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 - 난세 리더십의 보고 한비자
신동준 지음 / 인간사랑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서양에 군주론이 있다면 동양에는 한비자가 있다. <사기>를 읽다보면, 동서고금을 통틀어 최고의 난세로 춘추전국시대를 꼽는 이유를 잘 알수 있다. 그러나, 난세가 사전적 의미로  전쟁이나 무질서한 정치 따위로 어지러워 살기 힘든 세상을 말하지만, <한비자>의 저자 신동준은 체제가 변하는 시대로 표현한다. 춘추전국시대가 신분세습의 봉건체제에서 능력위주의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로 이행하는 과정으로서 겪는 난세였다면, 지금은 미국이 오랜 세월 G1으로서 세계적인 헤게모니를 이행해왔지만, 새롭게 떠오르는 G2 중국으로 인해 이제는 '팍스 아메리카나'가 아닌 '팍스 시니카'의 도래와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진단하며 새로운 체제로서의 이행과정인 현재를 난세로 보고 있다. 이런 난세에 《한비자》에 더욱 주목하는 이유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마찬가지로 공과 사의 영역을 엄격히 나누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혼란스러운 세상을 통일할 수 있는 방법은 강력한 군주의 중앙집권화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신新국부론이라 할 수 있는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저자들은 세계의 불평등과 경제불황의 원인으로 정치와 경제제도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이런 제도의 문제는 바로 정부(국가)의 실패로 보았는데 이러한 지적은 바로 한비자의 법치사상과 맞닿아있다.  막스 베버가  "합법적 폭력 사용을 독점하는 것이  곧 정부"라고 규정한 후로 이후 정부의 정의로 합법적 폭력기관으로 대변하게 되었는데 시장의 잠재력을 활용하고, 기술혁신을 장려하며, 인재 육성에  투자하고, 개인이 재능과 능력을 동원할 수 있는 경제제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중앙집권화와 다원적인 정치제도가 필요함이 저자들의 주장이었다. 이것은 한비가 난세에는 군권이 신권보다 막강한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군주가 아무리 현명할지라도 나랏일을 혼자 이끌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신하들이 군주를 위해 감히 충성을 다하려 들지 않으면 그 나라는 이내 패망하고 만다. 이를 일러 '나라에 신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한비는 군주에게 사직을 지키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를 행하라고 충고하는데 하나는 나라를 부강하게 유지하는 부국강병이고 하나는 군권의 신권에 대한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제신술이다. 중요한 것은 이 두가지가 군주 개인의 도덕적인 덕목과는 하등 상관이 없으며 이 부분은 유가의 제왕지술과 다른 차이점이다. 역대 왕조의 명군(위무제 조조와 당태종, 청대의 강희제 등)이 겉으로는 유가사상을 내세우면서 속으로 법가사상을 가미한 이유를 외유내법의 통치라고 저자는 말한다.

 

 

 

진시황은 한비의 법치술을 그대로 받아들여 공과 사를 엄격히 분리하여 난세인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비 사후 2천여 년만에 한비의 통치술이 도치와 술치,세치등 4가시 통치술로 구성돼어 있다는 사실을 1940년대 사천대 교수로 있던 이종오가 최초로 발견하여 이후 노자의 도치, 한비의 '법치'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다는 '후흑구국'을 제창하며 서구 열강의 침탈로부터 중국을 보호하는 사상으로서 한비의 법치사상은 난세에 새롭게 떠오르는 리더십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무릇 치국평천하의 길은 반드시 우선 백성을 잘살게 하는 데서 시작한다.백성들이 부유하면 다스리는 것이 쉽고, 백성들이 가난하면 다스리는 것이 어렵다."

