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 혜민 스님과 함께하는 내 마음 다시보기
혜민 지음, 이영철 그림 / 쌤앤파커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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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생각을 하는가가 을 만들고,

어떤 말을 하는가가 행동이 되며,

반복된 행동이 습관으로 굳어지면

그게 바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읽으면서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시때때로 감정선을 잘 조절하지 못하는 나는 늘 후회를 달고 사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고요할 수 있다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나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간절함이 때론 나를 지배하곤 한다. 세상 속의 나는 아직도 세상의 시끄러움에 적응이 되지 않는다. 요즘 들어 자주 산에 가는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살고 싶다는 소망보다는 그저 자연이 주는 침묵이 좋다. 책 첫장을 열고 저자의 약력을 보며 참 독특하다는 생각을 했다. 특별히 관심을 가져보지 않았기에 혜민 스님이 승려이면서 미국 대학 교수인 줄은 몰랐다. 그런 독특한 이력을 뒤로 한 채 읽어나가는 동안 책이 주는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될수록 글 한자 한자에서 맑고 곧은 영혼과 마주하는 느낌이다. 혜민 스님이 써내려간 글은 그가 대학교수라서가 아니라, 종교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이다. 일반인도 아닌 종교인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과거  종교인이라는 선입견의 틀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고통인지 조금 경험해 보았던 적이 있어서이다. 종교인으로서 세상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이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뜻과 같다.

 

‘혼자서 도 닦은 것이 무슨 소용인가. 함께 행복해야지.’ 라는 생각을 시작한 트윗에서 많은 인기를 누렸다고 하지만, 혜민 스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이 마음에서 ‘더불어 사는 사회’를 몸소 실천하는 행동하는 종교인이라는 믿음으로 다가서게 한다. 책을 읽으면서 더욱 공감이 갔던 것도 늘 사회생활에서 느꼈던 괴로움과 피로함을 이해해주고 위로해주고 있어 마치 스님이 나를 투영하고 있는 기분이다. 특히 사회생활에서 가장 힘든 부분인 인간관계부분은 가슴에 무척 와 닿는 부분이었다.

 

 

첫째는 , 내가 상상하는 것만큼 세상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가끔씩 나를 혼란하게 하는 인간 관계는 사람들의 관심에 대해 그만큼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의무감과 정성을 보여야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인간관계를 늘 상호적 관계로 생각했던 내게 이 말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이 오히려 나를 더 힘들게 했다는 것을 떠올리며 세상 사람들이 ‘나’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 마치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 글을 보는 순간 한줄기 섬광과도 같은 자각이 나를 깨웠다.

 

둘째,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해줄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이다.

셋째, 남을 위한다하면서 하는 거의 모든 행위들은 사실 나를 위해 하는 것이었다는 깨달음이다.

 이 세가지의 말씀들이  비로소 ‘나’를 내려놓게 하고 있었다.

 

혜민 스님의 삶을 관통하는 지혜들은 혜민 스님이 ‘더불어 사는 삶’ 가운데 세워진 삶의 철학이기에 더욱 가슴 깊이 다가오는 신앙서와 같다. 살면서 가장 경멸하게 되는 것은 말이 행동보다 앞설 때이다. 생각이 말을 만들고 말이 행동이 될 때 그것이 진정한 인생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것은 삶을 관통하는 철학이 뼈대가 될 때 인생은 고요해질 수 있다. 혜민 스님의 책은 모든 말들이 진실의 알곡으로 가득차 있다. 삶의 심심한 위로와 격려, 그리고 사랑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기를 권한다. 아름다움을 마주 한 순간의 경이로움처럼 멈추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인생에 어떤 고난이 와도 흔들리지 않게 해줄 든든한 인생의 뼈대를 세워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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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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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 민주 공화국

