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음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영훈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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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던 싫던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태어나자마자 페르소나가 씌워진다. 이 벌거벗음에 씌워지는 페르소나를 벗어야만 우리는 벌거벗은 생명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벌거벗음에 대한 사유는 이 책에서 10편의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 서로 전혀 다른 내용의 10편은 벌거벗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유의 알고리즘이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창조되었다. 스스로 벌거벗었다는 자각이 없었기에 이들에게는 옷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브가 뱀의 꾀임에 빠져 죄를 지은 후에야 이들은 벌거벗음을 깨달았다. 조르주 아감벤은 이들이 옷을 입은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영광의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아담과 이브의 벌거벗음은 죄로 인해 초자연적인 옷이었던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한다. 또한 인간은 옷 없이 창조되었고 이는 인간이 본성과는 다른 고유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도 된다. 옷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초자연적 의복을 입기 위함이라는 역설이기도 하다.

 

죄로 인한 인간 본성의 왜곡은 육체의 발견과 신체의 벌거벗음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졌다. 타락 이전에 인간은 신을 위해 존재했고 그렇기에 인간의 육체는 옷이 없어도 벌거벗은것은 아니었다. 옷이 없었던 것은 명백하지만 인간의 육체가 벌거벗지 않았던것은 초자연적 은총이 개별 인간을 의복처럼 감싸고 있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단순히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빛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발견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입었다. 죄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했고, 그로인해 그의 영광 없는 신체가 비로소 가시화된다. 이는 순수한 육체의 발가벗음이며, 육체의 순수한 기능성을 야기하는 발가벗김이다, 이제 육체는 하나님의 영광 속에 있다는 궁극의 존엄성을 모든 고결함을 상실한다.-p100

 

위와 같이 벌거벗음의 사유는 창조와 구원, 동시대인, 소송의 K, 유령,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페르소나 없는 정체성, 벌거벗음, 영광스러운 몸, 황소의 굶주림, 세계 역사의 마지막 장까지 이어진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모두 벌거벗은 생명으로 태어난다. 하지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벌거벗지 않은 채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동시대인들의 삶이다. 그러나, 동시대인들에 대한 아감벤의 벌거벗음의 사유는 동시대에 대한 정의를 살짝 비튼다. 동시대인은 시대의 어둠에 확고히 시선을 고정하며 어둠에서 나오는 한 줄기 빛을 지각하는 능력을 갖춘 자를 뜻한다, 이러한 동시대인의 전제는 결국 동시대인은 현재성을 지닐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사물 속의 체험할 수 없는 부분 즉, 도달할 수 없는 현재성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은 동시대인이 결코 현재에 안주하거나 스며드는 속성을 지니지 않았음을 말한다.

  '이 체험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것, 이것이 동시대인의 삶이다. 그렇기에 동시대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살아본 적이 없는 현재로 되돌아가는 걸 말한다.' 이렇게 벌거벗음의 알고리즘은 동시대인에 이어 잠재성에 대한 사유로 연결된다. 벌거벗음이 하나남의 영광을 상실한 결여에 의한 것이듯, 동시대인이 현재성을 결여한 것과 같이 드러나지 않은 잠재성의 비잠재성은 결여이다.

 

모든 잠재성은 동일한 잠재성의 그리고 이 동일한 잠재성에 대해 비잠재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여기서 비잠재성은 단순한 잠재성의 부재나 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즉, 자신의 잠재성을 실행시키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리고 실상 모든 잠재성은 항상 되는 힘과 되지 않을 힘, 할 수 있는 힘과 하지 않을 힘인데, 이 특수한 양면성이 인간의 잠재성을 규정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잠재성의 양태로 존재하며, 누군가이며 동시에 아닐 수 있고, 할 수 있는 만큼 하지 않을 수 있는 살아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에 비해 더 많은 오류의 위험에 노출된다, 그러나 동시에 잠재성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역량을 축적하고 자유롭게 지배할 수 있으며, 이를 능력으로 전환할 수 있다, 잠재성은 어떤 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의 척도이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하지 않을 가능성을 유지하는 능력인데, 이것이 인간 행동의 등급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불꽃은 불타는 것밖에 못하며, 인간 이외의 생물은 스스로의 고유한 잠재성을 따를 수 밖에 없다. 이들은 생물학적인 소명에 각인된 단순한 행동만을 할 수 있다. 반면 인간은 고유한 비잠재성의 역량을 가진 동물이다.  

