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키 동남아 - 사랑과 행복의 상징 두리안을 찾아 떠나는 힐링 로드
김이재 지음 / 시공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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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에서는 "두리안을 잘 먹는 남자와 결혼한 여자는 평생 행복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전 세계가 불황으로 허덕거리고 있는 와중에도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우리가 늘 우리보다 뒤쳐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남아 국가들이다. 내가 사는 곳이 시골이라 그런지 유난히 다문화가정을 많이 보게 된다. 하지만, 다문화가정을 보면 왠지 걱정이 앞서는데 그녀들을 보면 그녀들이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너무 어려서 놀라고 말이 너무 빨라서 놀란다.이 먼 곳까지 시집와서  남편에게 사랑받는다면 모르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이 불행한 얼굴들을 하고 있어 더 안쓰럽다. 아마도 알게 모르게 동남아에 대한 편견의 벽은  우리가 생각하는 벽보다 무척 높지 않을까...

 

<펑키 동남아>의 저자는 이런 동남아의 편견을 깨뜨려주는 좋은 책이다. 책의 서문에 동남아에서 '과일의 왕'이라 불리우는 '두리안'을 설명하면서 두리안 껍질이 가시가 날카롭고 삐죽뿌죽하여 쉽게 잡을 수 없지만, 껍질을 벗기고 나면 그 안에 부드럽고 향긋한 커스터드 크림같은 속살이 나온다고 하는데 이  표현처럼  동남아 사람들에 대한 날카롭고 삐죽삐죽한 편견을 버리고 동남아를 바라본다면 동남아의 속살이 얼마나 부드럽고 향긋한 지를 알 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번 여행을 부와 행복, 사랑과 희망의 상징이며 동남아에서만 생산되는 과일의 왕, 두리안을 찾아 떠나는 힐링 로드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두리안 산지가 모계사회의 전통이 강해 씩씩하고 멋진 여성이 많고 어린이가 행복한 곳이며, 행복한 사람들이 많은 '행복 밀집 지역'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래 전 박칼린의 <그냥:)>에서 삶의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삶의 다양성이란 세계를 다양성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될때 세계는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수많은 사상과 이념들의 다양성 한가운데에서도 그 모든 것들을 동시에 지니려 애쓰게 되면 자연적으로  편견과 비판의 노예가 되지 않고 균형 한 가운데에 서 있게 되며 그 깨달음은 열정으로 발산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은 채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만큼 삶을 다양성이라는 시각으로 본다는 것은 엄청난 가치를 지니며 삶을 아름답게 해준다. 반갑게도  이 책의 저자가 그런 다양성의 시각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저자는 여행을 하면서 그 나라의 단면만을 보지 않고 여러가지 다양한 삶을 소개해주고 있으며 그 삶들을 통해 세계가 지닌 가치로서 독자들에게 삶의 다양성을 체험할 수 있도록 안내해주고 있는 것이다. 

 

책에는 무척 다양하면서도 각 나라들의 특징과 문화, 음식, 역사를 들려주고 있는데 내게 가장 인상적인 부분들은 이들 나라가 가지고 있는 교육정책이었다. 싱가포르가 가장 부유하고 경쟁력있는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인재교육에 대한 정부의 노력덕분이었는데 , 싱가포르는 초등학교 때 시험을 통해 계속 공부할 학생과 직업학교로 보낼 학생을 나눈다고 한다. 이후 우수한 학생들은 국가로부터 특별한 지원과 다양한 교육적 혜택을 아낌없이 지원받게 되며 국비장학생으로 외국에서 공부하다가 나중에는 싱가포르 정부를 위해서 일하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영재교육을 국가차원에서 장려하고 있으며 이런 고급 인재들로 채워 진 정부는 세계 최고의 문화와 예술의 도시로 거듭나기 위한 변화와 변신의 노력을 끊임없이 한다. 그래서 싱가포르의 정부를  세계 최고 수준의 '나비 정부'라고 부른다. 

