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범들의 도시 - 한국적 범죄의 탄생에서 집단 진실 은폐까지 가려진 공모자들
표창원.지승호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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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드라마에서 접해 본 프로파일러라는 직업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사건이 일어나면 면도도 하지 않은 채 쌍욕을 날려대는 터프 그 자체의 형사들과는 달리 사건이 일어난 원인과 결과를 두고 사람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범죄의 출발점으로 두고 사건을 수사하는 프로파일러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찌르면 피 한방울 안나올 것 같은 냉철한 모습보다는 사람의 마음에 접근하여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프로파일러들의 모습은 흡사 정의라는 이름에 가깝지 않을까.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노력,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출발점 일테니까.

 

이 책 《공범들의 도시》는 프로파일러 표창원의 인터뷰이다. 국내 유일의 인터뷰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가 묻고 표창원이 답을 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승호의 인터뷰집은 이 책 외에도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여러 권이 있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해보았다. 그 유명한 《닥치고 정치》도 내 서재에서 조용히 먼지를 먹고 있는 중인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분야가 아니기도 한 이유다. 평소 시사 프로그램에 관심은 있지만, 책까지 사서 읽어볼 정도의 애청자는 아니고, 지난 대선 프로그램에서 간간히 뉴스에서 보던 표창원은 좋은 인상이 아니었다.  과격한 말투도 마음에 안들었고, 자칭 보수라 칭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는 보수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승호의 프롤로그에서 말하는 '비정한 공범들의 도시에 홀연히 나타난 정의의 사나이'라고 불리우는 표창원이 입은 정의의 옷은 대체 어떤 옷인지 ,  점점 정의조차도 애매해지고 있는 이 시대에  스스로 극보수주의를 자청하는 그의 속내는 무엇일까? 

 

 

 

정말 아주 단순하게 진보와 보수의 선을 가르고자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이가 들수록 보수에 가까워지고 젊을수록 진보의 성향을 띤다. 아마도 그 이유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장 안정적이고, 가장 평범한 삶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겪게 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이가 들어 가면서 점점 고착화되는 이념과 가치, 체제나 구조를 바꾸기가 매우 힘들어지게 된다. 그러나, 표창원이 말하는 보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수구꼴통의 보수이미지와는 너무도 다른 보수를 말하고 있었다. 그는 사회의 공정성을 바로 세우고 정의의 가치를 되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아름다운 보수를 말한다. 그 보수는 보수적인 멋과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굉장한 노력이 필요한 보수이다.  

 총 5부로 나누어져 있는 《공범들의 도시》는 지승호의 전문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는 예리한 질문과 경찰대 교수였던 표창원의 사회를 보는 시각들이 잘 어우러져 사회현상과 맞물려서 들려주고 있다. 표창원은 우리 사회의 환부를 날카롭게 도려내며 우리 사회의 정의가치에 대한 재정립과 사법부의 환골탈퇴등 마치 하나하나 고름이 맺혀 있는 상처의 환부를 도려내어 치료하는 과정처럼, 차분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표창원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프로파일러라는 직업에서 파생된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모습에 많은 귀감을 받곤 하였다.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혼란에 대한 항체가 필요한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비인간적이고도 참혹한 사건들이 유독 많이 일어나고 있고 한국 사람들에게만 존재하였던 최고의 미덕이었던 ‘情(정)’은 이제 초코파이 이름으로만 남겨졌다. 극심한 자본주의 사회로 경쟁하며 달려오는 동안, 우리는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다. 우리가 무한경쟁에 몰두하며 달려오는 동안 그 사이를 가득 메꾸고 있는 극악무도한 범죄들을 보면 우리 사회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기득권층의 횡포와 맞물려 있는 용산참사 사건과 한때 의적이라 불리웠던 신창원사건, 오원춘 사건안에 담긴 사회의 어두운 이면들과 장준하 선생사건과 김성재 변사사건과 같은 미제 의혹 사건들에 담겨진 사법 시스템의 문제점들과 같은 거대 범죄 담론에 대한 이야기들을 일반인이 아닌 프로파일러라는 전문가 입장에서 들으면서 사회를 조금 더 냉철하게 바라보게 하는 잇점이 있다. 한때 영국 유학을 다녀왔던 표창원은 우리나라 경찰의 출발점부터 뜯어 고쳐야 한다고 하며 영국의 경찰과 비교하여 경찰업무도 전문성을 띠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안정적인 경찰 제도덕에 영국의 경찰은 다른 직역의 판사, 검사도 존중할 수밖에 없는 전문성을 가진 직업으로서 자리를 굳혀가고 있으나 , 우리나라의 경찰 제도의 문제점은 포스트 식민지 시대를 맞이하면서 왜곡된 식민사관을 바탕으로 자리 잡혀간 것이 첫 번째 문제이며  형법학계, 형사소송법학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이재상 교수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전문용어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들을 수 있으며 공소장일본주의公訴狀一本主義 의 문제점과 콜드케이스나 라포 형성, 보수주의 범죄학에 관한 이야기도 함께 들을 수 있다. 

