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없는 그 자리
이혜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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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지내고 있지? 난 한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전부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아. 이제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전부라는 목적어를 지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마치 천둥이 치고 번개가 치고 바람이 불때마다 떨어진 내 생명의 일부들이 땅위에 떨어져 뒹글때마다 느꼈던 아픔과 외로움처럼, 이제까지 나를 스쳐갔던 인연들 중에 좋았던 기억보다 아픈 기억들이 더 많이 느껴져. 그리고 그 인연이 좋지 않았던 이유가 목적어 전부를 사랑하려 했기 때문인 것 같아. 내가 너를 사랑하지 못한 것도 그 목적어 때문이었어. 전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 조금만 사랑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너 기억하니? 내가 너에게 보냈던 무수한 편지들을, 그런데 넌 한 번도 답장해준 적이 없었어. 이 책 <너 없는 그 자리> 소설을 처음 본 순간, 네가 떠오른 건  편지 때문이야 답장 한 번 받지 못하고 쓴 여자의 편지를 본 순간 네가 자연적으로 .. 당연하다는 듯이 떠올랐어. 한때 내가 사랑했지만 잊혀 진 것들, 한때 미워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 애틋해지는 것들 그리고 그 사이에 항상 존재하는 때문에...

 

장편소설인 줄 알았는데 여러 개의 단편들로 구성되어져 있는 소설들은 모두 우리의 만남에서 비롯된 관계에 관한 이야기야. 이들의 관계를 통해 우리의 생을 관통하는 불가항력적인 데스티네이션을 느끼게 된 것 같아. 이 책의 표제작 <너 없는 그 자리>는 너무도 친근한 말로 시작해 . 당신 잘 지내지? 하는 애정 듬뿍 담긴 이 편지를 읽으면서 여자의 전부는 사랑이라는 것은 안 봐도 비디오야. 여자는 편지에 당신 방으로 스며드는 아프리카의 꽃향기로 변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내 몸을 내주고 꽃이 되고 싶어요썼어. 넌 누군가에게 꽃이 되고 싶을 정도로 사랑해봤어? 나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이 남자는 정말 행복하겠다하는 생각이 들었어.그런데 그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아. 심지어 외국으로 떠났다는 것도 거짓말을 한 거야. 참 웃기지 않니?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몸서리치게 싫은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참 이상했어. 그 남자에게 여자는 한 번도 사랑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너도 그래서 내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았던 걸까? 나는 그때 왜 너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걸까. 사랑도 때론 착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지금에야 알게 된 걸까?

 

인생은 참 이상해요. 언제 등 뒤에 감춘 도끼를 치켜들지 아무도 모르죠.

 

 

그래 나는 너를 지금도 생각해. <한갓되이 풀잎만>에서는 남자에게 배신당한 여자와 여자에게 배신당한 남자의 이야기야. 나는 배신을 한 번도 당해 본 적은 없어. 아니 한 번도 당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해. 믿는다는 말은 상대방을 완전히 신뢰한다는 뜻이잖아. 신뢰한 적이 없으니까 배신도 당한 적이 없는 거야. 그렇다고 날 너무 냉정하게 생각하진 말아줘. 너무 잘 믿기 때문에 스스로 방어막을 친 것뿐이니까. M과 사내커플이었던 여자가 M의 약혼을 직장상사에게 듣게 되는 그런 심정을 배신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했던 남자의 배신은 심지어 여자를 스토커로 몰아세우기 까지 하는 남자M. 배신당한 여자의 선택은 배신당한 남자를 만나는 거였어. 여자는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두 가지 밖에 선택이 없었다고 하는데 , 누가 그러더라 여자는 죽을 때까지 사랑으로 먹고 사는 존재라고, 그래서 그런 선택을 하는 걸까? 남자에게 배신당했어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아마 그때의 나와 너는 나란히 서 있는 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나란히 서 있다가 어쩌다 분 바람에 살랑 실이 한 번 꼬이고 나면 걷잡을 수 없이 배배 꼬이게 되는 것처럼 꼬여버리듯이 우리의 인연은 미풍에도 이어질 수 없었던 가느다란 실이었던 게 아닐까해. 그동안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던 삶의 편린들을 이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기분이야.

