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뇌 - 당신의 뇌가 정보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법
토르켈 클링베르그 지음, 한태영 옮김, 정갑수 감수 / 윌컴퍼니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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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뇌는 얼마나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을까?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전문가의 연구대상이었던 뇌가 이제는 21세기 인류에게 가장 흥미로운 화두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그래서인지 21세기는 생명의 시대 혹은 뇌의 시대라고 한다.

 

보통 새벽 5시에 기상하는 편인데 남편은 일어나자마자 페이스북을 확인하는 동시에 음악을 듣고 나는 밥을 하는 동시에 청소기를 돌린다. 그러면서 순간순간 스마트폰을 본다. 한번에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이 늘상이다. 그러다가 커피를 마시려고 전기주전자를 켰는데 전기주전자 안에 물이 없어 주전자를 태우기도 하고, 음식에 간장을 넣는다는 것을 설탕을 넣어버리기도 한다. <넘치는 뇌>에서는 이것이 멀티태스킹 능력을 초과해 사용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한다. 이렇게 멀티태스킹으로 인해 허둥대는 모습은 우스꽝스러울지 몰라도 한편으로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자 정보화시대의 흔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며칠 전에 출근을 하면서 교통사고를 목격하게 되었는데 사고원인은 운전자의 휴대전화 사용 때문이었다. 자동차가 거의 다 부셔질 정도의 처참한 사고였다. 그 안에 탄 운전자는 119에 실려 가긴 하였지만, 차가 거의 휴지조각이 된 상태로 봐서는 심각한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럼 운전하면서 전화를 하거나 네비를 사용하는 동시에 문자를 보내는 인간의 멀티태스킹능력은 어디까지가 한계일까? 두뇌훈련을 통해 이런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스웨덴의 인지신경과학자 토르켈 클링베르그 박사가 <넘치는 뇌>를 통해 그에 대한 답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정보의 양과 복잡성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우리의 두뇌는 4만년 전 석기시대 원시인의 두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한다. 크로마뇽인의 뇌가 현대의 정보 홍수를 만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보려면 저자는 주의력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한다.

 

