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너머의 역사담론 1
오항녕 지음 / 너머북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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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나는 종종 광해군과 연산군에 대해서 새로운 평가를 하는 것에 감을 잘 잡지 못하였다. 실제로 둘 다 폭군의 이미지이고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지도 못하였을 뿐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조선에 이런 왕들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가끔 드라마나 영화에서 만들어지는 왕에 대한 이미지에 따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거 보면 , 역사의식 자체가 없는 일반사람들에게 정치와 임금, 그리고 역사의 이미지는 만들어기 나름이라는 것은 이 세가지 키워드, 정치와 임금,역사라는 것이 상징으로  세뇌시키기에 얼마나 쉬운가를 떠올리곤 한다.

 

 

이 책은  사료《광해군일기》라는 자료에 충실하여 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아닌 광해군의 역사를 살펴본다. 저자는 20세기에서 21세기에 조명되기 시작한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대한 재평가에 대해서도 자신의 주관보다는 광해군 시대를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광해군 시대는 한편으로는  조선이 근대사회로 넘어가지 못하고 중세에 머물게 된 가장 핵심적인 요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해군에 의한 재평가의 시작은  '인조반정'이 '근대 역사주의적 역사관'에 의해  새롭게 재평가받으며 부활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런 근대주의에 포섭된 조선 근대의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 조금 더 거시적인 안목의 역사사관을 일깨워주기 위해 광해군의 역사를 살펴보기를 권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두가지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는 사실과 광해군에 관한 새로운 평가는 정당한 명제인가.

 

또 이 책은 《광해군일기》 사료에 충실하였는데 이 광해군일기를 비판하는 이유의 하나가 서인들이 편찬하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누가 편찬했기에 믿을 수 없다는 것 자체가 참인 명제가 아닐뿐 더러 누가 편찬한 사료든 어떤 이유로 믿을 수 없다는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서인이 편찬했다는 사실로 비판 받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인조반정이후에 후에 남인과 북인도 참여한 사료이기에 믿을 수 있는 사료이다. 광해군일기는 광해군 재위당시 기록된 사관의 사초, 국왕에게 보고하거나 관청끼리 주고받은 문서이다. 따라서 재위 당시의 기록이므로 인조반정을 예상해서 편파적으로 작성했으리라고 보기에는 어렵을 뿐더러  광해군 일기는 중초본과 정초본이 다 남아 있어서 원래기록에서 어떤 기록을 빼려고 했는지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광해군일기》를 통해 광해군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이유는 최근 광해군 재평가의 시조 또한  《광해군일기》에 의존한 사실이다. 그런 거 보면 광해군일기는 비판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지만, 추앙할 수 있는 자료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책은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 시대를 세 시기로 나누어본다.

1기 즉위부터 1613년 계축옥사까지

2기 1613년부터 1618무렵까지

3기 1618~인조반정까지

 

 

 