부시대통령은 20021월 이란과 북한,이라크를 "악의 축(axis of evil)" 에 포함시켰다. 이것은 미국이 반테러리즘을 빙자해 제국주의적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행위와도 같다. 소설에는 부시대통령과 거의 흡사한 인물로 미국의 번즈 대통령이 나온다. 미국이 규정한 악의 축에 대항하여 국제사회는 미국이  전 세계의 전략적 균형을 심각하게 뒤흔들었고 미국의 테러리즘뿐 아니라 미국의 일방주의에도 맞서야 한다고 했던 적이 있다.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있다며 국제사회에 동참을 강요하였던 미국은  이라크전쟁을 일으켜 자신의 경제발판의 도구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콩고의 막대한 자원(대량의 지하자원, 다이아몬드,컴퓨터에 쓰이는 희귀금속, 그리고 유전)등의 확보를 위해 내전을 지원하면서도 인근 지역의 우간다와 르간다와 벌이는 전쟁에 자금을 지원하는 이중 정책을 쓰고 있었다.  오랜 내전을 겪고 있는 콩고 민주 공화국에 에볼라 바이러스가 출현했으며 에볼라 바이러스는 인류가 조우한 병 중에 가장 위험한 감염증이다. 감염 즉시 바이러스가 뇌를 포함한 모든 세포를 먹어치우는 바이러스의 집단 감염 지역을 말살하기 위해 가디언 작전이 실시된다. 소설은 이렇게 표면상으로는 에볼라 바이러스의 박멸을 가장하여 인류를 구원하는 선善의 이미지를 띠고 있지만, 실제로 콩고의 자원 이권에 대한 탈취와  원주민을 제노사이드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 식민주의 정책과는 다른 형태의 신제국주의 형태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제까지 자본주의의 역사처럼 말이다.

 

인류에서 가장 뛰어난 지성인 루벤스

IQ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뛰어난 두뇌를 가진 루벤스는 현인류 중에서 가장 뛰어난 지성인 (인물)이다. 현인류의 천재절차를 밟아 온 루벤스를 매혹시킨 것은 단 하나. 과학이라는 학문이다. 인류가 축적해 온 지식에 대한 모든 것을 거슬러 오는 여행은 루벤스에게 가장 커다란 재미이자 오락이었지만 과학의 지적 진보는 아쉽게도 19세기 이후 멈추어 있다.  루벤스는 과학에서  더 나아가 철학에 심취하며 전쟁 심리학에 까지 지적 호기심이 미치게 되었는데 이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천재 절차를 거치게 되면서 터득한 인간 세계에 적응하는 방법의 귀결이다. 이후 루벤스는 우등한 자로서의 역할 즉,  잔혹한 관찰자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는데  지적으로 열등한 생물일수록 열등의식의 표출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뛰어났기 때문에 늘 견제를 받아야했고 자신의 열등감으로 경쟁하려는 인간들로 인해 피로함을 느꼈던 그는 자연적으로 관찰자의 시선을 택하게 된 것. 이미 스무 살에 박사학위까지 수여받았던 루벤스는 이후 인간 본성에 관심을 두게 되고 그 인간 본성에 숨겨져 있는 야만성을 고찰하는 전쟁 심리학에 심취하게 되면서 번즈 대통령을 가까운 곳에서 관찰하게 된다. 번즈 대통령이야말로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수만명을 죽일 수 있는 인간 세상에서 가장 잔혹할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번즈 대통령을 꿰뚫어보고 있었으며 번즈 대통령을 통해 전쟁심리를 파악하고 있었던 루벤스는  네메시스 (신종 인류출현말살계획)를 총지휘하게 되면서 하이즈먼 리포트에서 예견하였던 진화생물의 출현을 발견하게 되고 인류에서 가장 뛰어났던 루벤스보다 더 뛰어난 두뇌(지성)의 소유자인 초월적인 지성을 의미하는‘누스(Nous)’로 명명되는 신종 인류인 아키리를 마주하게 된다.

 

일본에 약학 대학원생 겐토

바이러스 학자인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아들 겐토에게 아버지로부터 메일이 도착한다. 아버지의 메일을 본 순간 아버지가 자신의 죽음을 대비하여 자신에게 자동발송 메일을 써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겐토는  불치병 폐포 상피 세포 경화증을 치료하던 아버지의 연구를 얼떨결에 이어 받게 된다. 연구의 내용이 아버지가 남겨 놓은 노트북 안에 그대로 들어있었고 불치병을 치료하는 약을 개발하면 세계 10만명을 살릴 수 있다는 공명심(公明心)이 강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구를 시작하게 되면서 미국 정보기관과 일본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는데 이때 고립무원 상태가 된 겐토를 구원해준 것은 다름아닌 '파피'라 불리는 익명인이다. 그리고 또 한명의  사카이 유리라는 정체불명의 여인과  위기에 처해 있을 때마다 겐토를 도와주는 또하나의 조력자와  같은 대학원에서  제약연구를 하는 한국인 친구 이정훈이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한 축을 이룬다.  