주의력에는 여러 유형이 있는데 저자는 자극주의력과 통제주의력이라는 유형을 살펴보는데 이 두 유형은 계통상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두뇌에 두 가지 주의력을 통제하는 다른 영역, 즉 다양한 두뇌 프로세스가 있음을 발견한다. 이런 주의력을 결정하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은 저자의 다양한 실험과 연구를 통해 통제주의력과 자극주의력에 대해 각기 다른 병렬시스템에 존재하며, 이는 두 가지 유형의 주의력이 서로 독립적임을 보여주는 여러 심리학 실험결과를 가져왔다. 예를 들면 아주 비싼 물건을 사고 택시를 탔다가 물건을 택시에 두고 내리는 행동에서 보이는 주의는 주의력 상실의 일종으로 ‘이런 현상을 ’무시‘라고 하며 두정엽 주변부가 손상된 탓에 발생한다고 한다. 따라서 두뇌가 정보를 받아들이는 능력에 한계가 있는 것은 주의력의 메커니즘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위에 말한 택시에 비싼 물건을 두고 내리는 행위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을 쉽게 말해 ‘작업기억’이라고 하는데 작업기억의 결정적 특징은 용량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앨런 베들리는 작업의식의 정의를 “작업기억이란 언어이해, 학습, 추론같은 복잡한 인지과제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조작하기 위한 임시장소를 제공하는 두뇌시스템이다.” 라고 하는데 이 작업기억은 어느 정도 멀티태스킹을 요구하며, 유동성과 상관관계가 높은 기억과제를 의미한다고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석기시대 두뇌가 현대의 정보홍수를 만날 때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의 원인을 찾아 분석한 결과 저자는 작업기억의 한계로 보고 있다. 아동기를 거쳐 사춘기가 될 때까지 작업기억의 정보저장 용량은 계속 증가한다. 따라서 성인은 아동에 비해 작업기억이 뛰어나다. 여기에 저자는 멀티태스킹 능력이 여성이 남성보다 낫다는 주장과 좌우 대뇌반구가 여성의 경우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속설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진화심리학 이론에서는 우리의 지능과 작업기억의 발달이 사회환경과 언어, 복잡한 문화의 발달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많은 정보과 동시다발적 상황,빠른 속도 여러 가지 방해요소 등을 특징으로 하는 정보화사회의 요구로 인해 현대인 대부분이 일종의 주의력결핍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며 최근 몇 년 새 ADHD(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치료를 받는 아동의 숫자가 급증한 것 또한 디지털화로 인한 인터넷 과다사용이 원인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ADHD(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치료를 대부분이 약물에 의존하고 있는 것에 대해 저자는 약물에 의한 부작용을 우려하며 훈련만으로도 충분히 작업기억을 향상시킬수 있다고 한다. 인간의 두뇌는 근육을 계속 사용해야 약해지지 않듯이 뇌를 훈련하는 것으로 주의력결핍장애를 치유할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주의력 결핍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요구와 능력간의 불일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하며 전두엽과 두정엽의 특정영역은 정보의 양에 한계가 있으며 두 가지 이상의 정보가 동시에 유입되면 상당한 부담을 준다고 한다. 그러나 정보의 양과 스트레스 호르몬 사이에는 단순한 연관성은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자극과 정보에 대한 욕구는 충족시켜야 한다고 한다. 저자는 주의력결핍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정보요구와 작업기억 능력이 평행상태를 유지할 때 ‘몰입’ 할 수 있다고 한다. 뇌가 몰입할 때 현대의 넘치는 정보와 환경을 통제할 수 있게 되면 뇌의 과부하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일을 재정립해서 능력을 키우는 것은 우리자신의 몫이다. 현대인의 과잉정보에 노출되어 한 가지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다면 주의력결핍에 시달릴지 모르니 지금이라도 잠시 멈추고 명상을 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한다. 가만 생각해보니 오늘 하루 뇌를 사용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던 것 같다. 현대인의 뇌, 잠시 쉬어줄 필요도 있을 것 같다. 멀티태스킹에 익숙하다보면 한가지 일에 점점 더 몰입하기가 힘들어 지는 것은 어쩜 자명한 이치인 것 같다. 한가지에 몰입한다는 것이 이제 힘든 시대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뇌를 위해서라도 '몰입' 하는 연습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 매순간 정보를 확인하는 버릇은 원초적인 수준의 기회와 위협을 처리하는 데 관계된 도파민 호르몬의 분비를 유도해 ‘중독’에 이르게 한다. 도파민으로 인한 흥분이 가라앉으면 이번에는 지루함이 밀려들며 금단증세가 나타난다. 따라서 정보에 대한 갈증이 더욱 커지게 된다. 산만함으로 인한 피해도 적지 않다. 운전 중 휴대전화 사용이 사고를 유발하듯, 멀티태스킹이라는 ‘환상’은 집중력과 창의성을 저하시키고 인간적인 생활을 파괴한다. 한마디로 정보의 바다를 헤매다 망각의 바다에 빠지는 격이다.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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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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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별을 보면 아픔이 느껴진다. 알퐁스 도데가 노래한 반짝반짝 빛나고 예쁜 별이 왜 내게는 아픔으로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을 읽으면서도 그토록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시가 왜 그렇게 슬펐던 이유도 모를 일이지만, 별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을 노래하다가 갑자기 설움에 북받힌 이유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별은 내 가슴에 말하지 못하는 슬픔처럼 자리잡아 있었다.

 

모든 별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일제히 빛을 내뿜는 순간 아빠가 다른 우주로 갔다.

정훈은 이후 죽음이란 빛으로 태어나 빛으로 죽는 것이라 생각한다.

영원한 빛은 곧 죽음.

그렇게 1984년 열다섯이던 정훈은 고아가 되었다.

의식이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깨어난 정훈은 '애국지사'라 불리우며 '원더보이'라는 공식명칭이 붙는다.

이후 모든 별들의 빛을 받아서인지 정훈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지금은 곁에 없지만 다른 우주에서 여전히 과일을 팔고 있을 아빠를 위해 정훈은 하늘의 별을 세곤 한다.

 

그러면 아빠가 우주의 비밀을 말해준다.

"순리대로 사는 게 바로 이 우주의 비밀이지."

"산은 더욱 산이 되어야만 하고 물은 더욱 물이 되어야만 한다.그게 우주의 비밀이야" 라고...