책은 광해군의 역사를 말한다. 저자의 주관적인 역사사관의 저술이 아니라 사료 <광해군일기>에 실린 원문에 충실하게 현재 광해군에 대한 재조명까지의 보다 총체적이고도 거시적인 안목을 제시하고 있다. 역사에는 가정이란 없다고 하지만 만약에 인조반정이 성공하지 않았다면, 광해군은 성군이 될 가능성은 과연 몇 프로나 될까?  물론 광해군이 집권 당시의 시대는 난세였다. 그 와중에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을 회복시켜야 했고 붕당정치속에서 바른 정치를 하기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러나, 근대라는 과정을 일본의 식민지로 겪어야했던 우리나라의 역사에 광해군이라는 임금은 많은 것을 시사하는 동시에 현 우리나라 정치상황과 잘 맞닿아있다. 광해군에 대한 재조명까지는 좋지만,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료대로의 광해군은 솔직히 성군에 끼지 못할 재목이라고 본다. 아무리 정치가 도덕적인 개념과는 무관하다고 하지만,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펼친 것외에는 딱히 왕으로서의 자질은 극히 의심스럽다. 상징을 만들고 그 상징에 지배받으며 사는 것이 정치습성이라고 보면 광해군의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닌 실제의 모습 또한 중요하다.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이야말로 앞으로 계속 바꾸어가야할 미래를 쓰는 일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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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공부법 - 통찰력을 길러주는
안상헌 지음 / 북포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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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문학이 좋다.그러고보니 처음 블로그를 할 때가 기억이 난다. 사실 인문학과 나와는 인연이 없었다. 인문학을 한다고 해서 남보다 더 잘사는 것도 아니거니와 개인적으로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 특유의 고리타분함과 지루함은 솔직히 더 싫어했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즐거운 책을 읽었을 뿐이었다. 내게 책은 하루를 견디게 하는 수단이자 일종의 유희였기에 그땐 인문학을 읽는 사람들을 이해하지도 못했거니와 그저 어려운 인문책을 읽는 것을 대단하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허나  책을 워낙 좋아하다보니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부터  인문을 접하는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게 되다보니 자연스레 인문을 접하게 되었다. 처음에 인문을 고리타분한 학문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인문학을 읽는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공통점은 인문학을 모두 감동이라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내가 범접하지 못하는 그 어떤 부분에 대한 지적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금씩  인문에 발을 들이기 시작하였는데, 처음 어려워했던 것과는 달리 읽으면서 더한 깊이가 느껴지는 학문이며 읽을 때마다 감동을 주는 책이었다. 그런 인문의 깊이는 경험한 사람만이 알 것이다. 人文은 말그대로 사람의 학문이다. 인문의 감동을 느낀 사람들은 인문학이 좋다는 걸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지성 작가가 자기계발서 100권을 읽고 인문학 전도사로 나서게 되었듯이, 인문학의 감동을 아는 사람은 반드시 전도사가 된다고 나는 믿는다. 《인문학 공부법》의 저자도 삼천권의 책을 읽으면서 느낀 삶의 깊이와 깨달음을 많은 독자와 나누고 싶은 마음에 독서와 자기 계발의 전문가가 되었다. 인문의 감동을 아는 사람은 이렇게 평범한 사람을 전도사로 만든다. 

 

인문학은 예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고, 기존의 것을 다른 분야의 것과 연결해주기도 하며, 삶의 문제에 대한 또 다른 통찰을 보여준다.

 

그러나, 남들이 다 좋다고 해도 인문을 읽으려면 사실 막막하다. 어떤 책을 읽어야할지 , 추천받은 책을 읽어도 딱히 감흥도 느끼지 못하고 포기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아마도 이 책은 좋은 인문학 입문서가 될 듯 하다.

 

* 인문학 공부를 하기는 해야겠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한 사람
* 제대로 읽어낸 책도 별로 없이 계속 실패하는 사람
* 책 한 권을 다 읽어도 무엇을 공부했는지 남는 것이 없는 사람
* 좀 더 현명한 공부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사람
* 분야별로 깊이 있는 결과물을 얻고 싶은 사람
* 읽고 공부한 것을 어디에 활용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사람
* 무엇보다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

 

이 책은 이런 사람들에게 인문학에 다가가기 쉬운 방법을 설명해주고 있다.

책은 독서에 대한 첫 걸음부터 시작하는데 읽으면서 본인이 아마 책을 많이 읽는편이라면 저자가 말해주는 독서법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독서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느끼는 여러가지 공통점이 있다. 저자는 책을 읽는 것도 산에 오르는 것과 같이 세가지를 갖추어야 한다고 한다. 바로 체력과 끈기와 목표의식이다. 나 역시도 한달에 평균 스무권정도를 읽고 일년에 평균 240권정도를 읽었는데 이렇게 꾸준히 독서할 수 있는 비결을 꼽자면 체력과 끈기, 목표의식이 있어 가능했다고 본다.

 