 

하이즈먼 리포트(인류멸망보고서)의 마지막에는

현생인류에서 진화한 다음 세대의 인간은 대뇌신피질이 보다 크고 우리를 훨씬 능가하는 압도적인 지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지적 능력을 올리비에는 이렇게 상상했다. ‘4차원의 이해, 전체의 복잡한 상황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점, 6감의 획득, 무한히 발달한 도덕의식 보유, 특히 우리의 지적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정신적 특질의 소유.’

(이런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는 세살짜리 아이 아키리이다.) 

 

 

제노사이드

이러한 진화생물이 바로 콩고강 깊숙한 곳에 자리한 피그미족으로 구성된 캉가 밴드에 출현하였다. 일반인 기준보다 작은 체구에 약 사십명 정도 되는 이들을 말살하고 미국인 인류학자 피어스를 죽이는 것이 일명 가디언 작전이다. 이 가디언 작전에 참여하게 된 이들은 마이어스와 개럿, 일본인 믹, 대장 예거이다. 이중 예거의 아들은 겐토가 연구중인 불치병 폐포 상피 세포 경화증을 앓고 있는데 극중의 예거는 이상적인 양심과 도덕성과 이성을 겸비한 리더이다. 작가는 예거라는 인물을 통해 전쟁 가운데에서도 가장 이상적이고도 인간적인 보편적인 선善을 보여주고 있다. 예거의 아들이 앓고 있는 병  ‘폐포 상피 세포 경화증’ 은 신인류종과 전혀 상관없이 진행되지만, 여기서 작가는 이 병으로 인해 또 하나의 연결선을 만들어 놓았다.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거나 근친간의 교배로 인하여 발생되는 페포 상피 세포 경화증의 치료약은 신인류종인 아키리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었으며, 이것은 사건의 흐름에 아주 커다란 복선이 된다.

 

무서운 것은 지력이 아니고, 하물며 무력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이의 인격입니다.” 

 

전쟁 한 복판의 콩고에서 목격하게 되는 전쟁들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지옥을 연상하게 하는데 이 전쟁장면들을 통해 <제노사이드>가 말하고자 하는 뜻이 어렴풋이 다가오는 기분이 들었다. 작가는 언어나 화려한 글로 표현하는 대신 오로지 행동과 보여 지는 것만으로 전쟁을 말하고 있는데 제 3자의 시선에 의지하여 전쟁의 한 장면을 보는 기분이다. 예거 일행이 정글에서 처음 마주한 침팬지들의 싸움을 보며 하찮은 종으로 깔보는 시선이라든지 침팬지들을 지성인이 가진 잔인성을 마치 인간들로 표현하는 부분들을 보며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드는 이유도 그것을 바라보는 제 3자의 생각들을 통해 독자와 등장인물간의 유대감과 동질감이 느껴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작가의 그런 의도는 전쟁을 선입견 없이 바라보게 하는 동시에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이끌어 내고 있다. 이어  민간인 부대가 원주민들에게 가하는 잔인함과 폭력성에서도 철저히 예거의 시선으로 전쟁을 바라보게 되는데  이때  침팬지의 싸움과 바로 연상되어 인간들이 가지고 있던 종족 우월성등을 가감히 깨어버리게 한다. 그것은 마지막 전쟁에서 소년병들의 등장을 통해 철저히 확인되는 부분이다. 소년병들이 총을 들고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과 소년병의 죽음은 인간 본성에 깃들여 있는 폭력성과 야만성에 방점을 찍어주는 부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쟁중에서도 가장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인간미를 지닌 예거를 통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장점, 사랑과 인격에 대한 부분을 부각시키며 선명하게 주제의식을 각인시키고 있다.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선의 의미를 깨닫게 인도해주고 있는 과정처럼 보여지는데 책의 중간에  한국인을 조센징이라고 깔보는 겐토의 할아버지에게  겐토가 반기를 드는 모습이나 한국인 이정훈을 처음 본 순간 친근함에 사로잡히며 둘이 나누는 우정의 모습들은 작가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세계,  인종차별을 넘어서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시각으로서 인류를  그리고 있다는 점은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이다.. 

