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심보감 - 정본에 충실한 복원
범립본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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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힌 부분 펼치기 ▼ (명심보감 본문에서 발췌)
 

사람은 세상의 모든 맛을 다 보아야 한다. 그러면 담박함을 좋아하게 돼 굳이 부귀한 모습을 지니려 하지 않는다. [호안국]-p94

 

성실하면 후회가 없고, 용서하면 원망이 없고, 온화하면 척질 일이 없고, 참으면 욕될 일이 없다. 법을 두려워하면 아침마다 즐겁고, 천하공론을 속이면 날마다 근심한다. 소심은 천하를 버릴 수 있을 정도의 대담이 전제돼야 하고, 대담은 촌보의 이동도 어렵게 여기는 소심이 전제돼야 한다. [경행록]-p159

 

사람의 성품은 물과 같다. 물이 한 번 쏟아지면 다시 주어 담을 수 없듯이 성품도 한 번 놓아 버리면 되돌릴 수 없다. 물의 제어를 반드시 제방으로 하듯이 성품의 제어도 반드시 예법으로 해야 한다.

 

일체의 모든 번뇌는 모두 참지 못하는데서 생긴다. 때가 닥치거나 대상을 대할 때 그 표책은 미리 밝게 보는데 있다. 부처는 말다툼하지 말라고 했고, 유가경전은 다툼이 없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쾌활하게 사는 좋은 길이 있는데도 세상에는 그 길로 가는 사람이 드물다. -181p

 

널리 배우면 고루함에 빠지지 않고, 뜻을 돈독히 하면 세속으로 흐르지 않는다. 간절히 물으면 아는 것이 정밀해지고, 가까운 것으로 그 이치를 미뤄 짐작하면 깨닫는 것이 실질에 가까워진다. 인 仁이 바로 그 안에 있다. [자하]-p188

 

 

 

일이 비록 작을지라도 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순자 修身 p205-

 

무릇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간다. 노마 駑馬도 10배의 노력과 시간을 들이면 준마를 따라 잡을 수 있다. 학문을 '기다림'이라고 할 경우 다른 사람이 도중에 멈춰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그곳으로 나아가면 혹 지속遲速과 선후先後는 있을지언정 어찌 함께 그곳에 도달하지 못할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발걸음일지라도 쉬지 않으면 비록 절름발도 천리를 갈 수 있는 것이다. 흙을 쌓는 일도 중지하지 않으면 언덕과 산을 크게 만들 수 있다. 갈 길이 비록 가깝다 할지라도 가지 않으면 목적지에 다다르 수 없다. 일이 비록 작을지라도 이룰 수 없다.

 

일은 끝까지 다 할 수 없고, 세력은 끝가지 의지할 수 없고, 말은 끝까지 다 할 수 없고, 복은 끝까지 다 누릴 수 없다. 복이 있다고 끝까지 누리려 하지 말라! 복이 다하면 몸이 궁해지니라. 권세가 있다고 끝싸지 행사하려고 하지 말라! 세력이 다하면 원수를 만난다. 복은 늘 스스로 아껴야 하고, 권세는 늘 스스로 공손해야 한다. 사람이 살면서 교만하고 사치하면 시작만 있고 끝이 없는 경우가 많다. [장상영]-p244

 

일생의 계획은 근면히 공부하는데 있고, 일년의 계획은 봄에 있고,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있다. 어려서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아는 바가 없고, 봄에 밭을 갈지 않으면 가을에 바랄 것이 없고, 새벽에 일어나지 않으면 그날의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 [공자의 삼계도]-p317

 

 

 

펼친 부분 접기 ▲

『명심보감』은 유가사상을 토대로 수제치평修齊治平의 이치를 논한 게 특징이다. ‘수제’만 떼어 놓고 보면 『채근담』과 통하는 바가 있으나 입신양명을 적극 권한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명신보감』은 천하를 경영코자 하는 사대부들의 취향에 부합한다. 이와 달리 『채근담』은 입신양명을 멀리하는 까닭에 ‘일사’의 청아한 삶을 살고자 하는 선비들의 취향에 부합한다. 『명심보감』이 옛 성현의 말씀을 모아 놓은 ‘타인의 말’인데 반해 『채근담』은 저자인 홍자성洪自誠 자신이 터득한 처세의 이치를 종합해 수록한 ‘자신의 말’에 해당한다.