  

 

태국의 어린이들의 교육법 또한 이채롭다. 태국 어린이들은 영어 몰입 교육이나 수학과학 영재교육은 모르지만, 어렸을 때부터 감사하는 태도와 인사하는 법, 행복해지는 지혜, 가족과 친구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법,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법을 집중적으로 배우고 익힌다고 한다.  모든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태국 사람들이 물고기들에게 유기농 채소만 던져주는 모습도 무척 인상적이었고 사진을 통해 보는 동남아 사람들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밝고 온화한 표정들이다. 그들은 모두 성적 소수자를 포용할 줄 알고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들의 나라의 문화를 존중하고 아낀다.  

 

  위에 동남아 나라중 가장 부유하고 행복한 나라들이 이번 여행 코스였으며 행복 밀집 지역이라고 저자가 말하듯이 각 나라마다 행복이 넘쳐나는 분위기다. 전통음식도 한 번 꼭 먹어보고 싶을 정도로 맛있어 보이고, 사진들만 보아도 즐거운 여행기분이 절로 느껴진다. 그리고 각 나라들마다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정부의 정책도 볼 수 있어 무척 유익한 책이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에 한국을 저자는 우울한 사회라는 소제목을 달았다. 나 역시도 슬픈 것은 우리사회가 이제 아무도 자연을 사랑하는 법을 아이에게 가르쳐주지 않으며 어른들을 공경하는 법을 수학공식 외우듯이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이 슬프다. 자살 1위를 몇년째 기록하고 있는데도 왜 우리는 아무일도 하지 않는 걸까. 바쁘게 살아오면서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잃고 살아온 것 같다. 우리가 못사는 나라라고 우습게 보아왔던 동남아의 작은 나라들은 이미 그들의 문화유산을 최고의 관광지로 둔갑시켜 변신에 성공하였고 세계에서 자신들의 가장 큰 장점을 국가 경쟁력 삼아 국제시장에서 점점 우선권을 선점시켜가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왜 제자리걸음을 하는 기분이 들까. 행복하기만한 동남아사람들을 보며 우리나라 사람들도 저렇게 행복해봤으면 하고 부러워지는 건 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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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의 정치학 - 21세기를 위한 선언
안토니오 네그리 지음, 최창석.김낙근 옮김 / 인간사랑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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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주의는 어디까지 왔나>를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정치에 한편으로는 비관을 한편으로는 희망이라는 동전의 양면처럼 극과극의 미래를 떠올리곤 한다. 세상의 모든 일이 양면성을 띠고 있지만 , 정치는 이렇게 늘 극과극의 개념으로 분리되어져 있는 듯하다. 한 순간의 선택이 비관과 희망을 가져올수 있기 때문이다.  물과 기름을  혼합한 뒤  유리병에 담아두고 있다가  아무리 흔들어도 서로 합일점을 찾아내지 못한 채  이내 분리되고 마는 희망과 비관의 이름인 정치.  특히 대선을 앞둔 작금의 정치판은 살얼음을 걷고 있는 기분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어디까지 왔나>의 공저자들은 21세기를 탈근대의 시기로 전세계적으로 탈물질주의를 지향하는 움직임이 태동하고 있음을 말하였다. 이런 탈물질주의는  탈권위주의적이며 부당한 권위에 도전하고 수평적이 창의적인 '문화운동'이다. 이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여지는 21세기의 새로운 주체에 대해서 정치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탈물질주의는 고도의 산업화를 경험한 서구의 선진 민주국가에서 물질적 가치보다는 인권, 자유,자아실현,환경,생태,삶의 질 등 탈물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고학력,중산층, 젊은 세대 성향이 지니는 핵심 사상을 일컫는다.  

 

《전복의 정치학》의 저자 안토니오 네그리는 프랑스로 망명한 뒤 목격한 1986년 파리 학생투쟁을 보며 이제 '대중노동자'의 시대에서  무형적이고 협력적인 '사회적 노동자'의 시대로 변화되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여기서 네그리는 신자유주의의 한계인 지배계층의 빈곤화 전략이 조작된 것으로 빈곤으로 사회노동자 계층을 위협하고 있다고 한다. 새롭게 등장한  사회적노동자들의 연대와 통합을 저지하기 위해 21세기에 가장 중요한 '자본의 정보화'를 막기 위해 지배계급들이 비밀주의로 전환하게 되었으며,이에 국가는 점점  비밀주의를 기반으로 한 핵국가의 성향을 띄게 된다는 것이 네그리의 주장이다.

