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나 - 잔혹한 여신의 속임수
마이클 에니스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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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화려한 시대이기도 하지만, 가장 부패한 시대이기도 한, 그러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시대 르네상스를 만났다.  가장 인간적인 것으로의 회귀, 인간 본연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의 발로로서 르네상스 운동은 역사상 가장 매혹적이고도 이상적인 시대이다. 그래서인지  르네상스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  치명적인 매력을 지녔다. 명실공히 르네상스 시대의 상징인 군주론으로 유명한 마키아벨리와 21세기 여전히 천재로 칭송받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만났다. 《포르투나: 잔혹한 여신의 속임수》이 책은 픽션이 아닌 팩션faction에 근거한 추리소설이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서기관으로서 이탈리아에 들리게 되며 운명적으로 조우한 체사레 보자르와 고급 창녀였던 다미아타와의 만남은 마키아벨리의 인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연쇄 살인 사건과 추적하는 중 밝혀지는 진실들은 후에 군주론이 탄생하게 되는 모티브를 제공한다. 

 

책은 4부로 나누어 진행되고 있는데 1부는 다미아타라는 여인이 쓴 것이고, 나머지 3부는 마키아벨리가 쓴 것이다. 1부 네가 찾고 있는 진실을 조심하라는 다미아타가 아들에게 쓴 글이다르네상스의 꽃이라 불리우는 고급 창녀 다미아타는 교황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후안과 결혼했다. 그러나,  몇 년 전에 후안은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사랑하는 아들 후안의 죽음은 그렇게 잊혀졌지만,  작은 마을에서 목없는 여인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는 다름아닌 후안의 목걸이 였다. 교황은 후안의 죽음에 석연치 않았던 부분과 목없는 여자의 시체와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 다미아타를 마을에 파견한다. 대신 아들을 볼모로 잡고 있겠다는 교황의 명에 후에 아들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기록으로나마 사건의 진실을 남기기 위함이다. 1부는 이렇게 다미아타가 실종되기 전까지의 기록이다.  

 아들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아들이 자신의 진실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 편지를 읽다가 의아스러운 점이 있었다. 바로 여인의 직업이었는데  르네상스 시대 여성의 지위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미아타는 편지에 자신의 직업을 거론하며  르네상스 시대 여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란, 세 가지 뿐이라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결혼이란 부모가 지위가 어느 정도 있고  지참금을 많이 준비할 수 있는 여자가 할 수 있는 것이었고, 부모가 있지만  지참금이 없는 경우에는 정숙한 수녀의 길이 주어진다. 그러나부모도 없고 지참금도 없는 여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창녀의 길이 주어진다. 다미아타의 어머니가 다미아타를 위해서 몸을 팔았듯 다미아타는 살기 위해서 고급 창녀가 되었을 뿐이다. 아들에게 자신이 창녀였다는 사실을 말하는 다미아타의 삶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시대의 모순이었다.

 

후안공작이 살해당하면서 가장 큰 이득을 받은 사람은 단연코 형 체사레 보르자였다. 알렉산더 교황이 동생 후안만을 이뻐할 동안 작은 곳에서 추기경에 만족하고 살아야 했던 체사레는 후안이 죽자, 교회의 세속적 권력을 야심차게 확장해 나갔다. 이제 체사레 보자르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후안의 죽음은 그렇게 잊혀지는 듯 싶더니 목없는 여인의 시체로 인해 후안의 죽음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이때 살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다미아타 역시 체사레와 무관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

 

가장 좋은 진실이란 아흔 아홉이 거짓이고 나머지 한 부분이 참인 거겠죠.

 

교황의 명으로 이몰라에 파견된 다미아타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마키아벨리는 다미아타 근처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발렌티노 공작 밑에서 해부학과 과학수사학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레오나르도를 만난다. 레오나르도의 과학수사는 매우 정교하고 한치의 틈도 없는 완벽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사건은 오히려 더욱 미궁속으로 빠져든다.

 

   이 소설이 장미의 이름과 비견되어지는 이유는 가장 부패하고 세속적인 교회 권력을 고발하는 데에 있다.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심판의 어리석음과 권력부패의 최고 정점을 이루는 교황의 면죄부 판매등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타락하고도 부패한 교회를 여실없이 보여주며 시대정신의 날을 세우는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것으로의 회귀라는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배경을 어림짐작하게 된다. 게다가 잔인하고도 냉혈한이자 연쇄살인범의 실체에 대해서도 장미의 이름의 마지막 반전을 떠오르게 한다.

