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무기력이다 - 인지심리학자가 10년 이상의 체험 끝에 완성한 인생 독소 처방
박경숙 지음 / 와이즈베리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마음 사용 설명서, 무기력에 빠져있다면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명의 배꼽, 그리스 -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박경철 그리스 기행 1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그리스 역사를 거슬러 찬란했던 한 문명의 과거 영광을 찾아 떠나는 여행, 여행기치고는 좀 진부한 듯 싶으나, 니코스 카찬차키스를 좋아한다면 문학의 깊이를 덤으로 얻을수 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림모노로그 2013-03-14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밥도 잘 먹고 술도 잘 마시고 노는 것도 잘 놀고 쭉 뻗기도 잘해요 ㅎㅎㅎ

이제 다 읽고 리뷰 썻는데
마중물님의 리뷰도 멋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함 써보세요 ㅎㅎㅎ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었네요 ^^ ㅎㅎㅎ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이 책에서 너무 매력적이라는 @@
 
크레마 touch 신형 케이스 - 플립형(색상 4가지) - 레드커버/화이트트레이
알라딘
평점 :
품절


 

크레마가 워낙 가볍고 휴대가 간편하다보니 가방에 꼭 넣어다니게 되네요.

그러다보니 화면에 먼지가 이상하게 눈에 거슬려 크레마 터치에 옷을 입혔습니다.

핸드폰과 같은 고무 재질의 빨강 옷을 샀습니다.

다른 케이스보다는 아무래도 손에 닿는 촉감도 좋고 무엇보다 미끄러지지 않아

고무 재질의 케이스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게다가 색상도 이쁘구요 ^^

 

 

색상은 (블랙,블루,레드,퍼플) 네 가지 중에서

레드를 선택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칼라입니다 ^^

크레마에 옷을 입히니 한 결 보기도 좋고

자꾸 눈에 거슬리던 먼지가 눈에 안 띄니 더 좋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제 핸드폰에서 보이는 것처럼

중간에 케이스를 잡아주는 자석장치가 있었으면 합니다.

핸드폰 케이스보다 더 큰 사이즈라 그런지

케이스와 화면이 착 맞아 떨어지는 느낌은 없습니다.

중간에 자석으로 고정시키면 아무래도 그런 걱정은 없을 듯 한데요.

어쨌든 케이스 하나로 제 크레마는 더욱 고급스럽고 화사한 크레마가 되었습니다 ^^

 

 

 

보이시죠?

제가 지금 크레마로

열독모드 인거...

태백산맥의 842p에서

이제 겨우 559p

읽었습니다 ^^ ㅎㅎ

크레마가 확실히

눈의 피로가 적은 듯 합니다.

여기까지 크레마 껍데기

 리뷰입니다 ㅋ

이제는 별 걸 다

리뷰하는 드림이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검은 신 무의식의 저널 Umbr(a)
서지 앙드레 외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종교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뿌리 깊게 내려 온 종교근본주의는 질색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자신의 종교가 아닌 타종교에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신비주의적 성향이 너무 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주위에는 언제나 종교인으로 넘쳐난다. 나는 때론 그들의 호의에 감사하면서도 대체 ‘나의 종교’는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렇다고 나는 무신론자 또한 될 수 없다. 언제나 마음 한 켠에 하나님께 향한 깊은 사랑과 감사가 넘쳐나고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종교인인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나는 현실의 종교와 타협점을 찾지 못해 늘 방황하는 가련한 생물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그럼 종교는 과학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을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분명 과학의 영역이다. 그러나, 종교는 과학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과학자들이 종교를 과학으로 설명하기 위한 접근은 때론 얼마나 눈물날 정도로 우스운지 과학자들이 고작 몇 억년전의 빅뱅이론을 찾아내고서는 ‘신은 태초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고 ’ 할 때마다 인간의 유한한 삶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한하기에 단 하나의 사실을 ‘앎’에 대해서 마치 그것이 전부인양 치부해버리는 어리석음을 발견할 때마다 난 오히려 즐거웠다. 예를 들어,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성경 구절의 한 장면을 과학으로 설명한다고 치자. 그것이 어떻게 과학적 이론으로 설명되어질 것인가 말이다. 뿐만 아니라, 모세가 가른 홍해바다의 기적은 또 어떻게 설명되어질 수 있을까.