 

 이렇게 해서 <전복의 정치학>에서 네그리는 사회적 노동과 의사 소통적인 지성과 관련된 특수한 주체성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서 전복의 힘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바로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는 힘을 말한다.이러한 전복은 현존하는 모든 구조에 대한 전복이라기보다는 직,간접적인 착취를 목표로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전복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의 국민들은 이미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누어져 착취를 당하고 있음을 명징하게 깨달아야 한다.  전복은 착취에 내재하는 폭력을 파괴하는 것이고, 사회를 통해 분간할 수 없고 심각하며 잔혹하게 퍼져 있는 폭력을 파괴하는 것이다. 즉 전복은 노동력과 노동하는 주체가 지적이고 사회적이 될수록 착취에 내재하는 폭력은 더 지적이고 사회적인 특징을 얻게 된다.이것이 바로 사회적 노동자를 뜻한다.

 

"인간은 전투에서 싸우고 패배한다. 그들이 싸워서 얻고자 하는 것들은 그들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생겨난다. 그것이 그들이 의미하는 바가 아니라고 밝혀졌을 때, 다른 사람들이 다른 이름을 걸고 본래 그들이 뜻하던 바를 위해 싸울 것이다."-윌리엄 모리스

 

결론적으로  네그리는 현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회 양극화와 소통의 단절을 꼽았다. 위에도 말했듯이 사회의 양극화는 지배층의 전략에 의한 것으로 보았고  새로운 주체들의 소통 단절을 위해 점점 국가는 비밀주의로 고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의아한 것은 페이스북, 블로그, SNS 등 소통의 채널들은 다양해지고 있으며 기계의 최첨단화, 디지털화, 모든 것이 대중화 되며 소통할 수 있는 길이 무궁무진함에도 소통 단절의 시대라고 부르짖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이것은 바로 참된 소통은 매체의 다양화나 접근성에 기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네그리는 21세기의 새로운 주체자인 "사회적 노동자 또는  다중" 이 소통을 원할하게 할 때야  우리 사회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가져올 것임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비밀주의로 무장한 핵국가의 출현은 반대로 잠재된 사회권력이라는 힘을 표출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바로 사회권력이며  늘 동전의 양면처럼 희망과 따라다니는 비관의 이름은 소통의 단절로 축약할 수 있다. 


☆내 이해가 맞을 지 모르지만, 나는 네그리가 말하는 사회적 노동자와 다중, 그리고 탈물질주의를 모두 '새로운 주체'로 이해했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주체란 결국은 사회권력이라는 희망으로 이해했다. 그 점에서  이 시대를 바꿀 마지막 희망이 있다면, 시민이 주권을 갖는 사회권력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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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하비 리벤스테인 지음, 김지향 옮김 / 지식트리(조선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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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커피를 한 잔 마신다.커피를 마시면서 커피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커피에 함유된 카페인은 심장발작, 두통, 소화시 질환, 궤양, 불면증, 고민증, 우울증 등 여러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말들이 머릿속을 떠다니지만, 이내 무시한다. 점심메뉴로 간만에 짜장면을 먹으러 직장동료들끼리 우르르 몰려간다. MBC다큐에서 한 백색공포편의 밀가루가 떠오른다. 밀가루의 맛을 내기 위해서 첨가하는 무수한 식품첨가물들, 한때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쓰레기 단무지라는 말도 있지만, 짜장면을 먹을 때 단무지는 필수다. 가끔 단무지에 고춧가루가 살짝 묻어 있는 걸 보면 , 이 단무지가 안전한 제품일까 싶지만, 그래도 눈 찔금 감고 먹는다. 이제 남은 것은 저녁 한끼, 식구들과 먹거리는 늘 고민거리이지만, 며칠 전 추석에 받은 한우세트를 처분하기 위해 삼일 째 쇠고기를 굽고 있다. 근데 또 석판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를 보니, 쇠고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수천마리의 대장균이 확산된다는 보고와 방부 처리된 쇠고기를 먹고 수 백명이 대장균에 감염되었던 사건이 머릿속을 부유한다. 그래도 눈 질금 감고 먹는다. 먹어야 사니까.