 

아주 사소한 꼬임, 한순간 외틀어진 마음이 한평생을 꼬아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북촌>에 나오는 커플들은 조금 이해가 안 돼. 여자의 사는 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고, 남자에게 버림받은 여자가 그 화풀이를 세상 모든 남자에게 자신을 버리기 시작하는 이야기인데 타인에게 받은 상처를 굳이 자신에게 생채기를 내면서 치료하려는 방식은 오히려 자신을 더 아프게 하는 게 아닌가 해서 말이야. 그런데 이 바보 같은 여자는 사랑할 줄도 모르는 것 같아. 나쁜 남자에게 도망치다가 우연히 북촌 한옥마을에 세 들어 살고 있는 남자를 만났는데 비록 이 남자가 가진 것은 없지만 성실하고 진실 된 사람이었어. 여자의 과거 따위에는 관심은 없지만 충분히 사랑해 줄 수 있는 착한 남자 축에 속하는 그런 남자였어. 그런데 여자는 자신을 버리고 간 남자가 다시 돌아오자 착한 남자를 농락하지. 맞아 농락한다고 해야 맞는 말 같아. 그런데 이 남자. 여자의 농락조차 이해한다. 참 사랑이란 아이러니해. 근데 난 이 남자한테 사랑이란 목적어가 필요 없는 관계라는 것을 배우게 된 것 같아.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면 그것으로 족할 수 있는 것이 아마도 사랑인가봐.

 

<그리고, 축제> 참 제목이 근사하지 않니? 삶이 축제라고 생각해본 적 있어? 더 놀라운 건 이 단편의 주인공은 축제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먼 삶이야. 단지 축제와 같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 여자가 늘 옴 샨티 샨티 샨티 옴을 입에 달고 사는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니겠어? 여자는 아직도 어렸을 때 꼬마시절 도시에 사는 숙모네 부푼 마음으로 놀러간 시골아이의 마음에서 한 치도 자라지 않은 채 살고 있어. 마치 그 시간이후로 마음은 멈춤이 되고 몸만 어른이 된 것처럼 말이야. 어린 시절의 설렘이 지독한 감기로 변하여 평생 옥죄는 괴로움으로 살기 때문이야. 그런데 말이야 발리에서 일어난 참사를 본 뒤에야 자신의 아픔이 여름감기에 불과한 것을 깨달아. 맞아. 때론 설렘이 계절이 바뀔 때 찾아오는 감기로 변하는 순간이 일생에는 수시로 찾아올 수 있다는 걸, 그건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 옴 샨티 샨티 샨티 옴

 

<감히 핀 꽃> 은 사연 많은 집의 이야기인데 주인공이 말이 너무 많아. 꼭 내가 아는 사람과 똑같아.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말, 왜 아줌마들은 자기 말만 하는지 모르겠어. <금빛날개>에서도 마찬가지야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아집의 남자 역시도 자신이 쌓아 온 견고한 벽 때문에 타인의 말을 듣질 않아. 마치 자신에게는 불행이 닥치지 않을 것처럼, 동창생의 허망한 죽음 앞에서도 자신만은 피해갈 것 같이 완벽한 안락과 평온함을 꿈꾸지. 그리고 그런 삶을 아들에게도 똑같이 강요하고, 그러나 뜻하지 않게 찾아 온 아들의 죽음 앞에서 이 남자는 비극이 언제 든 다가오는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돼. 영화 데스티네이션에서 운명의 잔인함과 가혹함의 모습처럼. 우린 그런 운명의 잔인함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봐.