 

글로벌한 경제위기는 바로 민생의 위기로부터 나온다. 민생의 실패는 곧 시장의 실패를 의미하며, 이것은 정치의 실패를 의미한다. 결국 이러한 실패들은 리더십의 부재로 연결되어진다. 리더십의 새로운 창조의 보고로 <장자>를 읽으면서 기존의 장자를 문예와 철학의 보고가 아닌 창조적 상상력을 제공하여 주는 리더십의 보고로서의 장자는 색다른 고전의 맛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 책은 리더십의 보고 두번째의 책으로 창조적 경영의 리더십에 초점을 맞추어 난세에 한비자를 읽어야하는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를 되새겨보게 한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최근들어 주목받는 신국부론이라 칭하는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와 이어 <한비자>를 읽으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대의 요구'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유기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만큼 <한비자>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저자들의 주장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져 있었다. 이천년이 흐른 뒤에 현 자본주의 국가의 한계점에서  한비의 법치사상이 새로운 패러다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져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한편으로는 세계적인 석학들이 동양고전에 주목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 2024 노벨경제학상 수상작가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 시공사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배가 고파 빵을 사러 갔는데 그곳에서 한 여자가 내 눈길을 끌었다. 보기에도 너무 마른 여자는 옷이 더러웠고 언뜻 보기에도 가난해보였다. 여자는 빵가격을 보고 자신의 손에 든 동전을 헤아려보길 여러번 하더니 손에 든 돈과 가격이 같은 빵 한 봉지를 들고 계산대로 가서 계산을 한 뒤, 바로 의자에 앉아서 허겁지겁 빵을 먹었다. 나는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젊은 여자로 보였는데 그처럼 가난한 모습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난과 빈곤의 실체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불평등의 쉬운 예로 북한 주민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는 뉴스보도가 나온 다음날, 북한의 지도자들은 180억을 들여 불꽃놀이를 하였다. 지구촌 어딘가에는 밥한끼 못먹어 굶어죽지만, 누군가는 음식이 남아돌아 썩어버리기도 한다. 이런 세계적 불평등은 어느 시대에도 존재했던, 지금도 존재하는 문제이다.  정치권력은 소수의 손에 편중되어 부를 축적한다. 지독히도 가난한 빈곤국가 이집트는 국민들은 가난하다 할지라도 이집트 대통령은 개인 재산이 무려 700억 달러에 달한다. 북한의 김정은도 아마 그렇지 않을까 싶다. 북한과 이집트, 아프리카, 그외 무수한 빈곤국가들이 번영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를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저자들은  재능과 포부, 독창성, 미미한 수준이나마 그간 받은 교육을 한껏 발휘할 수 없는 사회 여건과, 비효육적이고 부패한 정부를 들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영국과 미국이 부유해진 것은 시민이 권력을 쥔 엘리트층을 무너뜨려 정치권력을 고르게 분배했고, 시민에 대한 정부의 책임과 의무가 강조되며 일반 대중이 경제적 기회를 균등하게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든 덕분이라고 한다. 이처럼 가난한 사회가 부유해지려면 근본적인 정치적 환골탈태가 필요하다. 성공적으로 정치변혁을 이루어낸 나라는 광범위한 사회운동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하는데 경제제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 나라가 어떤 경제제도를 갖게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와 정치제도다. 정치 및 경제 제도의 상호작용이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한다. 이것이 저자들이 제시하는 세계불평등 이론의 골자다.

 

이처럼 세계는 불평등하다. 아니 우리가 사는 세상자체가 불평등하다. 이런 불평등을 우리 나라와 북한과의 경제차이에서도 극명하게 알 수 있지만, 우리 나라처럼 담장 하나로 부와 가난의 엄청난 괴리감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있다. 바로  애리조나 주 노갈레스와 소노라 주 노갈레스이다. 애리조나 주 노갈레스가 소노라 주 노갈레스보다 부유한 이유는 국경을 두고 전혀 다른 제도가 시행되기 때문인데 저자들은 그 이유를 기업가, 개인, 정치인 모두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정치 ·경제제도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든 사회는 국가와 시민이 함께 만들고 집행하는 정치 ·경제적 규육에 따라 제 기능을 수행한다. 경제제도는 교육을 받고 , 저축과 투자를 하며, 혁신을 하고 신기술을 체택하는 등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국민이 어떤 경제제도하에서 살게 될지는 정치 과정을 통해 결정되며, 이 과정의 기제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정치제도다. 이 책은 한나라의 빈부를 결정하는 데 경제제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 나라가 어떤 경제제도를 갖게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와 정치제도이다. 따라서 , 저자들은 오늘날 제도가 서로 다른 패턴을 보이는 이유를  과거 역사에서 뿌리를 찾는다. 일단 사회가 특정한 방식로 조직된 이후에는 그런 경향이 지속되는 관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정치,경제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가난한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도 그런 관성과 그 관성을 유발하는 힘 때문이다.