북앤잡지에서 인문학에 대해 인터뷰를 한 적이다. 그때는 "인문학은 나를 돌아보고 또 나를 주위 세계 속에 집어넣어보고, 세계에서 발생하는 병리 현상의 원인을 찾아들어가게 한다"는 책속에서 배웠던 말을 했지만 인문학을 한 3년 공부하고 보니 이제는 인문학은 삶을 터득하게 하는 과정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나이 이제 불혹에 가까웠지만, 아직도 삶이 서툴다. 이제는 영글었어야 할 나이임에도 늘 서툴기만 한 나를 보며 인문이 주는 삶의 방식을 배우도록 노력하고 있다.그리고 이제야 조금 , 아주 조금 인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우리 삶 곳곳에 숨겨진 본질을 탐구하는 과정이 곧 인문학이다. 이 생각이 딱 인문학을 만난지 3년차에 든 생각이니, 앞으로 더 읽게 되면 또다른 깨달음이 나를 기다릴 것 같다. 저자가 말하듯 중요한 것은 인문학은 멈추지 않고 읽고 또 읽으며 내 삶의 길을 더듬어가는 길이기에 아주 오랜 뒤에도 인문학의 감동이 안에서부터 알차게 영글어가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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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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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머니를 이해할까.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 사랑하는 내 어머니, 하나 뿐인 어머니. 세상에 하나 뿐인 어머니를 이해한다는 말은 곧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일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내 어머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타인에 대한 이해도 무딜 수 밖에 없으리라.... 나는 언제나 어머니의 사랑에 목말라 했다. 자식이 많은 집이 의례 그렇듯 먹고 사는 것에 빠듯했던 대가족에서 어머니의 눈총 한 번 받아보려고 무던히도 애썼던 적이 있다. 사춘기시절, 내가 보내는 사랑의 화살은 언제나 빗나가기만 하고 그 화살은 어느 순간 부메랑으로 변하여 내게 돌아와 상처를 주곤 하였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순간, 집을 나왔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고작 내가 숨었던 곳은 집안 구석진 곳의 보일러실이 전부였으며 어른에게는 너무도 빤한 장소였다는 것을 몰랐다. 컴컴한 보일러실에서 자동차가 들려주는 불빛들의 소나타를 바라보며 엄마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지에 대해 몹시도 울었더랬다. 김연수 작가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읽으면서 그 시절의 내가 떠오른 이유는 세상에서 하나 뿐이자 혈연의 존재인 엄마조차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떠올리게 한다. 더 나아가 그 관계가 타인이라면 더욱 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정말 가당키나 한 일일까?

 

 

1.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미국으로 입양된 카밀라의 양모 이 죽자 젊은 여자와 살기 시작한 에릭을 위해서라도 자유인으로, 아니 자유인인척 살아야했던 카밀라. 다행이도 그녀에게는 연인 유이치가 있었다. 유이치의 눈동자에 비춰지는 단 하나 카밀라’, 동백꽃의 카밀라만 비쳐진다는 사실은 카밀라가 살아오는 동안 근 21년의 삶의 모든 고통과 절망과 분노를 치유할 정도의 기쁨이다. 그런 유이치의 권유로 카밀라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래서 탄생하게 된 책 너무나 사소한 기억들에 실린 어렸을 적 사진은 그녀의 과거를 찾아주는 매개체가 되어주고  사진이 말해주는 과거의 편린들을 찾아 떠난 카밀라는 마치 운명의 이끌림처럼, 연어가 바다로 흘러간 뒤에도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자연회귀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로 한국의 조그마한 바닷가 마을 진남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카밀라의 기억에 존재했던 어머니에 대한 정의 제일 먼저 카밀라를 사랑한 여자이자, 무의미한 단어에 불과했던 존재의 어머니를 찾아다니는 동안 카밀라는 더 이상 카밀라가 아닌 정희재가 되어 있었다. 동시에 희재는 죽은 어머니 지은과 함께 한다. 카밀라는 더 이상 카밀라가 아닌, 정희재라는 이름의 카밀라가 된 것이다.

 

2.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날개가 필요하다.

 

김연수 작가는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서는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원래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김연수 작가의 소설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들을 보아왔던 나로서는 약간의 배신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책을 읽어가면서 우리는 결코 타인을 진정으로 알 수 없다는 관계의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타인과의 소통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카밀라와 죽은 엄마와의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오버랩되며 진행되는 이야기는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고요하기만 한 수면위에 하나 둘 씩 떠오르는 엄마의 진실 가운데 카밀라가 희재가 된 순간 (정체성을 찾은 순간) 소설은 클라이막스에 다다른다. 소설속에서  엄마 지은과 희재와의 거리는 타인과 나의 거리를 말해주는 듯 하다. 딱 , 타인과 나사이 깊은 심연이 존재하는 거리와 같다. 이렇게  둘의 거리는 마치 열녀각에서 보여지는 열녀의 진실따위와는 상관없이, 매생이국에 담겨진 인간의 본성과는 상관없이, 동백꽃이 말하고 있는 진실 따위와는 상관 없이 우리가 보여지는 것만으로 타인을 이해하는 것처럼, 타인과 타인사이의 거리였다. 그러나, 엄마가 남겨둔 유작과도 같은 글을 통해 조금씩 엄마를 이해해가는 희재는 서서히 엄마의 고통과 교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교장이 필사적으로 감추려고 했던 진실과 엄마 지은을 아는 사람들의 침묵의 의미, 그리고 바로 ‘나’라는 존재가 엄마에게 준 의미를 통해 엄마를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나보다 어린 엄마를 만난 적이 있어요.”

