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러비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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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과거 앞에서, 기억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사건 앞에서 우리는 무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말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란 경험한 자만이 통감할 수 있는 아픔이다. 누구나 쉽게 비극을 입에 올리지만, 스스로가 겪어보지 않은들 그 깊디깊은 공허의 넋을 어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기억할 수 없을 만큼 고통은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이다. 책은 다행이도 그러한 것을 체험케 하는 훌륭한 매개체이다.. 식민주의적 잔재로 고통 받는 이들의 필독서이자 흑인들의 고전으로 불리우는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프란츠 파농은 흑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이런 표현을 하였다.

   세상의 차별은 흑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차별이 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때론 남성이라는 이유로, 때론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성소수자로 또는 이방인으로서 차별은 어디에나 있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기에  흑인에 대한 차별 역시도 일반적인 차별의 일부일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책 《빌러비드》를 읽으면서 미국인이 흑인에게 가해진 학대와 착취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차별과는 전혀 다른 '인권유린'이라는 상상 이상의 고통임을 상기해 보는 시간들이었다. 흑인들에게 노예의 낙인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기억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의 상흔으로 인류문명사에 남겨질 상흔이다.  노예로서의 삶은  인간이 아닌 동물로서의 삶,  주主가 아닌 생존이라는 부차적인 삶으로서의 삶이기 때문이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는 이러한 인권 유린 앞에서 동물로서의 생존을 거부한 한 자유인 어머니로서의 기억이다. 사랑하는 자가 아닌 사랑받는 자라는 뜻의 빌러비드beloved는 어머니가 자식에게 해 줄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자 마지막 선물의 이름이다.  세상에서 비록 사랑받지 못한 자로 죽었을 지라도 세상의 모든 어머니에게 자식은 '사랑받는 자' 일테니까. 그러니까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는 사랑받지 못하고 떠난 딸을 불러내어 장례식을 치러주는 치유와 위로의 여정이다.

 

토니 모리슨은 18561월의 어느 날, 켄터키 주의 노예였던 마거릿 가너가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 라며 두 살배기 딸을 살해하고 자살을 시도한 사건을 토대로 노예로서의 삶을 재조명한다.  온 몸의 뼈가 뒤틀리는 아픔을 통해 낳은 자식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는 자유인으로서 재판 받길 원했지만,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채  '노예'로서 생을 마친다. 실제 사건을 토대로 토니 모리슨은 <빌러비드>에서 세서라는 여인을 통해 '노예'라는 부차적인 삶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은 아이를 위해 디얼리 빌러비드(몹시도 사랑하는)’ 라는 비문을 새기고 싶었던 세서는 비문 새기는 남자에게 몸을 판다. 그러나, 그녀가 주고 싶었던 이름자에는 디얼리가 빠진 네 글자(빌러비드)만 허락된다. 아이에게 마지막 해 줄 수 있는 묘비명조차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이 삶의 모습이 바로 '노예'의 삶인 것이다. 이후 아기 혼령과 함께 저주받은 124번지에서 어린 딸 덴버와 삶을 연명하는 세서는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척박하기만 한 세서의 삶에 십 팔년만의 불청객 폴디의 방문이 아니었다면, 세서는 그 집에서 살아있으되 죽은 사람으로 살아갔을 터......

"내 등에는 나무가 자라고, 내 집에는 귀신이 나오고, 그 사이엔 품에 안은 딸아이 하나밖에 없지만, 더 이상 도망은 안 쳐. 절대로. 이 세상 그 무엇도 두 번 다시 날 도망치게 하지 못해. 난 여행을 한 번 했고 푯값을 치었어. 하지만 알아. 폴 디 가너 그 값이 어마어마하게 비쌌어! 내 말 듣고 있어? 너무도 비싼 값을 치렀단 말이야. . 이제 자리에 앉아서 우리랑 같이 식사를 하든지 아니면 우리를 내버려두고 떠나.”

