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똥별 - 가장 낮은 곳에서 별이 된 사람, 권정생 이야기
김택근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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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온 우주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내’ 것은 없다.

밭 한 뙈기 돌멩이 하나라도 그건 ‘내’것이 아니다.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왜 자꾸 눈물이 나는 것일까? 권정생 선생님의 삶 전체가 슬픔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욱 슬펐던 것은 그 분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인간다운 ’삶이 둔중한 울림으로 남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고 있다.  책을 좋아한다고 해도 좋아하는 이유와 장르가 다 다르듯이 책을 읽는 목적도 모두 다르다. 책을 읽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때론 낭만적으로 느끼거나 때론 지적인 행위로, 또는 더 나은 삶을 위한 포장을 하지만 사실 독서의 궁극적인 목적은 고독이라고 말하고 싶다. 언젠가 문학비평가로 저명한 문학작가 헤롤드 볼룸이 말했듯이 독서의 궁극적인 목적은 언젠가 맞이 할 죽음에 대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친다.  내가 늘 맞이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독서가 늘 외롭고 고독으로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독서는 생각하는 것처럼 그다지 멋지거나 거창한 행위가 아니다.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궁극의 것을 기다리고 있는 순간이란 사실을 마주하게 될 때마다 책은 내가 느끼는  외로움과 고독의 깊이만큼  삶의 소중함을 상쇄하곤 한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축제라 했던 예일대 철학교수 셀리 케이건의 말을 굳이 차용하지 않아도,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은 책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지혜인 셈이다.  그토록 짧은 생을 살면서 집착과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사는 것만 보아도 삶의 진실은 꽤나 단순한지 모르겠다. 삶이 아주 사소함의 연속으로 이루어졌음에도 우리가 삶을 위대하게 포장하려 애쓰면 애쓸수록 궁극에는 가장 소박하고 사소한 것이 가장 인간적인 것임을 알게 되는 순간처럼 말이다.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의 삶의 이야기에 옷을 입힌 《강아지똥별》은 권정생 선생님 스스로가 되고자 했던 꿈을 담았다. 이 땅에서 가장 낮고 하찮은 강아지의 똥이 거름이 되어 꽃을 피우는 것조차 삶의 아름다움으로 다가와 <강아지똥>이라는 동화를 쓴 그는 그렇게 세상에 거름이 되고자 하였다. 행간을 읽어가며 머리 위로 수도 없이 많은 상념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여러번 하였다.  살아가면서 매번 떠오르곤 하였던 삶의 궁극적인 의미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막연함에 방향감각을 상실하곤 하던 기억들이 권정생 선생님의 삶에 오버랩 되어 섬광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져 갔다. 삶에 대한 그런 물음들은 늘 내 삶에서 마음속에 가시로 남겨져 내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국 땅에서 태어나자마자 겪게 된 전쟁은 삶의 처참함과 오랜 상흔으로 남겨져 권정생 작가의 삶 전체를 궁핍과 굶주림, 배고픔으로 가득 채웠고  온가족의 몸부림 속에서도 가난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가난 때문에 중학교를 포기한 채 갖은 노동을 하지만 과한 노동의 대가는  결핵, 신장결핵, 늑막염이라는 병들과의 동행을 남겨놓았다. 그러나, 삶에서 주는 모든 눈물들은 방울방울 영롱져 아름다운 동화로 울려 퍼지게 된다.

 

우리 사는 땅에는 수많은 떠돌이 강아지가 있고 그 똥을 거름으로 해서 꽃들이 피어날 것이라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세상에 필요한 것은 황금 덩어리가 아닌 똥덩어리였습니다.