 

 

소설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최근에 밝혀져 화제가 되었던 레오나르도의 해부 습작 그림이 연상 되어지는 장면들이 세세하게 그려지고 있는 부분이다. 해부학자로서도 천재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는 레오나르도의 과학적 수사는 예술과 과학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주고 사건의 열쇠를 가지고 있던 다미아타라는 여인과 펼쳐지는 마키아벨리와의 로맨스는 추리소설의 재미를 더해주는 기제역할을 한다. 후에 군주론의 모델이 되는 체사레의 등장은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한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 가장 강력한 군주를 위해 집필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인간의 본성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집필된 군주론은 가장 냉혹하고도 잔인한 체사레와 같은 군주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집필되었다는 마키아벨리의 의도를 알게 된다. 역사적 고증을 철저히 지키면서 르네상스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을 그대로 재현해 내었다. 《포르투나: 잔혹한 여신의 속임수》는 사랑과 공포가 공존하는 탐욕과 매혹의 시대로서 생생히 살아 숨쉬는 르네상스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인간은 주로 두가지 중 하나에 의해 움직인다. 그 둘은 사랑과 공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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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의 종교를 넘어
달라이 라마 지음, 이현 옮김 / 김영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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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다양성을 띠면 띨수록 보편성에 대한 가치가 절실해지는 것 같다. 이런 보편성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것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특히 도덕적 가치나 윤리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볼 때도 보편적 윤리는 이러한 인간적인 것을 기준으로 비난이나 칭송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가 빠르게 하나로 묶이게 되면서부터 언제부터인가 세계 모든 경계의 구분이 사라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문명을 만들어왔던 모든 삶의 근간들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 미래경제학자 앨빈 토플러가 말하듯이 제일 먼저 가족의 구조가 해체되고 있고, 매스미디어는 탈대량화되고 있으며, 우리의 생활양식과 가치관이 다변화되면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회가 형성되고 있다. 우리는 제3의 물결 초입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종교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 아마도 달라이 라마의 종교를 넘어가 아닐까 한다. 이제까지 종교는 믿음을 근간으로 하여 지탱해왔다. 예루살렘의 역사를 다룬 예루살렘 전기에서는 이 종교에 대한 믿음의 뿌리가 깊으면 깊을수록 타종교간의 배척의 골도 깊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세 종교(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가 자기들의 종파만을 강요하며 타종교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의 극적인 상황은 이렇게 예루살렘의 역사로 이미 증명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뺏고 빼앗기기를 되풀이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진정한 종교의 의미가 무언인지를 돌아보게 하기도 한다. (넓은 바다와 같이 넓고 큰 덕의 스승이란 뜻의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종교와 정치의 지도자를 일컫는다. 이 책의 저자인 텐진 갸초는 제14대 달라이 라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에 의지하지 않으며 신앙을 가진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똑같이 받아들일 수 있는 도덕에 대한 접근법입니다. 현세적 도덕이 그것입니다.

 

 달라이 라마가 이 책에서 말하는 보편적 도덕에 대해 새로운 현세적 접근법이라는 것은 종교를 넘어서는 이타심에서 비롯된다. 모든 신앙에 대한 서로 간의 관용과 존경을 의미한다는 뜻의 현세적이란 말은 말 그대로 종교의 구별없이 신앙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매우 폭넓은 의미의 사랑이라는 개념이다. 이런 현세적 접근법은 인간에게 도덕과 내적 가치, 개인적 진실성에 대한 진정으로 다가갈 수 있는 보편적이고 지속될 수 있는 접근법이다.

 

*현세적 도덕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을 위해서는 단 두가지의 기본 원리를 인식해야 한다.

첫 번째 원리: 인간 존재라는 우리의 공통성과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우리의 공통된 갈망을 인식하는 것.

두 번째 원리: 인간 실체의 핵심적 특징인 상호의존성을 이해하는 것.

(사회적 동물로서의 생물학적 실체)

 

이렇게 1장에서는 현세적 도덕의 의미와 필요성을 이해시키고 있으며 2장에서는 이런 현세적 도덕을 실행할 수 있는 마음교육에 대한 자아성찰의 장이다 흘러넘칠 듯한 참기름 그릇을 옮기라는 명령을 왕에게서 받은 죄수에 대한 이야기를 '조심스러움'이라는 덕목으로 표현하며 늘 깨어있는 마음과 자각을 통해 나날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연습을 매일 하게 되면 커다란 기쁨과 내적 자신감의 근원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내적 자신감은 다시 타인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게 되며 세상은 종교를 넘어서 행복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종교에도 속해 있지 않다

나의 종교는 사랑

모든 이의 가슴이 나의 시원이다.