 '스위트홈'의 남자중의 하나였던 폴디는 세서의 남편 핼리의 친구였다. 마치 과거의 삶에서 폴 디만 톡 튀어나온 것처럼 세서모녀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폴디가 이들의 풍경에 합류하게 되면서 아기 혼령도 자연스럽게 오두막을 떠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빌러비드'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한 여인을 통해 세서는 자신의 '과거 -고통과 상실의 기억'을 불러내기 시작한다. 너무도 아파서 꽁꽁 묶어 자물쇠를 달아놓은 과거의 상자를 열어젖히자, 멈추어 있던 세서의 기억은 다시 재생된다. 

 

세월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단다. 세월이란 걸 믿기가 힘들다고. 어떤 순간은 떠나가. 그냥 흘러가지. 또 어떤 순간은 그냥 머물러 있고. 예전에는 그게 내 재기억 때문이라고 생각했단다. 너도 알 거야. 어떤 일들은 까맣게 잊어버리지만, 또 어떤 일들은 절대 잊지 못하잖니.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그 자리. 자리가 여전히 거기 남아 있어.” 

빌러비드의 존재는 명확하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빌러비드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세서의 봉인되었던 기억이 과거처럼 고통에 머물러만 있지 않다는 점이다.  상처를 그대로 놔두면 곪아서 썩어들어가지만, 상처에 메스를 대어 도려내면 새살이 돋는 것처럼 스위트홈의 노예들이 겪어야 했던 백인들의 착취와 학대의 기억과  식소와 핼리외 동료들이 백인의 채찍에 살점이 뜯기며 부르짖었던 기억들이 ,매일 밤 백인들에게 강간당하며 채찍질을 당한 그 순간들에 날카로운 메스로 상처를 드러내었을 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고통에 새살이 돋아나면서 아픔은 서서히 잦아들어 간다. 세서가 빌러비드와 함께 과거를 투명하게 바라보게 되었을 때,  '사랑받지 못한 자' 에 머물러 있던 세서는 비로소 '사랑받는 자'로서의 회복을 하게 된다. 자신이 주인인 삶, 그것은 스스로를 사랑받는 자로서, 자신을 '보배'로 여기는 것, 이것은  세상의 모든 이들이 되찾아야 할 인권인 것이다. 물론 토니 모리슨은 노예제도의 가장 큰 희생자였던 흑인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위로의 말이었겠지만, 폴디의 마지막 말 '당신이 보배야'는 바로 당신, 주체적인 인간으로서의 회복을 권하는 자유의 타전이 아니었을까.

 내 백성이 아니었던 자들을 내 백성이라,

사랑을 받지 못하던 자들을 사랑하는 자라 부르리라-로마서 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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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5 17: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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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6 10: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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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브
우르줄라 포츠난스키 지음, 안상임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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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영화에는 누아르장막이 짙게 드리워진 느낌이 든다.  사상초유의 사고로 요며칠 우울과 스트레스지수가 최고조에 이르렀는지 며칠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영화 몇 편을 보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잔혹한 살인마가 등장하는 <더파이브><몬스터>였다.  픽션으로 치부하기에는 암담한 우리네 현실의 연장선을 보는 것 같아  심장이 벌렁벌렁하였다. 한편으로는 이토록 범죄스릴러의 장막이 짙게 드리운 이유조차도 한국사회가 주는 공포수위가 이미 위험수위를 한참 초과한 하드보일드임을 방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작년 가족들과 함께 청소년 수련관에서 주최하는 오리엔티어링에 참가한 적이 있다. 지도와 나침반으로 목적지를 찾아가는 오리엔티어링이라는 가족레저는 최근에는 휴대용 GPS를 이용해 캐시(보물)을 찾는 보물찾기로 진화했다.  지구를 뜻하는 지오GEO와 보물을 뜻하는 캐시(cache)를 찾는 게임으로 휴대폰GPS를 이용하여 찾는 최첨단 보물찾기를 지오캐싱이라 한다. 지오캐싱을 하기 위해서는 지오캐싱닷컴에 프로필과 캐시를 등록하여야 하며 좌표캐시("cache")가 반드시 필요하다. (지오캐싱닷컴에 등록된 프로필은 수정이나 삭제가 불가능하다.)  