 

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사건들은,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같이 노력해야 한다. 누군가가 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범죄의 잣대로만 손가락질 할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죄를 지었다면  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쳤던 수많은 요소와 변수, 환경등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행동경제학의 모토이기도 하다. 프로파일러 표창원이 주장하는 바도 그와 다르지 않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 그것은 우리 삶을 형성하는 모든 것들의 출발점이다. 과거 우리가 너무도 섣불리 유형화시키고 예단하여 만들었던 비극의 주인공들과 같은 삶이 다시 재현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공범이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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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8 15: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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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1 09: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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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서리에서의 사유 - 청년 문화연구가 최태섭의 삐딱하게 세상 보기
최태섭 지음 / 알마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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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kbs -기자가 간다에서는 전 안기부장인 장세동의 취재를 다뤘다. 전 안기부장인 동시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자, 5공의 실력자로 불렸었던 그가 수지김 사건으로 국가에 내어야 할 세금은 약 15억원이다.  15년 전 수지 김을 간첩으로 지목하며 사건을 조작하고 은폐한 당사자 장세동은 법원으로부터 15억원의 배상책임을 판결받았다. 그러나, 그는 돈이 없다며 국가 배상금 일부를 내지 않고 있다. 장세동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 참 아이러니 한 것은 , 개인의 삶을 조작하여 갈기갈기 찢어 놓은 그가  2002년 대선에 출마한 사람이란 점이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사는 사회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삶이 조작과 은폐로 철저히 부셔질 수도 있지만, 지배계급의 가해자는 언제나 건재할 수 있는 사회.  이와 비슷한 사건은 한국사회에 차고도 넘친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이해해야만 한다. 이와 쌍벽을 이루는 '영남제분 싸모님 사건' 역시도 이러한 정경유착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사건이다. 저자는 <한복과 한국의 부르주아 그리고 근대성>에서 정·재계와 사법계에 걸쳐 광범위한 인맥을 형성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명실공히 '지배계급'에 대하여 이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한국사회가 아닌 선진자본주의의 중심지라는 사실과 <진실대신 욕망만 남은 천안함>에서는 '역사 속에서 존재했던 모든 룰은 그 어느 시대에도 불편부당하지 못했다. 곧게 서 있어랴 할 막대는 현실의 권력관계에 따라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이쪽저쪽으로 구부러지기를 반복했다.' 라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불공정한 부분을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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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청년 문화연구가 최태섭의 《모서리에서의 사유》는 일련의 사회현상들을 하나의 프레임안에 두며 프레임의 사각지대인 '모서리 한 귀퉁이'에서 사회를 바라본다. 그가 이 모서리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스스로가 사회의 프레임 사각지대에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30대의 젊은 문화평론가인 저자는 ‘ 모서리 위의 인간이란 추락에 대한 공포와,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쓰는 안간힘과, 그 딱딱하고 각진 공간이 제공하는 통증 때문에 그다지 쾌적한 존재를 영위하지 못한다’라며  5년동안의 칼럼을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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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에 한번 열리는 무한도전 가요제는 정말 볼만하다. 열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남아있지 않은 대학가요제를 대신하여 뽕끼 제대로 발산해주시는 무한도전 멤버들의 창작을 위한 순수한 집념과 열정이 참 좋다. 이번 가요제에서 눈에 띈 노래는 단연 장미하관의 ‘오빠라고 불러다오’였다. 아저씨들의 발칙한  반항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더 애절한 발악이 숨겨져 있는 것만 같고 리드미컬한 박자 사이에 터져나오는 함성은 분명 본심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책을 보면서 아저씨를 대변하여 쓴 저자의  <아저씨> 에 대한 해석은 더욱 나의 생각을 확고히 다져주었다. '현대 사회의 아저씨들은 외롭다. 사리분별 능력을 잃어버리고, 생존과 욕망의 노예가 된 속이 텅 빈 괴물이 우리가 지겹게도 만나고 있는 그 수많은 아저씨들의 정체다. 아저씨가 되지 않으면 패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남자 정글의 법칙이 아직도 세상을 지배하는 룰이기 때문이다.'   