 

무력으로 이기는 쪽이 미치고 날뛰며 다른 인종을 도륙하는 모습은

어느 민족이 보다 열등한지 명백히 말해주고 있었다.

 

이외에도 제노사이드가 시사하고 있는 부분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진화생물학을 바탕으로 신종 인류의 출현에 대한 경고를 통해서는 그동안에 인간만이 가져왔던 우월감을 버리고 겸허함을 가지라는 충고를 주는 동시에 자본주의가 폭주하고 있는 시대의 대통령을 독재자로 표현하며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뿐만아니라  전쟁의 이면에  파고들어 전쟁에 깃들여 있는 인간의 심리를 파고 들며 인간의 본성에 심도 깊게 다가가고 있다. 거기에 전쟁에 얽혀 있는 신제국주의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고 있으며 과학과 철학과 의학을 넘나들며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퍼펙트한 추리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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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3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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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티가 브론스키에 버림 받았을 때, 세상을 다르게 보는 시선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던 순수한 친구 바레니카가 키티와 레빈부부를 찾아오고 돌리 역시 소유지의 집이 완전히 쓰러지게 되자, 동생 키티의 집에 머물게 된다. 레빈의 배다른 형 세르게이도 레빈의 집에 머물고 키티와 레빈은 갑자기 일어난 대식구들의 뒷바라지를 하게 되어 분주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레빈은 사랑하는 여인의 옆에 있다는 완전히 순결하고 고결한 기쁨에 취해 있으며 키티의 임신으로 더욱 행복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키티는 사상이나 생각이 전혀 다른 세르게이 형에게조차 늘 겸손과 애정을 보내는 레빈의 모습을 존경하며 언제나 나아지려고 하는 레빈의 평소 삶의 자세에 존경을 보낸다.

 

세르게이는 이때 키티의 친구 바레니카를 사랑하게 되는데 바레니카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훌륭함 때문이었다. 상류사회의 예의범절을 잘 알고 있었고 종교적 신념으로 다져진 바레니카의 생활을 보며 모든 것이 자신의 이상형과 잘 맞았다. 그리고 바레니카에게 느껴지는 가난과 외로움 또한...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깊었던 레빈과 키티 부부 앞에 나타난 단순하고 선량하며 지극히 쾌활한 청년 바세니카는 마치 안나 앞에 나타난 브론스키와 같은 느낌을 준다. 바세니카는 아름다운 키티에게 페로몬을 마구 뿌려대며 유혹 아닌 유혹을 하게 되는데 (본인이 꼭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브론스키처럼 그냥 습관인 것이다.) 그런 행위가 레빈의 눈을 거슬리게 하지만, 레빈은 키티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탓하며 애써 감정을 누른다. 그러나, 행동이 점점 지나치게 되자, 사냥을 위해 찾아 온 바세니카를 쫓아버린다. 여기서 작가가 레빈의 감정과 행동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바로 알렉세이와 대조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레빈도 알렉세이와 같은 상황, 같은 느낌이지만 알렉세이는 안나와 브론스키 사이에 어떤 이상한 기류를 감지하고도 안나에게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았다. 대신 레빈은 키티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키티는 자신의 남편이 바세니카의 행동을 통해 자신에게 가진 관심자체에 감사하며 오히려 남편이 바세니카를 쫓아내는 것을 이해해주고 있다. 알렉세이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감정을 안나에게 표현하고 대화로 풀었더라면 아마도 브론스키와 감정이 깊어지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그리고 돌리에게서도 안나를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해 주고 있다. 주인공은 안나지만, 톨스토이는 전혀 다른 이들을 통해 안나의 삶을 느끼고 생각하게 해 주고 있는데 같은 여자 입장에서 돌리는 안나를 비난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안나를 비난하지만, 돌리가 안나를 부러워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다는 것.

 

 

♣나는 그때 남편을 버리고 다시 한번 삶을 고쳐 시작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나는 정말로 사랑하기도 하고 사랑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 나에게 그녀보다 나은 데가 있는 것일까?

 

♣안나가 한 짓은 훌륭하다. 나는 이제 결코 그녀를 비난한다든가 하는 짓은 않겠다. 그녀는 행복하다. 그리고 상대방도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 나처럼 굴복당하고 있지 않고, 틀림없이 여느 때처럼 싱싱하고 영리하며 무엇에나 마음을 터놓고 있을 것이다.