 

원더보이는 이렇게 가슴속에 아버지를 품고 우주의 비밀을 깨닫는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복학생 선재 형, 남장 여자 강토 형,해직 기자 출신의 재진 아저씨, 구구절절한 사연의 무공아저씨, 이들 모두의 고통을 느끼는 정훈은 그들의 고통을 흡수하면서 자란다. 타인의 고통이 스며들어 자신의 일부가 되었을 때 정훈은 '이해'라는 의미를 깨닫게 된다. 또한 타인의 이해는 더 나아가 전 우주에 대한 이해로 확장되어 간다. 처음 정훈이 아버지의 죽음을 우주의 양자론으로 받아들여 또 다른 우주에 아버지가 살고 있다고 믿는 것처럼, 아버지를 다른 우주에서 만날 수 있다고 희망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경계지어진 것들에서 벗어나 범우주적인 시각으로서 자아를 바라보게 한다. 그것은 정훈을 통해 고통과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제안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자아를 바라볼 때, 지구의 수억만명 중의 하나인 존재이지만 그 수억만명중의 한 인연으로 만난 소중함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특별함을 부여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 슬픔으로 다가왔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별을 바라보며 언제나 떠올랐던 슬픔의 실체를 나는 정훈을 통해 비로서 이해하게 되었다. 그 별은 현실에 일어나는 타인의 고통들을 외면하고 있는 '나'를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별을 희망이라고 말하고 싶은 이유는 원더보이의 마지막 말 때문이다. "우리의 밤이 어두운 까닭은 우리의 우주가 아직 젊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믿고 싶어져서 이다.

 

우주에 그토록 별이 많다면, 우리의 밤은 왜 이다지도 어두울까요?

그건 우리가 지구라는 외로운 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천문학자들은 우리 은하에 어림잡아 3천억 개의 별들이 있다고 추정합니다. 이중에서 생명체가 살고 있다고 알려진 별은 현재로서는 지구뿐입니다. 그래서 지구는 고독합니다. 이 고독은 3천억분의 1의 고독입니다. 그 별들 중에서 생명체가 존재하는 별이 하나라도 더 있다면, 이 고독은 반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그때 지구의 밤은 지금보다 두 배는 밝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구 하나 뿐입니다. 아무리 별이 많다고 해도 지구가 3천억분의 1만큼 고독한 한에는 지구의 밤은 여전히 어두울 것입니다.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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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성장시키는 독서법 - 책에게 질문을 던지는 소통의 책 읽기 노하우
채석용 지음 / 소울메이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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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란 무엇일까? 책은 왜 읽는 걸까? 가끔 내 자신에게도 하는 질문이다. 근 몇 년간을 하루도 책에서 손을 놓지 않은 거 보면 적어도 독서광 정도에 속하긴 하는 것 같다. 책읽기는 처음 서울에서 낙향하였을 때 심심하여 읽게 되었던 것을 시작하여 아직도 멈추지 못하고 있는 행위이다. 무료하여 읽었던 것에서 더 나아가 블로그에 책을 읽은 소감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독서 패턴이 정해지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재미있는, 오락성이 강한 책만 선택하여 읽었다. 친구도 없고 문화생활을 즐길 수 없는 시골생활의 적적함을 책으로라도 달래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나를 성장시키는 독서법>의 부제는 “책에게 질문을 던지는 소통의 책 읽기 노하우”이다. 과거 재미있는 책만 읽던 내게 무척 도움이 되었던 것이 바로 소통이었다. 이웃과의 소통은 그만큼 책 읽는 것만큼 소중하다. 독서에 대해서 누군가와 토론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인 것 같다. 그리고 소통을 통해 바른 독서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박사인 저자가 강조하는 독서법 또한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독서법이라고 한다. 책읽기와 글쓰기 , 말하기가 모두 어우러져 독서할 수 있을 때 책이 주는 독단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바른 독서법이 된다.

