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해도 괜찮아 - 나와 세상을 바꾸는 유쾌한 탈선 프로젝트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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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 영화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베드신이라는 입소문으로 호기심으로 보았던 영화였지만, 비극적인 운명의 소용돌이에 빠진 사랑을 보며 이루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열망을 꿈꾸게 하는 그런 영화였다. 여자는 죽을 때까지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영화를 보면서 처음으로 베드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저자는 그 영화를 스무 번 넘게 보았다고 한다. 난 다섯 번 밖에 안봤는데...)

 

욕망하면 왠지 어감에서부터 터부시되는 느낌이 들듯이 단지 사회적으로 억눌려있는 부분때문에 표현하지 못할 뿐이지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욕망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욕망이 나를 위한 것이라면 그렇게 문제될 것이 없지만, 오로지 타자를 위한 욕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지금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이 욕망하는 것인가?하는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욕망은 타고난 본능이나 충동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욕구가 충족된 후에도 늘 뭔가를 강렬하게 욕망하는데 그 욕망은 자기 고유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욕망은 다른 사람의 욕망을 흉내낸 것입니다. -p49

 

이 책은 창비 인터넷 블로그 창문에서 6개월가량 , 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글을 모은 것이다. 제목 때문에 영화 , 가 떠올랐는데 우리가 욕망하고 있는 것들에 관한 솔직하고 담백하게 풀어내고 있어 책 자체는 무척 재미있다. 그러나 이 책을 재미로만 치부하기에는 무언가 더 강한 메시지가 있다. 화두는 욕망이지만, 우리 사회의 규범에 대한 건전한 사고의 전환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인문정신으로 끝을 맺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회에 만연한 학벌지상주의와 중년 남자들의 숨겨진 욕망과 사회규범이라는 프레임 속에 갇혀 건전한 사고를 방해하는 감정들을 분석하여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바로 보게 한다. 저자는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욕망을 바로 보지 못하면, 중년이 되어서 불륜을 저지르는 일탈자가 되거나 욕망을 숨긴 채 희생양에 돌을 던지는 사냥꾼이 된다고 하는데, 한마디로 일탈하는 사람들과 이들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은 사실 욕망에 관해서는 같은 유전자를 가진 일란성쌍둥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르네 지라르의 이론을 통해 희생양 메커니즘을 설명하는데 대표적인사건이 신정아 사건과 상하이 스캔들이다.

 

다른 사람의 숨겨진 야심을 잘 찾아내는 사람은 대개 그 자신이 동일한 야심을 지닌 경우가 많다는 유난히 남의 욕망이 눈에 잘 들어올 때는 먼저 자기 내면을 조용히 돌아볼 필요가 있지요. p38

 

상하이 스캔들이나 신정아 사건들을 통해 중년 남자의 성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가 있다외국영화나 소설을 읽을 때 성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운 외국인들에 비해 한국인들의 성은 억압적인데다 드러낼 수 없는 욕망으로 치부되고는 하는데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다. 저자는 한참 나이에 섹스를 통해 분출되어야 할 에너지를 공부로 소비한 채 보내고 성장하게 되어서는 자신의 내면에 성장하지 못한 소년이 중년 남자들에게 존재한다고 한다.

 

중년 남성의 내면에 남아있는 소년은 지랄총량의 법칙으로 알려진 지랄이기도 하고 , ‘에너지이기도 하며 , ‘청춘이기도 하고, 프로이드가 말하는 이드(id)“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즉 욕망의 영역에 속한 힘이죠.p89

 

