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눈물을 닦다 - 위로하는 그림 읽기, 치유하는 삶 읽기
조이한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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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시스란 바로 이런 것 ! 슬픈 그림을 보며 위로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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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눈물을 닦다 - 위로하는 그림 읽기, 치유하는 삶 읽기
조이한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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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딸아이의 친구가 교통사고로 하반신을 절단하였다. 출근할 때마다 나는 그 길을 어쩔 수 없이 지나간다. 지나갈 때마다 눈물이 나와 고개를 숙이고 지나간다. 다 큰 어른이 울고 다닌다고 할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아이의 아픔에 아무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절망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한번은 커다란 슬픔 하나 정도는 살아가면서 겪게 된다고 하는데 그 아이에게는 그 슬픔이 너무 빨리 왔다. 그러나, 슬픔이라는 몫은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것 같다. 슬픔은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이겨내야 하는 고독과 동의어이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요즘처럼 세상이 절망으로 보이는 때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세상에 너무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던 탓도 있다. 내 안의 울타리에서 한 발짝도 나오기를 거부하다가 넓은 세상에 눈을 돌려보니 우물 안의 개구리는 바로 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세상을 바르고 정직하게 살면 되는 것이라고 말한 윤리나 도덕은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공허한 메아리가 된 것만 같다. 새로 시작한 일 때문에 어쩔수 없이  신문과 뉴스를 챙겨보는데  매일같이 충격받고 있다. 텔레비젼도 없고 별로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탓이라 생각하지만 , 매일 같이 보도 되는 사건과 사고는 믿기 어려운 절망과 같은 소식들이다. 초등학생이 사는 게 너무 힘들다는 유서를 쓰고 자살하는 사회가  우리사회의 현주소라니... 그래서인지 더욱 울적한 날들이었다. 

 

이 책 《그림, 눈물을 닦다》는 치유하는 그림 에세이란 부제를 가지고 있다. 치유라는 것은 우리의 삶에 메스를 대고 상처를 끄집어내야만 치료가 가능하다. 이 책은 그렇게 삶의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상처를 끄집어내 그곳에 메스를 대는 기분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긍정병으로 인해 타인을 의해 씌어진 삶이 아닌, 오로지 '자신' 위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과 그림을 통해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 안에 꼭 억눌러왔던  슬픔과 아픔, 상처가 바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림과 글을 읽어가다보면  마치 왓츠의 <희망>이란 그림에서처럼 두눈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마지막 하나 남은 현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여인의 모습에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는 희망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절망이라는 토양에 희망이라는 싹이 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슬프지 않은 인생은 없기 때문이다. 비극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운명이다. 삶 자체가 비극이다. 부재,어둠,소망의 결핍, 나처럼 평소에 늘 조증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도 인생은 기본적으로 슬프다.

 

제우스에게 저항한 프로메테우스처럼,

인간은 저항함으로쎠 무의미한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베첼리오 티치아노,<프로메테우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슬픔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저자는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스캔한  예술가의 모습이 아닌, 독수리에게 끊임없이 몸통을 쪼이면서도 살아야 하는 존재로서의 예술가들의 운명과  무의미한 삶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살아야하는 인간의 숙명을 보여주는  프로메테우스의 그림을 통해  생生의 날 것 그대로의 모습과 직면하게 하고,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슬프고도 비극적인 사랑,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절망적이고도 처절한 사랑, 아나 멘디에타의 불행한 죽음, 고흐와 창녀와의 슬픈 사랑 등 우리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슬픔이나 절망, 분노와 마주하게 하며, 서서히 그림을 통하여 우리가 슬픔을 감당해야 하는 이유를, 비극을 이해함으로써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사랑은 오해다. 동시에 사랑은 상상력이다.

연인들은 불완전한 상대를 앞에 두고 완전한 서로의 모습을 상상한다.

상상력이 있기에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다.

-르네 마그리트, <연인> - 

 

이 그림을 보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던 것 같다. 르네 마그리트는 기발한 발상으로 관습적 사고를 거부하고 상식과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 세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화가로 유명한데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 '경이로운 것만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듯이 르네의 기상천외한 발상은 그림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항상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것 같다. 사랑이란 것은 어쩌면 이 그림처럼 서로에 대해 잘 몰랐을 때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서로가 완전하다는 착각이 사랑을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르네의 사랑에 대한 통찰 <연인>은 어쩌면 사랑뿐 아니라 타자에 대한 오해와 착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림이 아닐까 한다. 한편으로는 태어나면서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는 교육을 받고 타인에 의해 길들여진 채 살아가며 사랑할 줄 모르는 괴물이 된 채 사랑하는 슬픈 연인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연한 인생>에서 류가 그랬던가?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으며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가 우리의 인생이라고..." 이렇게 르네의 그림은 참 놀라우리만치 삶에 대한 통찰력을 지녔다.