 

<꿈길밖에 길이 없어>의 주인공이 이런 말을 해 선생님, 저는 왜 미쳐지지도 않는 걸까요?” 이 말 참 재밌지. 미칠 만큼 절박함 심정에 빠져 본 적이 있어? 삶의 모든 신경세포를 스스로 끊어버리는 행위가 때론 자신을 삶에서 구원해준다는 것을 깨달았던 이 남자는 미쳐서 정신병원에 갔다가 병세가 호전되자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선 한 말이 왜 자신은 미칠수도 없는지 의아해하는 이 질문은 정말 너무 처절하지 않아? 결국 이 남자가 일상에 돌아와서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어. 죽거나 미치거나, 차라리 미쳤더라면 이 사람은 그냥 살았을까?

 

고개만 돌리면 환한 햇살인데, 그 한 발짝을 내딛지 못해 그늘에 갇혀 있어야 하는 날들이 있다.

 

덧없이 죽을 운명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어디까지나 겸허히 인간적인 것을 긍정하고 사는 것이 삶이라는 테리 이글턴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어? 네가 그렇게 떠나고 난 뒤 나는 늘 죽음을 생각했어. 너 없는 빈자리가 내게는 그처럼 견디기 힘든 날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이해해 어쩌면 그것은 운명이라는 불가항력의 힘 이었을 거야. 고개만 돌리면 환한 햇살인데 그 고개하나 돌리기가 무척 오랜 세월이 걸렸지.  너 없이도 가능한 삶을 살기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사랑은 목적어가 필요 없다는 것을 나는 새삼스레 이 소설을 만나서 다시 상기하게 되었어. 마치 처음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야.  어린 시절 늘 함께 했던 너와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흐트러진 파편을 주워 소설과 함께 너를 기억해보는 것은 미안하지만 너를 지워내는 작업과도 같았어. 어차피 그때 나는 너를 목적어 없이는 사랑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번번이 어긋나던 관계로 나는 많이 아파해야 했어. 그래도 너로 인해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아마도 이 편지가  네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아.  오래 전 사랑했던 너를 기억한 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지난 날을 보상받은 기분이야.

 

 잘 지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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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벤구르 을유세계문학전집 57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윤영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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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심해에서 사는 생물들을 촬영한 다큐멘타리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생명의 황홀감에 빠져들었다. 바닷 속 깊은 곳에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살기위해 펼치는 저 나름대로의 생존법에 감탄을 하며 보았다.  바닷 속 깊은 심해에 사는 생물들은 조개껍데기를 이용해 몸을 보호할 줄 알았고 때로는 위장술을 펼치기도 하며 나름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생물들은 오로지 살기 위해 생존했다. 오로지 인간만이 죽기 위해 생을 포기한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교만함으로 인류문명을 이루어 왔지만, 만물중에서 생을 포기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밖에 없다. 생물들을 보면서 왜 유물론이 떠올랐는지는 모르지만, 이제까지의 교만을 버리고 아주 작은 생물들에게서 생명의 소중함을 배우는 것처럼, 우리에게 자연과 물질에게서 배우는 겸손함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하는 생각에 더욱 조그마한 생물체들이 경이로워 보였다. 이 책 《체벤구르》를 처음 본 순간 그런 유물론의 가치가  떠오른 것은 ‘소비에트 유토피아 문학의 정수’라는 소개글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점점 잊혀지고 있는 공산주의의 이념인 유물론은 최근 읽은 책들에서 느끼는 공통점과 연결되어 있어서이다.  그것은 바로 세계의 중심이 '인간'이 아닌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말하는 '사물의 흐름'을 인지하라는 말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과거 많은 지도자들이 그리고 현재 명망높은  철학자들이 여전히 이구동성으로 가장 이상적이고도 완벽한 사상으로 보고 있는 이유를 바로 이 책《체벤구르》를 읽으면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개미나 모기 정도의 지혜만 주어졌다라도, 가난하지 않도록 삶을 단번에 구축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 사소한 생물들은 우애로운 생활을 하는 위대한 기술자들이다. 인간이 개미와 같은 장인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

