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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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생물학적인 필요 때문에 살에 꼭 달라붙는 것이 아니다 - 시기심 때문에 달라붙는다. 삶이 워낙 아름다워서 죽음은 삶과 사랑에 빠졌다. 죽음은 시샘 많고 강박적인 사랑을 거머쥔다. 하지만 삶은 망각 위로 가볍게 뛰어오르고, 중요하지 않은 한두 가지를 놓친다. 우울은 구름의 그림자를 지나칠 뿐이고. 그 백인 남학생은 '로즈장학위원회'에서 장학금을 받았다.

p.17

 

모든 생물은 광기가 있어서, 때론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이런 미치광이 기질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것이 적응의 원천이기도 하니까. 그런 기질이 없으면 어떤 종도 생존하지 못할 것이다.

p.59

 

공포심에 대해 한마디 해야겠다. 공포심만이 생명을 패배시킬 수 있다. 그것은 명민하고 배반 잘하는 적이다. 관대함도 없고, 법이나 관습을 존주앟지도 않으며, 자비심을 보이지도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에 접근해, 쉽게 약점을 찾아낸다. 공포심은 우리 마음에서 시작된다.

p.203

 

공포의 손아귀 -최악의 폭풍우- 속에서도 당신은 권태를 느낀다. 그 모든 것과 함께 깊은 나른함을 느낀다.

죽음만이 지속적으로 감정을 흥분시킨다. 삶이 안전해서 침체했을 때 그것에 대해 고민하게 하거나, 삶이 위협받고 소중할 때 달아나게 한다.

p.270

 

얀 마텔, <파이 이야기>

 

 

+) 이 소설은 '파이(피신)'이라는 소년의 표류기이다. 바다 위에서 폭풍우를 만나 부모와 형제 모두를 잃고, 기존에 아버지가 경영하던 동물원의 동물들과 남게 된다. 그것도 다리를 다친 얼룩말과 하이에나, 오랑우탄, 그리고 호랑이 한 마리와 말이다. 최종적으로 호랑이와 파이가 남게 되기까지 파이가 생각한 것은 인정할 수 없는 현실과 맹수들 곁에서 어떻게하면 죽지 않을 수 있을까이다.

 

호랑이 한 마리, 그러니까 이름이 '리차드 파커'인 호랑이는 기회가 주어지면 먹으려고 들었고, 파이는 그가 자신을 먹기 전에 먹이를 주기 시작했다. 파커의 먹이를 구하면서 생물을 죽이게 되고, 그것에 자책하게 된다. 그러나 그건 바다위에 떨어진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다. 그는 오랜 시간 바다 위에 표류하게 되면서 채식주의자의 식성을 버리고 바다사자와 물고기로 연명하게 된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처한 기막힌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이다. 좌절? 절망? 아마도 어떤 사람은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고 자기가 먼저 상어가 우글거리는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파이는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해서 살아야 했다. 물론 파이도 좌절하고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는 현명한 소년이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나열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는 최고의 선택을 했다. 나는 두꺼운 이 책을 손에 쥐고 솔직히 '재미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잠깐 했었다. 하지만 소설이 본격적으로 파이의 표류기에 들어서면서 손을 뗄 수 없었다. 밤새 읽고 나니 파이가 존경스러웠다. 인간에 대한 뿌듯함과 편안함이 몰려왔다.

 

누구나 살면서 수많은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거기서 좌절하고 만다면 생을 사는 사람보다 죽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것을 하라. 그렇다면 삶도 기꺼이 달라질 것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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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의 나비 - 우리가 꼭 읽어야 할 박완서의 문학상 수상작
박완서 지음 / 푸르메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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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형한 눈, 한 번도 의식화되지 않은 눈, 앞으로 의식화 될 가망이 전혀 없는 채송화시만 한 눈이 느닷없이 나의 어떤 지난날부터 지금까지를 한꺼번에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에 나는 전율한다. 그 채송화씨만 한 눈이 샅샅이 조명한 나의 생애는 거러지보다 남루하고 나의 손은 피 묻어 있다.

-[그 가을의 사흘 동안]

 

권위란 상대방으로 하여금 하고 싶은 말을 참게 하는 어떤 힘이 아닐까?

 

-[엄마의 말뚝 2]

 

차도로 나왔으나 좌회전을 하지 못해 돌아가야 할 도시를 뒤로 하고 달릴 수 밖에 없었다. 어딘가에 유턴 지점이 있겠지. 유턴 지점을 열심히 찾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믿으며 상쾌한 속도를 냈다.

-[꿈꾸는 인큐베이터]

 

암만 해도 저건 현실이 아니야. 환상을 보고 있는 거야. 영주는 그래서 어머니를 지척에 두고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녀가 딛고 서 있는 것은 현실이었으니까. 현실과 환상 사이에는 아무리 지척이라도 아무리 서로 투명해도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별개의 세계니까.