결국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상하이 사건이나 신정아 사건은 언젠가 떨어야할 지랄이라는 실탄을 사용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아직 마음이 다 자라지 않은 내면의 소년이 욕망이라는 에 뒤늦게 이끌리게 되어 일어난 사건이며, ‘의 세계에서 살던 소년이 색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면서 겉잡을 수 없이 빨려들게 된 일탈인 셈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 또한 이런 욕망 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 그래서 일탈하는 사람들과 이들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은 욕망에 관해서는 같은 유전자를 가졌으므로 누구도 돌을 던질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매일 일상에서 자기 내면의 욕구에 충실하려는 과 남에게 그럴듯하게 포장하려는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나역시도 욕망에 대해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욕망이라는 색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계의 경계선, 이것은 영화 색 계 를 보면 두 간극이  명징하게 다가온다.색에 속한 여주인공과 계에 속한 남주인공의 사랑은 위에 말한 두가지 사건과도 무관하지 않다. 서로 다른 경계의 주인공 둘이 색과 계의 경계가 흐트러졌을 때 남자는 욕망에 몸을 던졌다가 다시 계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과는 달리 여자는 사랑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아마도 여자는 사랑에 대한 욕망이 더 강한 편에 속하기 때문이 아닐까 )

 

인생이란, 규범으로 촘촘히 짜인 바둑판 위를 조심스럽게 한 발 짝씩 내딛는 것 같은 하루하루입니다.

 

교회를 어렸을 때부터 다녔는데 책에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근본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사실 종교인이지만, 뿌리깊은 근본주의적인 사고욕망이 자랄 수록 불안과 우울을 남기기도 한다. 쉽게 말하면, 규범이라는 것이 인식하지 않을 때는 느껴지지 않지만, 규범에 길들여지면 그 규범에 나를 맞추지 않으면 곧 불안해지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규범을 잘 지켜야만 한다는 강한 억압감과 책임감에 길들여지다보니 마치 착한여자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것처럼 좋은 일이 생기면 내가 착하게 살아서 그렇다는 생각을, 나쁜 일이 생기면 내가 착하지 않았기때문에 생긴 일로 치부해버리는 비논리적이고도 무척 단순한 프레임에 나를 가두어놓고는 했다. 그러나 저자는 규범을 의심할 줄 모르고 무조건 따르기만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해치는 일이라고 한다. 욕망의 존재나 가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욕망을 부인하고 억압하면서 계속 어두운 구석으로 몰아붙이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 더 안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한다.

 

처음 시작은 황당하게도 저자가 제일 두려워하는 듣보잡으로 시작한 책이었는데 읽다보니 저자의 다른 책도 궁금해진다.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고백하기가 쉽지 않음을 이해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과 더불어 자신의 이야기를 한 타래씩 풀어놓지만, 결국은 자신을 돌아보고 타인과 소통하며 사회와 공존을 모색하는 인문정신이 잘 드러나 있는 책이다.  태어날 때부터 타인에 의해 씌여진 페르소나를 벗고 내면에 꿈틀거리는 욕망을 잘 다독이며, 이웃과 사랑의 연대를 이룰 때 리얼 유토피아는 실현 가능한 꿈이 되지 않을까? 꿈틀대는 욕망을 다스리는 법

 

욕망아, 네가 또 숨 쉴 곳을 찾는 구나. 꼭 그래야만 한다면 .... 욕망해도 괜찮아.”를 읽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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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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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 익숙한 우리들은 돈으로 물건을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물건 뿐만이 아닌 '도덕'이라는 양심의 영역까지 침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도덕'이라는 가치와 개념이 무감각 해져 있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가치관에 혼란을 느끼고 있으며, 사회에서 일어나는 범죄는 '도덕'이나 '정의' 가 아무 소용이 없음을 볼 수 있다. 불과 몇 년전 만해도 한국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도덕성이 의심되는' 극심한  문제들이 많이 대두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한국 역시 돈으로 무엇이든 사고파는 시장경제에 깊숙히 물들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은 마이클 샌델이 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해 15년간 철저히 준비하고 고민하여 완성한 역작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샌델은 최근 수십 년 동안 우리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 사회가 시장경제(market economy)에서 시장사회(market society)로 옮겨갔다고 진단한다. 시장경제에서 시장은 재화를 생산하고 부를 창출하는 효과적인 ‘도구’인 반면, 시장사회는 시장가치가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으로 스며들어간 일종의 ‘생활방식’이다. 이것이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원하는 사회는 시장경제를 원하는가? 아니면 시장사회를 원하는가?