 

 

 

오빠라고 좀 불러다오 오빠라고 좀 불러다오 / 배 나온 남자 아저씨라 부르지좀 말아줘요

날씬하진 않지만 깜찍하고 귀엽기만 하잖아/ 숱없는 남자/ 아저씨라 부르지 좀 말아줘요/머리 큰 남자/ 아저씨라 부르지 좀 말아줘요/ 오빠라고 좀 불러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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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련의 사태들은 전혀 다른 분야 다른 이야기이지만, 서로 각기 다른 부분에서 사회현상을 대변해주고 있다. 우리사회를 대변하고 있는 수많은 언어들, '된장녀'의 계보에서부터 꾸준히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지배계급들의 속내,  공정한 사회라는 슬로건과는 다르게 비리와  부패의 온상으로 빠르게 동화 되어 가고 있는 현 사회의 모습을 저자는 장 보드리야르의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이미지들만이 둥둥 떠다니는 '하이퍼리얼리티'의 사회라 칭한다. 이 부분은 또한  랑시에르가 말한 ~도 아니고 ~ 도 아닌 이중부정의 의미인 교차모순의 사회와도 같다고 본다. 인터넷과 통신기술의 발달은 기존 언어의 대변혁을 가져왔다. 문자언어와 구술언어만 존재하였던 언어가 이제는 문자적이지도 구술적이지도 , 사적이지도 공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비현실적이지도, 능동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 우파적이지도 좌파적이지도 않은 ' 양상을 띠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 된다. 진보와 보수가 , 학교교육이, 문화와 정체성이 , 민주화와 공산주의 이념이 , 잉여세대의 증가와 공허한 메아리인 사이버 세상이 , 랑시에르가 말한 ~도 아니고 ~도 아닌 , 포스트모던 비평의 꼭지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데올로기도 아닌 뭣도 아닌 , 혼란 그 자체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생각에 종종 빠져들게 한다. 인터넷 발달은 아이러니하게도 신구 세대간의 불통을 가져왔다.나는 이런 극심한 분열과 분리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우리들의 세대를 심히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중의 하나이다. 이 책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냉철함과 저자의 중립적인 시각이 마음에 들었다. 모서리라고 하지만, 저자처럼 우리는 사회를 한 발 떨어져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가능하다면, 가슴은 따뜻하고 머리는 차갑게.