 

<결핍을 즐겨라>에서는 결핍이 있기에 무엇인가를 채울 수 있는 희망이 생긴다고 한다. 이 책은 심리학과 미술사를 전공한 미술평론가 조이한의 그림 심리 에세이이다. 저자는 그림이나 예술 작품을 만나는 일이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한다. 가끔 마음이 울적하거나, 요동칠때 보는 그림이 있는데 앞서 말한 왓츠의 <희망>이라는 그림이다. 예술은 슬픔과 비극만 가득한 세상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켜주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요즘처럼 예술이 필요한 이유를 절감한 적이 없다. 이명옥 교수는 인생이라는 흙길을 걸어가려면 신발에 흙이 묻는 것을 겁내지 말아야 하며 , 신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 인생의 고단함과 장애물을 극복하지 않고, 삶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슬픔은 이겨낼 수는 있어도 벗어날 수 없듯이, 저자는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면, 묵묵히 상처를 껴안고 걸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며 비극이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치유의 첫걸음임을 말한다. 이별했을 때, 이별노래가 심금을 울리듯이 마음이 아플 때 슬픈 그림은 내면 깊은 곳을 건드려 오히려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그림, 눈물을 닦다>는 페르소나를 벗고 진정한 '나'를 만나게 하는 여정을 통해  인생이라는 거울을 마주보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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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에블린 민음사 모던 클래식 57
잉고 슐체 지음, 노선정 옮김 / 민음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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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에블린은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로 볼 수 있다. 서사가 없이 대화체로 진행되는 이야기라 이야기 전개가 무척 빠르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심리에 대한 묘사보다는 가벼운 연애감정처럼 가벼움이 느껴지는 주인공들이다. 하지만, 이런 가벼움이 오히려 현실성 있게 다가오는 기분이 든다. 서독과 동독의 통일 전, 시대의 무거움은 전혀 없지만,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간과할 수 없는 사회와 일상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문학적인 서사만 가득한 소설은 끊임없이 사유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실생활과는 많이 동떨어져 거리감이 든다. 그러나, 현실에 직면한 먹고 사는 문제와 대화는 늘 우리가 경험하는 문제들과 맞닿아있어 친숙한 느낌이 드는 것처럼 이 소설은 그 어떤 문학보다 친숙하게 느껴지는 기분이다. 독일문학을 보면 우리나라 문학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리고 같은 공통점 , 분단의 아픔을 가져서인지 독일 문학은 동지적 연대감이 들 때가 많다.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은 통일 전으로 동독의 독재정치와 공산주의 체계에 반발하여 100만명이상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탈출하였을 때이다. 이와같이 대규모 이탈자들의 증가는 동독 사회의 기반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었다. 서독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20대의 젊은층으로 서독에서 자유를 꿈꾸었다. 《아담과 에블린》은 겉으로는 연애소설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자유를 찾아 동독에서 서독으로 가려는 젊은이들의 이야기이다.

 

 

 

