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들 세계사 시인선 107
송재학 지음 / 세계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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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극채색 볏'

 

 

볏을 육체로 보지 마라

좁아터진 뇌수에 담지 못할 정신이 극채색과 맞물려

톱니바퀴 모양으로 바깥에 맺힌 것

계관이란 떨림에 매달은 鍾이다

빠져나가고 싶지 않은 감옥이다

극지에서 억지로 끄집어내는 낙타의 혹처럼, 숨표처럼

볏이 더 붉어지면 이윽고 가뭄이다

 

 

송재학, <기억들> 中

 

 

+) 오래전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 들고 한참을 서서 읽었던 시집이다. 기억나는 시는 '평정을 잃으면 소리를 낸다'라는 시였는데 몇 년 전 읽었을 때와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이 시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꽃과 나무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 아니, 꽃이름과 나무이름 같은 자연을 많이 알고 있다면 훨씬 더 가슴에 와 닿았을 시집이다. 가끔 사람들이 꽃 이름을 모르면 작가가 될 수 없다고 하는데, 그 말이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젠 가끔씩 새삼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시집에는 꽃과 나무에 깃든 영혼과 인간의 영혼을 나누지 않는다. 즉 자연과 인간을 나누지 않고 자연스럽게 하나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특별히 '너' 혹은 '나'라고 칭하는 대상도 굳이 사람으로 볼 필요는 없다.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바람 혹은 나무일 수도 있으니까. 육체와 정신을 나누지 않고 한 몸에 두는 것처럼, 시인은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엮고 있다. 그것에 굳이 커다란 테두리를 만들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영혼이 사람에게만 한정되는 것이라 여겨서도 안된다.

 

경계라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생겨나는 것인가. 시인은 애초부터 경계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곧 주변의 자연이며 사물이고, 자연이 곧 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시집을 읽으며 내가 모르는 꽃과 나무들에 대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알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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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팔십년대
임철우 외 지음, 민족문학연구소 엮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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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중에 우린 사람들을 만나면 서로 정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것도 영원히. 처음 만난 사람을 보면 무슨 생각이 가장 먼저 드냐 하면 말이야, 내가 저 사람을 앞으로 두번은 더 만날 수 잇을까, 아니면 세번? 그 안에 우린 대부분 죽게 마련이니까. 살아서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의 삶을 지탱해온 것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어머니가 우리 형제들을 기르면서 가르쳐준 사소한 것들이었어요. 내가 군대에 지원해서 전쟁터로 떠나던 날 어머니는 말했어요. '아들아, 그 모든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들을 수는 없다. 사람들이 너를 미워하고 욕할 수는 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누구한테서도 경멸받을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 방현석, [존재의 형식]

 

햇살 아래였다면 그 표정이 분명했을 것들이 안개 속에서는 애매하고 몽롱했다. 사람과 사물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명하지 않은 그 거리가 작은 위로처럼 마음에 와 닿았다.

- 정도상, [함흥, 2001, 안개]

 

 

김인숙 외, <소설 팔십년대>

 

 

+) 80년대는 자유와 진보를 향해 열정을 내뿜었던 시기이다. 민주화를 모색하며 모두들 걷고 또 걸었던 그 때. 시대의 아픔과 분노와 희망을 노래한 작가들이 있다. 글쓰기에 있어서도 상처를 안고 상처를 아프게 짚어 나가야 했던 때. 그때의 작품들을 묶어서 만든 소설집이다. 80년대의 소설과 80년대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엿보기에 좋은 기회이다.

 

이 책에는 '임철우'와 '정도상'의 광주와 분단 문제, '방현석'의 노동자와 노동 현장의 사실적인 묘사, '김인숙'의 금지된 이상을 향한 열망 등이 몇몇의 단편으로 그려진다. 읽으면서 언젠가 '방현석'의 문체가 얼마나 사실적인지 놀랐다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났다. 마치 그 현장에 있는 사람처럼 인물을 살릴 수 있는 사실적이고 현실감 있는 묘사에 나도 놀랐다. 그만큼 그 상황이 떠올라 마음이 아프기도 했지만.