결국 번영을 일부 기본적인 정치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기존의 이론들이 세계 불평등 원인에 대해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했던 이유는 세계불평등을 설명하려면 서로 다른 정책과 사회적 환경이 경제적 인센티브와 행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이해해야 하므로 경제학에 대한 이해와 그에 부수적인 설명으로 정치적 설명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경제성장에는 포용적 시장의 잠재력을 활용하고, 기술혁신을 장려하며, 인재 육성에  투자하고, 개인이 재능과 능력을 동원할 수 있는 경제제도가 필요하다. 막스 베버는 사회에서  "합법적 폭력 사용을 독점하는 것이  곧 정부"라고 규정한바 있다. 중앙집권화되고 다원적인 정치제도를 포용적 정치제도라고 부르며 위에 말한 두가지 조건중 하나라도 충족하지 못한다면 착취적 정치제도라고 부른다.

 

산업혁명이 유독 잉글랜드에서 싹이 터 가장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포용적인 경제제도 덕분이었으며 이런 경제제도는 명예혁명이 가져다준 포용적 정치제도의 기반 위에 마련된 것이다. 명예혁명은 경제적 필요성과 사회의 열망에 한층 더 민감한 개방적인 정치체제를 만들어주었으며, 산업혁명은 거의 모든 나라에 영향을 끼친 결정적 분기점을 만들어주었다. 프랑스는 17989년 프랑스혁명으로 절대왕정이 무너지자 포용적 제도를 향한 새로운 길이 열렸고, 궁극적으로 산업화에 착수해 고속 경제성장을 누릴 수 있었다. 혁명은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독일과 이탈리아 일부 지역에서도 산업화에 불을 지폈다. 19세기 이후 전개된 주요 기회를 활용할 수 있느냐는 궁극적으로 앞서 설명한 제도적 환경에 갈리게 되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세계불평등의 뿌리는 바로 이런 제도적 확산에서 비롯된다.

 

오늘날 국가가 실패하는 원인은 착취적 경제제도가 국민에게 인센티브를 마련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착취적 정치제도는 착취적 경제제도를 뒷받침해준다.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착취적 정치,경제 제도는 국가가 실패하는 근본 원인일 수 밖에 없다.  

 

세계적 불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어찌되었던 간에 현재의 경제위기를 타계할 방법을 세계적으로 모색해야 할 때이다. 기존의 낡은 패러다임으로는 글로벌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없을 듯 하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저자들은 나라의 성패를 가르는 제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하고 있다. 저자들은 빈곤국가들의 빈곤에서 벗어나는 이유를 살펴봄에 있어 역사속에서 정치와 경제제도의 상호작용을 살펴보는 다차원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굉장히 방대한 분량임에도 책이 주는 가치가 엄청난 이유는 가난이라는 것이 이제 빈곤국가만의 위기가 아닌 전세계에 당면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너도나도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지만, 정부(국가)의 실패는 외면하고 있다. 기존에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여 구조적인 실패자체를 외면하던 시각에서 벗어나 정치의 실패는 곧 경제의 실패임을 이 책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국가가 잘 사는 방법은 저자들이 말하는 포용적 정치제도의 기반위에 포용적 경제제도의 도입이다. 더 쉽게 풀어 설명하자면, 기존에 정부의 실패의 요인은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여 경제를 모르는 정치인들이 정책을 만들었기에 국가(정치)의 실패를 가져온 것이며 글로벌 경제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 기존에 우리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켜 시장의 실패만을 이야기해왔지만 , 결론적으로는 정치의 실패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들은 정치와 경제가 상호작용을 하며 정치권에서부터 구조적인 변혁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책의 골자이다. 현재 전 세계에 닥친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탈출시켜줄 빈곤과 번영의 정치학이자 경제학으로서 이 책은 심오한 가치를 깨닫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며칠 전부터 집에 텔레비젼이 생겼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물론 아이들이다.문제는 아이들이 텔레비젼을 보면서 무언가를 자꾸 사자고 조른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텔레비젼에서 소개하는 광고를 보며 무조건적인 신뢰를 가진다. 물론 미남미녀들만 등장하며 이쁘고 멋진 모습으로 소개하는 상품소개는 아이들에게 제품의 신뢰를 주기에는 충분하다. 문제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달라고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주어도 아이들은 맑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왜? 라고 순진한 얼굴로 되묻는다. 아이들과  한참을 소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나 역시도 쓸데없는 소비를 많이 하고 있는 과잉소비자였다. 