 

 

레빈 또한 안나를 처음 만난 감상을 ' 지혜와 우아와 아름다움 외에 그녀의 마음속에 깊은 진실성이 있다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고, 이렇게 가장 고지식하고 가장 큰 비난을 보냈던 레빈마저 안나를 아름답고 슬기롭고 솔직함과 성실함에 넋을 잃었다고 하며 오히려 브론스키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까 걱정을 하는 장면은 안나에게 동정심을 유발시킨다.

 

 

레빈의 우려대로 안나가 관심 있어 하는 ‘여성교육’ 이라는 문제로 인해 안나와 브론스키는 심하게 다투게 되는데 여성으로서의 우월과 자신감, 아름다움 뿐 아니라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던 안나에게 여성교육에 경멸을 표하는 브론스키의 말은 안나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안나 자신이 사랑한 브론스키에 대한 기질과 감정의 차이점을 느끼게 하면서 둘의 사랑이 점점 어긋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나는 일반적으로 연인이 상대방의 성격과 감정을 이해하여줄 수 있는 것만큼 당신이 나의 기질과 감정을 이해해줄 수 있으리라고는 바라지도 않았어요. 그래도 최소한 품위만은 가져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내 사랑은 차츰 열정적이고 이기적으로 되어가는데 그이의 사랑은 점점 식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들의 마음이 멀어지는 원인이다.”

 

 

안나는 처음 브론스키를 만난 기차역 플랫폼에서 자신의 짧고 격정적인 사랑이 남긴 괴로움을 떠안은 체 그리고 연인 브론스키에게 벌을 주기 위하여 기차에 몸을 던진다. 죽음만이 안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며...

 

 결론적으로 나는 안나가 가여웠다. 19세기 러시아에 지배적인 여성차별에서 가장 자유로웠던 여인이었지만, 결국에는 여성이라는 벽을 넘지 못한 채 사랑에 희생당하는 불운의 아름다움을 가진 탓이다. 19세기의 불륜으로 유명한 여인으로 <마담 보바리>와 늘 비견되어지는 간통한 여인 안나가 보바리와 결정적으로 틀린 점을 발견했다. 에마 보바리는 자신의 삶의 주인이었던 적이 한번도 없는 여인이다. 늘 남처럼, 마치 ~ 처럼, 사랑을 꿈꾸고 갈구하고 찾아다니며 여러 명의 남자들의 정부가 된 여인이지만, 안나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사랑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에게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은 사랑이 없는 삶이었을 것이다. (돌리가 남편의 바람을 이해하면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며 자신의 남은 인생을 슬퍼하며 안나를 부러워하는 모습에서 안나가 자신의 삶에 매우 충실한 여인이라는 믿음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연애소설치고는 꽤나 방대한 분량이라 느껴졌지만, 읽다보니 결혼을 둘러싸고 한 번 쯤 배우자에게 했을 법한 고민이나, 사랑에 대해서 , 그리고 삶에 대해서 , 그리고 우리를 둘러 싼 타인에 대한 선입견들에 대해서 심도 깊은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틀려지곤 하는데 한 때 불륜의 여인으로만 느꼈던 안나가 세월이 지나 자신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 몸부림친 한 여인으로 다가오는 느낌처럼 나는 톨스토이를 통해 삶을 관조하는 방법을 다시 한번 배운다.

 

 

그리고 삶의 모든 순간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나의 삶에 부여하는 의심할 나위 없는 선의 의미를 지니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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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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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내려와 농사일에 전념하는 레빈.

2권의 시작은 레빈이 농사일에 전념하면서 느끼는 노동에 대한 신성함을 최근 읽은 체벤구르의 주인공 자하르와 동일하게 느껴진다. 체벤구르의 자하르가 노동이 가진 진정한 가치가 사라졌을 때 ‘사심 없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기질에서 나오는 노동이 언젠가 오직 돈 하나만을 위한 것이 될 때, 그때 세계의 종말이 오리라 하는 믿음과 같이, 레빈은 노동을 신성시한다. 귀족인 레빈에게 시골은 그래서 좋은 것이었지만 배다른 형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에게 시골은 도시와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고 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좋은 곳이다. 이것은 달리 말해 도시에 사는 귀족 세르게이에게 시골의 노동이란 레빈이 농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세르게이(귀족)는 농민과 결코 밀접할 수 없는 관계라는 뜻이다. 그런 세르게이를 보며 레빈은 ’생명력의 결함, 또는 정이라는 것의 결함, 인간으로 하여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자주 맞닥뜨리는 인생 행로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하여 거기에 전념하게 하는 충동의 결함‘을 느낀다.