 

 

소설의 시작은 자하르 파블로비치라는 장인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자하르 파블로비치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물건을 나무로 만든다. 농기구나 가정용 기구, 하다못해 프라이팬까지 나무로 만들었는데 자하르 파블로비치가 타고난 장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에게서 배운 것이 아닌 오롯이 자연의 산물이다. 자하르 파블로비치는 태어나면서 홀로 자연과 공생하면서 살았으며 자연을 통해 모든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자하르 파블로비치가 자연을 느끼는 방법과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이 바로 유물론적 사고라는 것은 자하르 파블로비치가 바로 공산주의 이념을 가장 잘 표현해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하르 파블로비치를 보면서 내가 그동안 이해했던 유물론적 사고가 단단히 잘못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실제로 현대인들은 죽었다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환경이리라...그런  자하르 파블로비치는 자연의 법칙으로 세상을 본다.

 

그는 사심 없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기질에서 나오는 노동이 언젠가 오직 돈 하나만을 위한 것이 될 때, 그때 세계의 종말이 오리라 믿었다. 아니 심지어, 종말보다도 더 나쁜 것이다. 마지막 기술자가 죽은 후에는 태양의 식물들을 먹어 치우고, 기술자의 제품들을 망가뜨리기 위해 최후의 악당들만이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p78

 

그리고 또 한명의 유물론자 사샤 드바노프가 있다. 아버지가 죽자 고아가 된 사샤는 자식이 많은 집 드바노프의 양자로 들어가지만, 가난과 기근으로 입에 풀칠하기가 힘들어지지 드바노프의 큰아들 프로샤에게 쫓겨난다. 심지어 프로샤는  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자하르 파블로비치에게 1루블을 주고 사샤를 판다. 

 

"왜 인간은 악하든 선하든 그저 그런데, 기계는 그토록 훌륭한 것일까요?

 

 

스승은 인간의 지혜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기계 스스로의 희망에 따라서 기계가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인간들은 여기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p64

 

자하르 파블로비치의 양자로 들어간 사샤 이바노프는 양부에게서 그러한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아니 사샤는 아버지가 죽음을 동경하여 바다에 빠져 들었던 그 시점부터 자연을 이해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늙음과  생生이 주는 어쩔 수 없는 슬픔과 비애로 자하르 파블로비치는 자신의 전부처럼 사랑한 양아들 샤사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혁명가로 만든다.  양아버지의 권유로 볼세비키당에 입당한 사샤는 그렇게 러시아에 요동치는 혁명의 물결에 참여하게 되고, 공산주의의 가장 이상적인 유토피아 마을 ‘체벤구르’에 다다르게  된다.

 

드바노프는 체벤구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드바노프는 이전에도 이 작은 마을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는데, 왜 그런지 그 단어는 미지의 나라의 매혹적인 울림을 닮아 있었다.

 

이렇게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는 공산주의의 가장 이상적인 , 그리고 완벽한 나라를 소설 속에서 구현해 내었다. 요동치던 시대 ,혁명의 시대속에서 느꼈을 법한 사회적인 혼란이 체벤구르의 주인공들에게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노동계급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지독하고 암담한 현실을 살아가야 했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숙명과 자연과 공명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믿음을 혁명으로 완성해가고자 몸부림치는 사샤 드바노프를 통해 나는 새로운 유토피아 세상을 보았다. 유물론이라는 것이 예전에는 물질만능주의 쯤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주인공 자하르 파블로비치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삶을 터득해가는 과정, 기계를 아름다움으로 보는 감격의 순간들을 통해 참된 유물론을  배울 수 있었다. 굳히 표현하자면,  자연의 흐름을 나와 일치해가는 과정과 같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듯이, 타인과 나와의 경계가 없는 곳, 경쟁이 필요없는 곳, 살아가기 위해 공생해야 하는 유토피아의 세계, 그러나, 체벤구르는 영원히 유토피아로만 존재하는 곳이라는 것. 