 

김연수 작가는 엄마 지은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너와 헤어진 뒤로 나는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는 독백을  통해 사람과 사람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을 건너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인간에게 날개가 없다는 사실은 하늘을 나는 꿈을 꾸게 하는 것처럼, 엄마 지은앞에 닥쳐진 비참하고 잔인한 현실을 잊을 수 있게 해주고 버틸수 있게 해준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희재라는 날개였다는 것은 그동안의 모든 고통들을 지우기에 충분한 진실이다.  소설은 마지막순간까지 양관의 딸 '희재'의 등장으로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이 다시 재현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 그러나 그런 불가능함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타인을 이해한다는 첫 걸음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날개"라는 희망이 존재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날지 못할 지라도 꾸어야 하는 날개의 꿈, 그것이 타인과 나를 이어주는 희망의 또다른 이름이다. 인간은 이루지 못하는 것을 이루려하고 날지 못하기에 나는 것을 꿈꾼다. 커다란  돌멩이를 산꼭대기에 가져다 놓으면 어김없이 다시 떨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지프스가 희망을 놓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에게 희망이란 절망속에 뿌려진 단 하나의 꿈이 바로 김연수 작가가 말하는 '날개'가 아닐까...... 가을에 돌아온 김연수 작가의 신작<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깊은 심연속으로 침잠해 관계의 진실과 맞닿게 한다. 그리고 다시끔 잃었던 꿈을 꾸게 한다.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영혼은 둥지를 틀고

말이 없는 노래를 부른다네,

끝없이 이어지는 그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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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23 0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날 부터 모두 걸어 잠그는 일들을 하는가 봅니다. 그래야 하는 건가보다..살짝 갈등합니다.독서록이든 글짓기이든 나를 내보이는 일. 그 것도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저의 행위는 부서지는 포말정도
흩날리는 거품정도..일텐데..
그럽니다.
언젠가 어린애처럼 오도카니 남의 오토바이
위에 올라앉아 즐거워 하는 엄마를 본 적이
있죠..그 녀의 로망은 큰 대형 트럭 기사거나
대형 오토바이커가 꿈이랍니다..그런 얘길하면서 다리를 아이처럼 흔들며 웃는
모습에 스물서넛의 막..이제 커서 엄마를 만나는 저는 생경하기도 하고..아..그녀도 꿈이 있었을테지..했어요. 엄마가 아닌..꿈
...그러니 제가 본건..나보아 더 어린 엄마의 모습일 겁니다.
여전히 엄마는 꿈꾸는 중이고..저는 그 피를
반은 가졌으니..저 역시..사는 한 그럴테지요. 이해 한다..못한다..그런건..
이젠 없다..기 보다..의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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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함을 드세요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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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타나봐요. 요즘 자꾸 눈물이 나요. 제 옆지기는 노환이라고 늙어서 그런거라고 하네요.  바람이 차가워져서 그런지 옷 사이  스며드는 바람에게도 울컥거려요. 밥벌이에 지쳐 늘 늦게 들어오는 옆지기의 헬쓱한 얼굴에 안쓰러움이 밀려오고 자신의 뜻대로 안된다고 떼쓰는 딸아이마저도 절 서글프게 하네요.게다가  가을을 노래하는 시들은 모두 왜그렇게 다 슬픈지... 가을은 고독한 계절이 맞나봅니다. 이 책 《따뜻함을 드세요》는 마치 어른을 위한 동화처럼 이쁜 책입니다. 그런데 이 이쁜 책을 읽으면서도 눈물이 나다니... 아마도 우리네 사는 생生이 모두 그렇게 슬픔속에서 애틋해지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할머니의 빙수>는 세 모녀가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치매걸린 할머니를 돌봐주는 이야기입니다. 치매걸린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어린 마유. 가장이 없는 가정의 삶은 무언가 한가지가 빠진 허전함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생계를 꾸려가고 있지만, 삶은 그렇게 녹록치가 않죠. 어느 날, 회사에서 쓰러진 엄마를 보며 마유는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고아가 되는 줄 알고요. 할머니가 이상해지자 요양원에 할머니를 보내고 맛있는 도시락을 싸가지만 어린아이로 돌아간 할머니는 굳게 입을 다물어요, 아무것도 먹지 않는 할머니때문에 엄마는 속상하답니다. 할머니는 어찌 된게 계속해서 '후'라는 말만 하죠. 옆에서 보던 마유는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할머니가 원하는 것을 알아내죠. 엄마, 아빠, 마유, 할머니 온가족이 빙수를 먹으러 갔을 때 할머니가 '꼭 후지산 같다' 라고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마유는 홀로 먼거리의 빙수가게를 찾아가요. 마유는 빙수를 사러 간 사이 할머니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며 외치죠 . "할머니가 이제 곧 돌아가실 것 같아요.마지막으로.." 전 그 외침 속에 마유의 모든 간절함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빠가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후 엄마와 할머니, 그리고 마유 셋이 사는 그 모습을 보며 할머니는 어쩌면 마음이 많이 아팠겠죠 .아마도 가족이 모두 모여살았던 그 시절의 그리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암에 걸린 엄마가 죽기 전 딸에게 된장국 끓이는 법을 가르쳐 준 이유는 아빠를 위해서 였답니다. 자신이 죽고 나면 홀로 남은 남편과 딸을 위해 엄마는 많은 것을 준비해야 했죠.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 가장 먼저 된장국 끓이는 법을 가르쳐줘요. 그러면서 유언처럼 "매일 아침 아빠에게 된장국을 끓여주라" 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 딸이 장성해서 내일이면 아빠를 떠난답니다. 마지막으로 된장국을 끓이는 딸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악착같이 음식을 가르쳐준 어머니덕에 일찍 살림을 배워 아빠의 뒷바라지를 해 왔으니 하늘나라에서 엄마도 아마 마음이 뿌듯했을 거예요. 하지만, 아빠만 남겨두고 떠나려하니 더 애잔해지죠.  된장국은 이들에게는 엄마이자, 아빠이자, 가족의 역사였으니까요. <코짱의 된장국>은 부정父情이라는 날실과  모정母情이라는 씨실이  직조되면서 가족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탄생시켜가는 과정을 무척 애잔하게 그리고 있어요. 그리고 그 가운데에  된장국이 이들 가족들의 사랑을 더욱 끈끈히 이어주고 있답니다.