 

 

 

2008년에 발생한 금융위기로 시장지상주의 시대는 통렬한 최후를 맞았다. 샌델은 이에 대해 냉철하게 재고하고 도덕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시대라고 한다. 시장에 대한 지나친 신념으로 인해 도덕적인 가치가 희미해지고 있고 월가의 점령시위와 티 파티 운동과 같은 정치적 결과에도 시장의 역할에 대한 반응은 미미하다. 따라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다루는 것은 수많은 경제적 사안들로 시장만능주의의 자화상과 같다. 돈과 시장이 개입함으로 해서 기존의 가치가 변질되는 것에 대해 주목한 것이다.

 

 

놀이공원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과는 달리 돈을 지불함으로 새치기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사람들은  죄책감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는가?

아이들의 성적 향상을 위해서 책 읽을 때마다 돈을 주는 행위는?  

지구 온난화에 기여한 것을 상쇄하도록 기업들에 탄소 상쇄 정책을 하는 것은  돈을 지불함으로서 기업들은 환경오염에 대한 면죄부를 받은 것일까?

여성의 생식능력은 시장 거래 대상일까?

 

 

 

 최근 수십년 동안 전통적으로 비시장 규범이 지배했던 삶의 영역에 시장사회의 개념이 확대되고 있다.기존과는 달리 비경제적 재화에 가격을 매기는 성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도덕적 영역 안에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샌델이 이 책에서 논하고자 하는 논지는 시장논리가 '도덕논리'로 되어야 하며 경제학자들은 도덕적으로 거래'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사고 판다는 인식이 깊숙이 자리잡으면서 위기의식을 거론하는 이유는 샌델은  두가지로 정의하였다. 바로 불평등과 부패이다. 불평등이 점차 심화되면서 모든 것이 시장의 지배를 받는 현상은 부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삶이 분리되고 있다는 의미다.  모든 것이 상품화로 인해 돈이 중요해지면서 불평등 때문에 발생하는 고통이 깊어지고 있다. 두번째 좋은 것에 가격을 매기는 행위는 본래의 좋은 것을 오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김준호 《경제사》에서는 자본주의가 살아남은 것은 그것이 더 도덕적이고 더 이상적이어서가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덜 도덕적이고 덜 이상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현 자본주의 대안 담론이 부재한 상황에서 샌델은 우리에게 희망은 도덕적, 시민적 갱생에 대한 공적 담론의 장을 이끌어내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최근에 샌델의 저서 <정의의 한계> 에서  ' 옳음에 대한 좋음의 우선성' 을 전제로 한 정의를 지향하는데 ,  시장경제체제 또한 옳음의 완성을 위해 좋음의 관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책에서 그 '좋음'의 관점들이 어떻게 변질되는 지를 주목하고 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는 그 변질되는 가치들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제시한다. 정의와 좋음을 연결하는 하나의 방식은 정의 원칙의 도덕적 힘이 특정 공동체 혹은 전통에서 채택되거나 폭넓게 공유되는 가치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두 번째 방식은 정의 원칙의 정당화가 도덕적 가치 또는 활용된 목적의 본래적 좋음에 달려 있음을 말한다. 이 원칙을 배제한 롤스의 자유론을 비판한 것이 <정의의 한계>의 논지였다. 이와 연계되어 읽게 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정의의 한계>처럼 학술적이거나, 어려운 철학용어는 없다. 오히려 칸트의 기본 테제를 이해하기 좋은 사례들로 인식되었다. 도덕의 가치가 사라지고 있는 우리 사회에 아주 좋은 화두를 던져 준 책이며,  돈보다도 '정의'와 '도덕'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이유를 깨닫게 해주며 시장만능주의가 아닌 시민강화시대가 도래하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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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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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 보다 

 모든 설움이 합펴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 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 보다.