 

 

 

 
1,소비자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은 ..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끊임없이 소비해야 돌아가는 사회이다. 한마디로 소비자사회. 소비의,소비를 위한, 소비에 의한 사회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만들어지는 상품들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소비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상품들이다. 실제로 없어도 일상에 불편함은 없는 상품들이다. 소비를 목적으로 만든 상품은 강한 유혹으로 외관이 아름다워야 하며, 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야한다. 본질은 같음에도 말이다. 가만히 멈춰 있을 수 없고 오랫동안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없고 모든 것들이 계속해서 변해야 한다. 우리들이 좇으려고 안달하는 패션들과 우리의 주목을 받는 대상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 또한 우리가 꿈꾸는 것들과 무서워하는 것들, 우리가 욕망하는 것들과 몹시 싫어하는 것들, 심지어 희망을 품는 이유와 염려하는 이유조차도 계속해서 변화한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래야만 하는 지금의 이 시대를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라는 표현을 한다.

 

'유동하는 근대세계'는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저자 바우만의 독창적인 개념으로 , 기존 근대사회의 견고한 작동 원리였던 구조,제도, 풍속,도덕이 해체되면서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국면을 일컫는 용어다. 바우만은 인류가 고체처럼 견고한 사회를 지나 '유동하는 근대'를 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전자가 예측 가능한 사회였고, 공동체가 존속했던 시대였다면, 후자는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보호막이 모두 사라져버린 시대이다. 바우만에게 '유동성'은 후기 근대의 불확실한 삶을 가리키는 것이자, 동시에 공포와 결부되는 개념이다. 바우만은 이처럼 근대를 '견고한 근대'와 '유동하는 근대'로 나누고 견고성에 유동성을 대비시킨다. 바우만은 유동성이라는 개념용어를 현대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데 적용했다. 우리 시대 세계의 질서와 제도가 고체성을 잃어버리고 끊임없이 유동한다는 것이 바우만의 생각이다.

 

2, 나는 보여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소비자사회는 이렇게 보여지는 것,모든 것이 전시의 목적을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의 판단기준은 미와 추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보여지는 것이 이제는 상품이 아닌 인간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사회를 '나는 보여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가 인간의 존재를 대변하게 된다고 한다. 소비자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웹서핑은 점차 확대되어 인간 상호간의 의사소통까지 장악하게 되었고 이제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사귀는 만남이 아니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접촉하게 되었다.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이런 것들로 의사 소통의 기회는 더욱 많아졌지만 이런 온라인으로의 의사소통은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아닌 피상적인 대화속의 피상적인 만남을 부추긴다. 오로지 보여지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온라인의 만남은 사람과 사람사이에 가지는 어떤 친밀함이나 심원함, 영속성에 상처를 주고 있다. 

 

"어째서 의사소통 기술이 개선을 거쳐 계속해서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동안 정작 다른 형태의 의사소통, 다시말해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을 이어주는 진정한 의사소통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려 이처럼 여전히 서로 엇갈리는 혼란 속에 빠져 있어야 하는가. 더구나 은폐되어 있는 측면뿐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측면에 있어서도 분명 정직하지 못하며 실상 참다운 의사소통의 환상에 불과한 그런 광장(인터넷광장)을 지니게 되었다고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말이다." -주제 사라마구-

 