   

이렇게 음식은 먹을 때마다 불안함을 동반한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지만, 식품과 관련된 사건사고가 터질 때마다, 알고 먹어야 한다는 의식이 일기도 하지만, 그때뿐이다. 이런 공포속에서 문득 우리에게 음식이 공포의 존재가 된 것은 어느 시대부터일까? 인간의 가장 기초생활 중의 한가지 식은 인류사에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이다. 과거 콜롬비아가 고기를 절일 때 쓰는 향신료 후추를 구하기 위해 신대륙을 찾아 떠난 것처럼, 문명을 이루는 가장 기초요소는 또한 식이다.

 

 

  이 책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는 이런 음식을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또 하나의 메커니즘으로 바라보았다. ‘현대 과학, 산업화, 세계화가 합세하면서 만들어진 거대한 힘과 식품에 대한 공포를 중산층 삶의 필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미국인들의 개인주의 성향과 결합되었다. 저자 하비 리벤스타인은 식품에 대한 공포를 낳은 역사적 사실과 기록을 살펴보며 식품에 자본이 몰리게 되면서 점점 가중되어가는 먹거리의 공포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는데, 메치니코프가 요구르트를 마시면 평균 140세까지 장수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정작 본인은 70세에 죽었다. 게다가 대장의 불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사람의 몸에 불필요한 장기인 대장과 결장을 제거하는 실험을 하면서 자신은 대장과 결장을 제거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 2차 세계 대전 당시 파리가 박테리아의 주범이 되면서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파리와의 전쟁을 선포하지만 사실 이 박테리아는 근절시킬 수도 없고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박테리아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유해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대적으로 파리퇴치를 하면서 쏟아부은 살포제와 끈끈이 값 만해도 아마도 어마어마 할 것이다. 결국 파리퇴치로 돈을 번 사람은 따로 있다. 게다가 수많은 쇠고기 공포에도 미국인들의 변함없는 쇠고기 사랑, 쇠고기가 미국에서 충분히 식품안전에 위협적임에도 미국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는 아이러니까지 적나라한 고발을 하고 있다.

   

미국인들에게는 맛이 좋은 음식과 건강에 좋은 음식은 별개라는 인식이 기저에 깔려 있다. 이는 20세기 영양학의 핵심메시지와도 일치하는 것이고, 이런 인식 때문에 많은 미국인들에게 쇠고기는 맛이 좋으면 더욱 경계해야 하는음식이었다.

 

 

 

