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_사랑한_비극
사람들과의 부침과 짜증이 나거나 관계에서 오는 허무함이 들 때 혼자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도저히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임을 이해는 하지만 도저히 타인들의 횡포에 휘둘리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서인지 혼자 조용한 곳에서 누리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도 하다.
나는 가끔 타인을 받아들인다는 선, 그것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의 기준이 될까하는 생각이 든다. 타인의 삶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험담하면서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타인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다가 하고 싶은 말을 못해 기어이 마음에 병이 든 사람도 있다.
자기를 너무 사랑해서 죽은 나르키소스는 어쩌면 현대인의 쓸쓸한 초상인지도 모르겠다. 나르키소스는 ‘망연자실’이라는 뜻으로 타인이 나르키소스의 얼굴을 보면 그 자리에서 넋이 나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나르키소스를 보고 테베의 예언자는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면 불행해 질 것이라 예언한다.
나르키소스의 어머니는 이후 나르키소스가 혹여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될까 각별히 조심을 했다. 나르키소스가 연못에 나가면 수면을 흔들어 놓아 자신의 얼굴을 비추지 못하도록 요정들과 하인들이 거친 바람을 일으켰다. 그런 배려 덕에 나르키소스는 한 번도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자라게 되었다. 그렇게 성장한 나르키소스를 보고 그의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 고백한 요정들이 수두룩했다.
허나 나르키소스는 타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히려 수치심과 경멸의 말로 외모를 비하했다. 너같이 못생긴 걸 사랑하느니 내가 차라리 죽어버리겠어!~ 이런 모욕적인 말을 듣게 되는 요정도 더욱 많아졌다.
그 요정들 가운데 에코라는 요정은 헤라 여신의 노여움을 사 남의 말만 따라하는 벌을 받고 있었다. 어느 날, 나르키소스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그녀는 사랑의 열병을 앓다가 지나가는 나르키소스를 안아버리는 실수를 한다. 말은 하지 않고 안기만 한 에코에게 차가운 경멸의 말을 쏟아놓는 나르키소스. 사랑했던 나르키소스에게 굴욕감을 느낀 에코는 깊숙한 숲의 동굴 속으로 멀리 멀리 달아나 숨어버렸다. 수치심 속에 야위어만 가던 에코는 형체도 없이 사라진 채 남의 말만 따라하는 목소리만 남겨지는데 이후 에코를 메아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나르키소스에게 거절당한 요정들은 신들에게 나르키소스도 처절한 사랑의 아픔을 느끼게 해달라 기도했다.
이 기도에 응답한 것은 다름아닌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였다. 예전 같으면 자신의 얼굴을 비추지 못하게 거친 물결이 일렁이던 샘가는 나르키소스 얼굴이 다가가도 그 모습을 투명하게 반사해서 비춰준다. 그대로 비치자, 나르키소스는 사랑에 빠져 넋이 나갔다. 물속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나르키소스는 숲의 요정 가운데 하나 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지거나 잡으려 들면 달아나기만 하는 자신의 모습에 애간장이 타던 나르키소스는 불러도 대답이 없고 만지려면 도망가는 요정의 모습에 시름시름 앓다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그의 사랑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죽은 자리에서 꽃 한 송이가 피어났는데 그 꽃이 바로 수선화이다. 꽃말 역시도 ‘자기애‘이다.
나르키소스가 바로 보고 있었단 사랑,은 자기애이지만 타인과 소통할 줄 몰랐던 나르키소스의 비극이다. 자신의 아름다움 뒤에는 하인과 요정들의 노력이 있다는 것을 몰랐고 숲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본 적이 없었다. 에코의 처절한 원망이나 요정들의 기도에는 사랑의 갈구만이 아니라 자기를 돌봐주길 바라는 작은 관심이었던 것이다.
사적 자기의식이 너무 높았던 나르키소스는 결국 스스로의 세계에 갇혀 죽었다. 반대로 공적 자기의식이 지나치게 높아도 다른 사람 눈치를 많이 보고 사느라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 자신보다 타인이 생각하는 것을 따르려 하는 사람들 역시도 불행하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공적자기의식VS사적자기의식
일본의 심리학자 사카이 고우 교수는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고 간단한 실험을 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마에 ‘E’자를 쓰게 해보면 공적 자기의식이 높은 사람인지 아니면 사적 자기의식이 높은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자신이 보는 방향에서 E자를 쓰는 사람은 사적 자기의식이 높은 반면, 타인이 보는 방향에서 E자를 인식할 수 있도록 좌우를 뒤집어쓰는 사람은 공적 자기의식이 높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타인이 삶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타인이 내 취향이나 성향에 맞지 않아 너무 고민이 되고 이 지긋한 관계의 사슬을 끊고 나 혼자 살아가게 된다면 나르키소스의 어리석은 사랑처럼 자기안으로만 빠져들게 된다. 물론 타인과의 관계가 내 삶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지만 타인과의 관계를 공적 자기의식과 사적 자기의식 사이에 균형을 맞출 수 있어야 관계가 원만해질 수 있다. 타인을 너무 의식하고 살아도 피곤하지만 타인을 너무 의식하지 않아도 피곤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