-[환각의 나비]

 

 

박완서 문학상 수상 작품집, <환각의 나비>

 

 

+) 박완서의 작품은 여성의 깊은 곳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읽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그게 바로 장점이자 단점인데 작품의 색깔이 비슷하다는 역설적인 공통점 때문이다. 그러나 그만큼 여성의 생애를 깊이있게 다루는 작가도 드물다. 그래서 박완서의 작품을 읽으면서는 늘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데 이번 수상작품집에 실린 제 7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작인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이란 작품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물론 기존의 그녀가 다루는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꽤 정밀하게 쓰여진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치 이제 막 등단한 젊은 작가의 작품이랄까. 소파 수술을 주로 하는 산부인과 여의사의 고통과 기억에 대한 글인데, 그 소설에 상징적인 장치를 믿음직하게 실었다.

 

박완서라는 작가는 사실 작품보다 이름이 더 기억되는 사람이다. 그것은 다작의 작가이기도 해서 그렇겠지만, 비슷한 작품 색깔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그녀에게 새로운 작품을 요구하기보다 그녀의 작품에 구별의 선을 그어보면 어떨까.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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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민음의 시 131
김소연 지음 / 민음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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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뿔 위에서

 

 

 사방천지에 잠자는 짐승의 숨소리들이, 세상 가득 상처난 식물의 코 고는 소리가, 그들이 뱉어놓은 눅진눅진한, 짙은 입 냄새가, 들숨, 날숨, 부풀어오르다 꺼지는 뒷산의 어깨가, 눈 맑은 꽃, 까칠까칠한 턱, 내 손으로 감쌌던 두꺼운 손, 늘어진 머리카락들, 길처럼 여린 길, 발처럼 예쁜 발, 코끼리 발자국 속에 무수한 개미 발자국, 흙 속에 묻어둔 사나운 발톱, 바람 한 장에 꿀 한 숟갈, 이슬을 털다 스스로 놀라는 잎갈나무 숲, 달처럼 해진 달, 물처럼 환한 물, 이윽고 별들의 정수리가 다아 보일 때 나는, 점자책을 읽듯 손끝으로 세상을

 

 

김소연,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中

 

 

+) 시집 곳곳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것은 전통적이고 관습적으로 치부해온 여성의 여성성, 그러니까 모성성의 울림이다. 어머니이기도 하며 할머니이기도 하고, 아내이기도 한 여성들의 움직임은 '가정'을 스쳐서 '시대'를 관통한다.

 

그런데 그것을 이끄는 주체는 '그림자' 이다. 여성은 천천히 사그라들면서 그림자만이 남게 된다. "그림자 없는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 / 지독하게 환해져야 하는 /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빛의 모퉁이에서]) '길'을 걷는 존재는 그림자를 따르지 않고 자신이 그림자를 이끌고 싶어한다. 그러나 "어김없이 황혼녘이면 / 그림자가 나를 끌고 간다"

 

그림자는 누구인가. 그림자는 또 다른 자신이다.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수많은 모습의 일부이다. 시적 화자는 "자기 생을 낚기 위하여" 자신 내부의 혁명을 꿈꾼다. "혁명을 꿈꾼다는 것만큼 / 치욕적인 짝사랑이 또 있을까"([짝사랑 - 우리 시대에 대한 弟辭]) 자신의 중심부를 옮기고 싶은 화자의 욕망은 내부의 혁명을 갈망한다.

 

그것이 그림자 여성을 '여성'보다 '그림자'로 남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시인은 한 사람의 주체로 인정받고자 한다. 외적 구조에 의해 정의되는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는, 자기가 주체가 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안타까운 점은 보이는 것에서 멈춰버린 시상이다. 더 깊이, 한 호흡 더 깊이 들어가도 될 만한 소재들이 나열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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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에 아픈 사람 민음의 시 120
신현림 지음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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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었지

 

 

너는 아무것도 아니었지

순식간에 불타는 장작이 되고

네 몸은 흰 연기로 흩어지리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지

일회용 건전지 버려지듯 쉽게 버려지고

마음만 지상에 남아 돌멩이로 구르리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도 괜찮아

옷에서 떨어진 단추라도 괜찮고

아파트 풀밭에 피어난 도라지라도 괜찮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의 힘을 알아

그 얇은 한지의 아름다움을

그 가는 거미줄의 힘을

그 가벼운 눈물의 무거움을

 

아무것도 아닌 것의 의미를 찾아가면

아무것도 아닌 슬픔이 더 깊은 의미를 만들고

더 깊게 지상에 뿌리를 박으리라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때

비로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리라

 

 

신현림, <해질녘에 아픈 사람> 中

 

 

+)  이 시집은 두 가지 극명한 촉감이 있다.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 시인은 가난, 설움, 아픔, 고통 등의 차가움을 흑백 사진 속 낡은 이미지로 형상화하거나 '아슬아슬한 나날' 혹은 '낡은 육신'으로 그려낸다. 미스맘으로 혼자 키우는 어린 '딸'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이 희망의 등으로 따뜻함을 피운다. 그 사이에서 청춘을 보내고, 그 사이에서 현재를 보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다.