 

종교도 이제는 반목과 대립이 아닌 인간에 대한 화해와 평화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데에 희망이 느껴지는 책이다. 인간에 대한 내적가치와 도덕윤리가 점점 퇴색해가고 그 자리를  물질이 대신하고 있는 세상에서 세상이 아무리 변화해도 인간이라면 무조건 타고나는 것은 바로 사랑이 아닌가 한다. 차동엽 신부님이 사랑에게서 나와서 , 사랑으로 살다가, 끝내 사랑의 품에 안기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사랑은 인류를 지탱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다. 달라이 라마는 우리 모두가 도덕의 중요성을 배우고 우리 삶의 기본 관점을 내적 가치에 두게 될 때 우리의 미래는 긍정적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한다. 종교는 이제까지 인류에 굉장한 영향을 끼쳐왔다. 때론 정치와 권력과 결탁하여 전쟁과 학살이라는 역사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보편적 도덕에 대해 새로운 현세적 접근법으로 삶의 방식을 되새겨볼 일이다. 현자의 종교를 넘어서는 사랑이야기에는 깊은 사유로 비롯된 삶의 혜안들이 빛나고 있다. 종교인이 아닌 현자로서 달라이 라마의 위대함이 느껴진다.

 

비참한 부자의 문 앞에 만족한 거지가 잠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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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떻게 이동하는가 - 토플러가 말하는 제3 물결 정치학
앨빈 토플러 & 하이디 토플러 지음, 김원호 옮김 / 청림출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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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제 2의 산업혁명은 세계를 대량생산체제로 변화시켰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량생산은 무척 익숙한 시스템이다. 지금도 이런 대량생산이 건재한 듯 보이지만, 과거와는 전혀 다른 시스템으로 변화하고 있다. 한 바구니에 계란을 많이 담으면 바구니와 계란 모두 위험하듯이, 우리에게 닥친 현재는 바구니에 가득찬 계란과도 같다. 이제 우리는 이 가득찬  계란을 다른 바구니에 나누어 담아야 한다. 앨빈 토플러는 전작 《미래 쇼크》에서 우리의 가족 구조가 해체되고 있고, 매스미디어는 탈대량화되고 있으며, 우리의 생활양식과 가치관이 다변화되면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회가 형성되고 있다고 하였다. 이런 변화된 사회는  과거에 통용되어 왔던 정치적 분석으로는  이제 아무 의미가 없으며 새로운 변화를 읽고 준비하고 학습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닥친 미래의 변화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한다. 토플러가 《정치는 어떻게 이동하는가》에서 주목한 것은 우리에게 닥칠 미래를 이해할 수 있는 거시적인 안목으로서의 ‘정치권력’이다.

 

정치권력이 의회, 대통령, 정부기관, 정당 등의 기존 정치조직들의 손을 떠나 첨단 통신기기들로 연결되어 있는 풀뿌리 집단들과 미디어 쪽으로 계속해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p7

 

《제3의 물결》에서 토플러는 우리가 구시대 문명의 마지막 세대이자 신시대 문명의 첫 번째 세대라는 가설을 기반으로 하며,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과 고통, 방향감각의 상실 등은 저물어가고 있는 제2의 물결 문명과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는 제3의 물결 문명 사이에서 우리 자신과 각급 정치기구들이 겪고 있는 갈등에서 대부분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가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오늘날 모든 선진국들은 제3의 물결과 이미 구식이 되어버린 제2의 물결 사이의 충돌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토플러는 오늘날 사회의 중심이 되는 '정치적 힘'은 바로 제2의 물결에 속해 있는 사람들과 제3의 물결 속에 속해 있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고하며 현대의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한 사람들이 앞으로 일어날 새로운 문명을 이끌어나갈 것이라 예견한다.

 

 

작년에 읽은 《공장의 역사》에서는 현대 경제학이 직면한 위기가 오늘날의 생산의 부의 축적 메커니즘을 종래의 패러다임으로 분석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고 하였다. 우리가 생산의 3요소라 부르는 토지, 노동, 자본이 생산 또는 자본축적의 기본적인 구성요소였지만, 현대의 모든 경제 시스템은 ‘지식’을 근간으로 한다. 따라서, 이제 과거의 생산 요소로는 자본을 축적할 수 없게 되었으며, 전자통신 네트워크가 제 3의 물결 경제의 핵심적인 인프라를 구성한다. 이런 정보화 혁명으로 지식과 정보는 이제 새로운 변화에 가장 중심적인 생산요소가 되었지만,  이런 지식은 계측불가능하고 수치로 환원될 수 없기에 제3의 물결은 제2물결보다 더 불확실성을 띠고 있다.