 

 

프로이트는 어떤 행위가 종교적이라면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절대적인 종교적 행위나 믿음이란 없다.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어떤 것이 있다면 정신분석에서는 대문자 타자이며 그것이 욕망이다. 라깡은 이를 “검은 신”이라고 부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존의 실증주의적 과학과는 달리, 이 책은 종교적 문제, 즉 기원과 신, 창조의 문제를 사유한다. 기존의 과학이 종교의 믿음 자체를 허상으로만 치부하여 비판했던 것과는 달리 종교가 전유하고 있던 창조, 주체의 기원, 믿음, 소외, 희생과 봉사, 예외, 신성성, 사랑 등의 철학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다. 정신분석이론의 틀 안에서 종교를 사유함에 있어 일신교에 천착하여 정신분석으로 접근한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얼마 전 책에서 읽은 한 구절이 떠오른다. 기독교의 핵심은 인간의 보편적 유죄가능성이므로 이를 통한 공동체의식과 연민이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이를 세속적인 시각에서 풀어보면 너와 내가 여리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인식이다. 정신분석에선 존재의 결여와 욕망의 불가피성이 바로 인간의 보편적 조건이라는 말이다.

 

 

라깡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에게도 종교는 다름 아닌 이 세상, 즉 현세와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현세는 근대 과학과 근대 과학이 낳은 주체가 설립된 이후,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만 적절성을 갖는다. 정신분석은 지속적으로 이 지점, 즉 대타자에 대한 질문-어떻게 완전히 텅 비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이라는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가-에 이론적 노력을 기울여왔다.

 

 

프로이트의 분석에서 신의 고유한 역할이란 인간의 법을 보증하는 것, 법의 금지적 성격에 과외의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라깡은 프로이트를 좇아서 법은 부정적일 뿐만 아니라 욕망을 구성함으로 긍정적이라고 답한다. 종교는 욕망을 단순히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는 사실 욕망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향유(쥬이상스)는 기표가 아니라는 전제 하에 의식적으로 주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는 우리가 향유를 갈망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줌으로써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를 이해하게 한다. 욕망을 억압하지 않고 우리 삶의 기본적 현실을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이 라깡주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종교의 개념과 종교 비판을 변형시킨다. (이는 라깡주의가 진리와 현실의 개념을 바꾼 것과 같은 개념이다. )

 

 

라깡의 이론에 의하면 승화는 근대성이 실재와 맺는 변형된 관계를 일컫는 이름이다. 비록 인간의 “욕망하는 기계”는 오로지 대상을 향해 있지만 욕망의 대상으로서 실재는 도달 불가능하다.

 

 

라깡은 “정신분석은 결코 종교를 이길 수 없다. 종교는 파괴 불가능하다. 정신분석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정신분석은 살아남거나 죽을 것이다.”

 

 

라깡은 “프로이드에게 돌아가라”며 엄격하게 욕망을 분석하는 ‘구조적 방식’을 유지하였다. 결국 라깡주의의 이론은 종교로 귀결되지 않으며 라깡의 입장에서 정신분석은 종교에 대한 대안을 제공해 주어야 하며, 이는 프로이트의 비판에 매우 근접한 것이다. 프로이트와는 달리 라깡은 종교에 미래가 있다고, 혹은 적어도 정신분석에서조차 일반적 지평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인정하는 듯 보인다. 결국 종교가 갖는 의미는 인간존재가 실재에서 토대를 갖도록 보장해 줌으로써 인간과 인간의 삶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해준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라깡의 이론과 접목하여 종교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색다른 종교로서의 의미를 부각시켜주고 있다. 거울 이론과 같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상상속의 환상과도 같은 종교가 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러한 종교적 배경을 끊임없이 사색해야 한다. 비판과 사색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종교의 본질에 닿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책을 덮는다.