 

요즘 문학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의 문학이 사회의 어두운 부분에 너무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닐까 염려되었다. 소설가 조세희가 말한 것처럼 70,80년대의 암울한 일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데 왜 그것을 강렬하게 고발하고 분노하며 안타까워하는 문학은 생겨나지 않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나조차 그러한 현실을 글로 풀어내는 것을 망설이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왜 그럴까. 오늘은 그점에 대해 고민해야겠다.

 

어쨌든 80년대 문학을 엿보기에 좋은 작품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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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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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거나 나이먹거나 세월은 똑같이 소중한 거랍니다. 젊은 날을 잘 보내세요. 평범하고 지당한 말씀이었는데 그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p.17

 

너 준이 가끔 만나니?

응, 몇 번....... 근데 걔는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는 것 같아.

그게 누군데?

몰라....... 아마 자기 자신이 아닐까?

p.213

 

대위는 늘 말했다.

사람은 씨팔...... 누구든지 오늘을 사는 거야.

p.257

 

물론 삶에는 실망과 환멸이 더 많을수도 있지만, 하고픈 일을 신나게 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태어난 이유이기도 하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때려치운다고 해서 너를 비난하는 어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다. 그들은 네가 다른 어떤 일을 더 잘하게 될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 작가의 말

 

 

황석영, <개밥바라기별> 中

 

 

+) 이 소설은 황석영 본인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한다.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까지 그의 방황기를 다룬 작품인데, 읽으면서 참 용감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주어진 길에서 벗어나 잘 보이지도 않는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이란 그 나이 때에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이 선택한 것을 따라 갔던 그의 태도를 보면서 정말 맹목적으로 '그 용기가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평생 그를 기다리기만 했을 그의 어머니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다. 가족을 갖고 있다면 누구다 그럴테지만, 자신의 가족이 아프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것이 우선일텐데. 그는 달랐다. 어머니에게 죄송하고 동생에게 미안했지만 '준'은 자신의 뜻을 쉽게 굽히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을 믿었다. 아들의 선택을 존중했고, 아들을 붙잡아 두려 하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가 있었기에 지금의 그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건 혹독한 청소년기를 보낸 인물과 삶의 목적을 찾아 방황하는 청년기의 삶을 꿰뚫고 있는 소설이다. 학교를 떠나고 무전 여행을 떠나고 일거리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는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끝없이 삶의 목적을 찾는다. 살 이유가 없기에 자살을 꿈꾸기도 하는 사람이다. 그의 삶이 사춘기의 혼란과 방황이었다고 치자면, 그것은 꼭 그 나이 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을 살면서 사춘기는 언제라도 온다. 요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제2의 사춘기가 온 것 같다고 중얼거린다. 내 안의 '준'을 발견할 때마다 나 역시 떠나고 싶어진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어떤 부분에서는 이미 떠난 것도 같고, 떠날 것을 결심하는 것도 같다. '준'과 나는 꽤 닮았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작가의 말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따라가는 것은 오늘을 행복하고 잘 살기 위한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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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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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떠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p.40

 

험난한 길을 선택한 인간은 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버리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평탄한 길을 선택한 인간은 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 즐거움을 느낀다. 전자는 갈수록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후자는 갈수록 마음이 옹졸해진다.

p.42

 

세월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입니다.

p.178

 

이 세상 시계들이 모조리 작동을 멈춘다 하여도 시간은 흐른다. 지금 아무리 크나큰 근심이 나를 포박하고 있어도 언젠가는 반드시 소멸하고야 만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p.227

 

 

이외수,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中

 

 

+) 이외수의 산문을 읽으면 잠시 산속 암자에 머문 기분이 든다. 늘 일상에 쫓기고 경쟁 사회 속에서 쉴 수 있는 여유가 부족한 우리에게 그의 글은 잠깐의 여유를 선물한다. 개인적으로 이외수라는 소설가를 신뢰하고 존경하는데, 그것은 그의 문장 하나 하나에는 진심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서 그의 대중성이 그를 망치는게 아닐까 걱정되기도 하나, 그정도에 변할 사람 같지는 않다.