주제 사라마구는 그의 소설에서 아무리 의사소통 기술이 계속해서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지속될 수 밖에 없는 인간 고유의 특성-진정한 미궁을 통해서 서로 대면하게 될 때의 당혹감-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며 가지는 독특한 특성들은 온라인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3,김씨표류기가 보여주는 잉여사회

영화 <김씨표류기>를 보면 소비자사회에서 버려진 불량소비자 남여 두 김씨가 나온다. 은둔형 외톨이의 여자는 오로지 온라인에서만 여왕대접을 받는다. 이 가상의 공간에서 아름답고 행복하며 완벽한 여자가 되지만, 현실에서는 부모에게 의존해 사는 은둔형 외톨이일 뿐이다. 미와 추의 기준으로 보면 소비자사회에서 버려진 추의 여자이다. 끊임없이 성형수술을 해야하고 온 몸을 아름답게 꾸며야하는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로서의 삶으로 실제로 그녀는  얼굴에 흉터가 있는 불량소비자일 뿐이다. 신용불량자인 남자가 한강에서 투신자살을 한 후 강물에 떠밀려 표류하게 된 곳은 밤섬이라는 외딴섬이다. 이 밤섬은 도시의 외딴 섬으로 도시의 쓰레기가 밀려와 도착하는 잉여의 공간이다. 김씨가 떠밀려온 것처럼..도시의 모든 쓰레기가 강물로 떠내려와 도착한다. 이 밤섬은 그렇게 쓰레기 즉 잉여의 공간이다.  현실이 아닌 가상의 공간에 살아가며 은둔형 외톨이로 살아가고 있는 여자와 잉여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한 남자. 이들은 모두 바우만이 말한 도시에서의 잉여적 삶의 형태 -불합격품,불량품,폐기물,찌꺼기- 이다. 그러나 이들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쓰레기의 재사용이다. 쓰레기는 다시 쓸수 없는 버려진 물건이다. 잉여의 삶인 두 주인공들에게 희망이란 쓰레기를 다시 재사용함으로써 보여주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세계를 구축'하는 사용자로서의 '독립된 면모'를 발휘할 때 잉여적 삶에 희망이 비춰진다는 메세지와 함께 두 주인공들의 삶은  비극이 아닌 희망으로 막을 내린다. 이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은 이 책의 저자 바우만이 명명한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운 편지와 같은 맥락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4, 집단적인 불확실성과 개인적인 불확실성

폴란드의 노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유동하는 근대에 띄운 44통의 편지는 노학자다운 삶의 혜안과 번뜩이는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사회학이자 철학이 숨쉬고 있다. 가장 먼저 온라인이 장악하게 된 사회에서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무분별한 정보에 휩쓸리게 되면서 거짓말과 환영,쓰레기, 폐기물 같은 껍질들을 분리해내서 읽을 만한 낟알과 진리의 낟알을 뽑아내도록 도와주는 탈곡기가 없음을 안타까워 하는 첫번째 편지를 시작으로 세대 차이,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주는 의사소통의 한계,점점 프라이버시가 없어지며 무분별하게 이루어지는 섹스, 부모와 아이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교육 문제 등을  냉철한 판단과 노학자의 근심어린 조언을 들을 수 있다.  노학자의 가장 큰 우려는 모두가 이 '유동하는 근대'의 모습을 바로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유동하는 근대에 사는 우리들의 모습은 저자의 표현대로 하면 살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이런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위험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오로지 속도뿐이라고 한다. 저자는 앉아 있는 것보다는 걷는 편이 낫고, 걷는 것보다는 뛰는 편이 나으며, 뛰는 것보다는 오히려 서핑(파도타기)하는 편이 낫다고 한다. 어쨋거나 유동하는 근대에서는 어떤 한 형태가 언제 어떤 식으로 고체화될지 아무도 알 수 없으며 어떤 형태로 고체화된다하더라도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래는 이토록 집단적인 불확실성과 개인적인 불확실성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정보의 홍수속에서 살고 있으며, 언제든지 위험으로부터 구출해내줄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통신 수단은 최첨단을 걷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오히려 수많은 범죄에 노출되어 몸살을 앓고 있다. 나는 한편으로는 스마트폰이 우리의 정신을 뺏어갈 수는 있을지라도 우리의 일상에는 실질적으로 아무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위에 말했듯이 지금은 필요에 의한 상품들이 아닌 소비를 목적으로 하는 상품들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이름하여 소비자사회가 '유동하는 근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이들은 새로운 것들에 열광하며 넘쳐나는 물질문명에 익숙한 세대로 낡은 우리 부모세대들을 점점 더 이해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사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과 일상에서 철학할 줄 모르는 사유가 쏙 빠진 고독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미래는 더욱 불확실해져 갈 것이다. 유동하는 근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지그문트 바우만을 읽는다는 것은 이런 불투명한 미래에  한줄기 투명한 희망의 빛 같은 것이 아닐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1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김소임 옮김 / 민음사 / 200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여섯 블록이 지난 다음, 극락이라는 곳에서 내리라고 하더군요.

