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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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기 위해 촛대를 훔치는 행위가 과연 옳을까? 삶에서 직면하게 되는 도덕적 가치기준은 딜레마로 남겨지곤 한다. 이런 도덕적 딜레마를 보여주는 사건들이 사회적으로 이슈되는 경우를 간혹 보게 된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하나의 사건을 예를 들어보면 ‘20대 청년이 집에 들어온 도둑을 제압하다가 뇌사에 이르게 하여 1심에서 징역 16월의 형량을 받았다.’ 또는 엄마에게 뺨을 맞은 9살짜리 아들이 엄마를 경찰에 신고했다.‘, 라든지 아이 낳지 못하는 아내를 위해서 돈을 주고 대리모를 구하는 행위는 정의로울까? 아이들의 성적 향상을 위해서 책을 읽을 때마다 돈을 주는 행위는 정당한가?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이미 전통적으로 비시장규범이 지배했던 삶의

모든 영역에 시장사회의 개념이 확대되고 있다고 하였다. 돈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시장논리가 도덕적 영역까지 파고들면서 겪게 되는 도덕적 가치관의 혼란에 대해서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정의에 대한 사고를 정립할 수 있도록 도덕적 사상의 맥을 짚어준다.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자연스럽게 깨우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물었던 것처럼, 마이클 샌델은 정의에 대한 생각의 단초들을 정치 철학사 속 사상가들이 정의를 어떻게 생각하였는지에 대한 비판으로 정의를 정립한다.

 

 

최대 다수의 행복이 선이라는 사고가 고착되어가면서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는 소수의 희생을 어쩌면 당연한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현대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정의에 대한 딜레마이다. 제러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는 오랫동안 다수의 행복을 위한 소수의 희생으로 인한 도덕적 한계를 가져왔다, 이마누엘 칸트가 말하는 자유와 도덕의 가치를 정립하는 기본테제인 옳음'좋음'보다 우선할 경우에 다수보다는 개인의 권리를 옹호함으로 공리주의와 상충된다. 개인의 권리를 구체화하는 도덕원칙들은 다수의 행복과는 무관하게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롤스의 정의론은 이러한 칸트의 기본테제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기본적인 자유가 모든 시민에게 평등하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평등 원칙과 소득과 부의 불공평한 분배는 그 이익이 사회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차등 원칙을 정의이론화 하였다는 점에서는 사회구성원들간의 도덕이 살아있을 때에만 실현가능하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롤스의 정의론은 공동체간의 도덕성을 정의의 기준으로 하기에는 도덕적 딜레마에 봉착해 있는 현대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한계를 지닌다.   마리클 샌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좋은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며 정치적 공동체의 목적이 바로 좋은 삶이며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 한 부분에서 롤스의 정의론의 한계를 극복한다.

 

마이클 샌델은 공리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이러한 정치 철학들이 우리의 권리를 규정하는 정의의 원칙에 흔들리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좋은 삶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공동체의 노력이야 말로 정의의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이라 한다. 시장사회에 접어들면서 부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이 분리되어 불평등이 심화되어가는 것처럼 '정의'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기본적인 내적 명령인 양심 '바르고 곧은 것'의 의미는 점점 더 모호해져 가기 때문이다. 정의를 고민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 바로 우리 모두가 간절히 추구해야 할 '공동선'이자 정의에 이르는 길이다. 

   

성경을 읽기 위해 촛대를 훔치는 행위가 과연 옳을까? 옳고 그름의 경중을 따지는 것이 요즘들어 더욱 모호해지고 있다. 사회적으로도 윤리적 딜레마를 품은 사안들을 최근들어 부쩍 목격하게 된다. 다만, 끊임없이 정의를 고민하는 개인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더욱 정의로워진다는 마이클 샌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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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카로 가는 길 - 이슬람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영적 가르침
무함마드 아사드 지음, 하연희 옮김 / 루비박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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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라이프스타일은 현대 라이프 스타일이다. 서구의 기준에 우리의 모든 라이프스타일을 의심 없이 맞춰 왔다. 서구를 기준으로 하여 어긋나는 개념, 제도 등을 모두 열등하다고 치부하면서 자연스레 역사관조차도 서구 중심의 역사관을 진실인양 믿어 왔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전쟁 가운데 하나였던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를 적그리스도로 만들어 이슬람의 교리와 이상에 대해 왜곡된 문화를 전파하였다. 이러한 이슬람에 대한 악마적 선입견은 기독교라는 종교적 결속력과 함께 세계인들에게 편견을 심어주었다.