 

글 한 자, 한 줄에 슬픔을 담아 동화를 쓰고 나면 며칠을 앓아 누웠다던 권정생은 유수의 문학상에 당선이 되어도 가난한 삶을 포기하지 않으며 그동안 받았던 상금들을 모아 아이들을 위해 남겨둔 채 생전 자신을 위해서는 한푼도 쓰지 않았다. 배운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일이며 가르치는 일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믿었던 그대로 성 인의 삶을 살다 간 정생의 생은 아프고 외롭고 슬픔으로 점철된 생이었다. 자신이 겪었던 슬픈 현대사를 잊지 않으려고 무명저고리에 한 땀 한 땀 새겨 써내려 간 권정생의 동화에는 일본에서 태어나 태평양전쟁을 겪고 다시 한국에서 6.25전쟁을 겪으며 지난한 삶의 수많은 굴곡을 겪으면서 느꼈던 생의 슬픔들이 오롯이 배어난다. 슬픔이 배인 동화는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는 우리들에게 삶의 밑거름으로 뿌려져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다. 이 꽃의 이름을 우리는 희망이라 부른다.  눈물이 없으면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 누군가는 눈물이 되어야 한다며 그는 스스로 땅의 슬픔을 품에 그러모아 눈물로 만들어진 슬픈 별이 되었다. 그렇게 《강아지똥별》은 어른이 된 나에게도 희망의 꽃씨를 품에 남겨놓는다. 가장 소박한 삶이 가장 인간적이라는 푯말과 함께...

 

어느 밤, 하늘을 보며 당신을 찾아 헤맬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픔이라는 이름의 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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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7-09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정생 선생님의 아름다운 삶을, 이렇듯 아름답고 진솔하게 마음을 울리는
드림님의 아름다운 리뷰로, 오늘 또 다시 읽는군요.

'배운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일이며 가르치는 일을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믿었던.'
어쩌면 세상에 필요한 것은 황금덩어리가 아닌 똥덩어리였습니다.-

비가 내리시어 서늘한 저녁, 아름다운 글로 더욱 좋은 밤입니다.
오늘도 감사드리오며,
드림님! 편안하고 행복한 밤 되세요~^^.

드림모노로그 2013-07-09 20:43   좋아요 0 | URL
우헤헤 ~ 나무늘보님 수정하고 있었는데 ㅎㅎ 퇴근 전 리뷰 올리고 나서
집에와 이제 따슨 밥먹고 씻고 하고 오타를 살펴보고 있었네요 ㅎㅎ
에고 삶이 이렇게 고달프네요 ㅎㅎ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하구요 ㅎㅎ
이 책 읽으면서 눈물이 어찌나 나는지...
이렇게 착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오래오래 기억해야겠습니다. ^^
나무늘보님도 굿밤 ~ ! 보내요 ㅎㅎ
 
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 우리 시대의 주변 횡단 총서 1
로버트 J. C. 영 지음, 김용규 옮김 / 현암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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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식민적’이라는 용어는 역사적인 의미에서 말 그대로 ‘식민’ 이후를 뜻하는데, 이런 일반적인 의미는 다양한 정치 형태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탈식민주의가 식민주의로부터 벗어난다는 명료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데 비해 포스트식민주의는 그 용어의 의미론적 범주가 탈식민주의보다 더 넓다. 식민지를 벗어난 포스트식민국가에서 하는 정치적 모든 활동들을 ‘포스트 식민주의’라고 칭할 수 있기에 포스트식민주의는 탈식민주의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탈식민주의라는 역사적 상황들이 문학적인 성향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이름하여 '포스트식민주의 문학'이 식민국가에 나타나게 되었다. 포스트식민주의 문학의 특징은 제국주의가  수행하는 동일화 논리와 차별화를 선언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되찾고자 하는 노력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저자는 대표적인 포스트 식민주의 이론가 중의 한 명으로 《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에서  ‘트리컨티넨탈 포스트식민주의’라는 포스트식민적 문학에서 특징으로 삼아온 ‘정체성’을 되찾는 것을 학술적으로 접근하는 색다른 글쓰기를 선보이고 있다. 저자는 기존에 포스트식민적 문학 개념이 세계 문학이라는 거대한 실체와의 관계 속에 흘러왔지만, 포스트식민주의 문학이 가지고 있는 힘 ‘억압적이고 객체적인 세력들 앞에서 주체적 힘을 재주장하는’ 제한적인 문학적 포스트식민주의의 형태와는 구분되어져야 하며  탈 세계의 민중들이 독재와 부정에 저항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자신의 삶을 변형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포스트식민과 관련해 더 거대한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는 개념으로서의 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를 살펴보고 있다.