 

 

“인적자본이 금융자본을 대체했다.”

 

따라서 생산을 이루는 기본요소가 불확실하고도 무제한적인 '지식'으로서의 변화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자연적으로 무효화시켰으며 사회주의의 몰락은 제3의 물결과 충돌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정보과학의 가장 값비싼 자산은 지식이라는 것을 가장 늦게 인식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고르바초프-

 

 

마지막으로 토플러는 제3의 물결정치를 위한 세 가지 원리 -소수자들의 권력, 반직접민주주의, 의사결정의 분배-를 토대로 새로운 정치제도들을 위한 구상을 더 빠르게 시작할수록 새로운 문명으로의 평화로운 전환이 더욱 쉽고 빠르게 변화할 수 있다고 한다.

  최근에 사무실 복사기를 교체했다. 정말 놀라웠던 것은 핸드폰의 사진을 아무 조작없이 복사기로 프린트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놀라움은 최신기계를 접하게 될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다른 무엇도 아닌 기계에 대한 '정보나 지식'이 없으면 사용할 수 없다는 자각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디지털시대, 정보화시대를 산다는 것은 '지식과 정보'가 없으면 청맹과니와도 같다. 이미 '지식과 정보'는 삶의 근간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쉬운 예로 매일 진일보하고 있는 스마트폰에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신기기의 정보를 잘 모르고 있거나, 지식을 공유하지 않는다. 이것도 어쩌면 제3의 물결에 있으면서 제2의 물결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모습이다.

 

이 책에서 주목한 것은 '정치권력'이지만, 그런 정치권력의 거시적인 흐름을 말하기 위해 토플러의 전작인 《미래 쇼크》,《제3의 물결》,《권력이동》등의 내용이 실려있다. 그 이유는  이제까지의 정치권력이 수직적이고 권위적이며 다수에 의해 움직여온 민주주의를 써 왔지만, 제 3의 물결에서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민주주의 제도로 변해야 하는 과도기시대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정치는 어떻게 이동하는가》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토플러의 미래는 '지식'이라는 제 3의 물결위에 새로 써가야할 새문명의 프레임을 짜주고 있다. 그 프레임안에 무엇을 넣을 것인지는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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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기토와 무의식 SIC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엮음, 라깡정신분석연구회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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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프로이트로 돌아가라’

라캉만큼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상가도 없다. 라캉은 캐도 캐도 끝이 없는 미지의 영역을 이루어왔다. 라캉의 전문 분야는 정신분석으로 ‘프로이트로 돌아가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라캉의 견해는 주체라는 생각에 확고하게 매달려 주체를 꾸준히 ‘보호함으로써’ 구조주의적 모델과는 뚜렷하게 달랐다. 구조주의자 이지만, 다른 구조주의자들과는 다른 점은 데카르트가 말한 코기토의 주체가 무의식의 주체였다는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에게 돌아가려면 데카르트를 통해서 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라깡의 거울 단계 이론- 거울에 비추어보듯 자신을 대상화하면서부터 자신의 존재를 믿게되는 것-을 통해 생각하는 자는 ‘생각하는 것’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존재하는 것은 주체가 아니다. 존재하는 우리는 생각하는 우리가 아니며, 더 나아가 존재하는 우리는 궁극적으로 결코 주체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미 우리가 존재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주목해야하고, 우리가 지배자가 될 수 없는 그러한 존재를 붙들고 있는 것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함과 존재감이 일치하는 동일성을 지닌 이 주체의 지위는 ‘상상된 자아’, ‘상상을 통해 오인된 자아’ 이다. 이렇게 존재를 선택하는 것은 탈주체화를 함의하게 될 것이고, 이것은 토대와 일관성에 대한 희망이 없는 혼란 상태이자 합리성 밖에 있는 존재의 블랙홀, 간단히 말해 비존재적인 변덕스러운 상상계 속의 주체를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는 선택에 의해 생겨난 생각을 공허하게 발견하는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의 강요된 선택은 데카르트적 의사 표시의 보이지 않는 진실이며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생각한다’ 라고 주장했고, 라깡은 생각하는 것은 오직 ‘무의식’일 뿐이다 라고 주장한다. (프로이트와 라깡의 '무의식'이란 주장은 같지만, 주체의 자각은 다른 것으로 해석된다)