 

삶을 편견 없이 바라보기 위해서는 다양성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고착화된 이슬람 문화를 편견 없이 바라보기 위해서는 더욱 다양성이란 시각의 문화접근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기독교를 믿어왔던 나 역시도 이슬람교에 대해서 배타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홍익희의 저서 세 종교 이야기를 통해서 기독교와 이슬람교, 유대교의 역사가 아주 작은 다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의외의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이슬람이 기독교와 같은 줄기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생소하기만 했던 이슬람에 대한 시각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게  해 주었다. 

 

 

 메카로 가는 길의 저자 무함마드 아사드 역시도 유대인 집안에서 자라 서구 중심의 문화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이었다. 파키스탄 외무부에서 저널리스트이자 저술가로 활동하였던 그는 26세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이후 참된 이슬람의 민낯을 알리기 위한 일생일대의 역작을 썼다 서구 무슬림으로서  이슬람의 참 모습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23일간의 여행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1차 세계 대전 가운데 사회적, 윤리적으로 불안정한 시기를 지나며 노자사상을 탐닉하기도 하였던 그는 삼촌집이었던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머물게 되면서 무슬림의 정신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여행의 동반자 자이드와 함께 이슬람 국가를 여행하면서 뜨거운 사막의 열기와 모래바람을 통해 이슬람과 함께 숨쉬며 내리쬐는 태양의 가혹함 아래 고행의 길을 걷는 순례자로서 사막에 사는 아랍인들에게 세상이라는 의미를 반추해 보기도 한다. 서구의 음악과는 다른 유목민의 리듬에 매혹되는 과정과  대지의 광활함 가운데 낙타와 운명을 함께 하는 순간들을 서정적인 필치로 그려내며 이슬람의 참 모습을 자연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저자는 이슬람국가를 여행하면서 지금의 이슬람국가(IS)와 같은 폭력의 이미지가 아닌 변질되지 않은 순수한 이슬람의 정신세계를 회복하고 있다. 서구에서의 종교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지만 이슬람에서는 교회 갈 이유가 없이 언제 어디서나 종교와 삶이 일치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저자는  이슬람인들의 정신과 육체가 서로 대척점에 있지 않고 하나로 통합되는 삶을 지향한다는 점에 깊은 감명을 받으며 서서히 자신을 이슬람에 동화시켜 나간다. 황폐해져 가는 서구인들의 정신과 정서는 이슬람에 깃들여 있는 이러한 '정신과 육체'의 일치되는 삶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편견의 더께로 두껍게 쌓여있는 이슬람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각의 문화적 접근이 필요하다. 아라비아 곳곳에 배여있는 단순한 삶의 미학이 가슴속에 배여드는 멋진 여행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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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마르크스 How To Read 시리즈
피터 오스본 지음, 조원광 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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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백한 독해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죄를 범한 독해가 어떤 것인지를 밝혀야 한다. -알튀세

 

《HOW TO READ》 시리즈 니체 다음으로 선택한 것은 최근 제러미 러프킨의 <한계비용제로사회>를 읽기 시작하면서 자본주의 경제 패러다임의 변화에 관해 생각하다가 선택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존재 이유는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을 경제 영역에 들여 놓고 시장에서 교환상품이 소유물로 이전되는 데에 있다. 어쩌면 현 자본주의의 쇠퇴는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상품' 에 대한 사고의 변화(전환)에서 기인한다고 보야야 한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상품'을 어떤 시각으로 보았을까? 가 가장 큰 의문으로 남는다.

 

 ‘HOW TO READ’ 시리즈는 저명한 세계 석학들의 안내로 사상가들의 원전에 대한 깊이 있는 독해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게다가 두껍지 않고 사상가들의 전작들에 대한 핵심적인 읽기가 가능해서 좋다. 