이 책에서 다룬 내용은 미국 최고의 과학, 의학, 정부 전문가들의 든든한 후원을 등에 업고 공식적으로 확산돼 온 공포들이다. 최근 <독성프리>를 읽으면서 느낀 거지만, 우리에게 이제는 안전지대란 없는 것 같다. 저자가 슬프지만 정답은 없다고 명시하듯이 탄탄한 자금력과 과학적 권위를 부추기는 세력의 존재는 여전히 건실하다. 최근까지 나는 영양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비타민과 피로를 덜어주는 영양제들이었는데 이 책을 읽는 순간 모든 영양제 또한 끊어야 할 것 같다. 대기업에서 이제는 성매매와 카지노 사업까지 손을 대고 있다는 뉴스 보도를 보며,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같지만 인간의 가장 기초요소인 먹거리 또한 안전하지 않다는 것은 시장만능주의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얼마나 뿌리깊게 사회에 자리잡아 있는지를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한마디로 현사회는 돈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책이다. 마이클 샌델이 시장논리가 사회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으며 시장만능주의에 경각심을 일깨워야한다고 주장한 것처럼, 이제는 자본주의에 대한 위기를 공적 담론으로 내세워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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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 스완네 집 쪽으로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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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콩브레의 회상과 이어 2부 스완의 사랑은 1인칭 화자에서 3인칭으로 시점이 바뀌어 진행된다. 유년기를 회상하며 존재하였던 두 길은 화자에게 의미있는 길로 자리잡고, 콩브레에서 떠올린 유년시절의 기억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이 깨워주듯 어머니의 냄새와 더불어 맛은 기억을 되살아나게 하는 역할을 해준다.  이것은 마들렌의 모양이 주름처럼 펼쳐지는 것처럼 새롭게 떠오르는 기억이 펼쳐지는 것을 의미한다. 유년시절에 손님으로 들리던 스완에 대한 화자의 동경은 후에 스완의 딸 질베르트를 사랑하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랑의 모습으로서  2부는 스완의 사랑에 대한 고찰처럼 무척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스완은 화류계에 독보적인 존재로 책에서 스완을 표현하기를 스완은 자신의 사회 관계라는 건물 안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그 건물을 마음에 든 여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새 터에 다시 지을 수 있도록 탐험가들이 휴대하는 조립식 텐트 같은 것으로 만들었다.” 고 한다. 스완은 관계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언제나 사교계가 주는 쾌락과 향락을 모두 즐길 줄 아는 부류였다.시대상으로 그 시대의 낭만이나 예술이나 소위 지성이라 하는 것에 심취해 있던 상류층 사람들의 동경대상이었던 스완은 어느 날 삶에 어떤 소설보다 더 흥미롭고 더 소설적인 상황을 갈구하곤 하였다. 그런 소설적 상상력 때문인지 모르지만, 스완은  화류계출신인 줄 알면서도 자신의 이상형이 전혀 아닌 오데트를  보티첼리의 그림에 나오는 여인과 흡사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랑에 빠진다.

 

 

<스완의 사랑>에서는 다소 의외의 전개이다. 아마도 이 장의 주제는 사랑에 관한 성찰의 장으로 보여진다. 스완이 오데트에게 느끼는 감정의 변화를 무척 섬세하고 깊이 있게 묘사하였는데 사랑에 빠진 남자, 특히 스완이 어떤 예술작품을 통해 사랑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예술가들이 흔히 그러하듯 예술작품으로서 사랑을 만들어 가는 과정처럼, <스완의 사랑>자체가 하나의 소설이다. ( 마지막 작품설명에도 소설속의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내 짐작이 틀리지 않은 듯 하다.)

 

 

스완이 오데트를 보며 첫 인상을 묘사한 부분은 스완이 얼마나 오데트에게 실망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스완이 집에 돌아와서 책상 위에 올려놓은 그림 속 여인에게서 오데트를 동일시하며 단점을 모두 장점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의 묘사에서 스완에게서 사랑이 막 시작되고 있음을 느끼게 되고, 마치 스완은  소설처럼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진 스완에게 오데트가 창녀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첩일지도 모른다는 무수한 소문, 소설가들이 부여해주는 상상력처럼 자신이 알고 있는 오데트의 진실을 애써 모른척하려 할 때마다 찾아드는 의심과 질투심은 스완을 이전의 삶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스완으로 만들어버린다. 오데트만을 생각하다 오데트에 갇혀버린 셈이 되어버린 스완은 오데트를 완전히 지배하고 싶은 욕구와 싸워야했고, 그녀를 더 사랑하지 못해 죽을 때까지 괴로워해야 했다.

 

내 마음에 들지도 않고 내 스타일도 아닌 여자 때문에 내 인생의 여러 해를 망치고 죽을 생각까지 하고 가장 커다란 사랑을 하다니 !”