 

 

포스트식민주의가 비서양 세대륙(아프리카,아시아,남아메리카를 지칭하여 ‘트리컨티네탈’이라 한다.) 국가들이 대부분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종속된 상황에 처해 있고,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지위에 있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포스트식민주의는 자원과 물질적 복지에 대한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민중들의 권리를 주장할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문화,즉 현재 서양 사회에 개입하여 그것을 변화시키고 있는 문화들의 역동적 힘을 주장하기도 한다. (p20)  저자의 포스트식민적 문화 분석은 사물을 바라보는 이전의 지배적인 서양적 방식을 반박하는 이론적 틀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포스트식민주의가 ‘서발턴'(Subaltern·하위주체)’  곧 종속적 계급과 민중들의 정치학을 정교하게 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바로 이 아래가 포스트식민주의가 존재하고 있고 당연히 존재해야 할 지점이라고 하며 ,  무엇보다 포스트식민주의는 비서양뿐만 아니라 서양의 권력 구조에 개입하여 그 안에 대안적 지식과 사유의 깊이를 제안한다. 저자는 이러한 포스트식민주의식의 사고로 인하여 사고를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나아가  세계의 다양한 민중들 간의 더욱 정의롭고 평등한 관계를 생산하고자 한다는 의미로서 변화하는 세계, 투쟁을 통해 변혁될 뿐만 아니라 참여 주체들로 인하여 변혁된 세계를 또다시 변혁하려고 하는 세계의 변화에 관한 이론이다.

 

따라서, 이 책은 서양인과 비서양인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맺는 관계를 바라보는 지배적인 방식을 변경하려는 일련의 문학작품들을 통해 살펴보는 동시에 각 문화가 가진 독특하고도 섬세한 차이들과  나라마다 가진 특정한 정치와 사회의 분위기를 이해하고자 한다. 서양에 있는 이들은 이슬람 여성들의 베일을 억압의 상징으로 페미니즘을 앞세워 여성을 보호하려 하지만, 이런 베일의 강제적인 제거를 주장하는 서양의 시선은 일종의 식민지적 폭력이라는 것이 포스트 식민주의자들의 시각이다. 이슬람의 베일은 억압으로 읽어서는 안되고 베일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여러자기의 의미들, 여성들이 자신 스스로의 의지와 자신의 지위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을 서양에서는 자신들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알제리의 라이 음악이 가진 의미도 마찬가지다. 라이는 자신의 시각, 즉 그 자체의 전복적인 권력의지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포스트식민주의에 근본적인 많은 성질들을 압축하고 있다. 사회의 주변부에 처한 사람들, 즉 궁핍한 가난의 조건, 열악한 주거, 그리고 실업의 처지 속에서 살고 있는 도시 이주자들의 심정을 표현하는 라이의 음악문화는 젊은이들이 알제리 사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주요한 대중적 수단으로 발전해갔다. 라이는 전통적인 이슬람 가치들에 대한 현대적 해석과, 변화하는 역사적 힘에 대해 무슬림 사회가 보이는 수용과 전통적인 반응간의 갈등적이고 경합적인 공간에 존재한다.

이외에도 젠더와 근대성, 페미니즘, 서발턴, ,농민, 가난한 자, 온갖 종류의 버림받은 자들에게 깊이 공감하는 포스트식민주의는 엘리트 계급의 고급 문화를 피하고, 역사적으로 거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문화와 대항적 지식의 풍부한 보고로 간주될 수 있는 서발턴 문화와 지식을 지지한다.