 

 

과거 친구가 잔인하게 살해당한 일이 오랜 트라우마로 새겨져 있는 여형사 베아트리체는 싱글맘이다. 아름다웠던 에벌린의 죽음이 자신 탓이라 생각하는 베아트리체는 에벌린의 죽음이후 사랑했던 남자와도 헤어졌고 학업도 그만두었다. 사랑하지 않았던 남자 아힘과의 결혼생활은 불행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일과 육아 어느 것 하나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우울한 날을 보내는 평범한 형사이자 엄마이며 이혼한 여자였다. 그런 베아트리체에게 '지오캐싱'초대장이 날아온다. 초대장은 손이 묶여 있는 한 여인의 시체발바닥에 쓰여 있는 좌표(N47"35.285 E013"17.278) 였다.

 

지오캐싱 회원이었던 슈테판의 도움을 받아 지오캐싱 게임의 방법을 배운 베아트리체는 GPS의 좌표가 가르키는 지점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남자의 손이 담겨 있는 캐시통을 발견한다. 그리고 베아트리체 앞으로 쓰여진 편지에는 죽은 여인 노라 파펜베르트의 필체로 다음 좌표를 가르키고 있다.

 

 

 

                           이름이 크리스토프인 남자 성가대원을 찾아, 그의 왼쪽 손등에는 점이 있어.

       대략 오륙 년 전쯤에 잘츠부르크 성가대 소속이었고, 거기서 슈베르트 미사곡 내림가장조를

      불렀다는 데에 매우 자부심이 강해, 그의 출생연도 마지막 두 자리 숫자를 A라 하고

A를 제곱해서 37을 더하고, 당신이 가진 북쪽 좌표에 이 숫자를 더해.

 A10을 곱하고 그 자릿수의 합을 구해. 그런 후 A를 이 숫자와 곱해.

 229를 빼고 당신의 동쪽 좌표에서 나온 숫자를 빼.

 스테이지 2에 온 걸 환영해.

거기서 다시 봐.

 

 첫 번째 좌표가 이끄는 두 번째 장소에서 다시 세 번째의 좌표가 발견되고 좌표가 가르키는 곳마다 캐시통이 발견된다. 캐시통에는 전혀 다른 희생자들의 사체가 담겨져 있고, 다섯 명의 희생자들의 잘린 손과 잘린 귀, 잘린 손가락이 발견된다. 좌표를 가르키는 각 편지에는 첫 번째 희생자였던 노라 파펜베르크의 필체로 쓰여진 글이 쓰여 있고, 이들 다섯 명의 희생자들의 공통점은 오년 전  이들이 지오캐싱을 하였다는 것으로 압축된다. 지오캐싱에서 찾은 이들의 마지막 캐시에는 이들 다섯 명의 희생자 사인이 있었으며 베일에 가려진 한 명의 조커가 남아있음을 알게 된다.  점점 미궁속에 빠져드는 사건 가운데 베아트리체와 플로린은 점점 무력해지고 그 가운데 노라의 폰으로 문자를 보내는 범인의 메시지에는 과거 베아트리체의 오랜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암시가 담겨져 있다.  베아트리체를 향한 범인의 메시지로 인해 심리적 부담감과 혼란이 가중되던 베아트리체는 아이의 엄마이자, 형사로서 더욱 큰 불안과 공포에 잠식되어 간다. 