아담은 동독에서 ‘맞춤재단사’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지푸라기처럼 현금이 넘쳐나는 이유는 그가 여자들에게 아름다운 옷을 지어주는 동시에 자신이 창조한 아름다운 옷으로 아름다워진 여자와의 행위를 향유한다. ( 아담의 입장에서는 예술이지만, 나같은 일반인이 볼 때는 바람둥이에 한낱 카사노바에 불과해 보이지않지만) 이런 향락이 아담에게는 사랑하는 여인 에블린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아담은 자신이 재단하여 완성하는 작품에 대한 강한 애착이 많은 듯 하다. 자신을 때로는 하나님의 첫 창조물인 아담으로 착각하여 하와의 옷을 만들어준다는 착각을 하는 것으로 봐서는 예술가의 천재성에 따라오는 괴팍함이 아담에게도 보여진다. 그런 탁월한 재단실력을 겸비한 탓인지 아담은  공산주의 체제라 해도 재단사라는 안정된 직업으로 인해  중산층 이상의 삶을 누리고 있는 직위를 가지고 있다. 그와는 반대로 에블린은 백수인데다 동독의 관료주의적 통제에 갑갑함을 느껴  하루라도 빨리 서독으로 가서 대학에 다니는 것이 꿈이다. 떠나고 싶지 않은 아담은 늘 핑계를 대며 밍기적거리지만..........어느 날, 아담이 바람 피는 것을 본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친구들과 서독으로 떠난 에블린을 뒤따라 자신의 애마 ‘하인리히’를 타고 따라가게 되는데, (아담은 자동차조차도 이름을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또 덩치와 안 어울리게 거북이 엘피를 키우는데 엘피조차도 얼마나 애지중지 하는지, 아담은 낭만주의자에 낙천주의자인게 분명하다. 그리고 서독으로 가는 길에 만난 한 여자 카탸를 도와주는 모습을 보며 정도 많은 것 같다. 비자가 없는 카탸가 서독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떤 댓가든 치르겠다고 하며 아담을 유혹하는 말을  하지만, 아담은 오히려 돈까지 빌려주며 사랑하는 에블린을 만나러 가는 중이라며 아무 조건 없이 카탸와 동행해준다. 카탸는 점잖고 엉뚱하고 자유로운 성격인 아담을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그 사이 친구와 떠난 에블린은 아담이 준 상처와 아픔을 위로해주는 미하엘과 사랑에 빠지고, 미하엘과 아담, 둘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아담이 보여주는 사랑에 마음이 움직이고, 에블린은 아빠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 채 결혼을 서두르게 되는데,

 

그러나, 동독에서 여유로운 삶을 살았던 아담에게 서독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다. 낭만주의, 낙천주의 성격의 아담에게는 자본주의에서 빠르게 돌아가는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자동차 '하인리히'를 팔아야 할 정도로 생활의 곤궁함을 느낀다. 게다가, 그의 예술적 기질은 나태하고 무능함으로 치부되어 아담을 더욱 피폐케 한다. 에블린은 대학에 다니며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이렇게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혀 다람쥐 쳇바퀴를 돌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살아간다는 것과 살아내는 것의 차이는 삶에 대한 자세의 차이인 것 같다. 아담은 살아가는 것만 알았지, 자신에게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를 예상하지 못했고, 아담보다는 한참 어린 에블린은 살아내는 것만 알았지, 아담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다. 아담과 에블린의 동상이몽은 어떻게 보면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사랑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에블린이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아버지가 아담인지 미하엘인지 모르겠다고 할 때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못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체제와 자유주의 체제속의 개인과 사회와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으며, 통일을 앞두고 있는 우리나라도 동독아담과 서독의 에블린의 동상이몽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기도 하는 소설이다.

 

(첨하자면, 그의 목젖은 마치동물처럼 이리저리 도망을 가다가도 이내 다음 순간에는 언제나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재미있는 것은 소설의 모티브는  최초의 파라다이스인 에덴동산에서 뱀의 꾀임에 빠져 금지된 사과를 먹은 순간 하나님이 아담을 불러 사과가 목에 걸려 목젖이 튀어나오게 된 아담과 하와이다. 그럼 사탄은 자본주의나 자유주의고 에블린은 파라다이스(사회주의) 에서 추방당한 하와라는 이야기???인 셈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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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한 인생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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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새의 선물 중에서》

 

국내에서 유일하게 좋아하는 여류작가이다. 은희경 작가의 문학을 읽다보면  삶을 관조하는 통찰력이 무척 예리하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에서 주인공이 아내가 죽는 날, 억수로 운이 좋아 유난히 돈을 많이 벌어 기분 좋은 날이 되었던 것처럼 삶이란 때때로 농담과 닮았다. <태연한 인생> 또한 이런  삶의 아이러니의 연속을 말한다.