 

다소 길지만 본문을 실은 것은 아감벤 조르주의 사유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것 같지만,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인간의 벌거벗음은 태초의 시작과  궤를 같이 하여  인간의 본성과 연결 되어 있다. 그래서 신학적 미학에서 벗어날 수 없다. 누구나 태어나면서 씌워지는 페르소나를 벗고 본연의 나(본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철학(사유)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동굴에 갇힌 포로가 벽에 드리운 그림자나 흐릿한 사물만을 보며 살아가지만 철학자만이 동굴밖의 실재를 마주할 수 있는 것처럼 벌거벗음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궁극의 실재를 마주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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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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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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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취업의 관문은 더욱 좁아질 전망이라고 한다. 친구의 딸은 올해 졸업과 동시에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서류도 서류려니와 자소서와 토익에 인턴 시험에 대학시험보다 더 힘들고 어렵다고 한다. 신문이나 뉴스에서 보도 되는 사회분위기는 암울하기 그지없다.  청년 실업률은 해마다 증가하더니 기어코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그 여파로 이름만으로 멋졌다던 청춘의 세대는 삼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로 불리는가싶더니 이제는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대인관계와 내집마련까지 포기해야 한다는 오포세대까지 확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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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일본의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최악의 경제상황에서도 행복한 이유를 사회적 구조에서 살펴보는 책이다. 한때 젊은이들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발칙함과 싸가지가 사라진 젊은이들의 행복, 그 이면에는 어떠한 사회기제가 있을까하는 의문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젊었기에 꿈꿀수 있었던 열정이 사라지고 자기만족과 자기행복에 빠져 있는 사토리(깨달음)족이라 불리는 젊은이들은 절망에 빠져있는 일본에서 행복하다.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사태 이후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비단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청년 실업과 사회의 부조리, 양극화된 사회, 돈을 벌어도 빈곤한 워킹푸어의 증가, 고령화에 접어든 사회의 미래는 더욱 절망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의 행복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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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시작은 젊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젊은이 담론이다 '젊은이'란 세대가 등장하게 된 사회적 구조는 전후戰後의 인구이동을 통해 도시 지역으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젊은이들의 공통 체험이 용이해지기 시작하면서이다. 1950년대부터 젊은이들의 담론의 변화를 나타내는 용어로 아프레게르(전후戰後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허무적이고 퇴폐적) 가 등장한다.  1950년대 아프레라는 용어가 유행어가 된 사건은 범행의 동기가 모호하거나 딱히 동기하고 할 만한 것도 없이 극단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에서 일어나는 아프레 범죄가 연달아 일어나면서이다. 50년대의 아프레게르가 유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뒤흔든 존재는 틴에이저로 아프레게르보다 훨씬 젊고 패전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시장의 입장에서 좋은 고객이 되는 동시에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자란 틴에이저들은 자유로운 대상이었다. 아프레게르는 범죄를 저지른 일부 젊은이를 대표하는 말로 사회적 비난을 들어야 했지만 틴에이저는 고객이라는 점에서 비난의 대상이 아니었다. 70년대 이르러서 나타난 젊은이들은 기존 질서에 구애받지 않는 행동과 쿨한 감성으로 기성 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안겨 주었고 바통을 이어받아 미유키족이 롱스커트나 아이비 패션으로 몸을 치장하고 커다란 쌀 포대를 안고 긴자 미유키 거리에 모여 있던 젊은이들이 나타났다. . 젊은이들을 대표하는 태양족이나 미유키족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공통문화는 중상류층으로 상승하고 싶다는 동경을 자극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젊은이들의 계보는 1990년대에 사라지게 되었다. 이처럼 싸가지없고 발칙함의 대명사였던 젊은이들의 담론은 격자사회라는 용어가 유행하는 오늘날에 이르러, 존속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것이 1장에서 밝히고 있는 젊은이 담론의 변천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리 없다.”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행복하다.”라고 생각한다. 이로써 고도성장기나 거품경제시기에 젊은이들의 생활 만족도가 낮게 나타났던 이유가 설명된다. 말하자면, 그 시기의 젊은이들은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고 믿었다. 더불어 자신들의 생활도 점차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은 불행하지만, 언젠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중략)