 

포스트식민의 급진적 의제는 지상의 모든 인간들을 위한 평등과 안녕을 요구하는 데 있다

 

포스트 식민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서양과 비서양의 시선을 주체성을 가지고 이해하는 것이다. 저자는 서양인들이 비서양 세계를 바라볼 때 그들이 본 것이 실제 거기에 존재하는 현실이라기보다는, 서양 밖의 사람들이 실제 스스로를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지각하는가 하는 것보다는, 서양인 자신이나 자신이 전제하고 있는 것의 거울상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즉, 자신의 관점에서 타문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슬람 여인의 베일을 서양인의 기준으로 바라볼 때는 억압이지만, 그 이면으로 들어가게 되면 억압이 아닌 여성의 지위이자 의사표현이인 이슬람 문화로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포스트식민주의는 사진의 이면으로부터 바라보는 시선을 의미하며 뒤집어 생각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식민이라는 그늘이 사라진지 오래이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식민의 그늘에 잠식되어 살아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문화는 아래로부터 태동하고 있다. 미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차별받아 왔던 흑인과 히스패닉계가 현재 미국을 변화시키고 있는 하나의 동력이 되고 있는 것처럼 사회에서 오랜 세월 약자로 살아왔던  서발턴'(Subaltern·하위주체)’ 들의 역동적인 저항과 투쟁이 더 나은 삶을 위한 변화의 모토가 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우리나라 역시도 이러한 포스트 식민주의 이론에 자유롭지 않다. 그렇기에 더욱 주목되는 영의 이론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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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7-06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탈식민주의, 포스트식민주의, '트리컨티넨탈' 포스트식민주의, 서발턴'(Subaltern.하위주체)'.
그러니까 포스트식민주의는 사진의 이면으로부터 바라보는 시선을 의미하며 뒤집어 생각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처음 책 제목의, 포스트식민주의,라는 말부터 무슨 말인가 어려웠는데
드림님의 순차적이고 꼼꼼하고 차분한 리뷰를 따라 읽어가니, 절로 이해가 되고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의미도
잘 알게 되었어요. ^^ 드림님 덕분에 제 머리와 생각도 나날이 조금씩 진보하는 것 같아요..ㅎㅎㅎ

오늘도 멋지고 훌륭한 리뷰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드림님! 좋은 주말 되세요. *^^*


드림모노로그 2013-07-08 10:52   좋아요 0 | URL
ㅎㅎ 전 공부하는 기분으로 읽었어요 ㅎㅎ
정리하는데 무지 애먹었어요 ㅎㅎ
나무늘보님께서 제가 몇 시간을 머리 싸매며 공부한 것을 한 방에 찝어내시니 ㅋㅋ
제가 머리가 나쁜 건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하하 ~

인문서는 읽고 나서 남는 것이 많아서 좋은 듯 해요 ㅎㅎ
의외로 참 재미있게 읽은 것 같습니다. ㅎㅎ

주말 잘 보내셨죠 ~ 나무늘보님 ~
길고긴, ㅋㅋ 주말을 보내고 새로운 한 주가 다시 시작되었네요 ㅎㅎ
언제나 그렇듯 ~ 행복하고 즐거운 하루 되세요 ~
 
김유신 말의 목을 베다
황윤 지음, 손광산 그림 / 어드북스(한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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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하면 생각나는 구전 설화가 있다. 고려 말 스승인 일연이 민족의 주체성을 일깨우기 위해 저술한 삼국유사에서 읽은 이야기로 김춘추가 왕이 되면서 '태종'이란 칭호를 왕명에 쓰고자 한다고 중국사신들에게 고하자 중국사신들이 노발대발하며 태종은 중국황제나 쓸 수 있는 것이라고 거절하였다. 이에 김춘추가 '김유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태종'을 써야 한다고 하자, 사신들 모두가 수긍하여 돌아갔다는 일화가 내려온다. 삼국유사의 설화들이 대부분이 그렇듯이 구전설화나 토템신앙을 근거로 기술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 진정성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매우 의아함이 남는 부분이었다. 왕인 김춘추보다 더 위대한 천신 김유신, 그러나 김유신은 역사에서나 현재에서나 이인자의 위치를 넘어선 적이 없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의 인지도 역시 선덕여왕이나 김춘추이상의 인지도는 아니라 여겨졌다.  《김유신 말의 목을 베다》를 읽으면서 김유신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매우 부족했음을 새삼 깨달았다. 저자 역시도 김유신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전무한 사실을 깨닫고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팩트fact와 픽션ficton을 한 올씩 엮어가며 새로운 김유신 역사의 팩션소설을 선보이고 있다. 저자가 천착해가는 역사기술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생생하며 시대의 흐름을 읽는 새로운 역사읽기의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