 

 <고장의 이름-이름>

며칠 전 <일상에서 철학하기>에서 자신의 이름이나 우리가 알고 있던 이름들을 반복해서 불러 보다 보면 이름이 가진 의미가 무용지물이 되는 것을 깨닫게 되며 사물의 본체에 접근하게 되는 과정을 한 번 따라해 본 적이 있다. 프루스트는 이름에 대해서 무척 집착을 했다고 하는데 이름에 관련된 사유의 단순화가 아마 철학의 첫 시작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이 장은 특히나 철학적인 사유가 넘쳐나는 장으로 이름이 주는 의미를 천천히 곱씹을 수 있는 철학이 돋보인다. 2<스완의 사랑>에서 3인칭이던 시점은 3<고장의 이름>에서 1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진행되며 화자는 드디어 샹젤리제에서 질베르트를 만나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다.

 

화자는 이미지와 이름사이에 대해 이미지가 어쩔 수 없이 단순화 되었기 때문인데, 어쩌면 내 상상력이 열만하고, 내 감각들이 불완전하고도 즉각적인 기쁨없이 지각한 것을 이름이라는 은신처에 가두었으며, 어쩌면 내가 그 이름에 꿈을 쌓아 놓아, 그 이름들이 이제 내 욕망에 자기 磁氣를 띠게 하였기 때문인지 모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덮으면서 문학이 주는 삶의 의미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실 며칠 전부터 문학과 삶을 뇌에서 철저히 분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이 책을 읽으며 또 다른 삶의 의미를 배운 기분이 든다. 어떤 누군가가 소설이 도달할 수 있는 극한라는 표현을 한 것을 보며 대체 어떤 소설에 저런 찬사를 붙일까 하였는데 역시 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극한의 방점을 찍는 소설이다. 프루스트가 문학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진정한 삶, 마침내 발견되고 밝혀진 삶,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체험하는 유일한 삶은 바로 문학이다.” 라고 말한 것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우리의 모든 삶이자, 미지의 삶, 체험할 수 있는 모든 삶이 담겨져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색할 수 있는 삶의 모든 부분을 아마도 프루스트의 문학을 통해 배우게 될 것이다.

 

오타 352 p 두 번째 줄 얼굴 하는 없는 얼굴 하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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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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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읽어보고 싶었으나, 사실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대작이라 이번에 민음사에서 7편중의 1편 <스완네 집 쪽으로>1편이 프루스트의 전공자에 의해서 번역이 되었다는 소식은 환호성을 지를 만큼 기쁜 소식이었다. 누군가의 일생일대의 대작을 읽는다는 것은 그만큼의 부담이 있기도 하다. 프루스트에게 작가로서의 영광과 비참을 동시에 남겨준 일생일대의 대작《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우선 읽어내려가면서 독특한 서술방식과 세밀한 묘사에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개인적으로 화려한 미사여구 같은 기교를 마구 뿌려놓은 소설들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런 소설이 읽을 때는 좋지만, 책을 덮고 나면 묘사하는 반의 반도 기억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셀 프루스트의 묘사는 어떤 기분이냐면, 저자가 말하는 서술방식에 빠져 소설속에 등장하는 배경이 머릿속에 모두 그려진다는 것이다.

 

 

소설의 첫 시작은 콩브레를 회상하는 장면이다. 콩브레는 마르셀이 유년시절을 보낸 곳으로, 여기서 화자는 곧 마르셀의 분신이나 마찬가지로 보여진다. 마르셀이 어렸을 때부터 병약하여 천식을 앓은 것처럼 소설속의 화자도 몸이 병약하고 예민하여 엄마에게 무척이나 의존적인 모습이다. 엄마가 해주는 굿나잇  키스에 대한 욕망과 집착. 그리고 엄마와 함께하는 저녁시간이나 책 읽는 시간을 가장 감미롭고 행복한 시간으로 회상하는 것을 보며 화자의 어머니에 대한 집착에 의아함이 들었다가 그렇게 어머니의 사랑에 집착한 애정과 더불어 어머니가 선사해준 시간들이 화자에게 소설가가 되는 꿈을 심어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화자의 집에 자주 놀러오는 손님 스완에 대해서 화자는 비교적 많은 애정을 가지고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 이유는 후에 스완의 딸 질베르트가 화자의 첫사랑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소설 속에서 스완이라는 인물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가 아마도 가장 크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주식중개인이었던 아버지 스완과 화자의 할아버지는 친구사이이라 아들 스완이 놀러오는 것을 가족들이 반기지는 않았지만, 딱히 싫어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스완이 스스로 계급을 속이고 행동했기 때문인데  사실 스완은 상류사회에서 가장 환대받는 인물이자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중간계급이었던 화자의 집에서는 그저  스완을 아버지 스완처럼 중간계급으로 바라보았다.  프루스트는 사회란 폐쇄적인 카스트로 구성되어 있어, 각자는 태어나자마자 자기 부모의 계급을 이어받아 예외적인 일 아니고서는 계급에 지배받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핵심적인 주제중 하나는 게르망트가로 표현되는 귀족 세계와 스완으로 표현되는 부르주아의 대립이다. 이것은 또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편에 아우르는 주제이다.