 

 

당신들은 모든 걸 알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할 거야

 

이 책의 작가 우르줄라 포츠난스키가 그리는 여형사 베아트리체는 과거 슈퍼우먼화 되어있던 여성상과는 정반대의 캐릭터를 선보이고 있다. 사회에서는 남성중심의 조직사회에서 소외된 모습으로, 동료 플로린과 차별을 받고 남편에게서조차 일때문에 육아를 소홀히 한다는 이유로 이혼을 하고, 이후 육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사회적 역할 부담감까지 떠안고 있으며 범인과의 두뇌게임으로 괴로워 하는 베아트리체는 안쓰럽기 그지없는 캐릭터이다. 작가는 베아트리체의 심리적 부담과 압박을 정교하게 묘사하는 동시에 현실의 짐을 떠안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여성을 리얼리티한 감각으로 그린다. 누와르의 장막이 짙게 드리워진 현대인의 불안한 삶은 마치 캐시를 쫓는 지오캐싱의 긴박한 게임처럼 흘러가고 현대 사회에서 다양한 역할의 짐을 떠맡은 부초같은 여성의 삶을 섬세하고 리얼하게 묘사한 《파이브》는 심리 스릴러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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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2 14: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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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2 14: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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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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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두 가지 세계로 분열되어 있다. 한 세계는 평범한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세상으로서의 사회이다. 또 다른 세계는 학자들의 폐쇄적인 아카데미로 구성되어 있는 세계로서의 사회이다. ‘세상으로서의 사회에 살고 있는 삶들과 세계로서의 사회에 살고 있는 사회학자는 각자의 세계에 분리된 채 살고 있다. 각각의 세계에서 그들은 서로 알아 듣기 힘든 각자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사회는 알면 알수록, 짜증난다. 이건 진리이다. 그 짜증의 이면에는 세상의 모든 이치가  내 생각내 뜻이 아닌, 누군가의 생각과 누군가의 뜻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음을 알아가는 과정을 거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타인에 의해  가 움직이고 있으며, ‘는 없고 익명의 타자들을 항상 의식하며 사는 나의 또 다른 세계가 곧 사회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타자들의 세계와 나의 세계의 간극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크다는 깨달음이 뒤통수를 후려치게 된다. 그렇기에 사회에 속한 는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로 망망대해에 던져진 부표浮漂와 같은 존재이다. '나'라는 개인을 철저히 부표로 만들어 버리는 현대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흔히들 이야기 하듯 '세상물정'을 알아야 한다. 우리 사회를 보라, 몇 년 전만해도 상상하지 못하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사회를 보는 나는 늘 불안과 슬픔을 동시에 느낀다. 왜냐, 나는 이른바 '낀세대'이기 때문이다.

 

내가 낀세대임을 실감하는 순간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혼동이 느껴질 때이다. 디지털세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윗세대와 가르쳐주지 않아도 태어나자마자 디지털 세계에 입문하는 아이들의 모습과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구분하지 못해 상상이상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우리의 낀 세대들이  파타피지컬(현실과 가상의 혼재)' 터널을 지나고 있음을 깨닫고는 한다. 우리 낀세대가 불행한 것은 서로 다른 두 세계에 발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저명한 사회학자 피터버거는 좋은 사회학은 좋은 소설과 유사하다. 좋은 소설을 읽으면 사회에 관해 많이 알 수 있으니까.“ 라며 문학적 상상력의 통찰이 사회학과 궤를 같이하고 있음을 말한다. 누구에게나 한 번 뿐인 삶을 여러 번의 삶을 경험하게 하여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소설과도 같은 학문이 바로 사회학이다.  사회학 안에는 역사와 철학, 문학이 씨줄과 날실로 엮여 통찰하는 세상이야기가 담겨있다. 이렇게 세상의 이야기를 담은 학문이 사회학이지만,  대부분의 사회학자들은 학문 뒤에 숨어 사회학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 저자 노명우는 사회학이 전문화의 길을 걷는 학자로서의 학문이 아닌 사회학 본연의 모습 잃어버린 세속적 삶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연구실을 박차고 나와 세상이라는 미로를 빠져 나올 수 있는 지혜의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아 세속의 리얼리티’에 뛰어 들었다.  