 

 

주인공 류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뜻 또한 어머니가 우연히 비행기를 타면서 느꼈던 인생의 기류에 몸을 맡기며 ‘비행기처럼 기류를 따라 자유롭게 흘러가라는 뜻’의 이름이 주어졌지만, 아버지는 오페라 속 비극적인 여인의 이름을 류에게 붙어주었다. 자신의 이름에 거창한 이유를 기대했던 류는 자신의 이름이 지어진 것처럼 삶에는 거창한 이유보다는 그냥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요셉을 만난 것도 ,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반한 순간도, 이혼한 것도,  부모의 이혼으로 이미 상실의 세계를 경험해 본 류에게는 요셉과의 만남에서 헤어짐까지의 삶에서 깨달은 것은 ' 삶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은 고독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자신이 지은 삶의 서사속에서 터득하게 되는 것으로 류의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이제부터는 쓸쓸할 줄 뻔히 알고 살아야 한다. 거짓인 줄 알면서도 틀을 지켜야한다고 더 이상 동의하지 않게 된 이데올로기에 묵묵히 따라야 한다.

 

 

주인공 요셉을 표현하자면 ‘ 종 우월론자이면서도 인간을 결코 좋아할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요셉의 딜레마였다.'p22에서 볼 수 있듯이 인생에 대해, 타인에 대해, 삶에 대해, 냉소로부터 비롯된 시니컬함으로  모든 것을 대한다. 그러나, 또한 아이러니 한 것은 주변에 타인이 (그것이 여자라고 한다면) 꼭 있어야 하는 종자라는 것이다. 요셉은 자신의 기준으로 타인을 바라볼 뿐 타인에게 자신을 맞추는 고민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것이 요셉이 가장  경멸하는 것은 타인을 위해서 촌스러운 권위와 위선을 가지는 사람들이다. (이안을 그래서 싫어한다.) 그러나, 그런 자신조차 이율배반적으로 변해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실패한 모험을 마치고 자신이 믿지 않는 것들 속으로 천연덕스럽게 돌아가는 것’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삶의 다른 모습이란 걸.....

 

알고 있는 지 류, 나의 모든 것은 거짓이다. 내가 거짓된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깨달은 뒤부터

 

 

<태연한 인생>에는 다양한 캐릭터가 나와 다양한  생의 단면들을 보여준다. 어쩔 수 없는 위선을 지니고 살아가는 이안의 내면과 돈 많고 머리는 비었지만, 정은 넘치는 캐릭터 도경, 요셉을 선생님이라 부르며 쫒아다니는 귀엽지만 어딘가 속물적인 캐릭터 이채, 부모의 상실의 경험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어머니의 고독을 되물림하는 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지만, 한번도 사랑한 적 없고 사랑할 수 없어 괴로운 요셉의 모습등, 등장인물들의 다채로운 인생속에서  현대인들의 상실의 고독을 엿볼 수 있다. 중간중간 요셉의 엉뚱한 상상과 성에 대한 생각을 통해 작가는  우리가 규정해 놓은 삶의 금기와 규범 속에서 고정화된 인식을 해체하는 경험을 하게 하는 동시에 삶에서 삶의 진실이란 무엇인가, 진실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되묻게 한다. <태연한 인생>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 속에서 상처받는 이유에 대해 , 작가 특유의 통찰로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성숙되는 방법을 류의 마지막 독백을 통해 보여주는 듯 하다.'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었다.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 속에 류의 삶은 흘러갔다' 기존의 문학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삶에 대한 조금 더 성숙하고 조금 더 깊어진 통찰이 들어가 있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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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관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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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는 것과 잊지 않고 극복한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니체는 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라는 데, 우리가 기억하는 것을 잊는 것과 잊지 않고 극복하는 것 , 두 가지 중 어떤 것이 더 쉬울까? 누군가가 처절한 고통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치자, 그 고통의 기억을 시간을 되돌려 지울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순간을 지운 채 왜곡된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행복일까.  아니면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 행복할까? 차동엽 신부님은 <잊혀진 질문>에서 고통 속으로 걸어가다 보면 고통의 작동메커니즘은 보호의 기능과 단련의 기능으로서 나타나 정신적 성장의 계기를 만들어준다고 하였다. 고통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위대한 정신적 성장을 가져와 오늘의 문명을 이룬 것이라고 하였듯이 고통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더 좋은 ,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

 

<물의 관>은 성장소설인데 첫 시작을 너무 심각하게 시작한 듯하다. 요즘 뒤숭숭한 사건과 사고를 많이 접한 상태가 정신이 멍한 탓도 있다. 이웃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여중생의 자살소식이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사고로 인해 하반신 불구가 된 친구 딸의 맑은 눈망울이 자꾸 떠올라 마음이 괴로운 탓도 있다. 그러나, 고통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고 하였던가. 살아가면서 인생에는 누구나에게 똑같은 몫의 어려움이나 고통이 온다고 한다. 그게 어떤 이에게는 젊은 날이 될 수도 있고, 다 늙어서 올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고통이 찾아왔을 때를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요즘이다.