그러나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소박하게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생각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그저 끝나지 않는 일상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을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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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은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방향성을 지침하여 준다. 미래에 대한 긍정은 현실의 불행을 순화시키는 힘이 있다. 미래가 주는 행복에 대한 보장은 가난한 시절을 견뎌내게 한다. 나라는 절망에 빠져 있는데 젊은이들은 자기 안착과 평안에 머물러 '컨서머토리'로 살아가고 있는 일본 사회는 자포자기의 세대나 다름없다.  그러나, 해제 오찬호가 말하였듯 일본보다 한국은 더 절망적이다. 출구가 없는 터널을 걷듯 어둡기만 하다. 젊은 사회학자인 이 책의 저자는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 구조적 측면에서 젊은이들의 문화를 이해해야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진단한다. 거품 경제가 붕괴하듯 일본 사회를 떠받히던 구조물도 무너졌다. 한국 사회 역시도 오포세대를 맞이한 젊은이들의 미래는 더욱 절망적이다. 이미 젊은이의 문제를 사회 구조적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 촉수를 잃어버렸다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은 건 사회의 전체적인 프레임 안에서 '개인'은 그만큼 많은 변수를 가진 주체이기 때문이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깝다. 싸가지 없는 밝칙한 젊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질수록 미래는 밝아질테니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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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구나무
백지연 지음 / 북폴리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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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을 넘기고 나서 생각에도 리셋하는 기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전의 삶은 앞만 바라보며 살아온 경주와 같았다면 이후의 삶은 질주해오며 놓쳤던 풍경들을 다시 되짚어보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마치 모래시계처럼, 모래가 다 떨어지고 나면 다시 꺼꾸로 시간을 되돌리는 기분과도 같다. 아니 어쩌면 모래시계보다 더 적확한 표현은 물구나무인지도 모르겠다. 물구나무를 서면 위와 아래가 바뀌고 오른쪽이 왼쪽이 되곤 하듯이 말이다.

 

이 책 《물구나무》는 고등학교 시절, 유난히 물구나무서기를 못하였던 친구들 여섯명을 이십 칠년만에 다시 만나게 되면서 느끼는 감회이다. 물구나무를 서지 못한다는 것은 세상에 중심이 자기 자신이었던 시절에 대한 은유이다. 그 시절에 만났던 단짝친구들-미연, 하정, 문희, 수경, 승미, 민수-이 이칩 칠년이라는 세월의 풍화앞에서 자신들만의 최적층을 만들며 쌓았던 신산스러운 삶을 하나씩 풀어놓는다.

 

세상을 크게 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순수함이 살아있던 시절, 내게도 화장실도 꼭 같이 다니던 친구 네명이 있었다. 그렇게 죽고 못살던 친구들이었는데 고등학교 졸업 후 서로 다른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헤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다른 이유 없이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시 형편상 친구들을 만날 여유가 전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사소한 오해가 있었던 것도 같지만 한 친구가 호주로 이민간다고 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만난 적이 없다.

 

 

 

"인생이란 게 사는 동안은 꽤 긴 듯하지만 지구에 이별을 고할 때 뒤돌아보면 찰나 같을 것 아니겠어? 겪는 동안은 모든 어려움과 질곡이 힘들기 그지없지만 그 찰나의 순간을 맞아 세상에 이별을 고할 때, 이왕이면 다채롭게 살았던 인생이 심심하지 않을 것 같아. ‘내가 여기서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미련도 없이, 뒤돌아보지도 않고 떠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과거 어느 순간의 고생이 생각날 때는 내 인생에 다양한 무늬 하나를 또 만들어 넣었구나뭐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러면 신기하게 숨이 쉬어져. 시원하게.”

 

  이 의 주인공들 나이는 마흔 여섯 살이다. 불혹을 넘어선 나이라는 점에서부터 소설은 이상하게도 무한공감대가 형성 되었다. 중년이라는 삶의 교집합은 순수했던 고교시절에 단짝으로 붙어 다녔던 여섯 명의 친구들을 27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느끼는 민수의 감회를 읽을 때였다. 산전수전 공중전이라는 세월의 풍화를 겪고 난 후 이들은 물구나무서기를 하지 못했던 시절에 부끄러워하지 못했던 말들을 쏟아놓는다. 다정한 아버지로 인해 늘 부러움을 샀던 문희는 이십 칠년만에 친아버지가 아니라 새아버지였다는 고백을 하고 학교다닐때 가장 똑똑했던 수경이 남편의 외도를 목격하고 이혼위기에 있다는 사실과 키가 작고 왜소하였던 승미는 금융기관 대표가 되어 커리어 우먼으로 변신해 있지만 혼자 아이를 키우는 돌싱맘이 되어 있었고 아버지와의 불화를 털어놓는다. 프랑스 남자와 영화같은 결혼을 한 미연을 통해서 민수는 하정의 갑작스런 죽음에 얽혀 있던 실마리를 풀게 된다. 하정의 삶을 통해 민수는 삶의 의미를 반추하며 남아있는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정비하게 된다. 