 

몸과 마음이 곤하여 잠깐 머리를 식히고 싶은 마음에 집어 든 책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이다. 책을 펼치자마자 그 자리에 앉아 꼼짝하지 못한 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몰입과 구성이 빼어난 작품이다. 마치 한편의 연극을 보는 기분이었으며, 주인공 블랑시에게서 알 수 없는 동정심과 아픔이 느껴진다.

 

주인공 블랑시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게 된 이유는 동생 스텔라를 보러 가기 위해서이다. 여름 휴가를 동생의 집에서 보내고 싶어 욕망의 전차를 타고 극락에 내리지만, 이름처럼 극락은 아니다. 그러나, 욕망이란 전차와 묘지라는 이름, 극락이라는 동생이 있는 그곳은 바로 현실을 말하는 곳이었다. 블랑시를 현실로 되돌려놓아 결국 파멸하고마는 블랑시의 삶을 대변하고 있는 전차의 이름이다. 영어교사인 블랑시는 동생 스텔라 앞에서 무척 교양있으며 우아한 모습을 잃지 않지만, 사실 블랑시는 학교에서 열일곱의 제자와 불륜을 저질러 학교에서 짤렸다. 동생에게는 휴가를 가장하며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스텔라에게 현실에 안주해서는 안된다고 충고도 하며 똑똑한 언니의 모습을 가장한다. 동생의 남편 스탠리에게도 무례함을 꾸짖고 교양을 강조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스탠리에 의해 블랑시의 정체가 폭로된다. 블랑시의 여행가방에 가득한 거리의 여자들이 입을 법한  천박한 드레스와  다이아몬드 왕관을 흉내낸 모조 다이아몬드 왕관이 말해주는 블랑시의 과거는 충분히 짐작할만 하기에 스탠리는 블랑시의 거짓된 모습을 깨뜨리고 싶어한다. 그런 둘의 대립은 여러가지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서서히 가면이 벗겨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랑시는 거짓말을 계속한다. 부유하고 교양있고 처녀처럼 순진한 모습의 여자라는 상상을 가지고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 블랑시의 삶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진하고 아름다운 처녀로서  블랑시를 사랑한 남자 미치의 존재는 이런 블랑시에게 극락을 선사해준다.  늙은 노모를 모시고 사는 순수한 청년 미치.....그러나, 블랑시의 과거를 이해하기에 미치는 너무도 작은 남자였다.

 

 

아름다운 꿈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벨 리브'라는 농장을 유산으로 가지고 있었던 블랑시는  열 여섯에 사랑에 빠져 결혼하지만, 어린 남편이 변태성욕자인 줄 알면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시를 쓰고 낭만을 꿈꾸며 장래가 촉망되던 예술가였던  남편의 자살과 잇단 가족들의 죽음, 그리고 잃어버린 농장 벨 리브(아름다운 꿈)은 이름처럼 블랑시의 인생에서 아름다움을 거두어간다.

 

  “난 언제나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지해 왔어요.”