 

 레빈에게 시골에서 노동이란 '자연과 무아경에 빠지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소설 전반에 흐르는 레빈의 사고는 러시아의 진정한 공산주의가 변질되기 전의 가장 완벽한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레빈은 귀족들이 농사일을 천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노동이 주는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고 사랑했다. 레빈이 시골노동을 통해 무아지경에 빠졌을 때 전신에 땀이 흐르는 것을 ’자기를 의식하고 있는 생명에 찬 육체‘라고 말하는 것에서 노동 그자체가 생명이라고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 문학을 읽다보면 노동을 신성시하는 책들을 만나고는 하는데 아마도 그 이유가 마르크스사상이 변질 되기 전의 신성함이 그대로 문학에 투영되어 보여 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레빈이 걱정하고 있는 모든 러시아의 농부 및 지주 들에게 그들이 가진 몇백만의 손과 땅을 가지고 사회 전체의 행복을 위해 가능한 한 생산적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뇌가 19세기 후반 러시아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식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아마 이런 것은 농노 시대에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영국에서는 지금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두 경우에는 조건 자체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이었다가 겨우 모습을 갖추어가고 있는 오늘의 러시아에서는 이러한 조건들이 어떻게 수습될 것인가가 유일한 중대 문제인 것이다.’

 

 

‘빈곤 대신에 만인의 부와 만족, 적대감 대신에 이해의 조화와 일치, 한마디로 말하자면 피를 흘리지 않는 혁명인 것이다.’

 

 

 

안나와 안나의 남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그리고 브론스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완전무결한 사람이다. 그는 고관대작이었으며 책임감도 강했고 또한 의무감도 강했으며 신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신앙도 깊었다. 그에게 약점이 있다면 어린애나 여자의 눈물을 보면 혼란 상태에 빠져 완전히 판단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브론스키가 경주 도중 낙마하자, 모든 사람 앞에서 대놓고 브론스키를 걱정하는 모습을 본 순간, 알렉세이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을 알게 된다. 그리고 경주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도....   이후 알렉세이는 마음속으로 아내에 대해 완전히 경멸적인 무관심 상태에 있으나 오로지 하나의 걱정, 안나가 아무런 장애도 없이 브론스키와 결합하는 것을 상상하기도 싫었으며 이혼이 안나에게는 유리하지만 자신에게는 불리한 것임을 깨닫는다. 결국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소란은 최소화하고 자신의 지위를 지키는 것을 선택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혼하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결코 사랑의 자유를 경험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생활을 같이 할 수 없는, 각자 따로 생활하는 외간 남자와의 수치스러운 관계를 위하여 남편을 속이는 죄 많은 아내로서 끊임없이 폭로의 위협 아래 남을 것이다.

 

한번도 사람을 미워한 적이 없고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고관대작이었던 그에게 안나의 불륜은 알렉세이를 더욱 격한 미움과 원망을 만들어내고 알렉세이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가장 불행한 캐릭터는 아마도 알렉세이 ^^;; ) 그렇게 미운 안나가 자신의 자식도 아닌 브론스키의 딸을 낳은 후 산욕열로 죽음 앞에 다다르자 알렉세이는 또 한번 안나를 용서한다. 마치 안나의 죽음이 알렉세이의 저주로 인해 닥치게 된 것처럼 알렉세이는 죽어가는 안나 앞에 브론스키를 직접 데려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을 정도이다. 의사의 열중 아홉은 안나가 죽을 것이라고 하였기에, 브론스키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알렉세이. 이 모습은 매우 고결해보이기까지 한다. 바람 난 아내와 같이 바람이 난 젊은 남자에게 ‘그동안 그녀에게 복수하고 싶은 욕구에 쫓기고 있었다.’ 고 ‘ 나는 그녀를 버리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안나의 남편을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는 브론스키. 그리고 그런 알렉세이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은 오히려 브론스키였다.

