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미루지 마라 - 하버드대 긍정심리학 보고서
탈 벤 샤하르 지음, 권오열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한사람의 철학은 말이 아니라, 그가 내리는 선택을 통해 가장 잘 표현된다.

길게 보면 내가 내 삶을 형성하고

내가 나 자신을 형성한다.

이 과정은 내가 숨이 멎는 그날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내리는 선택은

궁극적으로 나 자신의 책임이다.

-엘리너 루스벨트-

 

 

행복을 미루지 마라 ! 누군가가 던진 이 한마디는 어떤 누군가에게는 행복은 미루어서는 안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주기도 하지만 너무 식상해 ! 그런 건 개나 줘버려 ~ ! 라고 외칠수도 있다. 그렇다고, 후자인 사람의 생각이 부정적이라고 우리는 매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에게는 ‘선택’ 이라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선택을 하든 긍정적인 선택을 하든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에 달려있으며 그것은 고스란히 ‘나’의 책임으로 남겨진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삶이 선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길은 언제나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다. 예스나 노우로 ..  

 

사실 행복의 약 40퍼센트는 우리가 내리는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심리학의 결론이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기로 선택하느냐가 감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든 , 당신이 옳다.” 

 

책의 구성은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미소를 짓느냐 심호흡을 하느냐와 같은, 우리가 거의 매 순간 내리는 선택의 기로에서 가장 기본적인 선택들로 이루어져 있다.  세상이 주는 기쁨에 감사하는 마음,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때, 부정적인 감정을 곱씹지 말며 용서도 미련도 가볍게 내려놓기와 같이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 첫 발을 떼고 있다.  둘째는 특별한 사건을 겪은 뒤 내리는 선택들, 가령 시련 속에 인생의 의미를 찾아간다나 현실의 고통을 직시하고 분투하는 것, 고난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  삶에서 참된 의미를 찾아내기와 같은 선택을 다양하고 많은 사례들을 통해 행복복을 선택하게 한다. 셋째, 인생의 큰 결정과 관계된 선택들이다. 삶에서 굵직굵직한 선택들을 하게 되는  직업 선택과 혹은 남을 돕고 그들에게 기여하는 삶을 사는 문제등 인생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들의 선택등이다. 

 

행복심리학을 오랫동안 연구하며 강의해온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행복에 대한 두 가지 목표를 제시한다.  첫째, 매일 매 순간 우리의 삶 속에서 존재하는 실제 선택지들을 의식하게 하는 것이며 둘째가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들을 저울질 한 뒤 가능한 최상의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고무하는 것이다. 즉, 무엇이 선인지를 알아냈으면, 그것을 행하라는 것이다.

 

가끔씩 나도 모르게 부정적인 사고가 찾아오기도 한다. 부정적인 사고는 경험에 의해서든 학습에 의해서든 어떠한 방법으로든 내면에 잠식되어 있다. 그러나, 부정적인 사고는 잘못된 선택을 이끌고 잘못된 선택은 두려움을 동반하게 된다. 생각의 악순환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메시지들은 대체적으로 근거 없고 비합리적이며 비현실적이다.  책에는 이런 부정적인 사고에 관하여 세라라는 한 여성을 예로 들고 있는데 세라라는 이 여성은 항상 ‘ 타인에게 사랑받고 인정받으려 하며 타인에게 완벽한 관계를 요구한다. 세라는 항상 '자신의 욕구보다 타인의 욕구를 우선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타인을 기준으로 하여 모든 사고를 타인에게 맞춘 이 여성은 결국 우울증에 시달리며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 결국  타인의 시선에 맞추기 위해서 파생되는 ‘기만적인 뇌의 메시지’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야 비로소 세라는 자아에 충실한 삶을 선택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무엇이 가장 옳은 선택을 하게 하는가? 그것은 삶의 자양분들이 하나하나 축적되어 한 층위를 이루게 되고 쌓여가면서 결정적으로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이끄는 동력이 된다. 선택이란 삶에서나 현실에서도 늘 해야 하는 당면한 과제이다. 또한 좋은 선택과 옳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매 삶에서 뚫을 수 없다고 여겼던, 부정적인 사고들로 고착 되어버린 그 '벽돌 장벽'을 넘어서야 한다. 과학적으로나 생리적으로나 불가능했던 1마일을 4분 안에 달리는 ‘벽돌 장벽’의 기록이  ‘마음’ 이라는 산물에 의해서 깨짐을 볼 때 긍정적인 사고가 왜 중요한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책에는 이러한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예들을 심리학과 잘 버무려 책을 읽는 동안 행복의 층위가 또 한층 쌓이는 즐거움이 들었다. 탈 벤-샤하르의 〈행복 Happiness〉는 하버드대학교 마이클 샌델의 〈정의 Justice〉와 예일대학교 셸리 케이건의 〈죽음 Death〉과 함께 아이비리그 3대 명강의로 불린다고 하는데 명불허전임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저자의 강의 중에서 행복에 대한 가장 좋았던 글귀를 적어 놓는다. 저자가 전해주는 행복의 팁은 항상 스스로에게 내면의 질문과 함께 삶을 단순하고 비어있는 곳을 행복과 긍정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그것은 바로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