 -<긍지의 날> 1955.2

 

 

나는 사실 김수영을 잘 모른다. 철학자 강신주를 좋아할 뿐이다. 그러나 그런 강신주를 오늘날까지 있게 한 사람은 김수영이라고 한다. 가끔 내가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사유하지 않고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젊은 날 김수영의 시보다는 테크니컬한 이미지의 아름다운 시만을 선호했었다. 한마디로 그냥 읽는 재미로 '시'를 읽었다. 나이가 들어 강신주의 철학이 가미된 김수영의 시는 거의 황홀한 지경이다. 강신주는 이 책을 통해 이제 김수영을 버렸다고 선언하지만, 나는 이제부터 김수영을 만나기로 했다. 짧은 사색의 시간으로 리뷰를 남기는 우를 범하지만, 내 내면에서는 언제나 이 시가 살아서 팔딱팔닥 뛰는 심장의 옆에 존재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덮은 후, 나도 모르게 흐르는 한줄기 눈물에 기대어 김수영을 기억해 보련다. 그렇게  김수영은 내 안에 들어왔다.

 

한 작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사상을 사랑한다는 것과 같은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사상은 작가의 삶과 분리할 수 없다. 그래서 신영복 교수님은 텍스트를 읽고, 저자를 읽고, 독자인 자기자신을 읽는 것이 독서라고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강신주의『상처 받을 권리』에서도 저자가 강조하는 인문정신은 이 책 『김수영을 위하여』에서 김수영이 깊이 뿌리 내린 인문정신과 똑같다.  저자는 거짓된 인문정신이 아닌 페르소나를 벗고 맨얼굴로 자신과 세계에 직면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인문 정신을 말하고 있는데 그런 저자의 인문정신은 김수영에 깊이 뿌리를 내려 잎을 무성히 드리우고 철학의 열매들을 대중에게 열려주고 있다.  우리는 그 열매를 먹음으로써 삶을 조금 더 깊이 성찰할 수 있게 된다. 나같이 시에 문외한이 김수영의 시에 다가갔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김수영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시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시인이 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한 번뿐인 자신의 삶을 타인의 흉내를 내지 않고 제대로 살아 내려고 했음을 말한다. 따라서 저자가 이 책으로 인해 김수영을 떠났다고 하는 것은 이제까지 김수영이 삶의 전반에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하며 이제는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의지와 같다. 삶을 살아 내는 것은 이런 절절한 의지가 바탕이 되어야 하고 그 소망을 타인에게 관철시키려고 했고, 끝내 그럴 수 있었기에 우리에게 위대한 시인으로 기억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제대로 된 시인이 되는 것은 김수영 본인으로서는 사활을 건 문제였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폭포 중에서 -

 

  

삶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 의심하는 고독의 순간에, 시인들의 시는 우리 귀에 들려오기 시작한다.  시인이기 때문에 살 수 있는 삶을 살아내려는 결단의 순간,

자신보다 먼저 그런 결단을 실행했던 시인들,

 세상으로부터 일정 정도 거리를  두어야만 폭포가 내는 소리가 들리듯이 폭포를 이루는 거대한 물줄기에 합류하고자 했던 소망은

자신 스스로가 곧은 시가 되고 그 시가 곧은 시를 부르기를 원하는 소망이 엿보인다.

이처럼 모든 글다운 글에는 절망 속에 다시 강해지려는 희망과도 같은 것, 혹은 되찾은 희망속에서도 현재의 절망이 더 몸서리쳐지도록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이어야만 한다.

 자신의 소리,즉 제스처를 만들어 살아가는 것,

이것을 시인의 숙명이자 시인이 그토록 바랐던 것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인문정신은 태어나면서 누군가를 위해 살게 끔 교육받았기에 타인에 의해 길들여져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는 것이다. 자기만의 스타일로 살지 못하고 남의 스타일을 답습하며 살아가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내지 못한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아야 한다는 타성에 젖은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채찍질 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삶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을 '팽이'를 본 순간 깨달은 김수영의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시를 읽으면 팽이처럼 끊임없이 돌아야 스스로 설 수 있듯이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여 스스로 설 수 있을때  시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내려는 '삶의 방식'임을 말한다. 이것은  한마디로 김수영의 사상은 시나 삶 어느 경우이든 '단독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단독성은 김수영의 사상이다.더 쉽게 말하자면,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내려는 사람은 예술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삶이란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는 통찰의 결여,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삶 혹은 다른 누구의 삶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나의 포즈' , '자기만의 포즈' 로 살아야 한다.