 

저자가 위에 밝힌 바대로 채근담은 홍자성이 스스로 익힌 처세이라 한다면  《명심보감》은  채근담과 대조하여 타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조선조 사대부들이 채근담보다는 명심보감을 더 즐겨 읽은 이유도 채근담이 수신修身하기 좋은 책이라 한다면 명심보감은  ‘개인의 수양은 물론 가정과 사회 및 국가를 원만하게 이끌어가기 위한 금언’들이다. 저명한 정의의 철학자(나의 애칭^^..), 마이클 샌델은 정의는 시대불변이며 시대가 바뀔 때마다 대두되는  (공리주의나 자유주의, 현재의 자본주의) 사상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 바로 정의라고 하였다. 명심보감은 ‘밝은 마음을 비추는 보배로운 거울’이라는 뜻이다. 시대가 변하여도 변하지 않는 진리, 이것이 바로 정의이며 그 안에는 항상 ‘선함(밝은 마음)’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 바로 명심보감이다. 이렇게 정의는 시대를 뛰어 넘는 보편적인 가치이며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물질 만능주의가 극에 달해 있고 개인이기주의가 팽배한 작금의 풍토 속에서 가치 지향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잘된 사람은 착한 말을 하고 착한 것을 보고 착한 일을 한다. 하루에 세 가지 착한 일을 하면서 3년을 보낸다면 하늘이 반드시 복을 내릴 것이다. 못된 사람은 나쁜 말을 하고 나쁜 것을 보고 나쁜 일을 한다. 하루에 이 세 가지 나쁜 일을 하면서 3년을 보낸다면 하늘이 반드시 재앙을 내릴 것이다. ‘ -[태상감응편]

상권
1편 선행을 이어라 계선繼善
2편 이치를 읽어라 천리天理
3편 천명을 따르라 순명順命
4편 효도를 다하라 효행孝行
5편 자신을 살펴라 정기正己
6편 분수를 즐겨라 안분安分 
 7편 마음을 지켜라 존심存心
8편 성정을 삼가라 계성戒性

9편 학문을 익혀라 권학勸學
10편 효자를 길러라 훈자訓子
 하권
11편 심신을 다져라 성심省心
12편 교육을 세워라 입교立敎
13편 정사를 펼쳐라 치정治政
14편 집안을 챙겨라 치가治家
15편 의리를 보여라 안의安義
16편 예의를 지켜라 준례遵禮
17편 믿음을 얻어라 존신存信
18편 언행을 삼가라 언어言語
19편 붕우를 만들라 교우交友
20편 부덕을 행하라 부행婦行

 

부록 1. 청주본의 『명심보감』 보유補遺

1. 증보增補
2. 팔반가八反歌
3. 속효행續孝行
4. 염의廉義
5. 속권학續勸學
부록 2. 유득화庾得和 발문跋文

신명神命은 하늘의 뜻으로 하늘의 밝음을 의미하는 내 몸의 신명神明과 같다. 내 몸의 신명을 끌어내려면 우선 내 몸부터 온전히 할 필요가 있다. 몸과 마음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심신心身을 함께 닦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p109