 

우리는 우리가 이뤄놓았다고 자부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한다. 우리는 더이상의 논공행상도 연말정산도 집어치우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의 한국 사회를 새로운 영점零點으로 삼아야 한다. 필요한 것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것이고, 새롭게 발명하는 것이다. 아직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들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한다면, 민주화를 비롯한 모든 해방의 역사는 화석이 아니라 해방의 힘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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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8 12: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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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8 13: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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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1-09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을 삐딱하게 본다기보다
삐딱한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고 해야 옳으리라 느껴요.
왜냐하면... 이 책에 나오는 여러 가지들은
'올바른 삶'이라기보다 '삐딱하게 비뚤어진 것'들일 테니까요.

그러니, 이래저래 바보스럽고 어처구니없는 그런 것들, 그런 사람들, 그런 짓들을
낱낱이 발가벗기는 일을 굳이 안 해도 얼마나 바보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줄 알 만하리라 느껴요.

청소년들한테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말하는 이야기를
조금 더 들려줄 수 있는 작가로 나아간다면
더 좋으리라 생각해요. 이 책을 쓰신 분이...

드림모노로그 2013-11-11 09:3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저자의 모서리사유가 삼자의 시각에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삐딱하기에, 아름다움을 보여주려 애쓰기 보다는
사회가 이러하니 이런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글을 써주시는 작가분이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밝음과 어두움이 공존하듯이 모든 것이 양면성을 띠니까요 ^^
좋은 말씀 감사드리구요 , 행복한 하루 되세요 ~ ^^
 
환상
나서영 지음 / 젊은작가들의모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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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화자는 주인수, 이아영, 김현숙, 나서영으로 이들의 복잡하게 얽혀있는 운명의 실타래는 햇빛 고아원에서 부터 시작된다. 햇볕 고아원에서 만난 이아영과 주인수는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도 친남매 이상의 끈으로 엮어 있다는 것을 운명처럼 느낀다. 그러나, 얄궂은 운명은 아영이가 입양이 되는 순간부터 꼬이기 시작하는데  다리를 절던 주인수가 정성으로 그린 아영의 그림을 아영은 인수앞에서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인수가 그려 놓은 아영의 그림은 어느 새 흉상으로 바꾸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아영의 마지막 모습은 인수의 가슴에 상처로 남았지만, 애증의 깊이 만큼이나 사랑 또한 깊었다는 것.  아영과 인수는 그렇게 서로 같은 하늘 아래 서로를  향한 끌림만으로 젊음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총망받던 인재 나서영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 J.로나의 제자이자, 브랑 뒤 폴그에서 가장 주목 받는 학생이었다영감이 곧 생명이었던 화가 나서영은 작품 하나를 완성한 뒤 창작의 고통 가운데 메말라가고 있던 중 결국 탈진에 이르게 된다그에게 더 이상 작품에 대한 열정과 영감의 뿌리가 남아있지 않게 되자, 악마에게라도 영혼을 팔고 싶다는 갈증에 사로잡힌 채 방황하게 된다.  귀국하여 한국의 산과 바다로 배회하던 그의 눈에 띈 그녀 이아영은 나서영은 첫눈에 반하게 되고 우연히 솔뫼공원에서 초라한 모습을 하고  아영의 그림만을 그리는 주인수를 만나게 된다. 

 

태양이 저무는 석양에 입혀지는 신의 영역인 빛의 축제가 나의 손끝에서 그녀에게 선사됐다. 색들은 서로를 받쳐주고 어울리며 더욱 아름다운 빛을 뿜어냈다. 그녀에게 바쳐진 수천만 가지의 색에 그녀가 삼켜질지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엄습할 정도였다. 환상이었다

 

솔뫼공원에서 주인수는 아영이를 그리며 아영이를 위한 그림을 그리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고,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그림을 그려주는 것으로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려 한다.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색과 빛으로 아영이를 그려주고 싶었던 주인수의 그림은 《환상》이란 이름으로 화가 나서영의 이름을 걸고 프랑스에 출품된다. 나서영이 주인수를 만난 시기, 아영은 오랜 우울증으로 의식불명이 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나서영은 자신이 주인수라며 아영의 남자행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의식불명인 아영이를 유린하며 주인수의 그림으로 명성을 얻게 된 나서영. 이들의 얽혀있는 운명의 실타래는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은 채, 비극의 종을 계속 울리고 있었다.

