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열심히 살아도 본전인생을 면치 못할까? - 세상에 휘둘리지 않기 위한 개인의 전략
이건호 지음 / 와이즈베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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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을 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단 두 가지 방법으로 축약하자면, 아무 생각 없이 살거나, 생각 있게 사는 방법이다. 인생후반기로 갈수록 인생전반에 대한 생각이 없다는 것은 불안전한 삶을 살고 있는 것과 같다. 게다가 스마트폰의 영향은 지적인 사유를 하지 못하는 상태까지 몰아대고 있다. 앞으로는 책읽기 어려운 시대가 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 정도이다. 왜 나는 열심히 살아도 본전인생을 면치 못할까?이 책은 제목을 잘못 지은 책이다. 오래 전 구본형 선생님의 인생경영전략서들을 많이 접해보았는데 이 책은 구본형 선생님의 인생전략서들을 능가한다. 매우 실질적이면서도 매우 잘 짜여져 있는 전략서들이다. 그러나 제목이 주는 뉘앙스가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는 기분이 든다. 지형시세地形時勢 전략서와 같은 인문과 병법의 매우 세련되게 조합하여 탁월한 인생전략이 들어있는 전략서이다.

 

미국의 장기적인 경제침체와 더불어 세계는 거대한 토네이도에 휩싸여있다. 불황이라는 거대한 그림자들이 점점 경기를 물들어가고 있는 것을 느끼는 요즘은 인생에 대한 전략이 가장 필요한 때이다여전히 개념이 없는 사람들은 이 불황이 단기간에 해결된 문제라 보고 있지만, 지금의 경제침체는 그동안 오랫동안 쌓였던 구조적인 문제들이 쌓이고 쌓여 곪아 터진 상태라는 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이며 장기간의 불황으로 치닫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큰 문제이다.  결코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들이 아닌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방법에 대해 전략을 짜지 않으면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는 더욱 불확실하고 불안한 디스토피아가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더군다나  자본주의 시스템이 '알지 못하면 도태되는 시스템이 아닌가?

 

전략을 가진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전략을 가진 자는 세상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전략은 과거 특수한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전략이란 자체가 매우 이질적인 언어였다. 그러나, 과거 전략을 가진 자는 세상을 지배했었다. 역으로 전략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지배당하지 않는다. 저자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개인들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장하고 있으며  평범한 개인들에게는 세 가지의 경쟁자가 있다고 한다.  

첫째. ‘과거의 자신이다.

둘째. ‘현재의 타인이다.

셋째. ‘미래의 불확실성이다.

 

저자는 자신과의 경쟁을 극복해야하는 첫 번째 이유가 과거에는 생존을 위해서 본능적인 혁신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보다 나은 자신을 만드는데 있다는 것을 전략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본다.보다 나은 자신을 만드는 데 필요한 본질적인 것은 인간의 생물적 유전자(gene)와 문화적 유전자(meme)가 자기 혁신의 대상이 된다. 진화하고자 하는 인간은 자신에게 불리한 생물적 유전자를 통제하고 보다 이로운 문화적 유전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죽을 때까지 자신과 경쟁해야 한다. 저자는 자신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첫째로 자신의 롤 모델을 세운 뒤 모방하며 뚜렷한 목표의식, 신념, 성실함, 인내와 같은 본질적인 가치들이 더 나은 자신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것들이라고 한다. 자신과의 경쟁에서 이긴 사람은 타인과의 경쟁에서 성공할 확률이 매우 높다. 저자는 특히나 스마트폰이 가져다 준 사색의 아웃소싱에 대해서도 스마트폰으로 직관과 추론, 상상이 가능해졌지만, 가장 중요한 것,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고하는 힘이 더욱 절실해졌다고 한다. 환경의 불확실성이 높아질수록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보다는 직관력이나 상상력 같은 지적 역량이 더욱 필요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20년간 전략 컨설턴트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자신과의 경쟁을 가장 우선적으로 매일 같이 하고 있다. 자신이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을 모방하며 그 길을 가기위해 일신우일신하는 모습이 가장 인상적으로 남는 부분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진리는 , 사람의 생태적인 면은 절대 바뀔 수 없는 것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처럼, 모든 시작은 자신을 다스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신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은 모든 면에서 승리할 수 있다. 인생의 전략 지형지세地形時勢의 전략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인생 병법서이기도 하지만, 더 나은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싶다면 꼭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세상을 생각있게 사는 것도 자신이고 생각없이 사는 것도 자신의 몫이기에 .. 선택도 자신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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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떻게 이동하는가 - 토플러가 말하는 제3 물결 정치학
앨빈 토플러 & 하이디 토플러 지음, 김원호 옮김 / 청림출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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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치의 탄생을 위한 지침서.매우 시의적절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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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홍신 세계문학 13
레오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최경준 옮김 / 홍신문화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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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읽은 《안나 카레니나》이후 십년 뒤의 작품이다. 부활의 주인공 네흘류도프는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 레빈과 매우 흡사한 캐릭터이다. 레빈의 청교도적인 사고와 노동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모습이라든지 삶에 대한 애착, 도덕적인 신념들을 <부활>의 주인공 네흘류도프에게서도 똑같이 볼 수 있다. 이 주인공들을 통해 작품 전반에 흐르는 기독교적인 사상과 삶을 깨달아가는 과정들이 바로 ‘톨스토이주의’ 즉, 기독교적 아나키즘이라 평가하는 톨스토이의 사상적인 면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이런 ‘톨스토의주의’가 가장 잘 표현되어진 주인공이 바로 부활의 주인공 네흘류도프라 여겨진다.