 

이후 블랑시는 욕망에 몸을 맡기며 살아가게 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녀에게는 기댈 무언가가 필요했으며 그것은 낯선 사람의 친절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올라 만나게 된 미치는 극락과도 같은 희망을 잠시 꿈꾸게 하지만 미치에게 과거가 알려지면서 버림받게 된 블랑시는 극심한 정신혼란에 빠지게 된다. 블랑시가 끝없이 불러대는 노래가사 " 당신이 나를 믿어주신다면 그건 가짜가 아니랍니다."처럼 블랑시는 거짓을 말하지만 결코 거짓이 아니었음을 자신이 진실이어야만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을 블랑시는 그렇게 해서라도 현실을 견디고 싶었던 것일까. 이렇게 블랑시는 끊임없이 현실을 거부하며 상상속의 자신을 만들어가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블랑시와 늘 대립되어 싸우는 스탠리는 호전적이며 성적우월감을 가지고 있으며, 지나친 현실주의자이며 육체적으로 강인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스탠리는 끊임없이 블랑시와 대립하지만, 정신이 온전치 못한 블랑시를 겁탈하는 것으로 블랑시는 극락이라는 곳에서 하차하는 것으로 극은 끝난다.

 

벨 리브가 내 손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하면서 지난 이 년동안 난 그리 바르게 살지 못했어.

전혀 강하거나 자립적이지 못했어. 사람이 여리면,여린 사람들은 희미한 빛을 발하거나 반짝거려야 해.나비 날개는 부드러운 색을 띄어야만 하고 불빛 위에 종이 갓을 씌어야만 해.... 여린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거든. 여리면서도 매력적이어야 해. 그리고 나는, 나는 이제 시들어 가고 있어! 얼마나 더 눈속임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보바리 부인이 현실을 거부하며 늘 환상속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처럼, 블랑시 역시 모든 것이 사라지더라도 환상속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은 너무 애처롭다. 그것이 남이 보았을 때 욕망으로 보여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블랑시에게는 사랑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이 책은 여러가지의 상징으로 읽혀질 수 있으며 삶의 무수한 의미를 담은 작품이지만  나는 이 책이 남자의 성과 여자의 성에 대해 무척  솔직하면서  극명한 차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블랑시가 정신병원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성적으로 여자는 사회적 약자일 수 밖에 없는 것일까하는 안타깝고도 아픈 우리 현실의 초상을 보는 기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근,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다 - 채소, 인류 최대의 스캔들
리베카 룹 지음, 박유진 옮김 / 시그마북스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채식주의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최근 들어 육식의 폐해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는 책들을 많이 보게 된다. 채식보다는 육식을 좋아하는 편인데 요즘들어 채식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최근에 영화  <인류멸망보고서>에서 주인공 류승범이 오염된 쇠고기를 먹고 이상한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모습을 보면서 한동안 고기는 쳐다보지 않았던 것 같다.(근데 어느 순간 다시 먹게 된다)  어느 철학자가 말하길, 우리는 매일 누군가의 죽음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고 하였듯이, 결국 육식이란 죽음과 생명을 바꾸는 일인지도........최근 유명 연예인들이 돌연 채식주의를 선언하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였는데 이 책을 보면서  채소가 몸에 좋은 이유뿐만 아니라, 채소가 인류문화사에 어떤 작용을 해왔으며, 우리가 늘상 보아오는 채소에 숨겨진 비밀등 이제껏 어떤 책에서도 다루지 않은 채소문화사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과일과 채소는 우리에게 하루에 필요한 비타민의 90%,비타민 A의 50%, 비타민B6의 35%,마그네슘의 25%, 니코틴산(B3),티아민(B1),철분의20%를 공급한다. 채소를 많이 먹으면,암과 심혈관계 질환에 걸릴 확률이 줄어들고 기대 수명이 늘어나며 몸이 날씬해진다.

저자는 채소가 무엇보다 어떤 첨가물투성이의 제조, 가공식품들과 달이 '진짜 음식'임에도 인류 역사에서 오랫동안 업신여김을 당해왔다며, 채소에 대한 편견과 오해, 그리고 역사속에서 어떤 변천사를 겪어왔는지를 설명함과 동시에 채소의 영양성분까지 있어 영양학부분만이 아닌 실용적인 부분까지 설명해주고 있어 이 책은 '채소에 대한 보고'와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채소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다.