 

브론스키는 군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자신이 타고 있는 배에 불을 지르는 짓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실제로 안나를 사랑하지만 안나와 결혼함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는 행동따위는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브론스키는 자신이 군대에 머물러 있는 한 아무것도 잃지 않으며 안나도 현재 상황을 바꾸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오히려 마음에 들어한다.

 그랬던 브론스키에게 죽어가는 안나의 앞에서 남편 알렉세이의 고백은 브론스키에게 사랑의 의미를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되어주는데 안나의 남편을 심술궂고 위선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사람으로 생각하며 조롱해왔던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것과도 같았다. 결국 알렉세이는 고백을 통해 순식간에 그를 선량하고 솔직하고 위대한 인물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찾아온 위기, 모든 위선, 자신의 비열을 마주한 그는 부지불식간 권총자살을 시도하지만 총알이 빗나가고 브론스키는 다시 살게 된다.

 

 

브론스키는 그의 고결과 자기의 비열을, 그의 올바름과 자기의 부정을 통감했다.

 

브론스키의 자살시도를 듣게 된 안나는 건강이 회복되자 바로 남편을 떠난다. 오히려 남편의 선행이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그녀는 자신의 아들마저 버린다. 브론스키도 군에서 준 임명을 거부한 채 안나와 외국으로 떠난다. 둘의 사랑을 위해서...

 

2권에서는 주인공들이 최고의 갈등을 이루며 전개되는 심리변화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두근거림이 어쩌면 안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브론스키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삶이라는 하나의 측면으로서는 충분히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만들어준 갈등의 최고봉을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책이 아닐까 한다. 남자와 여자가 가지고 있는 복잡미묘한 심리부분까지도 놓치지 않고 표현되어지는 섬세함에 한글자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읽게 되었다. 사회격변기에 휩쓸리지 않는 유일한 지성인이자 매우 도덕적인 인품의 레빈은 톨스토이의 전신과 같이 느껴진다.  레빈과 키티의 아름다운 결혼식을 통해 매우 이상적인 결혼생활을 보여주고 있지만, 안나의 불행한 결혼을 통해서는 서로 다른 둘이 하나의 삶(즉,결혼)을 완성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를 보게 되기도 한다. 사랑만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안나에게 닥친 불행은 2권의 마지막 "당신이 다 나쁜 거예요." 라는 절규로 예고되어 있다.(3권에 계속)


 

카테리니행 기차는 8시에 떠나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니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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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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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목표를 세계문학전집 읽기로 하였는데 전집의 시작이 안나 카레니나 이다.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레미제라블>로 큰 재미를 본 영국 영화사 워킹 타이틀이 새롭게 내놓은 다음편의 고전소설 영화는 또한 <안나 카레니나>이다. 가장 보고 싶은 영화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읽고 싶어 했던 세계문학도 안나 카레니나이다. 우연치고는 참 재미있는 우연이다 싶지만 이런 우연의 반복이 인간사에서는 필연의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마치 안나 카레니나의 삶처럼 ^^.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니나는 이 문구로 시작된다. 행복은 고만고만하지만 불행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행복한 가정이 순식간에 불행한 가정이 되는 나름나름의 이유를 오블론스키의 집안을 통해서 볼 수 있다. 부유한 귀족집안의 오블론스키가 가정교사와 바람을 피우자 아내는 이혼을 요구하고 이혼당할 위기에서 구원투수로 등장하게 된 것이 동생 안나 카레니나이다. 아름다울 뿐아니라 우아한 기품이 넘쳐흐르는 안나는 사교계에서나 어디에서건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나는 여인이다. 오블론스키가 안나를 마중나간 기차역에서  어머니를 마중 나온 브론스키를 만난 것은  한 불행한 여인의 자살시도라는 헤프닝과  맞물려  기차역은 안나에게 ‘불안한 징조’를 느끼게 한다. 그것이 그들의 첫 만남이다.