 

 

무엇이 내게 힘을 주는가?

무엇이 내 기운을 북돋우는가?

나의 열정은 무엇인가?

내면의 목소리는 내게 뭐라고 말하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검은 피부, 하얀 가면 - 전면개정판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세계 부자 503위, 전세계 영향력 있는 여성 13위에 해당하는 한 여성이 4천만원짜리 스위스 명품백을 사기 위해 샾에 갔다. 그러나, 그녀는 매장 직원으로부터 ‘ 당신이 사기에는 너무 비싼 가방이예요.’라며 거절당했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당한 그녀는 전세계 언론에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오프라 윈프리. 흑인 대통령시대에도 흑인에 대한 차별은 여전함을 보여주는 뉴스였다. 흑인에 대한 차별, 우리나라도 식민지 시대를 겪으면서 여전히 잔재하고 있는 식민 국가의 의존 콤플렉스로 인하여 주체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포스트 식민시대를 살아내고 있다.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포스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기보다는 ‘흑인’ 으로서, 흑인의, 흑인을 위한 아프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고전중의 고전이며 <식민주의 심리학>이라 불리기도 한다.

 

인간은 무엇을 원할까?

흑인은 무엇을 원할까?

나는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차별, 차별을 받아보았는가? 세상은 불평등한 곳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을 수 있고, 장애인이라 차별을 받을 수 있고, 식민지 국가에서는 지배하는 자에게 차별을 받을 수 있다. 만약,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인간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노예라는 운명이 주어졌다면, 이것은 차별일까?

 

 

 

 

 

프란츠 파농은 유태인과 흑인의 다른 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기차여행을 하던 중 파농을 가르켜 한 아이가 ‘저 검둥이 좀 봐!’ 라는 손가락질을 했다.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 말은 파농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후벼파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파농이 살던 마을의 이웃들은 모두 백인들이었는데 처음으로 자신이 검둥이라는 자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파농은 사회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타인들이 말하였던, 검둥이는 짐승이고, 검둥이는 사악하고, 추하고, 무서운 존재였을 때, 자신을 가르키며 누군가가 외친 ‘검동이!’ 가 바로 자신이었다는 충격으로 프란츠 파농이 쌓아올린 자신의 세계가 깨지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파농은 여기서 유태인과 검둥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깨닫게 된다.  유태인들 역시 흑인처럼 가슴아픈, 존재를 박탈당하는 역사를 가졌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타인에게 부여된 이름이란 사실이다. 유태인을 창조한 사람은 , 명백히 인종차별주의자인 반유대주의자이지만, 흑인은 다른 이들에게 부여되는 이름이 존재할 기회조차 없는 가치없는 존재인 흑인이란 사실을 말이다.

 

 

너무 늦고 말았다. 유태인과 나 사이엔 하나의 세계가 가로막고 있었다.

백인의 세계가 ....

 

 흑인이 자신의 세계 속에만 갇히게 되면, 몇 가지 예외적인 사소한 내적 갈등을 제외하고 타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없다.

 

 

 

세기의 천재, 팝의 황제이지만 흑인이었던  마이클 잭슨은 백인이 되고자 천문학적인 성형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프란츠 파농 역시도 같은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흑인에게는 단 하나의 운명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백인이다. 이 결론을 받아들이기 고통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그것을 인정한다.‘ 라고...