 

일례로 “책 읽는 사람이 제일 싫어“ 라는 말을 여러 번 들어본 적이 있다. 불과 몇 년 전에 나도 이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과 인격수양이 같은(=)의미가 되면 더욱 좋겠지만, 독서가 인격수양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기만적이고 이기적이며 앞뒤가 꽉 막힌 폐쇄적인 인간을 만들 수 있는, 독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예를 스탈린과 히틀러를 예로 들고 있는데 희대의 학살자인 그들이 지독한 독서광이라는 사실을 보아도 독서가 주는 폐단이 어림짐작이 된다. 이것은 지식이라는 것이 자기방어의 논리를 제공해주는 수단으로 충분히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책을 한권도 읽지 않아도 주옥같은 곡을 작사했던 김태원의 경우를 보면 책과 감성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책은 많이 읽어도 독재자가 될 수 있고,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아도 시인이 될 수 있다. 히틀러가 지적한 대로 책은 도구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

 

 

따라서 책은 혼자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느낀 점을 타인들과 나누고 공감하며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어야 건강하고 오래 살듯이 많은 사람과 책에 대해 생각을 나눠야 마음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미네르바 사건을 통해 독서가 독이 된 예를 말해주는데 미네르바의 폐단은 상호 소통을 위한 글쓰기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얕은 지식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글쓰기를 했기 때문에 발생한 예라고 한다. 한마디로 자신을 과시하고 과장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또한 차라리 하지 않는 것만 못한 것이다.

 

‘책을 읽는 것은 책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상의 활동이어야 하며 완전한 몰입과 완전한 분노만이 진정한 독서이다. 책을 책꽂이에 꽂아두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속으로 파고들어 오는 것, 혹은 거쳐가는 것, 때로는 영혼을 손상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읽기와 말하기, 글쓰기, 삼박자의 소통을 해야한다고 한다.

 

저자가 말해주는 독서법은 아주 좋은 충고이자 조언들이 많다. 책읽기가 습관처럼 굳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도움이 많이 되어줄 책이다. 중간에 저자는 무엇이든 자신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과감한 도전을 감행하고 소통하라고 한다. 소통하지 않은 채 하는 독서는 ‘자신의 신념을 정당화하는 미로에 헤어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한다. 소통하지 않은 채 책을 읽으면 책은 오히려 독이 된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 아마도 이 부분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역사책 읽는 법과 철학책 읽는 법에 대한 것도 참고해볼 만한 부분이다. 책읽기에는 왕도가 없다. 그러나 책 읽기에 대한 철학박사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면 책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은 배가 될 것 같다. 책읽기의 진정한 재미와 마음을 성장시키는 비밀이 들어있는 책이다.

 

과거 선인들의 독서는 인격수양이 목적에 있었다. 퇴계 이황은

오로지 학문에 있어서는 뜻을 겸손하게 하라. 시종을 한결같이 학문에 힘쓰면 덕이 자기 도 모르게 닦아진다.” 라고 했으며,

다산 정약용은 “네 삶의 모든 부분을 공부의 과정과 일치시켜라. 세상 모든 일이 공부 아닌 것이 없다.” 라고 했다. 독서 할 때마다 늘 바라보는 글귀이다. 독서에 대한 막연함보다는 목적을 가지고 책을 읽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 읽는 것은 작가와 대결하는 것, 혹은 연애하는 것이다. 연애나 싸움을 할 각오로 책을 읽으면 재미나고 줄기차게 읽을 수 있다.

☆책만 잔뜩 모아놓고 읽지 않는 수집가가 되는 것은, 진정한 독서가가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피해야할 사항이다.

☆-책에서 건진 책-

강신주의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김용옥의 책은 반드시 읽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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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의 역사 - 근대 영국사회와 생산, 언어, 정치
이영석 지음 / 푸른역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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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생산은 우리에게 이제는 익숙해진 말이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축적체제'를 일컬어 ‘포디즘’ 이라 하는데 이런 포디즘 체제는 18세기 말 영국에서 처음 나타난 공장제도(factory system)라는 대량생산체제의 확산을 통해 가능해졌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공장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공장의 역사>는 공장이라는 창을 통해 사회를 이해하는 작업이다. 최초의 산업화를 경험한 영국의 사례를 통해 공장의 구조 및 변화의 역사를 재구성하며 공장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체제를 대상으로 삼았다.