어제 읽은 이승욱의 [포기하는 용기]의 첫머리에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 경계에 서 있는 것 같다.'는 말이 명심보감을 읽으면서 머리 한켠에 자꾸 떠올랐다. 과거 수 백년전과의 가치와 전혀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는 우리의 삶이 그닥 행복하다거나 지혜롭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가 중심이 되어 돌아가는 가정이 잘 된다는 말도 아주 먼 옛말이 되었고 , 맹자가  후손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불효라고 하였지만, 육아가 두려움의 대상으로 기피되어 가고 있을 뿐 아니라,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미덕이라 하지만 폐륜 범죄가 판을 치는 사회는 그야말로 자본주의에 동화된 호리지성(好利之性)의 삶을 반추하고 있다. 이렇게 지나치게 물질에만 가치를 두다보니, 나이가 들어서도 가치관이 확립되어 있지 않아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유독 많은 듯하다.  가치관 확립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사회의 수많은 부침 속에 쉽게 좌절하거나 소심하게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가게 된다. 그렇기에 가치관의 확립과 스스로 가치 지향적인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명심보감》이나 《채근담》과 같은 고전으로 바른 가치관과 밝은 마음(정의)를 지니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수만 가지 법을 구할지라도 몸을 닦는 것만 못하고, 수천 가지 일을 할지라도 입을 다무는 것만 못하다.'(p107) 라고 하였듯이,  수신修身(몸을 닦는 것)은 인생이라는 비행기를 제대로 몰게 해주는 부조종사역할을 해준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생의 항로가 덜컹거릴지라도 , 쉽게 항로를 되찾아주는 나침반과도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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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는 용기 - 실존적 정신분석학자 이승욱의 ‘서툰 삶 직면하기’
이승욱 지음 / 쌤앤파커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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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나의 포기의 이야기다.

서울에서 한 회사만 십년을 다녔다. 이후,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고향으로 이사 온 지가 올해로 딱 십년이 되는 해이다. 경상도와 서울이라는 거리만큼이나, 인문환경의 변화는 지리적 거리보다 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우선 경상도 사람들의 직설적인 말투, 이것은 여전히 적응불가능하다. 서울 사람들의 나긋나긋하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듬뿍 담긴 대화에 익숙하다보니 무뚝뚝하고 화가 나 있는 느낌이 너무도 생경했다. 평상시에도 거칠고 지나치게 솔직하여 불편함이 느껴지곤 하였는데 흥분하거나 뭔가 불만스러운 부분을 접수 받을 때, 나는 단지 전화 받았다는 이유로 심하게 욕을 들어주어야 했다. (이런 날은 정말 심하게 우울해지곤 한다.)이런 환경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잊는 것,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내 욕망의 한 부분을 내려놓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불면 그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흐느적흐느적 거리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듯이 시골에 적응하려 했던 나의 삶도 그러하였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나를 내려놓고 포기하는 횟수가 잦아지자 의외로 이런 방법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배알이 없거나, 성격이 좋은 사람으로 비춰지곤 하여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나는 그렇게 배알이 없거나, 성격이 좋은 사람이 아닌데, 경상도에 적응하기 위한 나름의 포기가 나를 좋은 포장지로 싸주는 계기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지금도 매일을 하루같이 적응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그 노력안에서 나름의 포기의 노하우가 생겨서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요즈음이다. 그리고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나자, 내 삶은 전보다는 더  여유로워졌다.  (혹시 오해가 있을지 몰라서 첨하자면, 지금은 경상도를 무지 싸랑한다.)

 

 # 지금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이 욕망하는 것인가

심리학을 공공재로 사용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승욱의 공공상담소〉라는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저자의 《포기하는 용기》는 우리의 욕망이 타자에 맞추어있다는 것을 시작으로 첫 장을 열고 있다. 이는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질문인 “지금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이 욕망하는 것인가?” 의 질문을 떠올려보게 된다.

 

 