 

 

언어는 하나의 세계와 문화를 반영한다. 백인이 되고자 하는 첫 번째 노력은 언어이다. 앤틸리스 흑인들이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으로 백인들에게  문화적이나 백인성에 더욱 가깝게 되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흑인들에게 백인들의 언어는 필수적이었다. 언어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유색인종과 백인의 사랑이다.  [나는 마르티니크 여자] 에는  ‘ 나는 오로지 백인하고만 결혼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라고 쓰여있다. 이 글을 쓴 마요트라는 흑인 여자의 체험적 자서전을 통해 파농은 정신적인 분석을 하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흑인들이 겪는 갈등과 비교 설명 되어진다.   파농은 마요트의 세계를  흑과 백이 영원한 갈등의 두 축을 이루는 양극화된 세계‘라고 하는데 이는 흑인이 ’나는 백인이다.‘ 라고 하는 말은 흑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미와 덕을 가졌음을 의미하고, 반대로 ’나는 흑인이다‘ 라는 말은 이 세계와 완전한 혼연일체와 자아를 폐기해버린 화신임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흑인들이 가지고 있는 백인을 향한 열망, 집착, 백인에 대한 동경등은 흑인의 자아 존재와 소유를 결정하는 성분이자 내적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방증하는 것이다.

 

 

책의 맨 앞부분 들어가는 길에서부터 흑인으로서 살아간다는 절망이 느껴지고 있었다. 흑인이라는 것,  수많은 영화나 소설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을 볼 때마다 피부로 와닿지 않았기에 그다지 느껴보지 못했던 차별을 이 책을 통해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논리적이면서도 시처럼 유려한 프란츠 파농의 글은 아름답기도 하면서 비애감이 넘치고 거기에 장렬함이 서려있다. 세상의 차별은 흑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을 필두로 하여 흑인의 정체성과 흑인이 백인에 다다르려 하는 희망들이 처절하다면 처절하게 쓰여있다.파농이 흑인으로서 느끼는 정체성의 뿌리를 포스트식민주의의 정체성을 되찾는 것으로 보고 있는 책이기도 하지만 , 내가 느끼기에 이 책은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타인에 대한 사랑과 이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책이었다.

 

"문제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

"인간을 가두려는 시도는 반드시 중단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가 인간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직 독서뿐 - 허균에서 홍길주까지 옛사람 9인의 핵심 독서 전략
정민 지음 / 김영사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익을 향해 질주하는 호리지성(好利之性), 명예로운 삶을 추구하는 호명지심(好名之心). 옛 선인의 삶은 호명지심에 가깝지만, 현대인의 삶은 호리지성에 가깝다는 것은, 굳이 따지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 시대의 최고 지성이라 할 수 있는 마이클 샌델이 정의는 경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여러 개의 가치 중 하나가 아니다. 정의는 모든 사회 덕목 가운데 최상의 것, 다른 것보다 앞서고, 반드시 부딪쳐야 할 가치다.라고 하였듯이 우리의 삶에서 추구해야 하는 정의는  절대, 시대가 변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며 시대를 불문하고 추구해야 할 진리이다. 여기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전혀 다르면서도 같은 진리가 있다. 철학의 본질인 진리에 이르는 길은 같다는 점이다. 서양의 철학이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존재하였다고 한다면 동양의 철학은 정의를 추구하는 그 길목, 자신을 다스리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 수단은 오로지 책이었다. 마이클 샌델이 정의는 철학에 답이 있다고 우회적으로 말하였지만 현대에  왜 책을 읽는가? 하는 끊임없는 물음 속에서 나는 항상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책이 영혼의 밥이라든지, 책을 읽으면 마음이 풍요로워진다더지 그런 상투적인 대답말고 그 이면에 숨겨진 , 책의 의미에 더 갈증을 느끼곤 하였다. 나는 몇 년을 책에 빠져 지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잠들기 전까지 책을 읽었다. 책이 시간처럼 파도처럼 내 삶을 채워가는 과정속에서도 책은 나에게 항상 물음표로 남아있었다. 나는 왜 책을 읽을까,라는 물음은 좀처럼 떠나지 않고 내 주위를 맴돌았다. 