 

  마르크스의 원전을 독해해여 철학적 읽기를 시도하고 있는 <HOW TO READ 마르크스>는 런던 미들섹스대학교 현대유럽철학과 교수이자 잡지 <래디컬 필로소피>의 편집자인 피터 오스본의 해석과 철학자 고병권의 번역으로 탁월함을 더한다. 저자는 마르크스를 독해하고자 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마르크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난해함을 꼽는데 마르크스는 자신만의 용어를 만들어 내기 이전에 용어 자체가 독일 관념론에서 물려받은 철학 용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마르크스는 언제나 이론을 경험과 결부시키려 하고, 항상 실천의 방향을 모색했던 철학자였다.그런 마르크스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이론과 은유, 철학적인 난해함과 정치적인 투박함이 공존하기에 어려움이 따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저자 피터 오스본은 마르크스를 가장 생산적으로 읽는 방법은 마르크스의 글을 이 모든 수준에서 동시에 읽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자본주의 자체를 사유했던 사상가 마르크스에 대해 철학적 독해를 시도하는 동시에 마르크스의 철학을 비판적인 지적 실천이라는 관점에서 받아들인다. 이 책에서는 마르크스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상품, 소외, 노동, 본원적 축적 등의 개념들을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근본 요소들을 하나의 경제 체제로 이해했다. 즉 상품, 화폐, 자본, 노동, 잉여가치,축적, 공황 등이 맺고 있는 상호 관계들과 그 전개 형태들의 체계로서 자본주의를 이해했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계급들 간의 끊임없는 투쟁이라고 보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그 기본 형태의 한계들 안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행 중에 있는 생산의 한 역사적 국면일 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안에 억제되어 있는, 하지만 급격히 자본주의적 현재 너머로 나아가고 있는 대안적 미래를 인식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마르크스를 철학적으로 독해하는 방법에 대해서 철학과 실재계가 맺는 관계인 오나니즘과 같은 맥락이라 한다. 이는 마르크스의 전작들에게서 보여주는 이론적 추상의 경험과 접속하는 노력과도 같다. 궁극적으로 추상이 진리성을 획득하는 것은 경험의 요소들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를 철학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이런 의미의 차원을 발견하는 것이고 그것을 실천적인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 자신의 경험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마르크스를 철학적으로 읽는다는 것이 바로 저자 피터 오스본의 ‘HOW TO READ 마르크스 읽기이다.

 

마르크스의 저작 가운에 <자본>에서 상품이 신비한이유는 마르크스에 따르면 그것이 교환가치를 가졌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즉 상품의 교환가지 소유로 인해 상품의 구체적 사용이나 감각, 물질적 형태와는 무관한 성격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노동 생산물이 상품으로서 출현할 때, 그것은 감각적임동시에 초감각적 혹은 사회적인 것이기도 하다.

 

상품 형태 자체의 구조 안에 근대적 은유가 있음을 암시하고 하나의 객관적 환상으로 우리가 그것을 이해한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힌 남는다.근대와 전근대적 이미지를 이렇게 결합시키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저술에서 두드러진 특징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일련의 전근대적 형태들에 비밀스럽게 사로잡혀 있음을 드러내면서 고딕적 문학 이미지를 이용한다. 물신주의는 환상을 양산하는 일들의 어떤 상태를 특징지을 때 마르크스가 즐겨 사용한 일련의 용어들 가운데 하나다.

 

새로운 유물론의 시작을 알리는 <포이어바흐에 관하여> 에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실천적 과업에 지적으로 적합한 것을 지향했다. 마르크스의 사유가 성숙기에 접어들었을 때, 철학적 토대가 된 저작이다. 마르크스는 관심사가 된 관념들의 현실화를 위해서는 개념적 표상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요청된다고 간주하였고 그것들은 경험의 직관적이고 실존적인 차원에서, 예술에서, ‘에서 그리고 정치에서 다른 어떤 출구를 반드시 찾아야만 함을 강조했다. 철학적 관념들을 현실화시켜줄 실천의 전망으로서 말이다.

 

모든 사회적 관계를 혁명화하는 자본주의의 진보적 성격은 주로 그것의 파괴성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하지만 이 파괴성은 자본주의의 종교, 국가, 가족 , 세대, 성과 같은 사회적 구속에 대한 구조적 폐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파괴성은 특정한 사회적 공간에 자본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일회적 행위가 아니다.그 파괴성은 자본주의 자신을 향한 파괴에까지 이른다. 그렇기에 마르크스는 자본을 흡혈귀와 같다라 표현했다. 자본은  단 하나의 충동-자신을 가치 증식시키며,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충동은 오직 살아있는 노동에 대한 기생적인 관계 속에서만 자기표현을 발견하기 때문이다.살아 있는 노동은 이 관계에서 가변자본으로 통합된다.