 

<물의 관>의 등장인물은 크게 사춘기를 겪고 있는 이쓰오와 아쓰코이지만, 이 둘을 연결시켜 주는 인물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할머니이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전학 온 뒤로 반에서 왕따와 집단 괴롭힘을 당하는 아쓰코는 엄마의 무관심과  이제 세 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동생과 가난한 생활속에서 삶의 의욕도 없고 폭행의 공포에 길들어져 가면서 아무 희망을 느끼지 못한 채  죽기로 결심한다. 그 이전에 학교에서 20년후의 자신에게 편지쓴 타임캡슐을 떠올리고 내용을 바꾸어 놓기로 한다. 20년 후의 자신에게 평범한 편지를  써놓으면 자신의 삶도 변할 거라고 믿는 아쓰코는 작년 타임캡슐에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들의 이름을 써 놓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이렇게 엉망이 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자살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고통 가운데 자살하였다고 믿게 되는 것이 두렵기에 자신의 편지를 지극히 평범하고도 보통의 아이로 꾸며야 한다.

 

“계속 괴롭힘을 당하는 동안에는 마음에 서서히 이끼가 끼면서 결국에는 아픔과 차가움, 목을 넘어가는 액체의 온도나 맛도 거의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계속 그랬다면 분명히 언제까지고 참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괴롭힘이 중단된 그 순간, 이끼가 벗겨져 아쓰코의 마음은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나고야 말았다. 아쓰코는 언제 그 아이들의 손이, 발이, 말이 날아들지 모르는 캄캄한 곳에 벗겨진 마음과 함께 방치되었다.”

 

반면 이쓰오는 부잣집에서 자란 할머니의 푸념을 들으며 어린 동생을 돌보며 생활력 강한 어머니와 나약한 아버지를 보는 일상의 지루함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어느 날 ,아쓰코가 동생생일날 줄 선물로 인형을 훔친 사실을 알게 되면서 , 둘은 비밀을 공유하는 동지적 유대감이 생기게 된다. 이후, 아쓰코가 집단 괴롭힘과 폭행을 당하는 것을 눈치채게 되고 아쓰코의 타임캡슐을 찾아주는 것을 도와주려 하는데 ...

 

“내가 만든 추억 속에서 살아가기로 했어.”

 

아쓰코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쓰오는 부잣집 외동 딸로 살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할머니의 과거를 우연히 알게 되고, 오히려 아쓰코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자신의 과거를 애써 잊고 살아가는 할머니와 타임캡슐에 쓴 편지가 자신의 삶을 좌우할 거라 믿는 아쓰코의 모습은 너무도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부잣집 외동딸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믿어줄 거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과거를 잊은 채 살았던 할머니, 타임캡슐에 자신의 평범하고도 평범한 모습을 써 넣으면 자신의 삶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아쓰코, 그리고 그 둘을 바라보는 이쓰오. 이쓰오는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할머니와 아쓰코를 위해 할머니의 과거 아픔투성이인 고향의 댐이자 아쓰코가 몸을 던지려던 그곳에서 자신들의 형상을 닮은 인형을 던지는 의식을 하는 것으로 상처를 던져버리는 의식을 치른다. 인형과 함께 아픔과 고통을 물의 관속에 담아 다시는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우비에 감싸여 눈부신 금색으로 빛나는 공기가 정말로 아름다워서 눈을 떠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미치오 슈스케는 사람의 상처를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것에 뛰어난 작가이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은 윤택해졌을지라도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두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 상처를 극복하거나 다독이는 방법을 잘 모르기에, 아주 작은 상처가 겉잡을 수 없이 커져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 잊는다는 것과 잊지 않고 극복한다는 것, 그 차이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동시에 아직도 자신의 상처를 잊은 채 방치하고 있다면, 물의 관 속으로 던져버리는 것으로 상처를 치유해보는 연습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잊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잊은 것이 아니다. 고통 속으로 걸어들어가 고통을 마주볼 수 있어야 상처가 치유된다. 이들이 만날 때, 항상 여우비가 내리는 것은, 과거와 현재가 교집하는 곳이기 때문이리라...눈부시게 햇볕이 쨍쨍한 날 아름답게  내리는 비가 한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지는 아름다운 성장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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