여기서 저자는 제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내면

 '자신만의 포즈'는 저절로 만들어질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자신의 삶을 자기 스타일대로 정직하게 살아 낸다면, 우리는 타인의 삶에 공명하는 보편성을 확보한다. 들뢰즈가 '단독성만이 보편성에 이를 수 있다고 했듯이 김수영의 사상은 단독성이다. 시에서 중요한 것은 삶을 살아 내야만 하는 ' 나 자신, '나의 온몸'이다. 김수영은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비솝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메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그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 애 못 낳는 여자 ,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거대한 뿌리 중에서 >

 

낙후된 현실을 낙후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절망의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사태에 대한 냉혹한 진단이자, 낙후된 현실을 넘어서겠다는 의지의 선언이다. 며칠 전 진중권이 "우리나라 진보는 죽었다" 고 한 말이 생각난다. 김수영 또한 독재정권에 반한 자유주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좌절한다. 그러나 우리는 넘어진 자리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넘어졌다는 자각이 없다면, 일어서려는 마음도 가질 수 없다. 이처럼 낙후된 현실의 자각은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굴곡 많은 역사의 흔적과 지우고 싶은 더러운 역사 그리고 더러운 진창으로부터 일어나기 위한 위해서는 과거를 제대로 보아야 하고 정리해야 한다. 어쩌면 소위 진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결국 제자리 걸음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과거를 제대로 보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결국 진정한 아름다움은 새로운 삶의 국면을 포착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껏 김수영을 그저 시인중의 하나로만 느껴왔다. 그러나 김수영은 진정한 자유주의자이자 혁명가였다. 카프카가 우리 영혼에 깊이 상처를 남기는 책이 있어야 한다고 했듯이 이 책은 내게 커다란 상처로 다가온다. 지금 이 땅에 진보가 사라지고 있는데도 아무도 분노하지 않는 것처럼, 억압된 자유에 길들여진 무서움을 본다. 한 시인이 전생을 바쳐 투쟁한 개인의 단독성이라는 자각이 필요한 이유 또한 아마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 땅에 온 몸으로 시를 노래하는 시인이 없고 자유를 향한 외침이 없다면 이미 진보는 죽어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단독성을 위해 나는 이제부터 김수영을  만나기로 했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을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 시여, 침을 뱉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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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슬픔을 가볍게, 나는 춤추러 간다 - 댄스 스포츠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
방현희 지음 / 민음인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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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춤을 춘 적이 있다. 《오늘의 슬픔을 가볍게, 나는 춤추러 간다》이 책을 받아들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왜 춤을 잊고 살았을까? .. 하며...  며칠 전 아이들과 대중목욕탕에 갔는데 벽면에 걸린 대형 TV에서 '댄스 위드 미' 라는 댄스 경연 프로그램이 한참 방송중이었다. 우연히 본 댄스의 황홀한 동작과 리드미컬한 음악에 매료되어 순간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었는데 막둥이가 흥에 겨운지 댄서들을 똑같이 따라한다. 아이의 재롱과 화려한 댄스의 세계가 겹쳐지면서 오래 전 춤추던 그 날들이 떠올랐다.  

 

중학교때 우연히 특별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다름 아닌 '무용'이었다. 그냥 재미로 들어갔는데 의외의 재능을 발견하게 되어 담임선생님과 무용선생님은 무조건 예고를 가기를 권했다. 그러나, 가난했던 우리집은 한번 대회에 나갈때마다 당시만 해도 너무 비싼 대회비를 감당 할 수 없었다. 차마 대놓고 말씀은 못하시고 밤마다 고민을 하시는데 밑으로 딸린 동생 둘의 앞길도 구만리인데 차마 하고 싶다고 우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냥 순순히 포기했다. 그게 아마도  내 인생의 첫 갈림길의 순간이었지 싶다. 춤은 그래서인지 가끔 떠오를때마다 가슴 한 쪽이 찌르르 해진다. 마흔이 다 된 지금도 그때 내가 예고를 진학하였으면, 지금의 나와는 다른 모습이 되었을까? 가 늘 궁금해지곤 한다.