 

 

 

특히, 저자가 바라보는 역사 기술의 좋은 점은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며 역사의 맥락을 짚어나간다는 점이다. 그럼 시대의 흐름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김유신이 태어나 활동한 시대는 6세기이다. 6세기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나라가 가진 고유의 특성,  외교,  문화, 빈번하였던 고대국가의 전쟁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삼국시대는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상황이었고 각 나라마다 특성있게 불교를 숭배했고 그 신앙을 중심으로 예술과 문화를 꽃피웠다. 이 불교문화의 이해도 시대의 흐름에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이 가운데  중국과의 외교관계 역시도 삼국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러한 거시적인 역사의 흐름 가운데 이 모든 것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인물' 이 있다. 역사의 흐름이란 이러한 모든 것이 상호작용하면서 써가는 것이지 문화,종교,인물이 서로 각자 따로 시대를 기록하는 역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치열하였던 삼국의 역사중 신라의 김유신은 그러한 역사의 흐름 가운데 놓여져 있는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고구려의 연개소문, 백제의 계백, 신라의 김유신이 커다란 축이고 김유신과 횡으로 놓여진 인물이 김춘추이다.

 

 

 

 

6세기 말 신라에는 분명 그 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힘이 솟구치고 있었다. 진흥왕이 전륜성왕의 개념과 의식에 도취되어 가면서 신라왕실은 곧 석가모니의 계열이라는 강한 집단 최면상태에 빠지게 된다. 왕이 곧 석가모니라는 종교철학은 왕들에게 엄청난 자기애를 선사해주었고 이런 종교의 힘 덕택으로 신라왕실은 왕권강화의 구실을 마련하게 된다. 엄격한 신분사회 였던 귀족사회인 신라의 삼국통일의 원천적인 힘을 주었던 것은 이렇게 신격화된 왕실과 귀족자제들로 이루어진 '화랑'제도이다.  

 

길함과 흉함은 정해진 것이 아니옵고 오직 사람이 불러들이는 바에 달려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별자리의 변괴 따위는 두려워하지 마옵소서.

 

 

오래 전 드라마로 방영된 <선덕여왕>을 보면서 왜 덕만공주가 유신과 결혼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 화랑 중 김유신은 분명 덕만과 가장 마음이 잘 맞는 동료였었고 매 사건때마다 순발력을 발휘하여 덕만을 위기에서 구해주곤 하였는데 왜 작가는 비담과 애정전선을 그린것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덕만과 유신이 꽤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책을 보면서 그때의 궁금증이 다소 해소되는 것 같았다. 덕만과 유신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은 신라가 엄격한 계급이 있는 귀족사회였기 때문이다.

덕만은 귀족 사회 가장 최고계급인 성골이었고  김유신은 가야계 출신으로 가야의 마지막 왕의 가문이었다. 물론, 혁혁한 공을 세운 할아버지, 아버지 덕으로 김유신 역시도 계급은 높았지만 태생이 최고 귀족계급인 성골과는 엄청난 차이라는 사실. 6세기 중엽 신라는 가야를 복속하게 되면서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경주 외지인이 주축이 된 신흥세력과 비담을 중심으로 한 최고의 혈통 가문세력이라는 두 계층의 대립이 있었다.  비담의 난을 계기로 김유신은 최고의 혈통가문을 상대로 싸움에서 승리하였으며 선덕여왕에 이어 진덕여왕을 왕위에 올린다. 이후 진덕여왕의 죽음으로 성골의 대가 끊기자 이어 진골에게 왕위가 돌아가게 된다. 이어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게 되고 이어 문무왕까지 김유신은 정치권력자로서의 최고 자리에 오르게 되고 막강한 군부의 힘이 있었음에도 신하의 예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철저한 고증을 토대로 집필된 김유신의 일대기는 당쟁과 모략으로 얼룩진 역사이야기가 아닌 역사속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충직함과 강인함이 깃든 민족의 기상이 느껴지는 책이다. 《김유신 말의 목을 베다》는 허구가 아닌 실제 역사의 이야기이다.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면서 현재의 우리의 모습과 더불어 생각하는 역사사관을 펼쳐보이며 역사를 거시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매우 인상적인 역사책이다.  또한 이러한 역사사관이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지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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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7-06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 애기엄마의 모습을 보니 저랑 막상막하같다능...ㅎㅎㅎ