지금,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아낼 수 있습니다. 눈치 채셨나요? 우리가 최초로 ‘인식’하는 인간은 내가 아니라 (어머니이건 아버지이건 할머니이건 상관없이) ‘타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인간 최초의 비극이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먼저 인식된 개체가 자신이 아니라 타자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끝없는 욕망의 이면에는  ‘자아’의 욕망이 아닌 타인에게 길들여진 욕망이다. 이렇게 태어나자마자 씌어지는 욕망의 페르소나, 가족이라는 1차적 관계의 틀과 타자가 원하는 모습의 자아(나)를 형성하게 되면서 우리는 '자아'가 아닌 '타자'의 욕망에 저절로 맞추어져 살아가게 되는데 저자는 타인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겠다는 ‘타자의 욕망’을 버려야만 자신 내면안에 깃든 참된 진짜 욕망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참된 욕망,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면 분명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 자유로운 삶과 조우할 수 있게 된다. 니체가 모든 것을 부정한 뒤에 강한 삶의 긍정을 마주하게 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타자에게 맞추어진 모든 삶을 낯설게 바라보는 연습을 한 뒤의 세상은 분명 실존적이고도, (플라톤의) 실재계와 같은 세상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낯설게 바라보기를 통해  더 자유롭고 더 좋은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삶을 낯설게 바라보게 하는 과정은 총 4장( 1장 나는 괜찮은 사람인가? /2장 나는 누구로 사는가?3장 나는 왜 불안한가?4장 나는 타인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로 구성 되어 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저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사회의  복합적 매커니즘에 대한 이해와 현대인들이 호소하는 우울과 고통의  근원적인 존재불안에 대하여 인문학적인 치유와 방법을 모색해주고 있다.  

 

책임이란, 내가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항변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하지 않았던가에 대한 성찰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렇게 힘들게 열심히 살아왔는데 왜 이렇게 괴로울까요’ 라고 징징대지 마세요. 내 삶을 위해 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아침 뉴스에 최근들어 자살률과 우울증 환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는 통계를 보며 씁슬함과 안타까움이 밀려들었다. 저자는 고통의 원인은 삶의 균형이 깨어진데서 오는 것이며 우리는 욕망과 현실의 수평을 맞추어야 한다고 한다. 살면서 타자라는 부분을 의식하지 않고 살기란 매우 힘들지만, 저자의 말대로 타자에 맞춰 있는 욕망의 화살을 자신에게로 향해 삶을 재정비하는 과정은 꼭 필요한 과정이다. 우리의 삶 역시 흐르는 강물과도 같아 스스로 삶을 재정비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늘 폐쇄적인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다. 한번 쯤은 타인을 향한 모든 욕망의 근원적인 몸짓을 멈추고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삶에서 진짜 필요한 '용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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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2 13: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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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2 17: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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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레이철 조이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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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은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은 어쩌면 여행이라는 말보다 ‘순례’의 정의에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살면서 미처 깨닫지 못하였던 생의 간절함을 뒤늦게 발견하고 후회와 회한을 달고 사는 나이가 되면 생의 반짝이는 순간들이 더 그리워지는 법이다. 마치 바쁜 일상에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문득 마음의 허기를 발견하는 일과도 같이 순례란, 일상에서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친 또 하나의 세계를 만나는 마음의 여행인지도 모른다.

 

 

언뜻 보면 순탄한 인생을 살아온 것 같은 해럴드 프라이는  한 직장에서 오랫동안 성실하게 근무하였다. 은퇴한 뒤 집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해럴드에게 날아온 옛 동료 퀴니의 편지 한 통으로 홀린 듯 길을 나서게 된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시작된 그의 여행길.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실제로는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기도 한다. 주유소에서 일하는 소녀와 첫 만남을 시작으로 하여 해럴드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마주하게 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가져보게 된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해럴드는 살면서 포기해버린 모든 것을 생각했다. 작은 미소, 맥주 한잔하자는 권유, 양조 회사 주차장에서, 또는 거리에서, 그가 고개 한번 들어 바라보지도 않고 계속 지나쳐 버린 사람들. 이사 간 곳의 주소를 챙겨 둔 적이 없는 이웃들. (중략)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그가 뭔가 하려는 순간에는 이미 너무 늦어 버린 것인가? 삶의 모든 조각들을 결국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사실은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자신이 무력하다는 깨달음에 짓눌리는 바람에 그는 기운이 다 빠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으로 집을 나섰다. 단순히 옛 직장 동료 퀴니를 만나기 위한 길이기도 하지만, 자신 내면으로의 진정한 여행길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삶에 용기를 낸 해럴드가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걸어야 하는 길은 영국 남부 킹스브리지에서 북부 버윅어폰트위드까지, 1000킬로미터나 되는 대장정의 길이었다. 그리고 그가 가는 길 위에는 그동안 잊고 지나쳤던 해럴드의 아픈 기억과 상처들이 곳곳에 뿌려져 있었다. 자신을 외면한 아버지, 사랑해주지 못했던 아들과 어긋나기만 하였던 모린과의 일상들이 때로는  해럴드의 발목을 잡기도 하고 아프게도 하며 자신의 상처를 짐짝처럼 등에 둘처매고 걸어야 했다. 걷는다는 것은 고통을 수반한 고독과도 같다. 그의 여정에는 온갖 슬픔과 고통이 들러붙어 해럴드를 울게 하였다. 그렇게 괴로운 순례길에서 만난 이웃들은 해럴드의 짓무른 발을 치료해주고 깨끗한 침대에 재워주기도 하며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하고, 우연히 사진에 찍혀 유명인사가 되면서 순례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하지만,  해럴드는 퀴니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소중한 것들을 되새기며 포기하지 않는다. 해럴드의 첫 시작은 엉성한 노숙자의 모습이었으나, 걸으면 걸을수록 해럴드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의미를 찾아 가는 순례자의 모습으로 변모해 가게 된다.