 

작가는 내게 낯설은 국내작가이다. 처음 대하는 작가의 글은 무척 감미롭다. 잔잔한 감동의 여운을 남기는 동시에 심금을 울리는 것도 잊지 않고 건드려 읽다가도 가슴 뭉클거리게 만드는 얄미운 작가다. 그냥 춤 이야기만 있었다면 얄밉지만은 않을 텐데 나이가 들면서 느껴졌던 삶의 자양분들을 곳곳에 뿌려놓았다. 가장 마음에 드는 말이 있다면

 

"인생에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이 오는 때가 있다. 그것이 지금이 아니라면 그 어느 때인가는 반드시 나를 거쳐간다. 그게 어릴 때일수도 있고, 한창 때일 수도 있으며 다 늙어서일 수도 있다. 그것을 대비하면서 살아야한다."


이 말이 참 귓가를 맴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습성은 늘 현재에 안주하려 하기 때문이다. 인생이 봄날 만 있을 수 없듯이 때론 폭풍우가 치고 때론 비바람이 불어도 긴 생명력을 가진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내게도 미래는 불투명하지만, 지금의 내가 행복하다고 해서 안주하거나 자만하거나,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똑같이 어려움이란 것이 존재하기에 그것이 언제 찾아오든지 대비할 수 있으면 된다. 인생에 이런 어려움(아픔, 고통 , 슬픔) 등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이겨내는 힘의 원천이 누구에게는 책이 될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음악이 될 수 있겠지만, 이 책의 주인공들은 춤으로 그 슬픔을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작가가 수년간 댄스 스포츠를 배우며 만난 이들의 이야기를 룸바, 차차차, 왈츠, 자이브, 삼바, 탱고, 파소 도블레, 폭스 트롯 등 다양한 종목의 댄스 스포츠와 접목하여 한 편의 삶과 춤의 에세이집이 완성되었다. 이들이 춤을 배우게 된 이유와 춤이 이들에게 어떤 존재인지,작가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 우리의 삶에 춤이 강한 위로가 되기도 하며 온전히 나를 표현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될 것만 같다.  

 

영혼마저 구속하는 것은 비단 사람만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 나를 얽어맨 모든 현실 , 삶 자체의 무거움이 있다.

 

요즘도 가끔 아이들이랑 춤을 춘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이 책이 내 버킷 리스트에 '춤' 을 추가하게 만든다. 오래된 기억, 열정이란 이름도 몰랐을 시절에 추었던 그 춤사위들이 그나마 정겹게 느껴지는 것은  이루고 싶은 그 무엇을 떠올려 주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감각적이고 밀도 높지만, 깊은 성찰에서 우러나온 작가가 풀어놓은 삶의 이야기가 너무도 살뜰히 다가와 고요했던 수면에 파문을 일으켜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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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미국의 역사 - 1차 세계대전부터 월스트리트 점령까지
전상봉 지음 / 시대의창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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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는 악마의 세기였고 20세기가 물려준 세상은 말 그대로 도저히 살 수 없는 지경의 세계다. 폐허의 도시에서 살아야 하는 빈곤층은 그 비참함에 질식하고 모든 것이 넘쳐나는 부유층은 욕망의 노예가 되어 호화로움에 숨이 막힌다." -《21세기 사전》자크 아탈리 -

 

20세기는 전세계적으로 불행한 세기이다.  미국이 주도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휩쓸려 전 세계가 불황과 전쟁에 시달려야 했고, 반세기 가까이 냉전의 세기였으며, 자본주의의 물결에 휩싸이며 탐욕에 물든 세기이다. 저자는 21세기는 이런 냉전과 탐욕이 끝난 순간 시작되었다고 한다.