 

"엄마는 코하루 속에 살아 있어. 전혀 외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이 된장국 속에도 엄마가 있는 걸."

 

 

책에는 일곱가지 사연과 일곱가지 음식이 나와요. 모두 아름다운 사연들과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들이지만 저는 <그리운 파트콜로릿>을 제일 가슴 아프게 읽었어요. 쇼조라는 치매걸린 노인이 남편이 죽은지도 모르고 정신이 나가서 남편과 생전에 함께 한 추억의 장소를 찾아가죠. 옆에 남편이 있다고 생각하면서요. 남들의 이상한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끊임없이 대화를 하죠. 남편이라는 투명인간과...전 쇼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남편에게 늘어가는 흰머리처럼, 늘어가는 주름살이  , 우리가  점점 죽음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지만, 남편의 빈자리는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답니다.  남편은 가끔 그런 소리를 잘해요. "내가 없으면,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야돼." 하는 말이요. 이 말처럼 남편없으면 할 줄 아는게 전혀 없는 저로서는 남편의 빈자리는 상상이 안돼요. 그래서  쇼조가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과  옆에 항상 존재해주는 남편을 상상하는 그 모습이 슬프게도 느껴지지만, 왠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이 참 이쁩니다. 아름답고, 우리네 삶이 언제나 햇살 가득한 삶이면 좋겠지만, 이렇게 바람이 부는 날도 있고, 아픔도 있고,상실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날 것 그대로의 생生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이 작가가 보여주는 소설속의 삶이 더 애틋하게 다가옵니다. 따뜻한 음식을 먹고 난 후 얼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 책을 다 읽고 나면 가슴속에 온기가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 드는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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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로스 & 토르소
크레이그 맥도널드 지음, 황규영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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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로스&토르소》는 범죄소설이다. 『살인의 해석』『죽음본능』으로 유명한 제드 러벤펠드와 비견될 정도로 상상과 허구를 넘나드는 치밀하고도 정교한 미스터리 팩션물이다. 처음에 제목이 참 독특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스 신전같은 건축 양식을 토로스라고 하고  토르소는 팔 다리나 목이 없는 몸통의 조각,즉 흉상들을 토르소라고 한다. 그럼 이제 제목에서 연상되는 그림이 좀 그려진다. 토르소로 가득한 신전?이라는 뜻 일까? 범죄소설 치고는 제목이 너무 미학적이지 않나..흠