 

그리고 사랑.

나는 그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 존재가 어떤 미지의 삶에 참여하고 있어서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그 미지의 삶 속으로 뚫고 들어가게 해 줄 수 있다고 믿는 것. 바로 이것이 사랑이 생겨나기 위해 필요한 전부이며, 사랑이 가장 중요시 하는 것으로,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다.

 

콩브레 주변에 산책을 하려면 길이 두개 나 있는데 이 두 '길'은 정 반대의 방향으로 한쪽은 메제글리즈라비뇌즈라고 하고 하나는 게르망트 쪽이다. 메제글리즈라비뇌즈를 지나려면 스완의 소유지를 지나야하기 때문에 스완네 집 쪽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책을 읽다보면 스완네집 쪽과 게르망트 쪽이라는 이 두길에 담겨있는 무수한 은유들이 무궁무진하게 숨겨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책의 각주에는 이 두 길이 잃어버린 시간을 구성하는 커다란 두 기둥이라는 역자의 보충설명이 있다. 아마도 이것이 어떤 계급을 의미할 수도 있고 기억에 대한 오류일수도 있고 연대기적 착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1편에서는 단지 두 길을 산책하며 아름다운 나무의 향연과 강가로 난 장면들을 눈으로 스케치할 뿐이다.

 

스완네 집 쪽은 가장 아름다운 평원의 풍경이며 게르망트 쪽은 전형적인 냇가 풍경으로 현실적이기보다는 관념적인 것으로 그 길의 종점과도 같은, 적도나 극지방, 혹은 동양처럼 일종의 추상적이고 지리적인 표현이었다. 나는 그 두 길중 어느 한 길의 작은 부분도 내게는 소중했고, 그 길의 특별한 우월성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중략) 그러나, 두 방향으로 동시에 간 적 없는 습관 때문에 더욱더 절대적인 것이 되어, 두 길은 멀리서 서로 알아보지 못한 채, 여러 다른 오후들을 소통이 안되는 밀폐된 항아리 안에 가두고 있었다.

 

1권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 외에도 옛 피아노 선생 뱅퇴유가 딸에 대한 지나친 믿음이 오히려 화가 되어 슬픈 생을 마감하는 과정을 통해 믿음과 사실의 연계성을 떠올리고, 하녀 프랑수와즈가  레오니 아주머니를  섬기는 과정에서 레오니 아줌마가 보여주었던  증오와 의심, 노여움 이런 것들이 때론 한 사람에게는 존경과 사랑의 감정이 될 수 있기도 하다는 것을 회상한다. 1권 마지막에 화자가 두 길을 바라보면서  시사해주는 삶의 모습이 자신의 지적인 삶과 맞닿아있음을,  이 삶이 우리 안에서 서서히 진행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길을 열어 주는 진리 발견을 위해 오래 전 부터 준비해 온 길이라는 말을 한다.  나는 이 말이 콩브레에서 보내는 유년시절을 회상하는 화자가 오래 전 부터 준비해온 길의 초입에서 나를 초대하는 기분이 든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그 길 입구에 서 있는 기분은 과히 환상적이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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