 

"물구나무서기처럼 삶은 위와 아래가 뒤바뀌는 거지. 그래서 재미있기도 하지만 그런 이유로 두렵기도 한 것이 인생이지.”

 

 

서재에 올려놓은 <물구나무> 책을 남편이 보더니 어? ...앵커 . . 연이네 ? 맞아? 하며 물어본다. 남편의 반응에 웃으면서 맞아. 그분. 이번에는 소설이야. 워낙 완벽하고 똑부러진 이미지였던 그녀여서인지 남편은 소설이라는 말에 시큰둥한 반응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좋았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인생 수다를 떠는 것처럼 친숙했고 이 시대의 신산한 여성의 삶을 무겁지 않으면서도 감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웃다가 울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책을 덮었다. 그래 나이든다는 것은 물구나무 서 듯 세상을 보라는 뜻일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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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평등의 창조

  2월 신간 추천도서 가운데 불평등의 창조가 단연 눈에 띈다. 창조경제에 어울리는 말일 듯. 최근 눈에 띄는 신조어는 '갑질'이다. 여기저기 일어나고 있는 '갑질 사태'는 생각보다 불평등에 대한 사회인식이 극과극을 치닫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가진 자들의 패악이 사회에서 지탄을 받고 있음에도 이런 녹록치 않은 사회와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갑질과 함께 유행인 '열정페이( 열정을 구실로 무급 또는 최저임금으로 만족하라)'라는 조어로 이런 불평등 사회를 견뎌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런 불평등의 기원과 진화는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이 책의 저자들은 불평등이 인간 사회에 내재한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며, 농경의 등장 같은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도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며 불평등의 기원과 진화를 역추적 한다. 인류의 초기 조상은 작은 집단을 이루어 살았고 사회적 평등을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지만, 규모가 큰 사회가 형성됨에 따라 불평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놀라운 점은 인구 성장, 잉여 식량, 귀중품의 축적만으로 불평등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든 인간 집단의 핵심에 있는 고유한 사회 논리를 의도적으로 조작한 결과물이라는 의미에서 불평등의 창조라 한다.

 

 

2, 문명과 지하공간

  지반공학 전문가인 김재성 동일기술공사 부사장이 지은 책이다. 인간 문명의 역사와 발맞춰 변화해 온 지하공간에 대해 풀어쓰고 있습니다. 생활문화 공간일 뿐만 아니라 소통의 공간까지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는 지하공간의 의미를 인문학 제반 분야와 통섭하여 다룬다.

 

 

 

 

 

 

3,부모와 다른 아이들

 

제목은 육아교육에 관한 책이지만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든 된 '다양성'에 관한 이야기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볼 때 자식을 소유물이라는 이해관계에서 나아가 인간과 인간이라는 관계형성에 주목하고 있다. 개인의 특징적인 상태는 모호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가족 안에서 그리고 보다 넓은 사회 안에서 차이를 헤쳐 나가는 과정은 우리들 대다수에게 공통의 문제라는 점이다. 문제의 보편성을 인지하고 수많은 다양한 가족들이 서로의 유사성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그동안 그들을 괴롭혀 왔던 문제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괴롭히는 문제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작게는 가족이지만 크게는 인간관계의 기본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를 짚어주고 있다는 점에서 부모에게 한정된 육아책이 아닌 다양성에 대한 인간적인 면모를 배울 수 있는 책이다.