 

그의 발바닥은 땅을 딛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상처를 딛는다. 때로는 상처의 기억 속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찾지 못해 방향을 잃고 헤매기도 한다. 그렇게 움직이는 마음의 역정이 실제로 땅을 걷는 길고 힘든 역정에 조응한다.

 

삶의 다채로운 모습이 해럴드의 순례길에 아롱진다. 삶은 희로애락의 무늬가 씨실과 날실로 촘촘히 짜여져 가며 하나의 무늬를 완성해간다.  해럴드의 순례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이 저마다의 삶의 조각을 가지고 해럴드의 삶의 무늬를 짜주고 있음을 볼 때 , 그리고  해럴드가 마주한 진실의 한 조각 앞에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하였다. 게다가 아들의 죽음과 함께 남겨진 삶의 틈새를 메꾸어준 유일한 동료 퀴니의 마지막을 지켜주기 위한 해럴드의 순례길은 어쩌면  성지 이상의 의미를 가진 숭고함이 배여 있는 듯 했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다른 눈을 갖는 것이라고 하였다. 해럴드의 순례길은 자신의 마음을 떠난 여정이기도 하지만, 삶에서 다른 눈을 발견하는 진정한 여행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순례의 여정에 동참하고 싶어지는 아름다운 발자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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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1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11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엄마가 읽는 동의보감 - 한의사 엄마가 깐깐하게 고른 최고의 양육처방 : 태어나서 열 살까지
방성혜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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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산청의 전통의학 엑스포에서 만난 동의보감은 기존에 알고만 있었던 동의보감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선사해 주었다.  우리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고,  아이를 키우면서 병에 대한 부모의 상식이 항상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의 기로에 서서 고민케 하는 부분이었기에 동의보감으로 인해 마음가짐을 새롭게 정비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항생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우는 아이 앞에서 항생제를 거부할 수 있는 부모는 결코 많지 않다는 것을, 내 경험상으로도 알고 있다. 큰 아이를 너무 어렵게 얻어서 인지, 정말 금지옥엽으로 키웠다. 게다가 아이는 병약했다. 귀하게 얻었지만, 병약하여 먹는 음식도 유기농 제품외에는 먹이지 않았고 기침이라도 하면 설레발치며 병원에 입원시켜 완치 될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유리아이처럼, 깨질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키웠던 것 같다. 하지만, 이상하게 병원을 전전하고 다니면 다닐수록 아이의 병은 더욱 심화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병치레가 잦은 아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까지 자잘한  병을 달고 지냈는데 반대로 둘째 아이는 지금까지 감기 한 번 크게 앓은 적이 없다. 큰 아이와 둘째 아이는 성향도 매우 다르지만, 큰 아이에 비해 작은 아이는 이제까지 항생제 치료 한 번 받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하다.  지금은 큰 아이도 어렸을 적보다 많이 건강해졌지만, 아이의 병력을 떠올릴 때마다 그게 다 내 잘못된 양육방식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후회하곤 한다. 

