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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여자, 착한 남자
이만교 지음 / 민음사 / 2003년 8월
평점 :
"세상은 차가운 방의 이불 같은 게 아닐까 싶어. 서늘하긴 하지만 애정을 갖고 섞이면 적어도 자기 체온만큼은 따뜻해지지. 하지만 자기 체온을 섞지 않는 한 점점 더 차가워질 뿐이지. 나무토막은 나무에 불과할 뿐이지만 계속해서 마찰을 주면 거기서 불이 나올 수도 있어. 나무의 속성은 불은 아니지만 나무 한 그루 속에는 이 세상을 다 태우고도 남을 불이 들어 있지 않은 것도 아니야."
p.48 - [나쁜 여자, 착한 남자]
자신이 이미 길을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걸어가고 있는 사람도 세상엔 많아. 그런 사람에 비해, 자넨 행복한 거야. 찾아야 할 길이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으니까.
p.105 - [농담을, 이해하다]
무엇보다도, 잘못 들어선 길도 언젠가 한번 와본 것 같은 나이가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서른 가까운 나이를 사는 동안 이제는 세상 대부분의 것에 익숙해져 버린 것인지도. 마치 오래 신어서 신어도 벗은 것 같고 벗어도 신은 착각을 불어일으키는 구두처럼 말이다. 똑같은 하루의 반복이 그러하고, 책이나 영화나 신문 텔레비전 등을 통해 체험해 온 그 많은 장면들이며 또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많은 공상과 꿈을 연신 진행시키고 있으며 심지어 한 개인의 유전자 속에는 살아온 모든 조상의 정보들이 축적되고 있다는 설도 있지 않은가.
pp.146~147 - [눈빛과 마주치다]
"잘못인 줄 알면서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과, 잘못인줄 알면서도 그 사람을 말리지 않은 죄의 크기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거야."
p.254 - [너무나도 모범적인]
이만교, <나쁜 여자, 착한 남자> 中
+)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한 작가가 자기는 이만교의 소설을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그래서 좀 오래되었지만 이만교의 소설집을 읽었는데, 지난번에 읽었던 그의 단편 [그녀, 번지 점프를 하러 가다]의 인상 그대로 웃으면서 즐겁게 읽은 책이다. 이만교는 천상 이야기꾼이다. 어쩜 그렇게 맛깔스런 서사를 구사해내는지, 너무 능청스러워서 이 사람 참 능글맞겠구나 싶을 정도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그런 능청스러움의 이면에는 얼마나 짙은 냉소가 깔려 있는 것인가 깊이 생각하게 한다. 씁쓸하면서도 안타까운 시선을 느낄 수 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작가, 이만교. 스토리텔러의 기질이 돋보이는 소설가이다. 그의 소설은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나쁜 여자, 착한 남자]의 경우 직장내의 남자와 여자에 초점을 맞추었고, [농담을, 이해하다] 또한 직장내의 동료들이 대화를 주고 받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물론 그것은 주축이고 거기서 파생되는 '항상 정도의 길을 걷는 사람'과 '정도에서 벗어난 길을 걷는 사람'의 모습이 중첩된다.
그 의사소통 방법이 참 독특한데 누구나 한번쯤 상대와의 대화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반적인 오류를 정확히 집어낸다. 그의 소설에서는 이렇게 말이라는 것, 대화라는 것, 그것에서 생길 수 있는 오해와 그로 인해 인물이 받게 되는 오해를 동시에 그려낸다. 실상 [너무나도 모범적인]이라는 단편도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것을 강요받은 아이가 어떻게 성장하게 되는지 알게 된다. 그것은 융통성의 문제겠으나 근원은 진실이 언제나 옳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융통성이 나쁜 것인가? 진실이 언제나 옳은 것인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차갑게 그렇지만 분명히 웃다가 소설을 다 읽고 책을 덮을 땐 마음 한켠이 헛헛하다. 이런 군상들이 현대인의 대부분의 모습이며 지금 우리가 살아가면서 고민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 고민해야 하는 것들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의 맛깔스런 수다가 그립다면 이 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