 

라깡의 중요한 논제는 무의식의 경우보다 더욱 더 철저하다. 프로이트적 주체는 자명하고 통합된 자의식과 아무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철학 자체의 영역 안에 있는 무의식에서 비롯되었으며 무의식이 바로 데카르트적 주체 자체이며 ‘통합된 선험적 주체’의 관념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표준적인 주체성의 철학 모두 ‘무의식’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데, 즉 데카르트 주체를 자명한 자아 또는 인간, 즉‘인격적 개인’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틈새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라깡이 왜 정신분석의 주체가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실체’와 ‘연장된 실체’ 를 정신과 사물로 분리되는 이원론을 추구함으로서 근대적 주체성은 인간을 ‘거대한 존재사슬’의 최고 창조물로서, 즉 우주 진화의 완성점으로서 보는 관념과 아무 관련이 없게 되었다. 근대적 주체성은 주체가 자기 자신을 ‘뒤죽박죽된 것으로’, ‘사물들의 질서’로부터, 즉 실체들의 실증적 질서로부터 배척된 것으로 지각할 때 나타난다. 마치 데카르트가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으로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책의 제 1부는 프로이트적 개념으로서의 코기토의 기초를 제공하며 무의식의 주체가 왜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다르지 않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고, 지젝은 근대적 주체성의 네 가지 기본 양식 뿐만 아니라 그 양식의 내재적 성화까지 정교화한다. 제 2부에서는 데카르트적 기획이 인간 몸의 수수께끼 같은 지위에 관해 연루될 때 생기는 교착상태에 대한 분석이다. 제 3부는 데카르트 주체성의 세 가지 계열체적인 현대 비판들을 이룬다.

 

요즘은 데카르트가 거의 동네북 수준이라, 데카르트의 비판에 대한 책들을 많이 접하고 있다. 이 책은 라캉이 데카르트의 코기토에 대한 비판으로 정신분석에 근거하여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통해 바라본 데카르트의 주체를 분석하는 것이다. 무의식이란 내가 스스로 의도하지 않았지만 잠재되어 있는 것처럼 데카르트가 생각하므로써 존재한다는 주장은 무의식의 발현이며 인간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는 뜻과 같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자각은 실재계가 아니다.  라깡은 코기토에 숨겨진 무의식 '상상을 통해 오인된 자아' 를 분석하며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과  정신분석 사이의 관계에 접근한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정신분석 분야라 매우 난해한 부분도 있지만, 적어도 라깡이 ‘프로이트’로 돌아가라는 의미를 알게 된 것만으로 내게는 큰 수확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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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 - 마흔에 다시 읽는 동양고전 에세이
신정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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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알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마흔이라는 나이에는 시시때때로 딜레마가 찾아오는 나이인가보다. 때론 금전적인 이유로 찾아오기도 하고 때론 정체성에 대한 의문으로 찾아오기도 하고 때론 존재론으로도 찾아오는 것 같다. 내게는 그래도 그런  딜레마를 극복하게 해주는 매개체인 책이 있음에 늘 감사함을 느낀다. 늦은 나이에 다시 시작된 독서이지만, 독서에 빠져 사는 요즘은 가끔 찾아오는 딜레마에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동양고전은 마음을 다잡아주는 데는 최고의 책이었다. 이미 사람들은 오래된 고전에서 삶의 지혜를 찾기도 하고 마음의 치유를 얻고 있듯이 동양고전은 마음의 뿌리와 같은 존재이다. 특히 불혹이란 나이는 사회생활에 적응되며 기반이 형성되어 있는 나이인 동시에 가정을 책임지는 나이이기 때문에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나이이다. 참 이상한 것은 어른들이라면 잘 해야 하고 잘 한다고 생각했던 문제들이 실제 내 문제로 다가왔을 때는 어른처럼 행동하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쉽게 말하면  마흔에는 선택이나 결정을 잘 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더욱 고민되고 갈팡질팡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여전히 자기성찰의 책이나 마음을 다잡아주는 책을 떼지 못하는 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마흔을 타겟으로 한 성찰과 힐링이 붐을 이루는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한다. 마흔만 되면 척척 잘 할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 나이만 먹고 마음은 한치도 자라지 않은 경우를 깨닫고는 공자가 마흔에는 어떤 유혹에도 혹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나는 왜 아직도 혹하는 것이 많을까하는 자각으로  삶의 본질을 마주하고 싶은 욕구가 그대로 반영된 심리적 불안감 같은 것.

