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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소설 2009
문학나무 편집부 엮음 / 문학나무 / 2009년 2월
평점 :
본 적은 없지만 나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첫 생리를 한 아이가 생리 흔적을 말끔하게 버리기 위해 까만 봉지에 담고, 또 한번 더 비닐에 담고. 그러고도 내 시선이 닿지 않는 휴지통을 찾지 못해 집 밖에 나가서 버렸을 풍경들을. 내가 공CD를 버릴 곳을 찾지 못해 계속 가방에 품고 다녔던 것처럼 말이다. 아이에게 어른이 된다는 것은 한 달에 한번, 증거를 인멸하는 범인이 되라는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초경은 그 신호탄이었고, 그런 죄책감을 가르친 사람은 나였다.
p.145 -윤고은, [타임캡슐 1994]
속으로 중얼거리며 가속 페달을 꾹 밟았다. 그래도 한두 가지 정리해야만 한다면...... 선뜻 선택할 수 없어서 난감하기만 했다. 여자의 인생에서는 매번 무얼 가져야 하는가보다 무얼 버려야 하는가가 더 어려운 문제였다.
p.193 -이홍, [50번 도로의 룸미러]
그는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잠들기 전의 시간이 가장 외롭고 무섭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 했지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스무 살도 훨씬 넘은 남자가 외롭고 무섭다고 엄살을 떠는 모양새가 우스웠다. 외로움을 잊기 위해 아무나 옆에 두려는 사람들이 있어 내가 집을 손쉽게 옮겨 다닐 수 있긴 하지만, 한심한 건 한심한거다.
"세상에 정말 그런 일이 있을까요? 외계인은 정말 있을까요?"
"아마도 말이에요.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우주에 우리 말고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너무 쓸쓸하잖아요. 어, 반짝거려요. 상처가. 아름다워요."
p.230 -정소현, [빛나는 상처]
김정남 외, <젊은 소설 2009> 中
+) 젊은 소설 작품집 시리즈를 읽은지 몇 년인데 점점 느낌이 다르다. 등단한지 3년차 이내의 작가들이 쓴 작품 가운데 (각기 다른 잡지에로 등단한) 10편을 선택하여 실은 소설집인데, 지난 번에 읽은 <젊은 소설 2008>보다 단정히 정제된 작품이 좀 더 있었다고 생각된다. 여전히 나는 <젊은 소설 2007>이 가장 마음에 드는데 어찌되었든 그건 3년 전의 작품집이고 이건 최근이니 최근 작가들의 경향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김정남의 [야생 도시]는 레커차 운전사로서 타인의 죽음에 아무 감정이 없어지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는 도로위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천천히 잃어버리는데, 도로로 상징되는 '야생 도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잡아가는 역할을 맡았다. 시도도 좋았고 서사도 흥미로웠으나 끝이 너무 뻔한 반전이라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명지현의 [이로니, 이디시]의 경우 한 몸에 붙어 태어난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아가길 원하는 그들의 이야기에 '글쓰기'의 의미에 대해 중첩시켜 소설을 전개한다. 글을 쓰는 행위가 글쓰는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또한 그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논하고 있다. 다만 한 몸의 두 존재라는 소재는 너무 진부하지 않았나 싶다.
이홍의 [50번 도로의 룸미러]는 강남 엄마의 아이 교육시키기 문제를 줄기로 삼고, 입양한 아이에게 융합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자신이 아이를 괴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만드는 강남 엄마들에 대한 충고는 아닐까. 추리물을 연상하게 하는 전개가 신선했다.
이 외에도 전체적으로 작품의 수준이 둘쑥날쑥하지 않아서 반가웠다. 그러나 그건 다른 한 편으로 그들이 글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식이 비슷해진 것은 아닌가 염려도 된다. 이런 작품집을 통해 등단 3년차 작가들의 신선한 글을 볼 수 있어서 유익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