 

덧 ; 소설을 집필할 당시 소련은 공산주의가 스탈린주의적 관료 국가로 변질되고 있었다. 그런 시대에 진정한 공산주의 이념을 담은 체벤구르는 금지당했다. 60년이 지나서야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는데 이미 공산주의는 몰락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읽은 뒤의 소감은 공산주의가 왜 가장 완벽한 사상인지를 알 수 있게 되어 기쁜 책이었지만, 서글픔이 남는 것은 이제 어쩌면 공산주의는 회생불가가 아닌가 하는 씁쓸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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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닦고 스피노자 - 마음을 위로하는 에티카 새로 읽기
신승철 지음 / 동녘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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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내가 그래도 가장 좋아했던 말은 데카르트의 ‘나는 존재한다.고로 나는 생각한다.’ 였다. 최근 들어 이 데카르트의 철학이 오히려 우리 존재의 관념이나 존재자체를 얼마나 기계적인 사고로 바꾸어 놓았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철학서들을 접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위기의식은 인류 공동체의 종말론과 맞물려 우리의 존재론 자체의 회의가 일면서 시작된 문제가 아닐까한다. 브뤼노 나르노의 《과학인문학 편지》에서도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코기토)가 인간이라는 유일무이한 세계상만이 존재한다는 근대적 세계관으로 인해 오늘날의 생태 위기가 초래되었다며 우리는 생각한다(코기타무스)는 사고의 전환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의 접근이 아닐까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데카르트는 나와 세계를 분리하여 사고하는 이원론적 사유방법이고 스피노자는 나와 세계를 하나로 보고 있는 일원론의 사유방식으로 스피노자는 동양적인 철학방법이다. 데카르트는 세계의 중심에 내가 있다는 사유라고 한다면 스피노자는 세계를 작동하는 섭동의 원리중의 하나로 ‘나’가 작동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유방식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핵심 사유방식이다.)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철학자들의 예수라고 칭했다. 스피노자를 철학자 중에서도 가장 특이하게 보는 이유는 아마도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서구 철학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부터 자연적으로 스피노자의 일원론은 배척을 받게 되었다. 스피노자가 주장했던 철학은 바로 데카르트가 권력체계의 중심부에서 이데올로기 역할을 수행한 데 반해, 스피노자는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평생 개인의 자유를 위해 싸웠으며, 권력자들에 대한 반항을 멈추지 않았다. 《에티카》는 이러한 자유의 본성을 밝히고 자유를 위한 투쟁의 책이다.  이 책 《눈물 닦고 스피노자》는 매우 독특한 형식의 마음 치유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가 지배하였던 이제까지 알고 있던 우리들의 존재 관념들을 깨며 스피노자가 추구하고자 했던 개인의 자유에 대한 관념을 새롭게 세워주는 동시에 《에티카》의 여러 아포리즘을 다양한 정신 질환의 해법과 대안으로 제시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진단해주는 독특한 철학서이다.

 

 

 

책은 스물여덟 살 백수 청년 김철수가  매일 밤 스피노자와 토론하는 형식의 대화체로 진행된다. 매일 매일 보이지 않는 미래의 불안감과 싸워야 했던 철수 앞에 튀어나온 스피노자와 매일 밤 자신이 고민하고 있던 사회의 문제를 질문하면 스피노자는 에티카의 구절로 해답을 찾아준다.  책에 나오는 현대인의 병은 이제는 흔한 병이 되어버린 우울증과 불안증, 게임 중독, 강박증, 집착증, 공황 장애, 조울증 , 피해망상 등의 병들에 관한 스피노자의 유쾌한 답변을 통해 과거 우리의 존재에만 집착하였던 데카르트의 사유의 형식이 아닌 관계 맺기에 주목한다. (이것은 과학인문학의 창시자 브뤼노 나르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에서는 아무것도 연역되지 않으며 ‘코기타무스’(우리는 생각한다)에서는 모든 것이 연역될 수 있다라는 설명과 같다.)