 

허균은[한정록]에서 책은 한때라도 놓아 버리면 그만큼 덕성이 풀어진다, 책을 읽으면 이 마음이 늘 있게 되고, 책을 읽지 않으면 마침내 의리를 보더라도 보이지 않게 된다.’ 라고 말한다. 책은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 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 는 말도 있지 않은가? 독서를 통해서 삶의 이치를 깨닫고 실제의 삶에서 이를 체득하는 것도 마음에 있음이다. 이 '마음'의 중요성은 책에 실려있는 허균, 안정복, 이익, 양응수,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홍석주, 홍길주등 과거 문인이자 천재였던 이들에게서 공통분모가 된다. 

 

 [황덕일 형제에게] 안정복이 보낸 편지에서도  ' 괴롭게 공부하고 미친 듯이 몰두해서숨 쉬고 밥 먹듯이 해서 공부가 일상이 되어야 하네. 그렇게 쌓아 가다 보면 어느 순간 가슴속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나올 걸세. 그때까지 가야 하네. 중단 없이 해야 하네. 옛 선인들도 다 이렇게 공부해서 기쁜 소식을 얻은 분들일세. 라는 말에서도 

 

홍대용의 독서법 '이의역지 (以意逆志) ‘내 뜻으로 지은이의 뜻을 거슬러 구한다.’ .

 자신의 뜻으로 옛 성인들의 뜻을 거슬러 가다보면 너와 내가 만나고 지금과 옛날이 하나가 되어야 독서의 위력은 막강해진다.’ -[여매헌서]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독서는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변화시키는 마술이 곧 공부요 독서다.’

 

연암 박지원이 말하는 독서도 그와 다르지 않다.  독서는 그 자체로 함목적적이다. 읽어서 마음이 기쁘고, 생각이 변하며, 삶이 바뀐다. 이보다 더한 보람이 어디 있는가? .

  

세상 모든 사물이 다 책이라네. 손짓 발짓 하나하나가 다 공부요 독서인 셈이지. 헛된 지식 몇 조각 들고 나부대고 으스대면 못쓰네.’

 

9人의 독서에 방점은 홍석주가 [학강산필]에 쓴  ‘덮어놓고 책만 읽으라기보다는 바른 마음자리를 심어주는 것이 먼저다.책은 지금 안 읽어도 다음에 읽으면 된다. 마음은 한 번 흐트러지면 추스르기가 어렵다. 마음 밭을 황폐하게 하는 원인은 소인을 가까이 하는 데 원인이 있다.’ 이다.

 

책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또 마땅히 마음자리를 살피는 것이 먼저이다.’

 

독서는 중요하다. 사회에는 인문학 전도사도 있고 독서 지도사, 독서 전문가등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독서가들이 정말 많다. 시중에도 그 독서의 중요성은 차고도 넘친다. 그러나, 정작 독서인구는 점점 줄어가고 있다. 호리지성에 반하기 때문이다. 당장에 눈에 보이는 이익이 없으면 가치가 떨어지고 있는 시대이지만 여전히 독서는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존재한다.  <책은 도끼다>의 저자 박웅현은 삶을 풍요로워지는 훈련을 하기 위해서 책을 읽으라 하였고 이는  홍대용이 독서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부분과 닮아 있다. 인문학 전도사 <리딩으로 리드하라> 의 저자 이지성은 책을 미친 듯이 읽다보면 언젠가는 책에서 빛이 나는 순간이 있을 거라고 하였다. 이는  연암 박지원이 책에서 본 그 빛나는 순간, 독서의 즐거움과 닮아 있다. 정의가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이듯 책이 전해주는 울림은 옛 선인들과 현대인들이 공통으로 느낄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이다. 그 사유의 공간에서 우리는 함께 할 수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다. 마치 옛 선인들과 한 자리에서 ‘너와 내가 만나고 지금과 옛날이 하나가 될 수 있는 ' 공간으로서의 초대처럼 과거와 현재를 연결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을 통해서이다. 나는 우습게도 일본의 비평가이기도 한 사사키 아타루가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에서  책이 있는 한 인류는 멸망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을 때 , 지나치게 자의적이며 비약적이라며 썩소를 날렸던 그 말을 《오직 독서뿐》의 옛 성인들에게서 느끼고 있다. 과거에서 날라 온  한 줄기 희망의 빛줄기로 인해 나는 앞으로도 쭈욱,  책을 읽을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ppletreeje 2013-08-12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는 왜 책을 읽을까, 생각해보니 살기 위해 읽는 것 같아요. 그저 글을 깨치고 나서부터 줄곧 책 보는 즐거움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읽어서 마음이 기쁘며, 생각이 변하며 삶이 바뀐다.-
'세상 모든 사물이 다 책이라네. 손짓 발짓 하나하나가 다 공부요 독서인 셈이지. 헛된 지식 몇 조각 들고 나부대고 으스대면 못쓰네.'-