삶의 리얼리티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판타스마고리아fantasmagoría 라는 환등상幻燈像의 등불을 끄게 만드는 힘의 근원이다.

 

 

사회학은 삶에 대한 근거 없는 희망이나 하면 된다와 같은 사실상 거짓말에 가까운 헛된 기대가 아니라 철저하게 삶의 리얼리티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학문이다 

 

 

 

 

 

 저자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스무가지의 키워드들 -상식,명품,프랜차이즈,해외여행,열광,언론, 기억, 불안, 종교, 이웃, 성공, 명예, 수치심, 취미, 섹스, 남자, 자살, 노동, 게으름, 인정, 개인, 가족, 집, 성숙, 죽음-을 관통하며 사회에 통념되고 있는 된장녀, 군중심리, 세계화, 여론의 흥망성쇠, 종교와 자본주의의 유사성, 사회적 자살의 증가와 사회의 이면들을  진단하며 삶을 관통하는 철학으로 투사하여 해석해 주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저명한 사회학자 피터 버거가 연상되곤 하였는데 둘 다 학문으로서의 사회학이 아닌 삶의 리얼리티에 근거한 사회학을 주장하는 점에서 많이 비슷했다. 특히 '낀세대'로서 긍정의 사회학에 익숙한 우리 세대에게는 긍정과 환상의 거품을 빼고 날 것의 사회를 통찰할 필요가 있다. 책을 읽으면서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은 세상이고 새삼스레 내가 세상물정에 지극히 어두우며 여전히 사회는 불안하고 두렵게 느껴지지만, 그러한 세상에서 구원해줄 수 있는 아리아드네 실이 필요하다면 세상물정의 사회학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특히 우리 낀세대들에게 ...

 

시장은 범죄율을 숨기고 여자 의원은 주저하고

사람들은 분노했지만, 정작 투표일을 까먹고

일기 예보관은 맑은 날을 예고했는데 비가 온다고 투덜대고

모두가 저항하고 있는데,

남자친구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러지 말라하고

쓰레기 치우는 사람은 없고, 여자들도 보호받지 못하고

정치인들은 이용당하는 사람들을 써먹고

오염된 강물처럼 마피아 세력은 커져만 가고

당신은 이게 현실이라 내게 말하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머리는 지끈거리고

침대에서 흘러나오며 내던졌던 옷들을 끼어 입고

창을 열고 뉴스를 들어도 지배층들의

블루스만 들을 수 있을 뿐이고

총은 불티나게 팔리고, 주부들은 삶이 따분하고

이혼만이 해법이고, 흡연은 암을 유발하고

열 받아 있는 젊은이들의 노래 속에서

이 따위 체제는 곧 망해야 하고

이 모든 것이 구체적인 냉혹한 사실일 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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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고향으로 가는 짧은 여행
자크 랑시에르 지음, 곽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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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거리는 버스에 머리를 기댄 채 넋을 잃고 버스 밖 풍경을 바라보곤 하였다. 언제나 무릎위에 책이 놓여진채. 내게는 언제나 책을 읽지 않을 자유가 있었다. 하지만, 창밖을 보면서도 의식은 언제나 책을 향해 있다. 내가 탄 버스의 종착역은 항상 풍경과 겹쳐진 의식의 끝자락을 붙들면서 끝이난다.  노스텔지아를 불러 일으키는 책 《사람들의 고향으로 가는 짧은 여행》을 들고 다니면서 ' 나 자크 랑시에르 읽는 여자야'하고 다녔지만, 자랑하기에만 좋았고 무척 난해한 텍스트라 힘들게 읽었다. 자크 랑시에르가 미학과 정치의 관계를 다룬 첫 책이라 쓰여있는 출판사 띠지문구를 보며 이 책은 자크 랑시에르에 익숙한 사람만이 독해가 가능한 책이라는 생각이 문득^^;;;

  