 

고모 집에서 반은 하녀, 반은 양녀 같은 존재로 자란 카튜샤. 이런 어정쩡한 신분은 어린 카튜샤가 반은 상류사회, 반은 하류사회에 익숙하다는 말이다. 충분히 독립할 수 있음에도 고모 집을 떠나지 않았던 것도, 고모 집을 떠나서 하녀로서만 살아가기 싫었고, 나이가 차 혼담이 들어 올 때마다 하류층 사람들의 삶이 눈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그러던 중, 고모들의 조카 네흘류도프는 완벽하고 멋진 상류층 남자로 보이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순수하고 깨끗한 그리고 도덕적인 청년이었던 네흘류도프는 카튜샤와 사랑에 빠지고 순전히 정신적인 사랑을 나눈다. 그 뒤 3년, 군대에 간 네흘류도프는 변해 있었다. 모든 훌륭한 일에는 자기의 생명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순진하고 헌신적이었던 그는 몇 년의 군대생활로 자기의 쾌락만을 사랑하는 타락하고 세련된 이기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이 모든 무서운 변화가 그에게 생긴 것은 그가 스스로를 믿지 안하고 남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자기를 믿지 않고 남을 믿게 된 것은 자기를 믿으면서 산다는 것이 너무나도 괴롭기 때문이었다.-p71

 

 

이런 변화는 네흘류도프에게 정신적으로 깊은 사랑으로 연결되어지곤 하던 카튜샤를 쾌락의 도구로 삼으면서 타락해간다. 네흘류도프는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카튜샤를 범하지만, 이후 100루블을 전해주는 것으로 자신의 죄를 잊고 살게 되고 이후 카튜샤는 크나큰 불행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는데, 네흘류도프와의 하룻밤으로 카튜샤는 임신 하게 되고 몸이 무거워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고모들은 카튜샤를 쫓아낸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아이는 죽고 예쁘고 아름다웠던 카튜샤는 자연적인 수순을 밟아 유곽에 발을 들여놓게 되고 그곳에서 7년을 살았다. 타락한지, 8년이 되는 해에 카튜샤는 감옥에 들어가게 되는 사건으로 법정에 서게 되고 배심원으로 참여한 네흘류도프와 조우하게 된다.

 

 

카튜샤와 네흘류도프의 만남은 네흘류도프에게 커다란 정신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타락했던 영혼이자 대지주였던 네흘류도프를 순진하고 헌신적인 , 곧은 기질과 정열의 네흘류도프로 바뀌게 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너무나 순결하고 아름다웠던 카튜샤가 자신이 첫날 밤 희롱하고 버린 인생의 잔인함을 카튜샤에게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네흘류도프에게 더욱 큰 죄책감과 고통을 준 것은 카튜샤에게 선고 된 ‘시베리아 유형’이라는 형벌이다. 이성적이었고 높은 신분의 네흘류도프는 고아였고 여자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몰아가는 법의 이면으로 죄책감만이 아닌, 사회의 부조리한 모든 것에 대해 고통을 느낀다.