 

무척 충격적인 소설이었다. 삶의 가혹한 얼굴은 운명이라는 추의 관성으로 비극을 향해 질주하고 예술을 향한 집념이 어느 순간 악이 되는 찰나를 포착한다. 서영이의 소설 중 이렇게 비극적인 이야기는 처음 접하는 것 같다. 그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관록의 살이 붙었다는 뜻일까. 동화처럼 아름다운 이야기에 핏빛이 하나 스며들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악의 색을 입는다. 삶의 아주 조그마한 균열 사이로 비극이 스며들기 시작하는 것처럼, 운명이란 잔혹한 아름다움일지니......책과 함께 눈물이 방울져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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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너에게도 상처로 기억될 시간이 지나간다
나서영 지음 / 젊은작가들의모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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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일이란, 꽃씨는 심는 일이예요. 라고 다산 정약용 선생님처럼 이쁜 언어로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글을 쓴다는 일이 꽃씨를 심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인고의 시간들을 견뎌내야 하는가.  리뷰를 쓴다는 일도 그렇다. 누구에게는 하찮게 보이는 이 일조차도 누군가에게는 (주체)  최선의, 최고의 공을 들이는 시간이 된다.  밥 먹듯 책 읽고 리뷰 쓰는 나에게 밥 먹듯 소설을 쓰는 친구가 있다. 작년부터 귀찮을 정도로 메일을 보내며 소설을 읽어달라는 친구, 그랬다. 귀찮았다. 나는 그다지 쓴다는 것에 미련이 있거나, 집착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가끔은 귀차니즘으로 막 써내려간 리뷰를 블로그에 올려놓고 한다. 다음 날 수많은 오타와 비문을 발견할 때마다 어이없을지라도 고치면 그만이다는 가벼움을 지니고 있던 나에게 글쓰기는 그저 보통 그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책을 읽는 것이 내게는 더 중요한 일이었기에 ...  물론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도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은 있다.  그러나, 좋은 글을 알아볼 줄 아는 심미안은 애초부터 지니고 있지 않았기에 소설을 보내오는 친구에게 항상 답장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친구의 열정을 단순한 집착이라고만 여기고 있었더랬다. 내가 책에 집착하듯 말이다. 그러나서영이에게 소설의 의미는 책 이상의 의미였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이해하고는 글쓰기에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달고 살았던 나를 무진장 부끄럽게 하였다. 그리고 경이로웠다. 책이 누군가에는 생명의 의미가  될 수 있구나..

  

나에게도 너에게도 상처로 기억될 시간이 지나간다의 구성은 서영이의 자전적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네 번째 소설이후, 서영이는 나름 바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젊은 작가들의 대표로 대학에서 강연하는 일도 많았고, 소설을 판돈으로 아픈 아이들을 위해 늘 병원을 오갔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시간 가운데 써낸 소설이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서영이 스스로가 자신의 몸에 가시를 뽑아내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영이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아니 실로  서영이의 글에는 가시가 잔뜩 돋쳐 있었다. 다섯 살 서영이가, 일곱 살의 서영이가, 아홉 살의 서영이가, 열 두 살의 서영이가, 열 세 살의 서영이가, 스물 네 살에서 스물 다섯 살의 서영이가, 말을 한다. 자신을 버리고 떠나간 엄마를 , 자신을 구하려다가 꺾어진 꽃이 된  깐난이를, 짝사랑에 죽어가던 난쟁이의 불행한 죽음이 서영이를 향해 가시를 빳빳이 돋치우다가 이내 순하게 가라앉는다.   

 

글쓰기는 비겁한 도망이다. 문득 글을 쓰고 있던, 글을 쓰는 게 행복했던 나, 내가 썼던 글들이 가시를 뽀족하게 세운다. 그 가시에 찔릴까 두려워 도망을 치려 한다.