<오직 독서>, 가지고만 있지 아직 못 읽었는데 오늘도 또 좋은 드림님의 리뷰,로 예습 했습니다~^^
드림님! 오늘도 감사드리며 시원하고 좋은 날 되세요~*^^*

드림모노로그 2013-08-13 17:11   좋아요 0 | URL
ㅎㅎ 좋은 습관이죠 ㅎㅎ
읽어서 마음이 기쁜 경지, 괴로움이 즐거움이 되는 경지에 오르면 정말 행복하겠지요 ㅎㅎㅎ
연암 박지원의 경지까지는 아니지만,
언젠가 제게도 그런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독서를 하고 싶습니다 ㅋㅋㅋ
저도 오랫동안 한 꼭지씩만 읽어왔어요 ㅎㅎ
사실 리뷰는 안쓰려고 했는데 ㅋㅋ 어찌 보니 쓰게 되네요 ㅎㅎ
습관이 무섭습니다 ㅋㅋ

정말 더워도 너무 덥죠 ^^ 나무늘보님 더위에 탈나지 마시고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
 
모든 것은 빛난다 -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
휴버트 드레이퍼스 외 지음, 김동규 옮김 / 사월의책 / 201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어두운 시대에서 좋은 예술에 대한 정의는, 시대의 어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 있고 빛을 내는 인간적이고 마법적인 요소들에 대해 심폐소생술을 가해주는 그런 예술일 겁니다. 어떤 소설이든 하고 싶은 대로 어두운 세계관을 가질 수 있지만, 정말로 좋은 소설이란 이런 세계를 묘사하면서도 그 속에 살아있는 인간 존재를 위한 가능성에 빛을 비춰주는 소설일 겁니다.

                                                                                                                      -p62

 

그랬다. 정의는 시대의 어둠속에도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고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매일 차로 출퇴근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게 되었다. 대중교통이라 해봤자 여기는 버스 밖에 없지만, 운전만하다가 버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한가로움에 이상한 정겨움이 있다. 그 느낌 ‘이상한 정겨움’은 고등학교 콩나물시루처럼 꽉꽉 차있던 만원버스가 연상되면서 오래 된 것에 대한 추억과 향수가 묘하게 섞여 전해지는 복합적인 느낌들이다. 마치 세상이 온통 칼라로 빛나고 있을 때 버스 안에서 오로지 나 혼자 색을 입지 않은 채 존재하는 그런 ‘이상한 정겨움’이 나이 탓인지, 요즘 점점 좋아져 하루 종일 버스 타는 시간을 고대하고는 한다.

 

제목도 이쁜 이 책 《모든 것은 빛난다》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공통으로 느끼고 있는 문화적 쇼크에서 오는 혼돈속에서 '실존'을 찾는 여정이다. 모든 것이 빛나는 데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빛나는 것들, 실존의 세계를 마주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일반인을 동굴에 갇힌 포로로 비유하고 있는데  동굴에 갇힌 상태에서 일반인들은 벽에 드리운 그림자나 흐릿한 사물만이 볼 수 있다. 이에 플라톤은 실존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 밖에 존재하는 궁극의 실재를 추구하기 위해 철학함으로써 실존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자살한 미국의 천재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David F. Wallace) 의 작품들에서는  실존의 상황이라는 극한에 다다르기 위해서  끊임없이 고통과 슬픔을 관통하는 삶에 천착한다.  반대로 호메로스 시대의 인물들은 실존의 상황에 다다르기 위한 정신적 노력이 없이도 실존과 함께 했던 인물들의 등장을 볼 수 있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   

 

