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분홍색 흐느낌 ㅣ 문학동네 시집 88
신기섭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무도마'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 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영혼, 기억들; 토막 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딱딱하게 막혔다 꼭 무엇에 굶주린 듯
너의 몸 가장 자리가 자꾸 움푹 패여 갔다
그래서 예리한 칼날이 무력해진 것이다
쉽게 토막 나고 다져지던 고깃덩이들이
한번에 절단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의 몸 그 움푹 패인 상처 때문에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세월의 때가 묻은 손바닥같이 상처에 태연한 곳
혹은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무덤 속 같은
너의 몸, 어느덧 냄새가 다 빠져나갔나 보다
개들은 밤의 골목으로 기어 들어가고
꼬리 내리듯 식육점 셔터가 내려지고 있었다
신기섭, <분홍색 흐느낌> 中
+) 신기섭이란 이름 옆에 (1979~2005)라고 적혀 있었다. 2005년에 등단한 사람인데 2005년에 죽었다구? 문학동네에서 이런 실수를 다 하는군. 고개를 움직이며 시집을 읽었다. 누군가 말했다. 그는 등단한 해에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그 말을을 듣자 그가 시집에서 수없이 이야기하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생각났다. 또한 할머니의 할머니까지. 그는 어디로 갔을까.
신기섭의 시에는 유달리 할머니에 대한 가족사가 많다. 그것은 어머니나 아버지의 삶이 아닌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삶에 그가 함께했음을 드러내는 것인데, 그들에 대한 추억은 "향기로운 나무껍질처럼 / 내 몸을 감싸고, 따뜻하다."([추억]) 세상의 "모든 엄마는 비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에게서 "가족사진" 또한 밝고 명랑한 기억이 아니라 교통사고의 비명으로 기억된다. 엄마에 대한 것은 부담스러운 관계이다. 엄마도 아이도 서로에게 상처로 남는다. "엄마를 죽이고 세상에 나온 신생아"([현기증])가 화자 스스로를 대신한 보조관념은 아니었을까.
반면에 할머니에 대한 것은 연민과 그리움, 추억이 된다. 시인이 "엄마라고 부르는 것들은 모두 할머니가" 되듯이([할아버지가 그린 벽화 속의 풍경들]) 시인에게 사랑과 따듯함과 행복은 할머니로 소급된다. 어머니와의 관계 혹은 세상에서 생긴 상처는 할머니의 품으로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럼 상처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것은 몸속에 녹아 들어갔다. "나의 몸속으로 / 다시 돌아와 잠잠하게 잠기는 분홍색 흐느낌"([분홍색 흐느낌])
자기의 상처를 보는 사람은 상대방의 상흔을 보고도 상처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화자는 상처가 상처를 알아보는 가운데에서 만남을 떠올린다. "상처만이 상처를 만나주는가, 저도 상처가 있다고 / 치마폭 소으로 뛰어오르는 낙엽들"([만남]) 그것은 곧 "네 몸에 내 몸을 끼우는 것"이며 "함게 내딛는 것"이다. ([집착]) 상처로 인해 맺게되는 관계들은 시인에게 진지한 대상이 된다. 여기서 신기섭의 시가 응고된 기분이 든다.
등단하자마자 유고작이 된 시집. 이 응고점에서 멈춰버린 시. 궁금한 것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