 

 

 

4,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겨져 있는 분단국가인데다가 공산주의가 몰락한 21세기에도 여전히 건재한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라는 점에서 이 책을 추천하게 되었다. 이 책은 1973년 초 미국에서 출간된 로버트 스칼라피노와 이정식 교수의 공저Communism in Korea를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한홍구 교수가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한국 공산주의운동사(초판 전 3)는 오랫동안 큰 도서관 혹은 헌책방을 통해서나 접할 수 있었던 이 분야의 고전이다. 운동 편과 사회 편 두 권으로 된 총 1,532쪽의 방대한 원서 중 1986~1987년에 운동 편만 번역해 세 권짜리로 냈던 것을 근 30여 년 만에 합본 개정판으로 새로 단장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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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6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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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사에서 출간되는 나쓰메 소세키의 2차분 전집은 [우미인초], [산시로],[그후], 이후 [갱부]이다. 이번 2차분 전집의 공통분모는 '청춘'이라 할 수 있다. 사춘기라는 터널을 지나 사랑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게 되는 의례에서 한 번쯤은 겪어 보았던 일말의 감정들을 공감할 수 있었던 책이었다.

 

《갱부》는  누구나 한 번쯤은 떠올려 보는 죽음에 대한 관조적 성찰이다. 이제 막 열아홉인 주인공 ''가 죽기 위해 가출한 것도 계획적이거나 오랜 시간 고민하여 행동에 옮겼다기보다는 10대 청소년들이 다 그렇듯이 충동에 의한 것이다. 부잣집 도련님으로 유복하게 살았던 ''가  죽고 싶어 집을 뛰쳐나왔지만 그런 '나'에게 다가온 현실은 '갱부'라는 직업을 소개하는 브로커와의 만남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사회적 보호막이었던 집을 뛰쳐나온다라는 것은 막연한 가출이 아니라 보호막을 걷어 찬 성인으로서의 성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부잣집 도련님과 갱부, 이 어마어마한 직업의 간극에서 보듯 세상물정 몰랐던 도련님은 순진하게 (물론 죽음앞에서 이것저것 가릴 형편은 아니었겠지만) 브로커를 따라가는데 이틀 동안 기차를 타고 산을 올라 깊고 깊은 광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순례의 길과 다름없다.  힘든 일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던 '부잣집 도련님'이 겪는 생전 처음의 배고픔과 굶주림이라는 고통이다.  그렇게 해서 찾아 간 구리 광산에서 만난 갱부의 얼굴은 뼈인지 뼈의 얼굴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각진 얼굴을 하고 있으며 짐승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주인공 '나'는 처음으로 자기가 떠나온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을 직감한다. 반대로 짐승 같은 갱부들은 풋내기와 같은 어리숙한 모습의 신참을 보며 적개심을 드러낸다. 그들의 적개심 가득한 얼굴은 흡사 해골을 연상케 했고 그들의 대화는 동물들의 은어와 같이 알아들을 수도 없다.  그런 분위기에서 목격하게 된 갱부의 장례식 행렬은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나'는 갱부가 되기 위한 테스트를 거친다.  갱 입구에서부터 지옥의 냄새를 맡은 '나'는 갱부가 될 수 있을까?

 

 

 

 

순식간에 생명이 확실해진다죽음에 다가가면서 좋은 기분으로 삼도천앞까지 간 사람이 수로를 터벅터벅 돌아오는 과정을 생략한 채 불쑥 속세의 한가운데에 출현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죽다 살아난 경험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철모르는 십대때 나도 가출을 한 적이 있었다.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한 준비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집을 나선 댓가는 혹독했다. 돈도 없었고 잘 집도 없었다. 다행히 갱부의 주인공 '나'처럼 브로커 같은 유형의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겠다. 하루도 채 넘기지 못하고 기어 들어간 집의 안도감은 두번 다시 가출을 떠올리지도 못하게 했다.  주인공 '나'가 가출하여 사회의 새로운 면모에 눈을 뜨게 되는 것처럼 나와는 다른 세계를 살짝 맛 본 것으로 족했던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세계란, 시비와 인정에는 문외한이었을 것 같았던 갱부들에게서 삶의 진경을 배우게 되면서 열린 세계이다.  죽음의 입구와도 같았던 갱 앞에서 '죽다 살아난 경험'을 했던 '나'는 카뮈가 말하였듯 죽음이란 생명이 가진 시간적 한계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죽음으로 인해 새 빛을 얻는 갱부의 삶, 어쩌면 그것은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사로서의 영감을 주는 수원지가 아니었을까. 마치 모든 소설의 첫 시작이자, 나쓰메 소세키의 첫 소설 같은 느낌의 갱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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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02-02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을 나오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길`을 찾고 싶은 마음일 테지요.
비록 `몸은 준비가 안 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가더라도요.
<갱도>에 흐르는 이야기를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