 

사냥터에서 상처 입은 새를 죽여버려야 할 때 경험하는 몸서리치고 불쌍하고 괴로운,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p98 

 

카튜샤가 시베리아 유형을 받은 날, 카튜샤는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첫사랑 네흘류도프에게 버림받으며 이후 만난 모든 남자들이 자신을 쾌락의 상대로만 대했으며 남자들 모두 자신의 아름다움을 칭찬했건만, 자신을 모두 유죄라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남자'들이라는 사실에 그녀는 처음으로 환멸을 느낀다. 그런 그녀에게 매일 같이 찾아와 용서를 빌고 희생을 무릅쓰고 결혼하자고 졸라대는 네흘류도프를 따라 변화된 삶을 살게 되지만, 카튜샤에게 네흘류도프는 넘지 못하는 큰 벽이 있었다. 이후 네흘류도프와 카튜샤의 눈부신 내면의 변화가 일어난다.

 

《부활》의 주인공 네흘류도프는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보다 더욱 종교적이고 더욱 도덕적인 관점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이다. 또한 매우 영적이다. 톨스토이는 끊임없이 인간의 자아를 영적인 자아와  물질적인 자아로 나누어 두 자아가 네흘류도프의  내면 세계에서 치열하게 싸우며 선택해가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는데 이런 내면 심리에 대한 탁월한 서술방법은 '인간'의 자아와 욕망에 대해서 깊은 사유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힘이 있다. 이런 두 개의 자아는 기독교적인 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 영혼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편으로는 네흘류도프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매우 인상적으로 느꼈는데 ‘Cogito’(나는 생각한다)라는 데카르트의 근대적 세계관이 아닌  ‘우리는 생각한다’라는 세계관을 <부활>에서도 발견하게 되었다. 오로지 인간만이 유일한 세계상이 아닌 각자의 세계로터 우리의 공통세계를 함께 만들어나간다는 ‘Cogitamus’ 세계관을 부활의 주인공에게서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다. 바로 이 부분 ' 이 세상 모든 것은 생명이 있으며 생명이 없는 것은 없다. 우리가 생명 없는 무기물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물체는 우리가 꿰뚫어 볼 수 없는 거대한 유기체의 한 단위인 사람의 사명은 이 유기체와 모든 살아있는 생명을 지켜나가는 데 있다.(p529) 이런 행위의 중심에 카튜샤와 네흘류도프가 있다. 이기적이었던 대지주 네흘류도프가 회개한 후 이웃에게 희생하며 삶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모습과 카튜샤가 7년동안 화려하게 치장하며 타락해가는 모습보다 고난과 노동에 길들여지며 이웃에게 봉사한 2개월을 더욱 보람되고 가치있게 여기는 모습에서 이들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이었는지를 떠올려보는 시간들이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모든 것’만 찾고 있다. 그러므로 발견될 까닭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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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얼룩진 교과서 1
모모세 시노부 지음, 한성례 옮김, 사카모토 유지 극본 / 느낌이있는책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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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친구들 가족과 저녁식사를 했다. 친구의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 나이가 같아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아 아이들에게도 좋은 시간들이라 여겼는데 이야기에 바쁜 어른들과는 달리 아이들은 대화 한 마디 없이 서로 어른들 핸드폰 하나씩 들고 앉아서는 오락에 열중하는 모습이다. 순간 우리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명절이나 추석, 가족 모임이 있을 때조차 모두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앞으로도 큰일이라는 한숨 아닌 한숨을 토해낼 수 밖에 없었다. 대화가 없는 아이들, 얼굴을 보기보다 핸드폰 액정이 더 좋은 아이들이 사회에 나아가 제대로 사람을 사랑할 수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설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된 현실을 어찌 아이들 탓만 할 수 있을까 . 어른들조차 시간 나는 대로 핸드폰을 보고 있기는 매한가지이다. 불통의 시대라며 소통의 매체들은 증가하지만, 정작 사람과 사람사이에 존재하는 믿음이 바탕이 되는 소통은 사라지고 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진정한 맨얼굴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들의 얼룩진 교과서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동급생의 극작가 사카모토 유지가 극본한 일본판 도가니라 할 수 있다. 학교의 집단 폭력에 의한 사고가 많이 발생하고 있지만 딱히 대안은 세워지지 않고 있는 교육환경에 대한 비판과 학교를 둘러 싼 선생들과 학생들간의 불통으로 인한 문제들을 직접 조명해주는 이 책은 비단 일본 사회문제 만이 아닌 우리나라 역시도 폭력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던 핫이슈들-교사의 자질문제나 학생들의 폭력과 자살-등이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빈번히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이 사건들로 우리나라에서도 교사의 자질문제와 공교육의 문제가 자주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사태로 볼 때 우리나라의 교육환경도 폭력의 사각지대에 놓여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정식은 아니지만, 임시담임을 맡으면서 교사라는 직업에 꿈을 가득안고 2학년 3반 교실에 선 가지 고헤이선생. 처음 시작하는 이들에게 볼 수 있는 순수한 열정을 가진 가지 고헤이는 첫 수업에서부터 운동장에 혼자 앉아 있는 아이자와와 면담하게 된다. 처음 만난 선생에게 아이자와라는 학생의 질문