 

1차세계대전전까지 '해가 지지 않던 나라' 영국의 파운드가, 1차세계대전 이후로 가치가 하락하고, 반대로 달러가 급상승하게 된다. 달러가 국제금융시장에서 급부상하게 된 것은  달러가 금에 확고하게 연동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전쟁중에 종이뭉치에 불과한 유럽의 각종 지폐다발은 무용지물일 수 밖에 없었으며 이것은 결과론적으로는 금 대비 영국의 파운드의 가치가 심하게 요동치게 되는 사태를 낳았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파운드의 매력을 크게 떨어뜨리게 되면서 금과 연동되어 있던 달러는 세계금융시장에서 급부상하는 발판이 되었다. 유럽은 전쟁중에 종이다발인 유럽의 화폐대신 금을 미국에 넘겨주고 무기를 사게 되면서 미국의 경제는 세계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두번의 세계대전은 미국이 세계의 금 70%를 보유하는 나라를 만들어주었고 반대로 경쟁관계에 있던 영국은 파운드의 몰락으로 이어졌고 독일과 프랑스의 정치위기는 곧 경제위기로 이어졌다.결국 미국은 20세기 세계 제일의 패권국가가 되었다.

 

자본주의는 인간은 누구나 정신적 자극보다 물질적 보상을 바라고, 사회와 조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일하고 싶어 한다고 전제한다. 그것이 '인간적 자연'이고 따라서 불변의 도덕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와 현실 사회주의의 싸움은 도덕성의 싸움이 아니라 현실성의 싸움이었다. 자본주의가 살아남은 것은 그것이 더 도덕적이고 더 이상적이어서가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덜 도덕적이고 덜 이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김준호 《경제사》-

 

 미국의 흥망사는 곧 자본주의 흥망사다. 20세기의 패권주자인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는 현재 몰락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패권국가로 우뚝 서게 되면서 미국에 의해 쥐락펴락 당하는 우리나라는 특히나 미국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파란만장한 20세기를 보낸 한국은 더군다나 미국을 빼고서는 현대사를 말할 수 없는 지경아닌가. 이 책은 미국이 패권국가로 등극하면서부터 21세기의 미국의 향후 전망을 다룬다. 21세기 들어 9·11테러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전쟁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이 중국이라는 새로운 강자가 부상하고 마침내는 2008년 9월 월가발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가 도화선이 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까지 미국의 1세기를 살펴본다. 이 1세기를 나누어 패권이 교체되는데 30년, 팍스 브리태니카의 세기가 팍스 아메리카 세기로 바뀌는데 30년, 그리고 신자유주의부터 글로벌 금융위기까지의 역사이다.

 

  저자는 '팍스 아메리카'를 대신하여 '팍스 시니카'의 세기가 되려면 무엇보다 경제위기를 타개할 대안 담론을 제시하고 성장 동력을 제공해야 한다고 한다. 1930년대 대공황에는 케인스주의가 제시되어 자본주의의 나침반 역할을 했고, 미국은 조타수 역할을 했다.(P412) 1970년대 불황일 때에는 하이에크를 위시한 일군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이론을 정립하기도 했다.(P413) 그러나 지금은 경제위기를 타개할만한 어떤 대안 담론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 경제위기는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며, 장기 불황이라는 긴 터널의 초입에 들어섰다고 한다. 과거의 대공황시에는 전시경제체제를 통해 불황이라는 긴 터널을 벗어났지만, 현 경제위기는 딱히 해결 방안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미래를 더욱 암담하게 한다. 결국 이 책은 현대 자본주의 역사이자 우리의 경제역사의 재정립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 경제 성장이라는 프레임속에서 사회생활을 했고 경제에 대한 바른 인식을 하지 못한 채 20세기의 한국을 견디었던 지금의 나에게  많은 위기의식을 전해주는 책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위기의식과 더불어 향후 전망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흥미진진하게 풀어주고 있어 무척 유익한 역사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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