 

 

 

 

스피노자는 기존에 '나'가 중심이었던 삶을 '우리'라는 관계맺기에 주목하며 우리 삶은 외부에서 영향을 미치는 힘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가는지 그리고 현재 내 삶의 형태나 방식이 어떤 것인가에 달려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생명과 공존하며 , 자신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삶은 세상에 보이지 않는 변화를 만든다. 이미 익숙해있던 것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다.  기존의 관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며  관계를 맺는 그 순간  존재했던 것은 새로운 흐름 형식을 띄게 된다. 불의 흐름, 물의 흐름, 음식의 흐름, 쓰레기의 흐름이 시작되고 새로운 정서를 발생시키는 삶의 내부를 바꾸는 새로운 실천과 약속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결국, 세상은 초월적 원인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자기원인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스피노자는 이런 현대인의 병들이 욕망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욕망에 대해서도 자신의 욕망이 유한하다는 것, 즉 욕망의 유한함을 긍정하면서 공동체 속에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고 한다.  과거 데카르트의 사유방식으로는 현대인들의 아픔을 치유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지젝이 이제 우리는 공동의 것을 염려해야 하며 공동의 것을 위해 싸우라고 하는 말과도 어쩌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닌 우리 모두가 존재의 이유를 생각해야 할 때인 듯하다. 일생을 개인의 자유와 투쟁했던 스피노자를 통해 진정한 자유의 기쁨을 나누었으면 한다. 스피노자의 유명한 문구 "우리는 우리가 영원하다는 것을 느끼고 경험한다."처럼... 바로 우리모두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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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병법경영
신동준 지음 / 인간사랑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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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장르의 영화 <아부왕>엔  순진한 총각 오동식이 나온다 . 오동식의 좌충우돌 직장생활을 보고 있자니 직장인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순진한 오동식이 번번히 따돌림을 당하자 처세술의 달인  혀교수를 찾아가 듣게 된 것은 다름아닌 손자병법이다. 그 영화로 손자병법이 전쟁에서 살아남는 법만이 아닌 세상살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정치와 경영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는《손자병법》은 최근 하버드대학 경제학부에서  필독서로 지정할 만큼 동서양을 막론하고 꼭 읽어야 할 책이 되어가고 있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사회는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난세가 되어가고 있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손자병법의 모태역할을 해 준 책이 바로 조조의 《손자약해》이다.

 

이 책의 저자는 군웅할거 시대에 가장 뛰어났던 인물로 조조와 유비, 손권을 꼽았는데 그 중 조조에 주목한 이유는 기존의 가치와 관행에 얽매이지 않는 창조적인 발상과 능력위주의 인재등용과 적재적소 활용, 파격적인 포상과 일벌백계의 신상필벌, 때가 왔을 때 우물쭈물하지 않는 과감한 결단 등이다. 이러한 조조의 탁월함은 조조가 설파한 영웅론에서도 보여진다. 경서와 사서 그리고 시문까지 밝았던 조조는 병서에도 능했는데 영웅론을 가슴에 품고 병서를 펴낸 것이 『손자약해』이다.  손자병법의 원저자로 알려져 있는 손무는 예로부터 논란이 많았으며 가공의 인물로 그려지고 있기도 한데 조조가 펴낸 방대한 병서들은 지금 시대를 관통하는 전략전술이 그대로 담겨 있다고 한다. 손자병법이 동서고금을 통틀어 최고의 병서로 주목받게 된 이유도 조조의 공이 크지만 대부분의 병서에서는 조조의 주석은 빠졌다고 한다. 시대의 가장 많은 병서를 저술한 조조의 주석이 빠진 것을 보고 구슬을 빼놓은 채 구슬상자만 파는 격이라며 저자는  조조의 주석만을 토대로 21세기의 경영전략을 논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무릇 영웅이란 가슴에 큰 뜻을 품고 뱃속에 좋은 계책이 있어야 하니 바로 우주를 감싸안을 기지와 천지를 삼켰다 뱉을 정도의 의지를 지닌 자를 말합니다.”