 

자본은 자기 자신에 대한 내적 관계- 가변자본과 불변자본, 노동과 다른 생산수단들의 관계-의 결과로서 양적으로 증식하고 성장한다는 점에서 운동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는 교환(시장)이나 특정한 수준의 축적이나 생산의 특별한 기술로 정의되는 게 아니라, 생산의 사회적 관계인 자본 노동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었음을 볼 수 있다.

화폐와 상품은 생산수단과 생활 수단이 그러하듯이 결코 처음부터 자본은 아니다.그것들은 자본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자본으로 전환되기 위해서, 부는 가치를 창출하는 데 쓰여야 한다.이 전환은 가치의 원천인 노동력의 상품화에 달려 있다.

 

마르크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저자 피터 오스본은 자신의 역사적 현재시점에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의 전 지구화가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고 있고 자본주의 시장과 협력적 공유사회가 뒤섞인 하이브리드 경제의 출현으로 자본의 전 지구화가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 마르크스를 읽는다는 것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필수과정이라 할 수 있다. 역자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현재의 마르크스는 항상 우리자신의 입장이고, 부단히 갱신된 우리 자신의 현재이다. 결국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우리의 대변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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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8 15: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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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1 1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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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 불멸의 인생 멘토 공자, 내 안의 지혜를 깨우다
우간린 지음, 임대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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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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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환경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최고의 속도를 자랑하는 온라인이 삶에 깊숙이 자리 잡아 가면서 알게 모르게 생활 모든 면이 온라인화 되어 가는 것을 느낀다. 속도전을 자랑하며 터지는 속보들과 말초신경을 건드리는 뉴스피드들을 이제는 충격도 없이 흘려보낼 정도로 무감해 지고 있다. 신문으로만 들었던 뉴스를 이제는 핸드폰만 있으면 페이스북이나 밴드등 다양한 소셜 커뮤니티를 통해서 언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너무도 익숙해진 광경들, 아침 출근시에 스마트폰은 안경보다도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페이스북을 수년째 이용하고 있지만 이따금씩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찜찜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최근들어 친구가 급증하면서 더 자주 그런 느낌이 든다. 벤덤과 푸코가 말하였듯이 나는  '페이스북'이라는 '파놉피콘'(감옥) 에 갇혀 생이라는 과업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이러한 감옥의 진일보한 개념으로 우리 사회를  디지털 파놉티콘이라 명명한 바 있다. 과거 푸코의 감옥(판옵티콘)은 한 개인에 의한 일방적인 감시개념이었다면,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현시대의 '디지털 판옵티콘'은 각자가 자발적으로 공론장에 나와 노출증과 관음증을 동시상영하는 개념으로, 모두가 감시자인 동시에 피감시자가 되는 사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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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곳은 교도소 건립 문제로 시끄럽다. 6.4 지방선거에서 교도소는 최고의 이슈였는데 선거 이후 학부모들이 다시 문제제기를 하면서 교도소는 뜨거운 감자로 재급부상했다. 유권자 신분으로 선거당시에는 침묵하고 있던 학부모들이 난데없이 아이들의 학습권 침해와 청정 교육도시 이미지를 훼손시킨다는 명분을 들고 일어서기 시작한 운동은 일파만파로 세가 커지더니 급기야는 지상파 뉴스와 CTV 뉴스에서도 대서특필 되었다.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님비현상이라는 비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교도소 반대파는 더욱 대담하게 '초등생 등교거부'라는 집단행동까지 불사해 가며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병철 교수가 디지털 파놉티콘시대라고 말했을 때만 하더라도 소셜 커뮤니티를 단순한 개념을 생각했었다. 문제는 이렇게 불거지게 된 '교도소 반대'가 밴드와 카톡, 페이스북으로 확산되면서 일어난 현상들이었다.  SNS는 순식간에 반대 강경파에 장악 되어 갔고 조금이라도 교도소 건립을 찬성하거나 옹호하는 발언이 나오면 순식간에 적으로 간주하며 집단 공격을 퍼부어 댔다. 인신공격은 차치하고 찬성하는 이가 자영업자일 경우에는 불매운동을 벌이며 찬성은 절대악, 반대는 절대선이라는 편가르기가 시작되었다.  심지어 초등생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교도소 반대 피켓을 들게 하며 이 추운 날 국회 앞에서 1인시위를 강요하고는 자랑스럽게 아이의 사진을 밴드에 올려 놓기도 한다.  