드림모노로그 2013-07-08 10:49   좋아요 0 | URL
ㅎㅎ 옛날에 저 그림을 보고 너무 웃기다는 생각을 했는데 ㅎㅎ
요로코롬 써먹네요 ㅎㅎㅎ
전 같이 마시는..ㅋㅋ
 

와 알라딘 14주년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알라딘을 이용한지 2년 정도 되는 것 같은데 다른 곳과 달리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결제창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ㅎㅎ 최근에 온라인 서점 최초로 문화상품권이 바로 결제되는 부분도 마음에 들구요. 사은품도 짱이고 적립금도 가장 많아서 가장 좋아하는 서점이랍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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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사람들 - 놀이하듯 공부하는 새로운 인류의 탄생
더글라스 토마스 & 존 실리 브라운 지음, 송형호 외 옮김 / 라이팅하우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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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 앞으로의 세계는 지식이 모든 생산수단을 지배하게 되며, 이에 대비한 후세 교육 없이는 어느 나라든 생존하기 어렵다." 라고 말한 지 어언 십 년이 지나고 있다. 지식이 모든 생산수단이 되었다는 것은 세계적인 기업으로 우뚝 선 구글신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사회의 모든 구조가 변화되고 있는 현재, 디지털 시대의 거대한 변화의 물결 앞에  후세에 대한 교육은 나라의 생존의 문제로까지 대두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디지털이 사회의 모든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 공교육의 침체와 부실 가운데 놓여진 학교 공부에 대해서도 자성의 목소리만 높지 실질적인 대안은 없는 가운데 부모로서 아이들의 교육은 또 하나의 근심거리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현재의 ‘공부’가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어떤 변화를 겪어 왔는지의 흐름과 그렇게 변화된 새로운 공부변화에 대한 몽타주를 그려주는 책이다. 디지털의 발달은 인프라 구성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왔다. 기존의 고정적인 인프라에서 유동적인 인프라로 세상이 바뀌게 되자, ‘공부’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며 이것은 새로운 인류의 탄생 ‘호모 루벤스’ 의 탄생을 가져왔다.  

 

 

 

 

 

 

새로운 공부 문화는 실제로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어떤 주제를 공부하든 거의 무한대에 가깝게 제공되는 정보 네트워크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제한적이긴 하지만 구조화된 경계 속에서 무한한 실험을 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둘 중 하나만 가지고는 학습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이런 개념이 제대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두 요소 간의 결합과 상호작용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새로운공부 문화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큰 아이는 어렸을 때 병치레가 잦았다. 그 중 중이염이 가장 크게 앓았던 병명이었다. 중이염을 낫게 하기 위해 수많은 병원을 전전하였는데 병은 낫질 않고 아이의 병은 더 깊어가는 와중에 육아전문 사이트에 올려진 부모들의 경험담을 토대로 치료하여 낫게 된 경험이 있다. 이후에도 병원이나 책보다도 육아 사이트에 올려진 경험에 따른 정보공유가 더 유익하였던  기억이 있다. 이런 육아정보의 공유는  아이를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로 일종의 '학습공동체'라 할 수 있다. 저자들은 이렇게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정보를 공유할 수 있고 참여할 수 있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새로운 문화가 새로운 공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새로운 공부 문화는 일반적인 것을 개인적으로 만들 수 있는 자유를 줌과 동시에 우리의 개인적 경험을 공유하여 일반 지식에 더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하는 공부 문화라는 개념은 정보와 개인적 동기가 더해졌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상상력을 키워서 공간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창조하는 문화가 된다.

 

이러한 새로운 공부 문화는 세 가지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첫째, 과거의 학습 방법은 급속하게 변하고 있는 세상을 뒤쫓아 갈 수 없다.