 

지금의 세계 경영은 과거 이윤이 목적인 기업경영에서 더 나아가 국가사회 발전과 인류공영의 가치를 내걸어야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시대다. 조조의 영웅론이 주목되는 이유는 이런 격동하는 시대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해 낼 수 있는 제폭구민(除暴求民)의 공의를 기치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비록 경쟁으로 얽혀 있으나, 경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함께 하는 공동의식으로 비롯된다.  조조가 사람을 가장 소중한 자산으로 생각하였듯이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한다. 이 책은 조조의 병서에서 21세기 경영의 키워드를 20장의 경영전략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저자는 삼국시대의 상황이 곧 국가 총력전의 양상으로 전개되는 21세기 글로벌 비즈니스 세계와 같다고 보았다. 원전과 함께 실린 본문은 무한경쟁의 경영 환경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기 위한 전략서로 조조의 병서가 탁월함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한편으로는 사기와 얽혀 이야기를 풀어가는 저자의 스토리텔링은 고전과 인문의 매력적인 조합을 보여주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사는 공동체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높은 식견이 필요하다. 그것은 비단 기업공동체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초석이 된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것이 조조의 병법과 같은 사회대응력이다.  이 책은 경제경영에 초점이 맞추어 있지만, 경제경영만이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살이의 이치와 다름이 없이 적용된다 . 그것은 아마도 조조가  하늘과 땅 사이에 가장 귀한 것이 사람이라는 진리를 터득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天地間, 人爲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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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하는 이유 -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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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구입한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다. 살아가는 이유.. 가끔은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내게도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이유따위는 사실 필요없다. 그리고 내가 행복하다면 행복해야 하는 이유따위는 정녕 필요없다. 살아가는 이유또한 마찬가지다. 삶이란  그냥 저절로 살아지는 것이기에 이유를 갖다 붙일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굳이 대라고 한다면? 

 

나는 가끔 부모님께 감사한다. 내가 풍족하지 않게 태어난 것을. 지금도 부모님은 명절날 새뱃돈을 만원 주신다. 꼬마때는 천원이었는데 그나마 많이 오른 것이다. 지금 아이들 과자값으로 만원은 부족한 값이지만, 부모님은 그 만원을 벌기위해 지금도 일을 하신다. 그리고 늘 부족했던 용돈 때문에 나는 늘 일을 했다.  부모님의 뒷모습을 따라 가난을 숙명처럼 여기며 그렇게 젊은 시절을 보내고 나니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가난이 값진 열매가 되어 있을때 비로소 나는 안도했다.  내게 젊은 날은 정말 가난했기 때문에 일을 했다. 그 사이 세상이 많이 편해졌고 많이 변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세상은 유비쿼터스 시대가 되어 있던 것이다. 처음에는 생활의 편리를 주도하였던  유비쿼터스가 이제는 일상에 깊이 스며들게 되면서부터 살아야 하는 이유조차도 컴퓨터에 물어보아야 하는 세대들을 낳았다는 것은 우리시대 불행을 알려주는 서막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자본주의가 주는 달콤한 환상에 젖어 저 언덕만 넘어가면 행복이 있을 거라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달려왔다. 그런데 언덕에 다다르자  '돈'이 있는 사람만이 입장 가능하다고 말하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미 언덕에 올라서 자본주의의 실체를 만난 사람들은 언덕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의 속임수였다는 것을 설파하는 전도사가 되고 아직도 자본주의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들은 부지런히 언덕을 올라가고 있는 형국이다.