 이 책의 저자들은 철학이라는 줄기속에서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 '실존적 존재'인  “자율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하여 철학과 인문학의 절묘한 조합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요즈음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보면 생명의 존재가 무척 하찮아진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대중문화인 영화에서조차 생명을 초개처럼 버리는 것을 ,너무도 흔하게 볼 때마다 씁쓸해지곤 한다.  이러한 생명에 대한 경시풍조 역시도  철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떻게 고착되어 가는지를 어렴풋이 느끼게 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독특하게도 '실존'이라는 텍스트로 문학과 철학과 역사를 종횡무진하며 '삶'에 천착한다. 저자들의 문제의식은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상실의 뼈저린 감각, 방황하는 존재의 어둠이라는 근원적인 문제의 지각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현대 고착되어진 생명 경시풍조나 우울, 자살, 방황과 같은 어두운 존재의 시작은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과 선택의 짐을 ‘개인’이 떠안게 되면서부터 라고 한다. 저자들의 거대한 철학의 줄기들은 현대인들의 뿌리깊은 진화론적 세계관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며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가치들에 대해서 아주 오래된 서양철학의 고전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시작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단테의 『신곡』,  멜빌의 『모비 딕』에서 삶에 대한 참된 가치를 추구하는 독특한 문화여행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여행의 종착지는 바로 '반짝반짝 빛나는 주위의 모든 것'들과 함께 하는 '실존'이자 현재의 순간들이다.  

 

1장 선택의 짐 ― 선택의 짐을 회피하는 두 가지 방식

2장 우리 시대의 허무주의 ― 실존의 과도한 짐은 허무주의를 부른다

3장 신들로 가득한 세상 ― 호메로스의 행복했던 세상

4장 유일신의 등장 ― 기독교가 바꿔놓은 삶의 가치

5장 자율성의 매력과 위험 ― 악마의 특징이 인간의 미덕으로 변하다

6장 광신주의와 다신주의 사이 ― 개인 대 신의 싸움

7장 우리 시대의 가치 있는 삶 ― 성스러움을 회복하는 길

 

단테는 『신곡』에서 인간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실존의 상황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자율성)을 악마의 특성으로 돌린다. 마르틴 루터를 거쳐 데카르트와 칸트에 이르러 인간의 자율성은 인간의 가장 존엄한 특징으로 복권된다. 칸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간은 “스스로 세운 도덕 법칙에 따라서만 행동하고 평가될 수 있는 자율적 주체”가 된다.

 

멜빌의 <모비딕>에 이르러 다신적 사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선장 에이브람의 고래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바라보는 이스마엘의 사고를 다신적 사고라고 한다. 유일신 문화에 물들지 않은 다신적 사고, 이러한 사고는 동굴에 있던 포로가 실존의 태양을 바라본 사고와 동급이다. 현대 테크널리지의 세계는 실존과 더욱 동떨어진 세계를 선사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세계의 의미를 상실할수록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도 단조로와지며 사물에 대한 애착과 존경-위에 말한 사물이 가진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저자들이 말하는  철로에서 떨어지는 취객을 구하는 순간, 야구장 관중석에서 하나가 되어 환호하고 기뻐하는 순간, 커피 한 잔의 기쁨과 같은 순간들 -여기에 하나 더 보태서 내가 버스타는 시간을 고대하는 순간들이- 항상 우리 곁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우리의 삶은 허무주의를 극복하며 더욱 가치 있어진다고 한다.  동굴의 갇힌 포로가 아닌 태양처럼 빛나는 존재와 같이 '실존'에 이르는 삶의 아름다움은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삶의 결을 느끼는 순간임을 기억하기를 .... 

 

단테에 따르면, 모든 영혼은 세상의 사물들에 자연적으로 끌리는 성향을 가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끌림을 가치 있는 삶 쪽으로 돌릴 수 있을까? -p229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의 삶은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잠들기 전까지 선택으로 시작하여 선택으로 끝난다.(여기서 선택은 개인의 자유(wiil)와 같다.) 이런 선택의 가장 기본적인 지향점은 아무래도 ‘정의(선)’가 아닐까 한다. 사전적인 의미의 정의는 ‘언제 어디서나 추구하고자 하는 바르고 곧은 것’이라 하지만, 선택을 할 때 이미 우리의 행동은 ‘자유(will)’에 의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의는 우리 내면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도덕성’에 근거하는 행동이라고 생각된다.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는 이들은 선택에서도 ‘바르고 곧은 것’과는 반대의 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최민식이 사이코패스로 열연한 <악마를 보았다>에는 정의로운 한 남자(이병헌)이 등장한다. 남자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사이코패스(최민식)에게 납치되어 성폭행 당한 후 잔인하게 살해당하였다. 이후 남자는 사이코패스(최민식)을 찾아 따라다니며 자신의 고통에 대한 복수를 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수한 이 남자를 ‘정의’롭다고 할 수 있는가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한동안 도덕적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감정이나 고통을 모르는 사이코패스를 모른 척 했다면 더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정의로운 사람이라도 누군가를 정죄할 권리가 있을까?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공리주의 측면에서는 어쩌면 이 남자(이병헌)은 ‘정의’로울 수 있다. 그러나, 자유지상주의의 입장에서 사이코패스(최민식)의 자유권을 침해한 행위가 될 수 있다. 사회가 불평등하다고 국가가 개입하여 빌 게이츠에게 세금을 부과하여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없는 것처럼, 설령 사이코패스라 하더라도 처벌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이렇게 사회는 점점 도덕이나 정의가 복합화 되어 가고, 사회의 구조 역시도 복잡다단해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정의’는 추구하기 힘든 , 도달하기 힘든 목표가 되어가고 있다.