 

어쩌면 그것은 인생의 반을 지나왔기에 삶을 다시 재정비하는 차원에서는 필수불가결한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저자 신정근은 이렇게 마흔의 나이에 삶을 재정비하는 차원에서 동양고전에서 말하는 마흔을 이야기한다. 요즘 우리 부부는  ‘당신도 늙는구나.’ 하는 말을 자주 한다.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늙음을 최근에  더 자주 느끼고 있다. 이렇게 서로에게서 ‘노화’를 확인하는 시간은 때때로 서글픔을 주기도 한다. 저자는 보통 사람들이 '노화'에 대해 세 가지 반응 양상을 보인다고 하는데 첫째가 저항, 둘째가 순응, 셋째가 자유이다.

 

여기서 저자는 영화 은교에서 이적요 시인의 말을 인용하여 노화를 정의해주고 있다.

“너희의 젊음이 노력해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듯이, 젊음과 늙음은 그 자체로 상도 아니고 벌도 아니다. 노화는 다시, 아니 또 시작하는 것이다. 마흔의 노화는 10대의 사춘기, 20대의 청춘기처럼 다시 한 번 자신의 나이에 일어나는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시작을 하는 때이다.

 

 

그래서 마흔이라는 나이는 삶의 한가운데에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책의 1부 불혹不惑(불혹), 혹하지 아니하리라' 에서는 마흔에 재정비되지 않으면 흔들리기 쉬운 감정들(나이듦과 욕심, 편견, 권위, 초발심, 용기)이라는 키워드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인지를 떠올리게 해주며 이에 대한 답을 『논어』『장자』『중용』『시경』부터 『한비자』『세설신어』『성학집요』와 같은 동양고전에서 찾는다.

 

“발꿈치를 들면 편하게 서 있지 못하고, 다리가 찢어지게 걸으면 오래 걷지 못한다. 자신이 보려고 하면 분명하게 보이지 않고, 자신이 기준이 되려고 하면 길이 환히 빛나지 않으며, 자신을 자랑하면 공이 없어지고,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면 어른이 되지 못한다. -노자 24장-

 

 

2부 유혹 誘惑 , 혹해도 좋지 아니한가 에서는 마흔에 가져야 할 마음으로 가장 우선적으로 ‘초발심’을 말하고 있다.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힘을 초발심이라고 하는데 저자는 마흔에는 이제까지 잊고 있었던 일상의 소중함, 평상의 소중한 가치를 돌아보기 위해 노력해여 한다고 한다. 그래서  필요한 첫 번째 마음가짐이 바로 초발심이다. 이제까지 바쁘게 살아오면서 잊고 살아왔던 것들을 다시 돌아보는 것을 시작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계절이 주는 황홀함, 집이 주는 평온함과 같은 우리 일상에 대해 진정한 가치를 깨닫고 다시 새로운 인생을 정립해야 하는 출발점을 알려주고 있다. 특히 5장에서 <의미 있는 삶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한가>에서는  이순신과 박지원, 묵자의 이야기를 통해 이제까지 ‘나’의 삶에 치중했던 삶에서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삶을 준비할 수 있는 의미'를 되새겨준다.

 

 

이 책이 또하나 재미있었던 것은 감성이 가득한 노래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반추한다는 것이다. 우리 가족의 취미는 7080노래 듣기이다. 처음에 그냥 들었던 아이들은 우리보다 더  7080 노래를 좋아한다.  지금은 서로 좋아하는 가사를 공유할 정도로 7080에 빠져있는 중이다.  들을 때마다 감성에 새로운 자극을 주고 신곡에서 느낄 수 없는 삶의 고독과 인생의 깊이가 느껴지는 곡들은 언제나 새롭다. 그래서인지 책의 각 장  마지막 부분에 '노래에 실린 인생, 인생을 실은 노래' 를 읽을 때 공통된 감성을 느끼고 나누는 기분이 들어 즐겁고 친근한 느낌이었다. 그런 공통된 감성때문인지 나도 때로는 , 여전히 흔들리는 삶을 살고 있지만, 마흔에 인생을 다시 돌아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는 저자의 말은 내 삶을 향한 응원처럼 들린다. ‘아직 늦지 않았어, 다시 시작하는 거야 !' 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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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6 09: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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