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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새로운 조건들 - 사건, 진리, 장소
이정우 지음 / 인간사랑 / 2012년 9월
평점 :
반복에는 반드시 그때마다 차이가 동반된다. 따라서 영원회귀는 새로운 차이와 함께 되돌아오는 반복이다.‘진보’는 이런 영원회귀,즉 반복을 통한 차이의 생성을 그 선험적 조건으로 가진다. 달리 말해 진보는 늘 어떤 귀환, 실재의 귀환이며, 이 실재는 곧 소수자들의 존재=생성이다. 그래서 실재의 귀환이란 지배적인 물적 체제에 구멍을 내면서 도래하는 소수자=되기의 운동인 것이다. 진보란 새로운 모습으로 귀환하는 소수자들의 생성/운동을 필수적인 조건으로 한다.
진보란 무엇일까? 진보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이 점차 발달하는 것’ 또는 ‘사물이 점차 나아지는 일’을 의미한다. 정치의 영역에서 진보가 적극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들어서부터이다.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에서는 이런 진보의 철학적 사유체계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무척이나 난해하다. 저자는 진보가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으로서 시간과 장소 , 진리의 체계가 이루어졌을 때 ‘역사의 진보’를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먼저 시간으로서의 진보는 역사속에서 반복되면서 특징지어진다. 마치 우리의 삶이 반복으로 이루어지며 그 반복을 통해 시간의 마디의 층위들이 생성되는 것처럼이런 반복의 시대가 복잡한 사건들을 만들어낸다. 시간의 반복은 곧 시대의 반복을 말한다. 이제껏 역사속에서 진보가 수많은 사건의 주역이 되었듯이 차이와 반복, 진보와 퇴보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곳이 바로 ‘시대’라 부를 수 있다. 이런 반복가운데 도래한 차이는 우리 사회를 통제사회/훈육사회에서 ‘관리사회’로 전환시켰다.
이런 관리사회의 개념을 쉽게 설명하자면, 몇 년 전 덴젤 워싱턴 주연의 <데자뷰>로 설명된다. 데자뷰에서는 ‘시간의 창’이라는 우주에 떠 있는 7개의 인공위성으로 작동되는 관측 스크린이 등장한다. 우주 상공의 인공위성들이 테러 같은 사고나 사건이 발생한 곳을 다양한 각도로 보여주며 사건 당시의 정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기계다. 실시간 뿐만아니라 ‘시간의 창’은 정확하게 지구 시간으로 4일하고도 6시간 전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이것은 지구에 위치한 시간의 창 연구소에서 스크린을 통해 보는 인공위성의 전송자료들은 분명 실시간인데 그 시점은 바로 4일 6시간 전의 모습들이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인공위성에 녹화된 화면들만이 아닌 지난 과거일지라도 연구소에서는 보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가 있다는 점이다. 인공위성으로 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사회는 바로 관리사회 , 머지 않을 미래 유비쿼터스 관리의 실현이다. 비슷한 맥락의 윌 스미스 주연의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도 마찬가지 사회의 모습이다. 평범한 시민에서 졸지에 범죄용의자가 되자 순식간에 정부로부터 표적이 되어 쫓기는 윌스미스는 자신의 모든 것이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신용카드, 위성, 자동차, 신분증 이런 것들은 윌 스미스가 이미 관리사회 체제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반복 가운데서 도래한 차이는 우리를 통제사회/훈육사회에서 ‘관리사회’로 데려가고 있다.
(들뢰즈가 말한 우리들은 ‘관리사회’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 관리사회는 감금이 아니라 끊임없는 관리와 실시간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으로 움직여진다.“)
이렇듯 우리가 사는 사회는 관리사회이다. 영화는 대부분이 현실 사회의 반영이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작위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이미 몇 년전에 만들어진 영화가 현실이 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이렇게 관리사회에서 자연적으로 훈육의 절차를 거치고 있지만, 우리는 사실 훈육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현대의 관리사회는 이 복잡한 양상을 , 추상적 파놉티콘(모두 다 본다)을 적절히 관리함으로써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리사회에서는 타자에 대한 이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소수자되기로부터 “사회를 방어하려는 ”전략과 전술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관리사회에서 소수자란 다수(기득권)에 저항하는 세력을 말한다. 이 책의 저자는 저항세력(시민주체)을 일종의 ‘귀환’ 이라는 성격을 가진 소수자로 표현한다. 그래서 저자는 진보란 새로운 모습으로 귀환하는 소수자들의 생성/운동을 필수적인 조건으로 한다고 한다.
사회주의적 진보 개념의 위기는 곧 소수자 운동의 위기이다.
진리란 곧 실재의 귀환이다. 실재의 귀환이란 신체와 화폐와 기호를 통제하고 조작하는 권력의 힘에 맞선 생명과 노동 그리고 주체의 귀환이다. 이 귀환을 통해서 역사는 파생적 반복의 영원회귀에 참여한다. ‘역사적 사건’은 맹목적 급류가 아니라 진리와 의미가 깃든 시간, 인간과 역사의 시간, 삶을 이끌어가는 힘으로써의 반복의 강도가 실재의 귀환일 수 있을 때, 진리를 담을 수 있을 때, 역사는 구원과 해방의 뜻을 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촘스키는 사회적 변화의 새로운 주역들은 농민들이나, 바아캄페시나, 또는 세계 농민들, 노동자 공동체들이라는 말을 했다. 앞으로는 국민이 원하고 사회에 정말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일에 투자하는 경영을 한다면 진정한 사회변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같은 맥락의 이야기이다. 진보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소수자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세계를 변화시킨 주역들은 소수자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런 소수자들은 바로 생명과 노동 그리고 주체의 귀환, 즉 진정한 진보라 할 수 있다.
위에 말했듯이 이 책은 진보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체계이다. 조금 아쉬움이 남는 점은 지나치게 학술적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