 

 

 

브론스키는 젊지만 부자에 총명하고 고귀하고 궁정무관으로서 탄탄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 키가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의젓하고 지극히 침착한, 선량해 보이는 아름답고 굳건한 생김새의 남자인 브론스키의 친절함에 매료되어 사랑에 빠진 키티는 자신에게 청혼한 시골농노 출신인 레빈의 고백을 무참히 거절한다. 레빈은 ‘인간의 활동이 언제나 목적을 가져야 되는 것처럼 사랑과 가정생활이 언제나 동일하기를 원하는 ’ 순수한 결혼을 꿈꾸었으며 결혼을 사회생활의 한 관례로 보고 있는 시대의 풍토나 견해와는 달리 결혼자체를 아름답고 신성하고 이상적인 삶으로 생각해왔다. 레빈에게 결혼이란, 인생의 최대사로 인생의 행복은 모두 결혼에 달려있다고 믿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러나, 키티에게 거절당하는 순간 모든 꿈은 좌절하고 만다. 그가 평생에 꿈꾸었던 꿈이 그렇게 브론스키로 인해 날라가버렸고 레빈은 시골로 내려가 실연의 아픔을 일에 전념하는 것으로 달랜다.

 

결혼에 대한 순수한 이상과 행복을 꿈꾸는 레빈과는 달리 브론스키는 독신자 세계를 추앙하는 사람이다. 결혼에 대해서도 꿈꾸어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남편이라는 가정에서의 지위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의 이런 결혼관은 자신이 사랑에 빠진 여인이 유부녀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가 굉장한 미인이었기 때문도 아니고, 또 그녀의 자태에서 느껴지는 조촐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도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그의 옆을 지나쳤을 때 그 귀염성 있는 얼굴에서 뭔가 유달리 정답고 부드러운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중략) 브론스키는 재빨리 그녀의 얼굴 가운데서 노닐기도 하고 반짝이는 두 눈과 살포시 미소 짓는 미소로 실그러진 붉은 입술 사이를 팔딱팔딱 뛰어 돌아다니기도 하는 짓눌린 생기를 알아챘다. 마치 과잉된 무너가가 그녀의 몸속에 넘쳐흐르다가 그녀의 의지에 반해서 때론 그 눈의 반짝임 속에, 때론 그 미소 가운데 나타나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일부러 눈 속의 빛을 꺼뜨리려 했다. 그러나 그 빛은 그녀의 의지를 거슬러 그 엷은 미소 속에서 반짝반짝 빛을 냈다.

 

 

 

결국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진 안나는 자신의 감정을 ‘살인자가 자기 때문에 목숨을 잃은 시체를 보고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이라며 부끄러워하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지만, 안나에게 사랑이란 부끄러움이라는 무서운 대가를 치르고 손에 넣었기 때문에 더욱 간절해지는 무엇으로 변한다. 마치 살해한 시체에게 공포를 느낄지언정 시체를 은닉하기 위해서 다시 그것을 난도질하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아닐까. 어쩌면 안나는 사랑에 빠진 순간 자신의 마지막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안나로 인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안 키티 에게 찾아 온 절망은 병이 되어버리고 키티는 그 병으로 인해 세상을 다르게 보는 방법을 배운다. 자신이 브론스키와 레빈을 결혼이라는 저울에 올려놓고 저울질하였던 행위가 위선이고 자기기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키티는 세상을 기존과는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 것이다.

 

자기를 잊고 남을 사랑하는 것만이 가치 있는 일이고, 이것만이 사람을 평안하고 행복하고 아름답게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기를 키티는 원했다. 이제 키티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똑똑히 이해하였다.

 

 

안나의 불륜을 알면서도 세간의 이목과 가정생활에 대한 책임이 강하였던 알렉세이의 미련스러울 만큼의 믿음을 끝내 저버리는 안나와 사교계에 퍼지는 소문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두 사람의 고집스러운 사랑은 안나가 임신하는 것으로 마친다. 키티의 내면세계가 변함에 따라 달라지게 될 레빈과의 사랑과 안나의 임신으로 브론스키와 만남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지 궁금한 채로 책을 덮었다. 안나 카레니나의 배경은 농노제 붕괴에서 러시아 혁명을 아우르는 거대한 격동기의 시대이다. 그 안에서 젊은이들의 사랑과 이상, 그리고 공산주의라는 사상을 삶속에 버무려 놓았다.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들의 심리변화를 통해 사랑과 이상이 짜집기 해가듯 만들어낸 가상의 현실속의 레빈과 안나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사람의 심리가 예나 지금이나 시대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똑같듯이 고전이 주는 위대함은 이 책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처럼 다가온다. (자세한 이야기는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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