 

퐁파두르 부인이 샐러리의 소문난 최음 효과를 염두에 두고 루이 15세에게 셀러리 수프를 먹여 오랫동안 총애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과  전설적인 18세기 엽색가 자코모 카사노바는 정력을 키우기 위해 셀러리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고대부터 아스파라거스는  최음제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였으며, 아스파라거스의 새순이 외설스러운 이유로 여학교에 금지당한 사연이 공개되며 아스파라거스는 비아그라의 기능뿐만 아니라 울혈성 심부전에서 신장 결석에 이르기까지 온갖 질병의 특효약으로도 권장되었다. (책에는 오랫동안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아 유명해진 퐁파두르 부인의 아스파라거스 레시피가 실려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성욕증진제는 당근이다(의외의 결과). 당근에 많이 함유되어있는 비타민A는 세포의 성장과 증식을 돕고 면역계를 통제하는데 무엇보다 시력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크다고 한다. 눈의 망막에서 비타민A가 간상세포속의 단백질 옵신과 결합해 시각 색소 로돕신을 생성함으로 어둠 속에서 사물을 잘 볼 수 있게 해준다고 하며  실제로 '시력 강화제'로 당근을 먹은 야간 비행사들이 전투에 성공한 전력이 있기도 하다.

 

최근 들어 밥 대체식품으로 더욱 가치가 높아진 옥수수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인간과 옥수수의 관계는 다른 어떤 채소보다 더 깊다. 과학자들은 옥수수가 약 9,000년간 재배되어 왔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는데  미국은 매 세끼를 옥수수를 먹는다. 그 이유를 흡혈귀에 비유한 점도 재미있다. 옥수수를 주식으로 먹으면 햇빛에 민감해지며 니아신의 부족으로 피부염에 자주 걸리기 때문에 펠라그라에 잘 걸린다고 한다.

 

가지에 븥은 별명 또한 재미있다.가지를 발광 사과 또는 미친 사과라고 하는데 가지는 취식자들을 즉시 발광시킨다는 평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동안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채소로 각인된 가지는 발광만이면 다행이지만 열병, 간질 , 주체 못할 욕정을 유발하기 쉬웠다고 당시 사람들은 믿었던 것 같다. 상추는 고대의 수면제로 사용했으며 반反 최음제의 기능을 가지고 있어 한때 기혼자들이 상추를 많이 먹으면 아이를 적게 낳게 될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상추를 먹고 태어난 아이들은 게으르고 어리석으며 까다로운 사람이 되므로 기혼자들에게는 좋지 않은 음식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유럽인들의 평이었고 이집트인들에게는 상추가 성적 흥분을 이끌어내는 채소로 알려졌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차이는 상추의 양에 있다. 상추를 조금 먹으면 상추 락톤의 영향으로 쓴맛과 곤충으로 부터 보호하는 진정제의 역할을 하게 되고 많이 먹을 경우에는 코카인 같은 유액 성분 트로판 알칼로이드가 작용하게 되어 행복감과 희열, 성적 흥분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럽인들은 상추를 많이 먹지 않고 조금 먹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다.

 

책에 나온 스무 가지 채소들은 우리의 일상 식탁에서 매일 볼 수 있는 식품이다. 나는 새삼스럽게도 이 모든 채소들에 잠재되어 있는 무궁무진한 영양소에 대해서 다시 배우는 기분이 들었다. 오이, 셀러리, 고추, 양파, 아스파라거스, 빈, 양배추, 당근 , 옥수수, 가지 , 상추, 멜론, 완두콩,감자, 호박, 래디시,시금치, 토마토, 순무까지 모두 최음제 또는 비아그라(정력제) 기능이 있다는 사실도 새롭게 안 사실이다. 그러고보면 자연에서 나는 모든 것들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는 것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주변에 갑작스레 몸이 안좋아져 자연스레 채식주의자가 된 사람들이 많다보니, 건강을 위해서 채식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문득 들게 된다. 그래서 그런 걸까. 저자가 서문에 세상을 훌륭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정원을 가꾸라고 하는 이유가 이제는 채소를 먹기 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사의 한 페이지의 주인공으로서 자연과 더불어사는 삶을 조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채소는 먹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살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유일한 자연식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