 

그의 길지 않은 생에 깊게 패인 상처들 사이로 비춰지는 삶의 진실들은 응고되지 않은 채 바람의 화살처럼 지나간다.  그렇게 서영이는 시간의 흐름 한 가운데에 서서 삶을 세고 있었다. 자신의 소설이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누군가를 찔렀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하며 글쓰기의 의미를 반추해 나가기도 한 기록이다. 글쓰기가 때로는 삶에서의 도망이 된다는 순간을 깨닫는 순간 두번 다시 글을 쓰지 않겠다고 했던 그는 또다시 글을 쓰고 있다. 글쓰기는 이미 서영이에게는 숙명이 되었기에..

 

나의 글쓰기는 무엇을 쓸 것인가를 고민하고 쓰면서 괴로운 그런 것이 아니다. 머리카락이 길고 손톱이 자라는 것처럼 가슴속에 글이 응어리진다. 그 응어리를 무시할 수 있지만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응어리를 토해내지 않으면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하다.

 

며칠 전 읽었던 주디스 버틀러의 <윤리적 폭력 비판>에서는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는 언어안에는 말하는 순간 나,너,우리의 의미가 함의되어 있음을 말한다. 말을 한다는 것과 글을 쓴다는 것, 이 모든 언어들 안에는 나,너 우리의 의미가 담겨 있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는 이미 타인을 향한 몸짓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서영이의 이야기는 곧 우리를 향한 이야기가 된다. 글쓰기가 때론  현실에서 비겁한 도망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의도하지 않게 누군가의 상처를 건드리는 아픔의 행위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우리는 투명하게 내 안의 '자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기에 글쓰기의 언어는 상처를 치유해가는 행위가 된다.  결정적으로 우리들에게 글쓰기(언어)는 인간이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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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5 10: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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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5 19: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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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5 18: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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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 2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4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4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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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꿈은, 별 탈 없이 일하면서 언제나 배불리 빵을 먹고,  지친 몸을 누일 깨끗한 방 한 칸을 갖는 게 전부랍니다.

 

 그랬다. 오직 침대에서 죽는 것만이 꿈이었던 제르베즈의 삶은 쿠포를 만나는 동시에 짧은 행복 긴 불행이라는 전철에 올라타게 되었다. 함석공 쿠포가 지붕위에서 추락하게 되면서 눈앞에 다가왔던 제르베즈의 세탁소 꿈은 사라져간 듯하였으나, 이웃의 구제 母子(모자)의 호의로 꿈은 이루어진다. 배불리 빵을 먹고, 봉쾨르 여관을 탈출하며 몸을 누일 깨끗한 방 한칸을 갖게 된 제르베즈는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는 행복에 도취되기 시작한다. 엄격하지만 올곧은 생활과 늘 상냥함을 지니고 있었던 대장장이 구제는 결혼지참금을 제르베즈에게 모두 털어주고 매달 조금씩 빚을 변제해 나갔다. 세탁소를 차리고 일꾼을 둘이나 두자, 제르베즈의 행복은 정점을 찍고 있는 가운데 불행은 이미 제르베즈를 향하여 한발 한발 다가오고 있었다. 도망 간 전남편 랑티에가 제르베즈의 행복을 갉아먹기 위해 다가 오는 중이었다. 배운 것 없고 순진한 노동자에 불과하였던 쿠포와 제르베즈는 랑티에의 감언이설에 속아, 조금씩 조금씩 가게를 털어 랑티에의 배를 불리우는 것으로 파멸을 자초한다.

 

불결함이 가득한 곳에서 입 한가득 주고받는 뜨거운 키스는 점차 쇠락으로 향하는 그들의 삶에 닥쳐온 첫 번째 추락의 순간과도 같았다.