 선생님 ,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은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질문으로 선생과 학생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믿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싹을 피우고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믿음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것임에도 소설에 등장하는 학교의 선생들은 이 질문에 모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밤이면 고급 요정에 호스티스로 변신하는 요시코시 선생, 딸이 성추행을 당했는데도 학교에서 짤릴 까봐 전전긍긍하는 구시하라 선생, 집단 폭력 가학생을 찔러 교도소에 간 아들을 둔 교감 아메키, 도박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자 딸 양육비로 돈이 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는 도이타 선생, 학생의 아버지와 불륜을 저질러 타학교에서 쫓겨난 오시로 선생 등 하나 같이 정상이 아닌 , 선생 다운 선생이 없는 이 학교에서는 세상을 바꿀 힘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순수한 열정이 가득했던 가지 고헤이는 그나마 자신의 작은 믿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유일한 선생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맡은 반에서 아이자와가 학교 창문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나고, 끝내 사망하자 학교는 각종 언론매체의 질타를 받게 되는데  아이자와가 추락사한 이유를 조사하던 중, 아이자와가 죽기 전 집단 폭력을 당했을 경우에 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가지와  변호사 쓰미키는 집단 폭력의 피해자로서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핏줄 하나 섞이지 않았지만, 젊은 날 사랑하여 결혼한 남자의 아이였던 아이자와. 쓰미키는 칠년 전 홀연히 사라져버린 남편을 원망하며 이혼한 이후 아이자와를 보육원에 버리고 이후 고시 공부에 전념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애정도 없었고 사라진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거의 방치하였던 아이자와를 보육원에 버리는 순간까지도 쓰미키를 원망하기는 커녕 붕어빵 꼬리부터 먹는 모습이 자기와 같다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던 아이자와가 학교에서 집단 폭력을 당했다는 증거를 찾게 되면서 쓰미키는 자신을 엄마라고 믿고 있었던 아이자와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러나, 이 소송으로 쓰미키는 약혼자 세리에게 파혼당하고 로펌에서 쫓겨난다. 쓰미키가  학교를 상대로  낸 소송은  가지의 입장 또한 난처해지는데 학교 선생들은 가지가 쓰미키와 자주 만난다는 이유로 가지를 철저히 따돌린다.

 

여기에서 가지의 변심으로 소설은 또 한번의 갈등의 고조를 이룬다. 소설에서 교사로서의 사명감을 가진 유일한 선생님이었지만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순간 결국 가지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믿음을 스스로 포기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삶의 기준이 무엇이 되는 것에만 치우쳐 결국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버리는 순간처럼 가지는 교사가 되기 위해 자신이 지켜왔던 교사로서의 소중한 믿음을 어쩔 수 없이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가지는  다른 선생들처럼  세상의 비난으로부터 학교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하에 집단 폭력 사실을 애써 부인하고 은폐하려는 학교 편에서 애써 아이자와의 믿음을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송이 진행되면서 서서히 학교를 감싸고 있던 비밀의 베일들이 하나 둘씩 벗겨지면서 집단 폭력의 배후자가 드러나고 이것은 또 다른 폭행을 불러일으키는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로써 학교는 다시한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소송진행중  가해학생이 법정에 서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며 느꼈던 공포와 친구들과 암묵적인 동의아래 벌어지게 되는 집단 폭력이 주는 고통은 읽으면서도 무척이나 가슴 아픈 장면이다. 폭행은 또 다른 폭행을 불러일으킨다. 피해학생들에게는 오로지 죽음만이 탈출구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런 모든 사건들이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란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햇볕을 잘 받은 풀이 곧게 자랄 수 있고 사랑을 많이 받은 아이가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아이가 되는 것처럼 세상은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아이들은 그 믿음으로 성장하게 된다. 소설의 첫 시작에서 시작된 질문은 마지막에서도 계속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과 꿈을 아이들에게 주는 어른들이 되는 것이 일그러진 우리 사회의 얼굴을 활짝 필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

   자라는 아이들에게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해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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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 혜민 스님과 함께하는 내 마음 다시보기
혜민 지음, 이영철 그림 / 쌤앤파커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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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 스님이 더불어 사는 삶 가운데 세워진 삶의 철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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