극단적인 예는 영화만이 아니라 현실에도 널려있다. 오늘의 메인 뉴스에는 ‘엄마에게 뺨을 맞은 9살짜리 아들이 엄마를 경찰에 신고했다’ 가 대서특필 되었다. 기본 테제로서는 엄마이자 어른이기 때문에 아이를 혼낼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보여지지만 안티테제로는 아이의 사생활 침해가 성립된다. 그러나, 정의의 관점으로 볼 때 사건의 심각성은 현재의 정의가 봉착한 딜레마가 무엇인지를 적확하게 보여주는 뉴스라는 점이다. 위에 말했듯이 정의란 선을 지향하는 내적인 마음에서 비롯된다. 법이란 불법적 행위를 금하는 외적 명령이다. 바로 이 내적 명령과 외적 명령의 선택영역에서 발생하게 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시민의 미덕을 장려해야 하는가? 아니면 법은 미덕에 관한 서로 다른 개념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면서 시민 스스로 최선의 삶을 선택하도록 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는 사회 곳곳에서 발생한다. 누군가에게는 옳은 것이 누군가에는 그른 것이 될 수 있는 사회의 ‘정의’라는 것, 마이클 샌델은 정의가 무엇인지 알려면 고대의 정치철학사와 근대의 정치철학사에서 찾아야 한다고 한다.  미덕에서 출발하는 고대의 정의론과 달리 자유로 출발하는 근현대의 정의론을 통해 정의'란 무엇인지를 살펴보게 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이론은 현대의 자유주의의 사상적 출발선이라고 할 수 있는 공리주의의 벤담과 밀의 사상적 차이와 칸트, 롤스의 정의론까지 체계적이며 실질적인 예들로 정의를 짚어주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일까? 

 

공리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이러한 사상들이 우리의 권리를 규정하는 정의의 원칙에 흔들리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매 삶에 선택을 하는 것처럼, 인류의 생존은 정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발전해왔다.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나쁘고 악한 것이라고 규정해왔던 것들이 언제고 '정의(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서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시장사회에 접어들면서 부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이 분리되어 불평등이 심화되어가는 것처럼 '정의'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기본적인 내적 명령인 양심 '바르고 곧은 것'의 의미는 점점 더 모호해져 갈 것이다.  정의를 고민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  바로 우리 모두가 간절히 추구해야 할 '공동선'이자 정의에 이르는 길이 아닐까. 

 

간만에 가슴 떨리는 책을 만났다. 이 책이 한참 베스트셀러였을 때, 나의 독서수준은 초등학교 수준이었다는 것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사두고는 선뜻 읽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꾸로 <정의의 한계>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고 나니 조금 용기를 얻어 펼쳐보게 되었고 다 읽고나서도 아쉬움이 남아  EBS 강의 동영상을 보았는데  책으로 읽는 것보다 더한 감동이 느껴졌다.  강의실 가득 메운 학생들과 대담하는 마이클 샌델의 자신감이 넘쳐나는 말투에서 왠지 정의라는 것은 스스로 확신하고 확언할 때 더욱 견고하게 굳어가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기도 하였다. 누군가 내게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생각하는 것(thinking)에 답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 권리를 규정하는 정의의 원칙은 미덕과 최선의 삶에 관한 주관적 견해에 좌우되지 말아야 한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해, 각자 좋은 삶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정의를 고민하는 것은 곧 최선의 삶을 고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