 

살인을 미학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면, 살인자는 예술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를 하는 대신 파괴를 반복하는 반 예술가적인 퍼포먼스를 하는 행위예술가 말이다. - 조엘 블랙

 

그렇다. 이 책은 미학적이다. 초현실주의 작품세계를 그리고 있다. 어떻게? 살인을 예술로 바라본 것이다. 초현실주의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하는 20세기의 문학예술사조를 말한다. 쉽게 말하면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표현이라고 할까. 가장 대표적인 작가는 르네 마그리트와 살마도르 달리가 있다.아마도 한번쯤은 르네 마그리트와 살바도르 달리의 특유의 '이상함'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기억의 집> 살바도르 달리

 

초현실주의자들의 미학이론에 영감을 받아 일어난 살인 사건들, 시체의 뱃속의 장기를 모두 드러낸 후 장미다발을 꽂아놓는다든지, 머리는 잘린채 기계로 몸통을 가득채운 시체가 발견되는 엽기적인 살인행태들이 벌어진다. 그러나 , 이 사건은 소설속의 살인사건이 아닌  실제 일어난 사건이다.  작가 크레이그 맥도널드는 실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집필했다고 한다. 기괴하게 잘리고 해부된 엘리자베스 쇼트의 몸이 캘리포니아 들판에서 발견된 사건을 '블랙 달리아'라고 하는데 이 사건을 바탕으로 세계대전 전후 스페인 내전까지 근 삼십년동안 초현실주의의 미학이론과 더불어 정신분석학, 로맨스가 멋지게 펼쳐진다.  마치 대하드라마처럼 ^^

 

주인공 헥터가 키웨스트라는 섬에 갔을 때, 우연히 만난 한 여자 레이첼과 사랑에 빠진다. 마침 키웨스트에 불어오는 폭풍에 대비하여 둘은 헥터의 집에 묵기로 하는데 첫날밤의 낭만을 뒤로한 채 다음 날 섬에는 살해당한 시체들이 떠오르는데 하나같이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다. 몸속의 장기들을 모두 드러내고 그 안에 기계들로 가득채운 것이다. 헥터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사라진 레이첼, 다시 떠오른 머리없는 여인의 시체. 모든 증거는 그 시체가 레이첼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레이첼을 잊을 수가 없었던 헥터앞에 나타난 또 한 여자 알바. 레이첼과 무척 닮아 있는 알바는 화가이다. 우연히 그녀가 그린 그림을 미술관에서 보게 된 헥터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림속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키웨스트에서의 헥터와 레이첼이었다. 그러나 알바는 반파시스트라는 혐의로 스페인 광장에서 총살당하고.... 헥터는 또 혼자 남는다.

 

소설속에 등장하는 초현실주의 그림의  미노타우루스는 헥터를 상징한다. 헥터주변을 맴도는 레이첼과 투우사의 사랑이라고 할까. " 투우에서는 케렌시아라는 용어가 있지. 헤밍웨이가 말하길 케렌시아는 투우장 안에서 황소가 편안함을 느끼는 장소라더군. 자꾸만 그 지점으로 돌아와 결국은 죽는다는 거야. 내가 당신의 케렌시아일지도 모르겠군."

 

최근에 읽은 범죄소설 중에 가장 스펙타클한 것 같다. 주인공이 범죄소설가로 등장해서 그런지, 추리하는 과정과 한마디씩 던지는 말들은 무척 매력적이다. 전쟁속에서 지난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생활상과 30년이라는 기간동안 전개되는 사건들의 진실. 초현실주의파들이 추구하는 미적욕망이 변질되어 현실과 상상의 세계의 경계선이 허물어지듯 소설 또한 어디서부터가 사실인지 구분이 모호해진다. 칼 융에게 정신상담을 받고 헤밍웨이의 유명한 여성편력과 부인 마사에 대한 실명조차 헷갈리게 하는데 아마도 이 소설 역시 초현실주의 소설이라고 칭해야 할 것 같다 .^^  어렸을 적 받은 성적학대와 폭행의 충격으로 인해 스스로를 둘로 찢어버린 정신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 범인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서의 동정이 가기도 한다. 범죄추리소설가  제드 러벤펠드와 쌍벽을 이루는 멋진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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