개인적으로 정치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치라는 단어 이면에 담겨져 있는 권력의 냄새와 지배계급의 함의들을 느낄 때마다 참 싫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은연중에 인정하고 있는 나 자신이 모순적인 사람임을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조르즈 아감벤은 그의 책 <호모 사케르>에서 정치가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언어를 통해 자신에게서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해내며, 그것을 자신과 대립시키는 동시에 그것과의 포함적 배제관계를 유지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자크 랑시에르의 사유는 이러한 정치적 사유로부터 출발한다. 여행을 할 때의 설레임이 아닌, 인간 본연의 정치적 모습으로서의 출발을 이 책은 특이하게도 여행자의 시선을 빌려  작가의 사유를 투영하는 사유의 여정을 그린다. 

 

이 여행은 세 단락으로 나누어지며 1부 새로운 고향에서는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와 프랑스의 작가 생시몽과 독일의 문학가 게오르그 뷔히너를 통해 통해 혁명과 공화주의 이념을

2부 가난한 여자는 프랑스의 역사가 쥘 미슐레,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통해 보는 노동자의 삶과 사랑을 3부 자살하는 아이에서는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로메르토 로셀리니의 <유로파51>을 통해서 보는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미학 - 사건, 만남, 무의식적 기억에 대한 영화이며, 또한 행위와 그 부재에 대한 영화-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다소 난해하고 독특한 구성이었지만, 미학과 정치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여행스케치 같다. 자크 랑시에르는 여행자의 마을을 그리고 그 마을을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인 인간과 언어와 혁명과 권력, 프롤레타리아, 부르주아를 소환해낸다. 정치와 미학이 역사와 문화뿐만 아니라 범세계적인 관념의 세계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이면들을 향한 노스텔지아의 색다른 사유의 공간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낯선 곳으로서의 여행,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의식의 끝은 결국 심연에 잠겨있는 또 다른 나를 깨우는 여행이라는 것..........

 

그들의 시선과 발걸음의 리듬에 따라 새로운 고장의 이미지들이 만들어지고 해체된다. 단순히 이방인이 언어를 배우거나 경험을 가진 자신의 시선으로 깨닫는 그런 것이 아니다. 통찰력은 풍경을 그리고, 믿음의 주름에 그 선과 그림자를 조화시키는 또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우선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과 행복한 미래의 꽃이 피어났던 자리에 메마른 돌과 차가운 무덤이 넘치기 때문이 아니다. 아직 상황을 잘 모르는 -순진하다고 할 수 있는 이방인이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이리저리 눈길을 주면서, 말과 이미지들의 첫 조합을 다듬고, 그곳의 확실한 기억들을 해체하면서, 일반적으로 실제라고 알려진 여행 일정들이나 그 곳들의 지도를 모르는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가능성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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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6 15: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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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6 15: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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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8 00: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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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8 15: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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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은 어디로 갔나
서영은 지음 / 해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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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라는 철학자가 있어요. 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사랑은 둘의 경험이라고요.  

《꽃들은 어디로 갔나》의 저자는 이런 말을 해요.

사랑이란 타인 속에서 내가 죽는 것이다. 라고요.

전 사랑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라고요.

이렇게 사랑이 저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둘의 경험에서 파생된 깨달음에서 사랑이 오기 때문이죠. 그러고보면 알랭 바디우가 말한 '사랑은 둘의 경험'이라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철학자 강신주는 <강신주의 다상담 1> 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타인을 알아서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면서 타인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 '사랑의 비밀'이라고요.