 

 

1부에 <전前 시대의 유산>은 중세 후기 생산의 근간을 이루었던 도시의 수공업자 조합이었던 길드제도guild system 를 살펴보는데 길드제도가 쇠퇴를 배경으로 원산업화가 전개되었기 때문에 저자는 농촌공업과 도시수공업의 관계를 탐색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2부 <산업혁명과 공장의 원형>에서는 영국 산업혁명의 주도산업인 면공업 분야를 중심으로 기계와 공장제도의 전개과정을 개괄한다. 여기서 저자는 기계와 공장이라는 말의 기원과 의미변화를 통해 공장의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는 추적한다. 여기서 '기계 machine'이라는 말은 숙련이 필요 없는 단순한 작업에 쓰이는 도구를 가르켰는데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자신의 손을 가진 장치’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 19세기 담론에서 주목할 것은 공장생산의 대안으로 소생산자의 출현이다. 대량생산을 비판하는 지식인들과 충돌하며 장인생산이라는 소규모 생산단위의 등장했으나, 19세기의 역사는 장인생산의 꿈과 사회이론이 산업주의 즉 사회의 욕구에 패배하였음을 보여준다. 이후 대량생산으로 대세가 기울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3부 <무거운 근대성과 공장제도> 19세기 중엽 영국은 다른 나라의 산업화에 힘입어 더욱더 경제적인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산업화과정에 나타난 경제 불황은 세계경제의 통합, 교통혁명, 제조업 성장 및 투자가속화에 따른 것으로 교통혁명으로 유럽의 선진적인 나라들이 유럽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낮은 비용으로 식량과 원료를 들여오게 되면서 전반적으로 저물가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저물가현상은 특히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산업국가의 농업을 황폐화시켰다. 그리고 이 저물가현상은 값싼 식량과 원료에서 비롯되었기는 하지만, 기술혁신에 따른 생산비 절감이 직접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대불황기에 새로운 기술혁신은 중공업, 특히 기계, 제강, 화학, 전기, 자동차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20세기에 들어와 전쟁과 전투적 노동운동 등으로 사회혼란을 겪어온 영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른바 복지국가 모델을 뒤따랐다. 복지국가 이미지는 실제로 대공장과 노동자, 둘 사이의 타협과 동거양식을 사회 전체로 확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자본과 노동의 경쟁과 타협을 전제로 한 노사관계 또한 근대성의 한 표현이라고 한다면, 대공장 안에서 이룩된 사용자와 노동자의 새로운 동거양식은 ‘무거운 근대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는 거대한 대공장들이 사회를 지배한 시대다. 포디즘은 20세기 자본주의, 즉 '무거운 근대성'을 상징하는 용어다. 무거운 근대성이란 자본과 노동을 하나로 결합해 상호의존성을 강화시켰다. 자본가와 노동자들은 ,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건강하거나, 병약하거나,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결합되어 있었다. 공장은 노동자 공동의 거주지였다. 노동법, 담합구조, 국가의 복지제도 등은 모두 이 동거양식과 관련된다.

 

4부 <탈공장의 시대> 영국 제조업이 쇠퇴를 통해 2차 산업에서 3차 산업으로 급속한 중심이동을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는 탈공장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징후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 전과 달리 거대기업들이 감량화, 경량화등을 통해 생조직의 유연화를 모색하는 한편, 전 세계에 걸친 분업체계를 통해 새롭게 변신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지식산업과 정보통신혁명같은 이 시대의 새로운 추세와 결합되어 전개된다.

 

지금까지 자본주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가 생산의 3요소라 부르는 토지, 노동, 자본이 생산 또는 자본축적의 기본적인 구성요소이면서 그와 동시에 역사성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여기에서 현대 경제학이 직면한 위기가 오늘날의 생산의 부의 축적 메커니즘을 종래의 패러다임으로 분석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고 한다. 이른바 탈공장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오늘 날 경제활동 일반에서 갈수록 그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생산의 3요소가 아닌 지식과 정보이다. 지식과 정보는 계측불가능하고 수치로 환원될 수 없기에 생산의 3요소로 치부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지식과 정보의 중요성은 디지털혁명과 함께 증폭되어 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경제학의 고민이다. 이제 생산의 주체는 기계이고, 인간은 그 보조적인 지위로 떨어진 셈이다. 포디즘에 의한 대량 생산은 곧 에너지, 자원의 고갈과 대량의 산업폐기물을 가져왔고, 또 대량 소비는 생활폐기물의 엄청난 증가로 이어져 결국 에너지 및 생태환경의 위기가 자본주의 핵심적 위기의 하나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우리에게 직면한 위기는 포스트포디즘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하고 있다. 탈공장의 시대, 앞으로 어떤 변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그렇기에 공장이라는 창을 통해 사회경제를 바라보게 하는 <공장의 역사>는 불투명한 자본주의의 미래에 무척이나 시의적절한 책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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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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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양날의 검이다. 국가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서 사회를 통제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의 자유를 막강한 권력체이다. 이 서슬 퍼런 '국가'라는 검을 누가 이용하느냐에 따라 민중들의 삶은 큰 굴곡과 변화를 겪어왔다 -국가의 거짓말 中에서-