 

랑티에가 주는 환락과 무절제한 욕망에 쿠포와 제르베즈가 잠식되어 가는 동안, 유일하게 순정과 순수를 지키며 제르베즈를 바라보고 있던 순정남 구제는 나락의 길로 들어선 제르베즈에게 여전히 돈을 빌려주고 있었고, 두 남편이 제르베즈의 등골을 빼먹는 것을  슬퍼하며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타락으로 물들어가면서도 순수한 영역에 늘 존재하던 구제와의 사랑은 제르베즈의 가슴 한켠에 고이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두려워했던 이웃들의 험담이 점점 두려워지지 않게 되고 이웃들에게 빌린 돈을 갚지 않아도 미안하지 않게 되자, 제르베즈의 삶에는 나태와 빈곤과 가난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이어 세탁소는 비르지니와 랑티에의 손에 떨어지고, 제르베즈는 가난한 이들이 거주하는 공동아파트로 이사 가게 된다. 몰락으로 내려가는 비탈길에 서서 가파르게 흔들리는 제르베즈를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쿠포의 엄마는 이미 죽었고, 제르베즈는 동네에서 신용을 잃은지 오래고 쿠포는 알코올에 서서히 잠겨 들어가고 있었고, 시누이 로리외의 비난과 경멸은 극에 달했고 구제 부인은 아들의 戀情(연정)에도 불구하고 타락해가는 제르베즈를 외면하게 된다. 아무도 제르베즈에게 일감을 주지 않았고, 제르베즈는 굶는 날들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제르베즈가 사는 공동아파트의 주민들은 그녀보다 불행하면 불행했지 더 행복하진 않았다. 여덟 살 밖에 되지 않는 랄리는 동생 둘을 지극정성으로 키우면서 술만 마시면 학대를 일삼는 아버지의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고, 이웃들이 아버지 욕을 할라치면 어른스런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편을 들었다. 쿠포는 알코올외에는 아무것도 소화시키지 못하였고 정신이 고장나 정신병원을 들락날락하고 있었고, 장의사 바주즈 영감은 늘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돌아다녔다. 하나 뿐인 딸 나나는 거리의 여자가 되었고 , 제르베즈는 자신보다 더 불행한 이들의 삶을 보면서 위안하는 것이 고작 삶의 일과였다. 굶주림에 지쳐 집을 나선 제르베즈는 거리의 여자들을 흉내 내며 남자를 찾아 나서는데, 그녀가 만난 첫 고객은 가슴 한켠에 잠들어 있는 순수의 결정체이자 경건한 사랑의 , 구제였다. 그녀는 얄궂은 자신의 운명을 탓하며 구제를 떠나간다.

제르베즈를 무엇보다 우울하게 만든 것은, 자신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바로 그 시각에 온 동네가 아름다워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진창 속에 빠져 있을 때는 머리 위를 환하게 비추는 햇살이 달갑지 않은 법이다.

《목로주점》은 세계를 감동의 도가니에 빠뜨렸던 <레미제라블>의 인기를 뛰어넘은 소설이다.  아픈 아이를 위해 거리의 여자가 되면서  불렀던  I Dreamed a Dream을 부르는 판틴의 모습과 제르베즈의 모습이 오버랩되곤 하였다.  빅토리 위고가 그리던 민중의 삶과 에밀 졸라가 그리는 민중의 삶이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을 보며  파리에서 살아가고 있는 민중들의 처참한 삶의 단면들에 한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니 여전히 도시의 노동자들은 이토록 처절한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에밀 졸라가 그리는 이들의 삶은 사차에도 불구하고 낯설게 느껴지지가 않다. 오히려 삶의 속성,  행복과 불행의 평행선을 달리다가 어느 한 순간 불어오는 삶의 바람에 비비꼬이게 되면서 불행으로 질주하게 되는 날 것의 모습에 두려움마저 든다. 자연주의 문학의 아버지인 에밀 졸라의 문학은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은 천연의 문학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비극적인 면들을 통해 삶의 속성을 이해하도록 하며 오히려 그 비극을 통해 삶의 동력을 깨닫게 해주는  에밀졸라의 문학은 그 자체로의 위대함을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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