 

이 책의 저자 강상중은 우리시대에 닥친 현실을 직시하라고 충고한다. 이제껏 인류를 행복론과 긍정론으로 이끌어왔다면 이제는 인생이 주는 진정한 의미를 생각할 때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재일교포 2세로  한국에 방문한 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며 자신의 일본 이름을 버리고 한국 이름인 강상중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저자는  일본에서 일어난 미증유의 후쿠시마 원전 대참사와 자신의 아들의 죽음, 그리고 이어진 일본의 대지진을 보며 이런 말을 한다. 결국 '행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불행'이 가진 힘을 통해 살아가는 힘을 얻는 것이 인생이라고.....

 

사는 게 참 녹록치가 않다. 작년 한 해 내 주변에도  슬프고 아픈 일들이 이웃들에게 많이 일어났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이있던 이웃들은 슬픈 일을 겪자마자 비관주의자로 급변하였다. 세상을 향해 자신만만하고 위풍당당하던 이들은 순식간에 닥친 불행에 세상을 등지며 슬픔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때로는 불행에 대비할 자세를 연습해야 겠다고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쩌면  세상은 긍정적이거나 비관적이라는  이분법으로 절대 나누어지지 않는 움직이는 물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슬퍼해서도 안 되고 너무 즐거워해서도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내 생각에 방점을 찍어 준 사람이 바로 지그문트 바우만이었다. 바우만은 기존 근대사회의 견고한 작동 원리였던 구조, 제도, 풍속, 도덕이 모두 해체되면서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국면을 일컬어  인류가 고체처럼 견고한 사회를 지나 '유동하는 근대'를 지나고 있다고 표현하였다.

 

저자는 이런 유동하는 근대에서는  슬픔과 불행이란 언제 든 찾아오지만 불확실성을 띠고 있기에 더욱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기존에 팽배했던 행복론이나 긍정론은 한계점에 다다랐고 이제 더이상 이 유동하는 근대에는 행복론과 긍정론으로는 미래를 대비할 수 없게 되었다. 언덕에 올라 자본주의의 실체를 만난 사람으로서 저자는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에 주목한다.  동시대를 살았지만 접점은 없었음에도 동서양에서 자본주의의 실체를 통찰하였던 두 거인은  누구보다 더  날카롭게 자본주의의 한계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두 거인들은 무려 백 년 이라는 시대 차이가 있음에도 현대인들을 마주한 듯 생생하게 작품에 표현하였다.  나쓰메 소세키 문학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현재의 시장만능주의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을 그렸고 베버는 고난의 변신론과 행복의 변신론을 통해  현시대의 한계점을 적확히  지적하였다. 이미 백 년 전에 이들은 근대라는 시대의 세례를 받은 이후에는 행복을 찾을 수 없다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예견대로 행복이 쏙 빠져버린 세계가 바로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세계이다. 

 

 

"인간이 덧없이 죽을 운명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어디까지나 겸허히 인간적인 것을 긍정한다." - 테리 이글턴-

 

언덕 저너머에 행복은 없다. 미안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살아가는 이유가 있다. 이제까지 내가 걸어 온 길에는 흙길도 있었고 아스팔트길도 있었다. 가끔 웅덩이가 깊이 패인 길도 만났다. 그 길을 건널 때마다 인생이 남겨 준 물음이 있다. 왜 살아가야 하는지, 왜 우리는 이토록 고독한 것인지, 진짜 자기를 찾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하는.... 그런 질문들에 답이 하나둘씩 채워져 내 인생을 만들어왔다. 어쩌면  삶의 부족함을 메워가는 것, 그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삶에 예기지 않게 불쑥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불행과 절망에서 인생의 의미를 건져올리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길이며 이 전인미답의 길을 채워가는 길목에 서 있는 모습이 현재 우리의 모습이다.  이 책에는 행복은 없지만 인생을 열어주는 길이 있다. 과거 무엇이 되기 위해 인생을 써왔던 우리에게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기에 매우 희망적이다. 불행을 염두에 두고 있는 한 희망이란 불씨는 절대  꺼지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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