   

사실 자식을 키우는 학부모로서 교도소 반대를 외치는 학부모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점점 도가 지나치는 반대 학부모들의 집단행동에 슬슬 거부감이 들었다. 재정 자립도가 낮은 편이고 지방 소규모 도시로서 교도소라는 (정확히는 법조타운이지만) 국가 시설이 들어온다는 것을 막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아이들의 학습권을 침해한다면서 자신들의 자식을 1인시위에 내보내는 학부모들의 행동이 내게는 오히려 기이하게 여겨졌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 교도소 앞 학교를 다닌 나로서는 교도소를 혐오시설이라 기피하며 비난과 욕설을 일삼는 일부 학부모들의 행위에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오랫동안 SNS를 별 부담없이 활용해왔던 터라 교도소 찬반 양론으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할 때 밴드나 페이스북에서 공공연히 교도소 건립을 찬성하는 발언을 해 왔었다. 교도소 반대를 하는 학부모들에게 표적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나는 반대파들의 이분법 논리에 영락없이 늑대우리의 생닭신세가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신상털기까지 당해 가족들까지 피해를 입었다. 이 때 나는 처음으로 '디지털 파높티콘'이 무엇인지 뼈져리게 경험해 보았다. 소셜 네트워크(밴드,페이스북,카톡)가 일방적인 소통에 불과할 뿐 아니라 가입과 동시에 모두 감시자이자 피감시자가 되는 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민주주의의 존립의 기본 전제인 표현의 자유는 '감시'라는 디지털 파놉티콘에 의해 저절로 자기검열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현재도 여전히 교도소 찬반 논란은 식을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사이버 상의 막말과 비난으로 수십건의 고소고발이 연이어 터지고 있는 중이다. 결국 군민화합을 위한 지역의 대표 밴드는 고소고발의 원천지가 되어 전과자를 양성하는 사이버 공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라를 통치하고 조직을 관리하며 인간관계를 잘 맺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 모두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다. 이런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선생님의 지혜야말로 최선의 답이다. -p75

   

"너희 생각에는 내 머릿속에 온통 정치와 도덕만 들어 있는 것 같으냐? 아니면 정치와 도덕에만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물론 너희에게 정치와 도덕, 예의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너희가 자신의 삶과 인생에도 관심을 두기를 바란다. 한마디로 너희가 자신의 삶을 더욱 서정적으로 만들어 가기를 바란다!“-p216 

 

 

 

 바야흐로 21세기 ' 디지털 파놉티콘' 시대 여전히 공자의 사상은 유효할까? 고전적인 것들은 모두 지루하고 상투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시대에 여전히 공자 열풍이 불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자의 열풍이 식지 않고 출간 될 때마다 나를 궁금하게 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2500여년이 흐른 지금도 공자의 사상이 유효한 이유... 그것이 가장 궁금했었다. 먼저 이 책은 기존의 고전 공자의 책과는 많이 다르다. 저자가 경제학자라는 점도 그렇지만 더 특별한 것은 기존 공자의 저작들 <논어>,<공자가어>,<사기>,<공자집어>등에서 공자의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가필한 스토리텔링 형식의 소설이라는 점이다. 논어 원문을 해석하는 형식이 아니라 삶과 밀접한 문제들을 그렸기에 조금 더 현실적인 공자를 만날 수 있었다.

 

 사회가 점점 복잡다단해지면서 도덕적인 가치들이 흔들릴 때가 있다. 아무리 가치관이 바르게 정립되어 있다해도 때때로 부딪히는 삶의 문제들은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서는 가치혼란을 겪곤 한다. 이번에도 나는 또 한번의 가치관과 싸워야 했다. 하지만, 나는 성경책을 읽기 위해 촛대를 훔치는 행위와 같이 목적이 아무리 좋다하여도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위는 옳지 않다 생각한다. 시대에 따라 아무리 가치관이 변한다해도 보편적인 진리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학습권을 지키기 위해 초등학생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 채 시위를 가르치는 부모의 편을 들고 싶진 않다. 공자는 '정치와 도덕과 예의 ' 이전에 자신의 삶과 인생에 더 관심을 가지라고 한다.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 해도 자신이라는 중심을 잃는다면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다. 공자의 이러한 가르침이야말로 원하는 삶을 사는 최고의 가치이며 공자가 디지털 파놉티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이다. 삶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공자의 사상을 관통하는 최선의 삶의 정의다. 중심을 잃지 않는다면 삶의 매 순간을 축제처럼 여기며 살 수 있다. 이것이 공자의 행복론이며, 고전이 지닌 가장 보편적인 가치의 힘이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에 삶의 기쁨이 숨어 있는 법이다.