 

 

요즘 들어 국가에 대한 책을 유난히 많이 접하게 된다. 박노자 교수의 책은 처음 읽어보는데다가 생소한 이야기들로 인해 당혹감이 드는 책이다. 일반적으로 국가를 생각할 때 국가는 개인의 이익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된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해왔던 것 같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 최고의 선善을 이루는 것이 국가가 가지고 있는 명제지만, 플라톤이 " 이상국가란 철학자들이 국가를 통치하지 않는 한, 혹은 통치자들이 철학을 공부해 국가를 다스리지 않는 한 실현되기 어려운 것일세." 라고 했듯이 국가는 선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증명이 된다. 아니, 역사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국가는 계급사회 권력관계의 중심이고, 생살여탈권은 그 권력관계의 핵심이다. 촛불을 든 국민들에게 물대포를 쏘아대고, 평화롭게 시위하는 국민들을 강경 진압하는 것이 바로 국가의 본질이 아닌가? 촛불은 '재협상.' '고시 철회.' '민영화 철회 및 공공성 강화' 등의 의제를 통해 국가에게 제 역할을 하라고 요구했지만, 제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이 국가의 본질이다. 따라서 촛불이 진짜 승리하기 위해선 국가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여기서 저자는 국가가 '합리적 조절자'라는 것은 환상일 뿐이고, 지배계급의 '사무총국' 성격을 띤다고 한다. 매우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역사적으로 소수의 기득권층이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국가'라는 정치권력을 사용할 때마다 항상 '거짓말'이 존재해 왔다. 막스 베버의 유명한 정의대로 근대국가란 폭력의 합법적 독점자이고 , 국내에서 그 합법적 독점자는 바로 경찰조직이다. 과거 용산참사만 보더라도 한국의 지배계급이 사회적 갈등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 하려는지 우리에게 직설적으로 보여준 예이다.

 

 

 

 

최근 제주의 해군기지 또한 국가의 폭력성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해군이 민간인을 폭행하고 강압적인 태도를 보여도 국가가 해결해 줄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지, 아니면 경제불황으로 인해 모두가 먹고 살기 힘들어서인지 과거처럼 촛불시위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과거 실미도의 비극이나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을 다 알면서도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수많은 한국인이 있다는 것을 보아도 우리는 자본주의에 깊숙이 물들어 이제는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고 있지 못한 지경에 다다른지도 모르겠다.

 

 

 

과거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동시에 두 개의 전쟁을 진행하던 미국정부는 '정의로운 전쟁' 운운하며 전쟁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저자는 이 '정의로운 전쟁'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거짓말'이다. 라고 한다. 특히 자본주의 국가의 성장은 전쟁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나아가 자본주의 국가로 구성되는 국제 패권 체제는 늘 대규모 전쟁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 책에서 가장 의아했던 부분이 있다. 근대의 전쟁은 종교를 하나의 정신적 도구로 보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종교 권력'과 동의어로 자리 잡고 있으며 한국의 시민이 모두 같이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고 한다. 1950년 이승만을 비롯한 열성 개신교가 권력을 독점해 기독교가 '국교 아닌 국교'의 면모를 띈 상황에서 기독교가 대한민국의 유일사상의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결국 한국 교회의 기적적 성장 요인으로 작용하여  바로 반공의 기독교화와 기독교의 반공화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이런 기독교의 사상이 뿌리깊이 인식되어 있는 한국인들에게 북한이라는 타자에 대한 적대심과 경계심 없이 '국민 통합'이 가능할 것인지 의문으로 남는다고 한다.

 

 

이 책은 이렇게 국가의 실체와 국가폭력의 실체에 대한 이야기이다. 무엇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국가의 폭력이 미화되고 합리화되어 정작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 실체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진정한 변혁만이 전쟁의 종식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쯤 인식하게 될까? 다소 불편한 진실일지도 모르지만, 과거 무의식적으로 인식되던 것들의 실체를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한 책이다. 국가를 바로 보는 시선, 바로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라는 사실이 확실히 각인되어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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