 

 

p.s: 이 책은 여덟 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윤리와 자본, 무에서부터>에서 갑자기 한 페이지에 두 면의 글이 실려 읽기에 매우 어려움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치 잔칫날처럼 - 고은 대표시선집
고은 지음, 백낙청 외 엮음 / 창비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록 우리가 몇가지 가진 것 없어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의 모습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의 소리 들을 일이다.

우리가 기역 니은 나는 것 없어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고군산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다 가지겠는가.

또 무엇을 생이지지(生而知之)로 안다 하겠는가.

잎새 나서 지고 물도 차면 기우므로

우리도 그것들이 우리 따르듯 따라서

무정(無情)한 것 아닌 몸으로 살다 갈 일이다.

겨우내 얼어있던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하는 생명력 넘치는 봄이 드디어 왔다. 고은 시인은 봄을 '아무리 숨 막히던 긴 겨울이라도 겨울은 끝내 하나의 봄이고야 만다.' 라고 노래한다. '그동안 언 산 언 것들 그대들도 끝내 녹고야 만다.' 기나긴 어둠이 지나고 오는 새벽빛의 아름다움처럼 긴 겨울의 끝에 걸린 봄이란, 일년 중의 가장 아름다운 날이다. 이렇게 봄은 시인의 가슴으로부터 시작된다. 《삶》 이 시는 곱씹을 수록 다가오는 의미가 틀려진다. 나이가 들수록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되고 많은 것을 아무렇지 않게 잊고 산다. 하지만 우리에게의 모든 삶에는 '시'가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란, 자연이 주는 삶의 의미를 배워가는 길이다. 자연과 멀어지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지는 지도 모르겠다. '지는 나무 잎새의 소리'나 '흐득흐득 지는 잎새의 소리 ' 를 들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쓸 지도 모를 일이다. 자연과 더불어 삶을 배우는 자세, 그것이 바로 고은 시인의 매력이다. 

 

시가 오지 않으면 흙을 팠다. 흙 속에 시의 넋이 더러 묻혀 있다가 내 몸에 떨며 들어왔다.

 

고은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김수영시인의 시와 닮은 점들을 발견하곤 하였다. 김수영 시인이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고 한 말처럼 고은의 시는 온 몸으로 써내려 간 시들이었다. 또한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내는 것이라고 했던 김수영의 말처럼 시 전체에서 삶을 온전히 살아가기 위한 눈부신 비상이 어두운 심연으로부터 한 줄기 빛으로 뻗어 오르는 작은 불씨처럼 피어오른다. 고은 시인의 시는 그래서 삶 그 자체이다. 그림자조차 느껴지지 않는 시, 온몸으로 써내려간 그 시속에 넋을 담았다. 우리에게만 존재하는 유일한 아픔인 넋이란, 분단의 아픔을 가진 민족만이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일인칭은 슬프다

 

슬프다 깨달음은 어느새 모순이 된다

지난 세기 초

소비에트 시인들은

'우리들'이라고만 말하기로 했다

'우리들'이라고만

시인 자신을 부르기로 했다

황홀했다

그 결정은

폭설 때문에 

거리에 나가지 못한 채

방 안에 서성거릴 때도 유효했다

저 혼자.

'우리들……'이라고 맹세했다

거울 저쪽에서 나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중략)

그 이래 시인들에게 온통 '나'뿐이다

'나'로 시작해서

'나'로 하루가 저물었다

'나'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모두 이제 '나'가 되었다. '나'가 가지고 있는 슬픔을 말하기에 일인칭은 슬프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느 샌가 우리라는 말이 사라지고 '나'가 그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 우리가 슬퍼해야 하는 이유는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우리'를 잊어버린 '나'를 위해서 슬퍼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회 , '나'로 시작해서 '나'로 하루가 저무는 그런 하루를 사는 것을 슬퍼해야 한다. 누군가가 '시는 가난한 사치'라고 했다.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지는 잎새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치'를 부려볼 수 있다면, 그보다 행복한 삶은 없으리라. 내게 봄이라 하여 가장 호사스러운 사치라면 고은 시인을 만난 시간들이다. 시가 가슴에 사무치도록 들어온 봄날, 고은의 노래를 듣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