 

이 책을 친구에게 선물하려고 한다. 바쁘지만 그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이 책에는 이외수의 젊은 날과 그의 방황기, 또한 짧게 언급하는 사회 비판이 녹아 있다. 산문집으로 출판된 것이므로 끈질긴 사유의 고리보다 하나의 사유를 펼쳐놓는 그의 재주를 발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는 60대의 이외수만큼 20대, 30대의 이외수를 좋아한다. 참 배울점이 많은 작가이다.

 

오늘처럼 흐린 날, 따뜻한 녹차 한 잔 마시며 읽어보아도 좋을 책이다. 경우나 상황은 다를지 모르나 그가 말하는 삶의 진정성을 독자들이 공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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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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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생존에 더 절박하게 필요하다가 느끼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의존적 대상을 선택하는 기준도 다양하다. (......) 의존적 대상 선택의 기준을 가진 사람이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그 기준이 되는 결함 속에 영원히 매몰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p.45

 

"5분 이상 화가 난다면 그것은 나의 문제다."

화를 잘 낸다 함은 어떠한 분노도 5분 안에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p.65

 

우울증은 내 마음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난장판이며, 정신의 착오일 뿐이었다.

이제 나는 우울증을 다스릴 줄 알게 되었다. 우울증이 찾아오면 틀림없이 이런 상황 중 하나다. 일주일 이상 운동을 하지 않았거나, 너무 오래 사람을 만나지 않은 채 틀어박혀 있었거나, 심하게 추위에 노출되거나, 햇빛을 적게 쬐었을 경우이다. 우울증에서 빠져나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운동이다. 운동복을 갈아입고 20분 정도만 걷거나 달리면 부정적인 생각들이 가라앉고, 40분 정도 지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한 시간쯤 지나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솟아오른다.

p.77

 

내면의 불안감을 인식하고 수용하자 오히려 불안정하다고 느껴온 삶의 조건들을 파도타기하듯 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삶의 안정을 꿈꾸는 대신 어떻게 파도타기의 중심을 잘 잡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p.91

 

 

김형경, <사람풍경> 中

 

 

+) 김형경의 소설 <사랑을 선택하는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읽으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나와 흡사하다는 생각은 기존에도 했었으나 이렇게 심리적으로 공감이 가는 인물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작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감도 생겼다.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이런 소설을 쓸 수 없으리라 믿었으니까.

 

<사람풍경>이 제시하는 '사람'은 개인적인 서술자일수도 있고, 복수의 목소리를 간직한 다수의 인물을 상징할 수도 있다. 이 책은 여행 에세이이면서 동시에 정신분석학의 개념을 호기심 많은 독자의 입장에서 비교적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그렇기에 심리 여행 에세이라는 책의 설명은 깔끔한 제시라고 생각된다. 작가의 말대로 여러가지 정신분석사전의 개념들을 차용하여 글을 작성하였더라도 기본적인 태도는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나오기에 다가서기 쉽다.

 

한 사람의 경험에서 깨닫게 된 정신분석학적 경향을 살펴보는데, 문제점과 동시에 서술자 나름의 해결책도 제시해 놓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또 한번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도 이런데, 나도 그랬지, 나도... 글자마다 수없이 많은 나를 발견하며, 내가 아파하는 부분과 내가 깨달은 부분의 공통점을 발견하며 반가워했다.

 

가끔 자신의 가슴이 머리와 달리 행동할 때 이런 책을 읽어봐도 좋다. 무엇보다 우울할 때 가벼운 걷기가 도움이 된다는 것.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걷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 그것은 내가 깨달은 진리이다.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기뻤다. 마음이 어지러운 사람들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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