한 박민규의 작품도 흥미로웠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읽으면서 굵직굵직하고 무게 있는 작품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우리 본연의 것에서 멀어지지 않고 있는 그들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인간 내면의 고통 혹은 위악, 사회 내부의 거짓 혹은 진실 등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작가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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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 2009년 제3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연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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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내부에는 그의 코끼리와 같은 것들이 하나씩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혼자 산책하는 일을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오랑우탄이나 코뿔소, 토끼, 어쩌면 매머드나 티라노사우르스 같은 것들 말이다.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그가 잠들 때, 코끼리도 잠들었다. 물론 잠들려고 누워 있으면, 거기 심장에 와서 닿는 코끼리의 발이 느껴졌다. 언젠가 다시 코끼리는 발에 힘을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또 그때가 되면 그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스핀이 먹힌 서브를 바라보는 심정이 되겠지만, 어쨌든 그건 그때 가서. 지금은 우선 산책부터. 걸어갈 수 있는 곳까지 걸어갈 수 있다면. 그는 적절하게 피곤한 상태로 잠들 수 있었고 그걸로 족했다.

p.29  - 김연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옴 샨티 샨티 옴. 갈라 페스티벌에서 인사말을 하던 사람들마다 마무리할 때 쓰던 진언. 그 뜻을 알려준 사람은 앨리스였다. "옴 샨티는 '모든 인류에게 평화'를 뜻해요. 그걸 세 번 반복하는 건, 정신의 고통과 육체의 고통, 그리고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 때문에 생긴 고통에서 풀려나 마음의 평화를 얻으라는 뜻이지요."

p.111 - 이혜경, [그리고, 축제]

 

그녀는 보송보송 마른 빨래를 걷는다. 반나절 만에 빨래를 말린 성급한 바람처럼 그녀의 팔십 년도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누군가 그녀의 세월 밖에서 그녀의 한 삶을 지켜보고 있다가 빨래를 걷듯 목숨줄을 휙 걷어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란 것은.

p.115 - 정지아, [봄날 오후, 과부 셋]

 

"긴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것은 입 밖에 내지 말어. 알았지? 왜냐하면, 확실허지 않은 것을 말허면 아부지 어무니가 피해를 본게."

p.145 - 공선옥, [보리밭에 부는 바람]

 

 

김연수 외,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中

 

 

+) 올해의 이상문학상 선정 경위에 '무게 있는 중편소설'의 후퇴가 지적되었다. 그만큼 현대 소설이 장편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출판 산업이 주춤하고 영상 산업이 확대되면서 '책'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고로 선택한 것이 장편소설 문학상을 만들어내 출판사의 상업적 전략에 빠지고 있다. 물론 장편 소설 문학상을 지정한 것은 배고픈 작가들과, 좋은 작품에 목마른 독자들을 대상으로 긍정적인 의미도 있겠으나 한편으로 중편소설이나 단편 소설의 위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염려되기도 한다.

 

2000년대 들어 시와 소설 모두에서 환상적인 문학, 그러니까 현실을 벗어난 비현실적이고 포스트모던한 작품들이 증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독자와의 소통을 간과하는 불친절한 작가들을 싫어하나,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오고가는 쏠쏠한 재미를 주는 작가들은 반기는 편이다.

 

어찌되었든 이번 이상문학상 수상집에 실린 작품들은 제법 '무게 있는 단편소설'들로 구성되었다. 대상을 수상한 김연수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의 경우 인간 내면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성찰적 자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혜경의 [그리고, 축제]는 여성으로서 겪기 힘든 상처를 안고 아파하며 그 고통의 깊은 곳까지 드러내는 것이 일품인 작품이었다. 정지아의 [봄날 오후, 과부 셋]은 봄날 오후, 노년의 과부 셋의 일상을 그려낸 작품이다. 무협소설 형식을 빌려 현재의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한 박민규의 작품도 흥미로웠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읽으면서 굵직굵직하고 무게 있는 작품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우리 본연의 것에서 멀어지지 않고 있는 그들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인간 내면의 고통 혹은 위악, 사회 내부의 거짓 혹은 진실 등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작가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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