 

분수에 맞지 않는 선행은 악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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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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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서 그 후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산시로>에서는 도쿄의 대학 생활을 그렸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 후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 후이다, <산시로>의 주인공은 단순했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산시로> 이후 성숙한 남자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 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주인공은 마지막에 예측할 수 없는 운명에 빠져든다. 그러나 그 후 어떻게 되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도 그 후인 것이다.

                                                                                         -오사카<아사히 신문>

 

촌놈 산시로가 도쿄에 상경하여 어설픔과 서툰 방황하는 청춘을 그리고 있다면, <그 후>는 위의 글에서 밝히듯이 <산시로> 이야기의 연장선처럼 보여진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지식인 다이스케는 일본 사회를 뒤덮고 있던 성실과 열의’와는 다른 세계를 구축하는 캐릭터이다.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이미 닐 아드리미라리 (어떤 일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경지에 이른 다이스케는 스스로를 밥벌이 문제로 더럽히지 않는 고귀한 인간 이라 규정하고 있었고 자신의 에고이즘과 더불어 자유와 예술을 사랑하는 탐미주의자임을 강조한다. 주변의 강요와 힐난에도 자신의 자유를 굽히지 않고 기계 같은 사회에 흡수되지 않으려는 일종의 고집은 다이스케를 나르시시즘이 지나친 에고이즘으로 보이게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자기만의 신념과 이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지식인이라는 점에서 나쓰메 소세키 문학에 등장인물들과 연결성을 지니고 있다.

 

다이스케는 결혼과 일을 강요하는 아버지와 형과 대립하며 자신의 세계를 포기하지 않지만, 그 세계는 친구의 아내 미치요가 나타남으로 인해서 흔들리게 된다.  옛 친구 히라오카는 다이스케와 대학을 같이 다녔지만 졸업하자마자 결혼하게 되면서 소식이 뜸했던 친구이다. 물론 히라오카가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미치요와의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다이스케 덕분이었는데 오랜 만에 조우한 히라오카는 방탕한 생활로 빚더미에 앉아 여관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초췌한 얼굴을 한 히라오카의 아내 미치요를 본 순간 다이스케에게 낯선 감정이 찾아들고 집안에서 강요하는 혼처와 고민하던 중 다이스케는 집안에 폭탄 선언을 한다.

   

다이스케는 인류의 일원으로서 마음속으로 서로를 모욕하지 않고서는 서로 접촉할 수 없는 현대사회를 20세기의 타락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이는 근래 급격히 팽창된 물질에 대한 욕심의 큰 압력이 도덕의 붕괴를 초래한 결과라고 해석했다. 또한 그것을 신구 세대의 가치관의 충돌로 간주했다. 결국 눈에 띄게 심해진 물질욕의 발전은 유럽에서 밀어닥친 해일이라고 결론 내렸다. -p142

 

 전쟁 이후 자본주의 물결에 흡수되면서 팽창된 물질욕은 아버지와 형을 통해 여실히 보여지고 있고, 그와 반하여 다이스케는 무능한 인간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 끊임없이 아버지와 형과 상충되는 모습을 보인다. 아버지와 형을 바보라고 조롱하면서도 그 바보들의 돈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다이스케의 행동에서는 무능한 현실성이 더욱 도드라진다. 신자유주의 물결로 출렁이고 있을 때 혼자만 고귀한 정신세계를 포기하지 않는 모습은 마치 <태풍>의 주인공이었던 백면서생이었던 도야 선생과 오버랩 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돈에는 관심없고 문학사로서의 신념과 이상만을 강조하다 학교에서 퇴학과 전학을 번복하며 비록 삶에서의 궁색함은 면치 못하지만, 신념과 이상을 굽히지 않으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가는 지성인의 모습과도 같다. 이처럼 신구파간의 갈등과 충돌로 인한 사회 분위기에서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굽히지 않은 신지식인은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 전반에 드러나는 공통분모이다. 이처럼 정신적인 부분과 물질적인 부분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다. 문학에서의 이상과 신념과 물질적 가치는 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한 현재성으로 남겨져 독자들에게 선택이라는 물음을 남긴다. 신념과 이상을 지키며 가난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물질적인 풍요를 선택할 것인가. 그것은 여전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물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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