 

엄마가 아이를 키우는 것은 마치 농부가 씨앗 한 톨을 땅에 심고 키우는 것과 같다. 씨앗을 어떤 땅에 심어 어떻게 거름을 주느냐에 따라 다 자란 나무의 모양새가 달라진다. 바꿔 말하면 돌보는 이의 손길에 따라 미래의 모습이 판가름 나는 어린 묘목인 시기가 있는 것이다.

 

 

 

《엄마가 읽는 동의보감》의 저자도 나처럼 두 아이의 엄마이다.  그래서인지 자녀를 키우면서 매우 공감되는 부분들이 많았다.  0세에서 ~10세 자녀를 둔 부모에게는 필독서로 읽어보기에 좋은 책이다.  아니 좋다기보다는 최고인 책이다.

가장 좋은 엄마는 '건강한 엄마'이다. 건강한 엄마가 성품도 건강하고 인생도 바르게 살아간다.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최고의 처방전은 하늘에서 내린 그대로가 가장 좋은 약이라는 것이다.  기다릴 줄 아는 부모가 좋은 부모이듯이 , '열'이라는 것도 아이가 스스로 몸의 면역력을 높이기 위한 하나의 과정인데 대부분의 부모들이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를 병약하게 키운다는 것이다. 스스로 병을 이겨내려 하는 면역 아이템이 생성되기도 전에 억지로 약을 사용하게 되면 아이의 몸안에서는 자생력이 생기지 못한다. 동의보감은 아이가 스스로 병의 면역력을 키울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미학과 자녀를 건강하고도 지혜로운 아이로 키우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책은 네가지 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각 장마다 동의보감에서 발췌한 본문이 실려 있다.

 

 

1장 동의보감에서 배우는 양육의 지혜

2장 느리게 자라는 아이가 건강하다

3장 늘 웃는 아이로 키우려면

4장 엄마가 곧 식의(食醫)

별책 부록 ≪엄마가 알아야 할 음식 처방≫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큰 아이의 비염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아이가 어렸을 때, 기다려주지 못한 댓가인 것만 같아 나는 자주 마음이 불편해진다. 책의 뒷면에 아이가 비염기가 있거나 기침 감기에 걸렸을 때 생강과 도라지를 넣은 차를 자주 마시면 좋다하여 며칠 전부터 끓여주고 있다. 큰 아이는 역시나 생강의 매운 맛이 싫다고 안먹지만, 작은 아이는 약이라 하면 신나서 먹는다. 둘이 정말 내 뱃속으로 낳았지만, 너무도 다르다. 아침 기온도 쌀쌀한데 환절기에 아이가 또 아플까봐 걱정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천천히,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보기로 하였다. 동의보감에 ‘10세에는 달리기를 좋아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나는 각 나이마다 적정한 생활의 범주가 있다고 믿는데 위의 말은 10세에는 마음 껏 뛰어노는 것이 만병통치약이라는 말과 진배없다. 아이가 원없이 10세를 즐기고, 밝고 건강한 아이로 자라주기를 바란다면,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엄마와 아이 모두에게 필요한 동의보감을 이렇게 쉽고 재미있게 '엄마'의 이야기로 들을 수 있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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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0 10: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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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0 16: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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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봤어 - 김려령 장편소설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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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갓 잡은 활어처럼 팔딱팔딱 거린다. 날 것 그대로의 삶과 조우하는 기분처럼 , 팔딱거리는 생의 활어는 언젠가는 또는 어디선가 보았던 누군가와 오버랩 된다. 생은 묘하게도 스쳐가며 보았을 때나 멀리서 바라볼 때는 아름다워 눈물이 나다가도 현미경을 통해 보는 형체에는 언제나 비극을 품고 있다. 마치 산에서 굴러내려온 바윗돌을 죽을 힘을 써서 올려놓으면 다시 떨어지는 시지프스마냥 저마다 타고나는 생의 무게는 시지프스의 바위만큼이나 힘겹고 무거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삶의 무게가 실질적인 형체로 다가오게 하는 소설을 만났다. 전작 《완득이》와 전혀 다른 느낌의 《너를 봤어》는 폭력이라는 비극의 옷을 입었지만,  연인들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戀歌연가를 담은 이야기이다.