둘째, 새로운 미디어 형태로 동료 간 학습이 더 쉽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

셋째, 동료 간 학습은 이러한 새로운 미디어에 참여하는 공동체적 속성의 틀을 만드는 기술의 출연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새로운 공부 문화를 통해 지식이 무한대로 여과 없이, 즉각적으로 생산, 소비 및 분배될 수 있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변화의 주요 원인이라고 한다. 싸이월드, 블로그,페이스북 등 개인 커뮤니티가 놀이와 상상력을 구체화시키고 있으며 이러한 변형은 공동체 속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통해 지속적인 놀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상상하게 되는 ‘학습공동체’ 집단이 만들어졌다. 학습공동체는 이와 같은 대화의 네트워크로부터 자연스럽게 생겨난 부산물이다. 개인에게 생각의 틀을 만들어주고 영향을 주고받는 공동체와 상호작용하며 학습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새로운 공부 문화의 핵심은 바로 블로그, 페이스북,싸이월드와 같은 개인 커뮤니티가 도화선이다. 미래의 교육이나 공부는 이러한 개인 커뮤니티를 통해 놀이와 재미에 기인한 새로운 공부의 문화를 가져올 것이다.

 

과거에는 생산의 기본 요소가 토지,노동,자본이었지만, 이렇게 변화된 디지털 사회는 생산의 부의 축적 메커니즘 자체가 탈공장, 탈생산화 되면서 지식과 정보가 사회의 모든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계측 불가능하며 수치로 환산할 수 없기에 더욱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인지하고 있기가 더 힘들다. 오래 전 공부하기 위해 산 속에서 심신을 수련하거나, 독서실에 박혀 홀로 공부하는 것은 '질문에 대답하는 공부', 주입식 공부이기 때문에 가능하였지만, 현재의 공부는 모든 산업의 근간이 정보에 기인하게 되면서 홀로 공부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 개인의 커뮤니티를 가지고 공동체와 정보공유를 하는 재미의 공부로 공부의 의미자체가 변화되면서 이제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아닌 '질문하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들》의 골자이며 공부가 이제는 학습이 아닌 놀이하는 문화를 새롭게 형성하는 문화임을 사회 여러가지 현상을 통해 반추해주고 있다. 새로운 변화의 물결로서의 '공부'의 변화는 미래의 생존 공부법으로도 매우 탁월한 책이다.

 

21세기에는 어떻게 학생들의 상상력을 함양할 것인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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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7-02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지금 우리들이 블러그를 통해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좋은 것을 배우며 즐기는 일도,
놀이하듯 공부하는 '호모 루벤스'의 ' 시간들이네요~.^^
교사에서 학생으로의 일방적인 정보전달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는 '학습공동체'.

ㅎㅎ 오늘도 똑부러지고 핵심만 꼭꼭 집어주신 명쾌한 리뷰, 덕분에
디지털 세상에서 보다 즐겁고 재미있게 사는 방향의 제시, 잘 이해하고 담아갑니다. ^^
(그런데..저는 아직도 디지털 세상이 좀 두려버요 ..ㅎㅎㅎ)

드림님! 오늘도 좋은 리뷰 감사드리며
좋은 하루 되세요~*^^*

드림모노로그 2013-07-04 17:03   좋아요 0 | URL
그런거보면 저도 블로그 하면서 공부하는 기분이 들어요 ㅎㅎㅎ
그래서 조금 수긍이 가더라구요 ㅎㅎ
제가 해보고 있으니 학습공동체라는 의미가 더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구요 ^^
하위징아가 가장 먼저 말하였던 호모 루벤스를 이 책을 통해 개념정리가 되는 느낌이었어요 ^^
나무늘보님은 역시 핵심을 콕 ~ 집어내시네요 ^^ ~
디지털 세상 무섭기도 하지만 모른 채 도태되는 것이 더 두려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정말 정보를 모르면, 아무 것도 할 줄 모르게 될 듯 해요 .. ㅎㅎㅎ
거기도 비가 많이 와요? 이곳도 비가 많이 옵니다 ^^
건강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