 

때로 "절망의 아들은 포기"를 선택하기도 했을 사람, "그냥 흘러가는" 하얀 구름이 되었을 사람, "가다보면 흰 구름이 진흙 더미가" 되고 흰 구름이 "배가 되어 풍랑을 만나"기도 했을 사람, 결국 그렇게 "길가에 쓰러진" 자신을 발견한 사람이([가질 수 없는 건 상처랬죠?]) 있다. 하지만 또 한 사람이 있다. "아팠으나 따뜻했던 기억들이 떠밀려" 오는 사람, "서글픈 해가 질 때나 / 정선 땅 굽이굽이 출렁이는 길 위에서 / 이 풍경이 바로 인생이야," 되뇌고 있는 사람, "목메게 아름다운 기억을 굴려가며 / 끝없는 시간, 끝없이 사라진 나날을" 견디는 사람이 있다.([고맙습니다, 따뜻한 시간 되세요])

 

둘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같은 사람이다. 한 사람의 삶 속에 녹아 있는 '나'이며 '나'이다. 이번 시집을 읽으며 나는 가끔 아프기도 했고 소박하게 웃기도 했으며 따뜻하게 가슴 한켠에 머물기도 했다. "삶을 단순하게, 더욱 단순하게 만들 것", "절망하지 말 것", "환하고 느긋하게 살며",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느낌을 기록할 것"([싱글 맘-원더풀 마이 라이프]) 화자의 읊조림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자 독자에게 하는 말이다.

 

특정한 상황에 처한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자. 우리 삶에서 특수한 것을 찾아내는 것 자체가 어색하지 않을까. 둥글게 돌아가는 원에서 우리는 하나의 점으로 만나고 있다. 시인의 시가 드러내듯, 시인의 사진이 보여주듯 일상 속의 우리는 '나'이며 또 다른 '나'이다. 시집을 읽는 내내 많은 사람과 감정을 공유한 기분이다. 비교적 공감이 잘 가는 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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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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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불행해'라는 생각이 '지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익한 활동'이라는 생각으로 확장되기란 어찌나 쉬운지.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라는 경박한 불평이 '사랑은 환상'이라는 우아한 경구로 승화되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흥미로운 점은 존재와 사랑이 무익하냐 아니냐가 아니라(일개 인간이 그런 걸 어떻게 알겠는가?), 어떻게 본래의 촉매제는 사라지고 아주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좌우명만 남느냐 하는 것이다.
p.49
 
"어째서?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랑 사귀는 게 훨씬 흥미진진한걸."
"그래? 왜?"
"글쎄, 그들이 섹시하고 멋진 데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니까. 아무튼 사랑한다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야?"
p.96
 
하지만 사랑에서는 권력이 훨씬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정의에 의존하는 것 같다. 사랑에서는 권력이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능력으로 간주된다.
p.175
 
다른 영역에서와는 달리,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아무 의도도 없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다. 사랑의 목표는 소통과 이해이기 때문에, 화제를 바꿔서 대화를 막거나 두 시간 후에나 전화를 걸어주는 사람이, 힘없고 더 의존적이고 바라는게 많은 사람에게 힘 들이지 않고 권력을 행사한다.
p.177
 
 
알랭 드 보통, <우리는 사랑일까>中
 
 
+)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은 쉬운 소설이 아니다. 그러나 스토리 자체는 꽤 단순하다. <우리는 사랑일까>는 런던에 사는 광고 회사 직원 앨리스가 파티에서 만난 남자 에릭과 엮어가는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이다. 청춘남녀의 만남에 대해 남자의 시선과 여자의 시선을 번갈아 가며 서술하고 있다.
 
젊은이들의 말랑말랑한 러브스토리에 플라톤, 탈레스, 헤겔 등 철학가들의 사상과 오스카 와일드, D.H. 로렌스 등 문학가들의 정의, 그리고 앤디 워홀의 예술적 의미가 절묘하게 녹아 있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과감하게 철학가와 문학가들의 이야기를 끌어들였다는 점이 신선했으나 이해하려면 천천히 곱씹어 읽을 필요가 있는 작품이다.
 
간혹 소름끼치도록 정확하게 짚어주는 것, 그런 작가의 손길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했을 것들을 놓치지 않는다. 심리학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러 상황에 처한 인간들의 심리를 치밀하게 그려낸다. 이 작품을 통해 무언가를 깨달으려고 읽을 필요는 없다. 그저 그런 생각도 있구나, 새로운 것들을 접해 보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그래야 부담없이 독서를 할 수 있다. 그의 말이 진리는 아니지 않겠는가. 다만 남녀 사이의 관계를 가볍지 않게, 진지한 심리학적 자세로 나누는 작가의 태도에 찬사를 보낸다. 흥미로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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