 

#마흔 여섯에 첫사랑이 찾아왔다.

 

한 출판사의 편집자이면서 소설가로서도 명성을 얻은 꽃중년이라는 애칭이 붙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남자  ‘정수현’의 아내는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피상적으로, 이 두 사람의 결합은 완벽해 보이지만, 남자와 여자의 거리는 타인보다 더 먼 거리였다. 아내는 너무도 차가웠고 살뜰한 정이라고는 없는, 돈으로 남편을 샀을 뿐이었고 불우한 가정사를 가진 정수현은 그저 여자가 내민 손을  구원처럼 잡았을 뿐이다. 폭력으로 점철 된 가정사를 가진 정수현.  이후 아버지의 죽음과 형의 죽음은 ‘정수현’과 무관하지 않게 일어났고,  유일하게 남겨진 어머니는 수현에게  거머리처럼 들러 붙어 수현의 돈을 피처럼 흡혈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형은 죽고나서도 수현의 등에 달라붙어 수현을 숙주 삼아 기생하는 괴물로 자라나 수현의 삶을 갉아먹고 있었고  어울리지 않게 사랑을 갈구하던 아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 타살인지는 모르지만......)그런, 그의 앞에 사랑이 찾아왔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사랑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이 남자에게 찾아 온 사랑은  그의 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는다. 마흔 여섯에 찾아온 첫 사랑은 어두운 수현의 생을 환하게 비추게 하고, 수현은 자신의 삶에 드리워진 폭력의 가정사라는 고리를 끊고 싶어하지만, 이미 늦었다는 것.  

 

나는 아직도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것이 그것이라면, 내 삶으로 기꺼이 맞이할 생각이다.  

폭력과 사랑과 삶,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던 이 세가지의 꼭지점

 

이상하게도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영화 《화차》의 한 장면이 오버랩 되어 떠올랐다. 동물병원 앞에서 강아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여자, 그녀는 가녀리며 어딘가 삶의 끈을 놓아버린 듯 멍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사랑에 빠진 한 남자. 남자는 여자의 말이 없고 순수한 모습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의 이면에는 거대한 살인마가 자리잡고 있었듯이 정수현도 그의 아내 유지연도, 삶의 이면에는  화차의 여주인공처럼 비극을 품고 있었다. 상처를 가슴에 담고 심연의 외줄 위에서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들의  몸짓은 바윗돌이 떨어지면 어김없이 다시 원위치에 돌려놓아야 하는 시지프스의 숙명과도 같아 보였다. 거대한 삶의 수레바퀴아래 깔려 버린 사람들,  그것은 소설의 주인공인 정수현만이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삶의 이면의 모습들이 아닐까.  그래서 소설을 읽으면서도 마음에 자꾸만 동요가 일렁였다. 폭력으로 점철 된 가족들의 이야기에  마치 엑스레이선을 찍은 듯 그려져 있는 삶의 무늬가 마치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처럼 느껴져 자꾸만 울먹였다. 거대한 수레바퀴에 깔린 정수현이나 , 화차의 그 가련했던 여주인공의 삶이 이제는 소설속의 이야기가 아닌, 이미 현실에서 재현된지 오래이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삶을 너덜너덜 조각내어 마침내는 비극의 장막을 내린다. 이들의 사랑 역시도 끝을 알고 시작한 듯 슬프지만, 그래서 더 치열한 아름다움이 있다.  폭력과 사랑과 삶,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던 이 세가지의 꼭지점이 서로 긴요하게  연결되어져 우리의 생을 더욱 투명하게 비추고 있다.  이들의 가여운 사랑은 소설의 끝과 동시에 끝이 나지만, 폭력에 멍들어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숙명처럼 남겨진다. 우리들의 이야기 , 어떻게  쓸 것인가. 그것은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의 몫인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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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07 14: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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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09 13: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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