 

 소설가 김동리의 세 번째 부인의 자전적 소설인 <끛들은 어디로 갔나>에는 이 사랑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현대식 사랑법과는 다른 느린 걸음의 사랑을 주인공 '호순'을 통해 보게 됩니다. 김동리 선생님의 개인사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유추해 볼 수 있는 실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화자인 '호순'역시도 작가 본인이 투영되어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래서인지 사랑이라는 '둘의 경험'이 매우 익숙하고 친숙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법한 달달함이나, 풋풋함, 가슴떨림 같은 두근거림은 없습니다. 애초부터 둘의 사랑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호순의 사랑은 그야말로 알아서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번쩍하는 운명의 장난으로 사랑에 빠졌고 그제서야 남편을 알아가는 사랑에 빠진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여자에게는 지고지순한 사랑이었지만 남편에게는 이미 첫 번째도 아닌 두 번째 부인과의 외도가 있었습니다. 사업기질도 있었고 소설가이기도 한 두 번째 부인이 있었음에도 사랑에 빠진 30년 차이의 제자와의 사랑. 두 번째 부인은 암투병 중에도 '아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인내합니다.  그런 두번째 부인이 사망한 후, 연인이었던 호순이 아내의 옷을 입습니다. 30년이라는 나이차를 뛰어넘을 정도로 사랑했던 남편은 이 아내의 옷을 입는 순간 , 본 모습을 드러냅니다.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남편은 온데간데 없고 쭈글망탱이에 마이다스 증후군을 가진 욕심 많고 인색한 노인의 모습을 한 남편을 보게 됩니다.

 

그녀에겐 라는 사람 자체가 보물이었으므로, 그 이상의 것을 탐낼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가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지금 그녀 앞엔 마이다스 증후를 가진 욕심 많고 인색한 한 노인이 있을 뿐이었다.‘

 아내로서 살아간다는 것, 한 남자를 사랑한 여자로서 그녀가 바라보는 삶의 형체는 서시히 두려움의 존재로 변질되고,  사랑의 흔적이라고는 전처가 좋아한다던 고양이 한 마리와 잡다한 수집욕에 몸을 맡겨버린 늙은 남편이 결혼생활이 알려주는 현주소임을 절감할 수록 고독과 외로움이 그녀를 침잠해 갑니다. 그런 젊은 아내를 보던 남편은 폭력과 집착에 물들어갑니다.  

 

삶이 참 두렵구나.’

그것은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명치를 겨누고 있는 깔끝처럼 단호하고 용서 없는 어떤 것이 자기 삶으로부터 불쑥 모습을 드러낸, 그런 것이었다. 돌이킬 수도, 피할 수도, 그렇다고 앞으로 나가기도 쉽지 않은, 오직 치러내는 길 밖에 없는 상황과 마주하고 있는 두려운 깨달음.

 

   

사랑이 주는 이상과 결혼이라는 현실에서 느껴지는 괴리감을 예민한 감성으로 직시하고 있는 문장들은 주옥같이 아름답습니다. 사랑은 너무 빠르게 오고 타인에 대한 이해는 너무 더디고 느리게 오기에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에게 너무 많은 희생을 요구하곤 하지요. 세 번째 부인의 지난한 세월을 관통하는 운명같은 사랑이야기를 엿보며 가끔씩 멍해지곤 했습니다. 사랑이 둘 만의 경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때 그 삶을 관통하는 '타는 사랑의 이야기'는 희붐한 새벽의 여명처럼 고독하고 여린 빛을 띱니다.  삶은 화무십일홍이요, 인생은 권불십년이라 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꽃들이 다 지기전에 사랑의 비밀을 되새김 해보며 나의 사랑을 알아가야겠습니다.  그녀의 사랑에 비해서는 제 사랑이 너무도 작은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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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9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09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착한시경 2014-04-09 1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사랑은 막상 손에 넣으면 신기루와 같아서 사라져 버리겠죠~사랑에 빠지기 보다 유지가 더 어려운것 같아요~^^

드림모노로그 2014-04-16 15:25   좋아요 0 | URL
그렇죠 ㅎ
사랑하긴 쉽지만, 유지하는 게 더 어려운 것 맞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어르신들의 금강혼식에 다녀왔는데 깨닫는 것이 많았습니다 ^^

착한시경님, 좋은 말씀 감사드리고 행복한 봄!! 보내고 계시지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