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 김영하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7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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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망해도 태양은 어디에서든 떠오르는 법. 망국의 한과 질기디 질긴 삶이 검은 색으로 물들어 피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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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양장)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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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값이 사람 잡네 ~^^ 벌써 몇 번째 구입인지 모르겠다... 총균쇠 같은 책은 제발 사서 읽으시길. 왜 빌려가면 안가져 오냐구 ~~~~!! 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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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기 활동 마감 페이퍼를 작성해주세요!

독서의 즐거움

 

14기 신간평가단이 이제 마지막이네요. 어제는 마지막 도서 <문학의 아토포스>를 읽었습니다넒은 황금빛 들판과 낙엽이 비처럼 떨어지는 길에서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습니다. 제  방황하던 청춘의 한 귀퉁이에서 짙은 페이소스 향기를 뿜어주던 님이 허망하게 떠나버려서 더욱 그런지도 모릅니다. 14기 신간평가단을 시작할 때는 봄이었는데 수확의 계절과 동시에 마지막이네요. 아, 쓸쓸하여라... 이번 신기평가단은 다른 기수보다 조금 나이브했던 것 같습니다.

 

14기 신간평가단 최고의 책으로 저는 홍익희 저자의 세 종교이야기를 꼽고 싶습니다.

가장 핫하고 뜨거운 논쟁이 될 수 있지만, 세계사라는 큰 줄기를 통해 세계의 3대종교를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보다는 마치 역사이야기 같습니다. 더군다나 유럽에서도 단 두권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예루살렘 역사를 한국인이 저술하였다는 사실에 무한존경을 보냅니다.

 

두 번째로 좋았던 책은 한병철 교수의 <투명사회>

이분의 칼럼은 가끔 접하기도 하지만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통찰력이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세월호 사건을 시작으로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이 한권으로 통찰할 수 있다고 보아도 지나친 말이 아닐 듯 싶습니다.

 

세 번째로 좋았던 책은 고병권 교수의 <철학자와 하녀>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지옥 같은 삶에서 철학하라, 라는 말이죠. 철학은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삶과 분리해서는 철학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요즘같이 수많은 이념과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실에서는 더욱 필요한 것이 철학이라 생각됩니다, 한 번 밖에 없는 소중한 삶을 더욱 정직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동력은 거창한 이름의 철학이 아닌 삶 그자체가 된 철학에서 만들어지니까요.

   

 

 

 

 

 

이렇게 마지막 페이퍼를 마감합니다.

봄에 뿌린 씨앗들이 어서 가슴에서 싹을 틔워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구멍 난 가슴으로 들어오는 찬 바람이 너무 추워요.

결실의 계절을 맞이하여, 이 책들을 통해 '삶'을 배워서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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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나무 2014-11-04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장력이 점점 좋아지는 듯..내공이 계속 쌓이구나, 난 요즘 책못읽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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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아토포스
진은영 지음 / 그린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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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시인의 <훔쳐가는 노래>를 좋아해서 이번 책<문학의 아토포스> 가 신간평가단 도서로 선정되었을 때 무척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만큼 재미있는 책은 아니었다. 독자에게는 좀 불친절한 책이지만 문학비평을 전공하거나 문학평론가에게는 도움이 될 만한 책이긴 하다. 제목 아토포스는 그리스어 '토포스 (문학에서 몇 개의 모티프들이 자주 반복되어 이루어내는 한 고정형이나 진부한 문구(literally commonplace)’를 지칭하는 개념)' 에서 유래한 말로 '비장소성' 정도로 번역된다.

 

 저자 진은영은 《문학의 아토포스》에서 아토포스란  

정체가 모호한 공간, 문학적이라고 한 번도 규정되지 않은 공간에 흘러들어 그곳을 문학적 공간으로 바꿔 버리는 일. 그럼으로써 문학의 공간을 바꾸고 또 문학에 의해 점유된 한 공간의 사회적-감각적 공간성을 또다른 사회적- 감각적 삶의 공간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문학의 아토코스이다. 이렇게 떠도는 공간성, 그리하여 결코 확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순간의 토포스를 생성하고 파괴하며 휘발시키는 일에 예술가들이 매혹될 때 우리는 그들을 공간의 연인이라 부른다. 이 연인-작가들에 의해 작동하는 문학의 아토포스는 우리가 미학의 정치라고 불렀던 것의 또 다른 이름이다. -p180

 

문학적 화두와 관련된 철학적 사유를 촘촘히 엮어낸 미학서적으로 랑시에르의 사유를 바탕으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통해 실험과 실천이라는 문학적 모험을 이끌어내는 것이 저자의 집필 이유라고 한다. 저자는 '잘 말하는 것', 확립된 의미의 질서를 '잘못 말해진 것'으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두 흐름이 섞이고 갈라지는 시간들이 필요하며 그러한 논쟁을 철학적 사유의 형식으로 풀이했다. 이런 문학적 실험정신은 저자가 말하는 문학의 아토포스라는 공간으로 대변하고 있는데 정치와 예술이 만나는 공간이다. 정치가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언어를 통해 자신에게서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해내며 그것을 자신과 대립시키는 동시에 그것과의 포함적 배제 관계를 유지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라고 조르주 아감벤이 말하였듯, 저자는 문학역시도 정치와 동일한 개념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가 어디로든 가지 않고 무언가 말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우리는 능력이 부재한자' 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문학과 정치는 서로의 경계선을 흐리며 스며들어 가게 되면서 삶과 정치는 하나가 되어 교차하는 지점인 장소, 문학의 아토포스를 말한다.

 

1부 문학의 비윤리

1| 감각적인 것의 분배

2| 한국 문학의 미학적 정치성

3| 선행 없는 문학

 

2부 문학의 비장소

4| 숭고의 윤리에서 미학의 정치로

5| 미학적 아방가르드의 모럴

6| 문학의 아토포스: 문학, 정치, 장소

7| , 숭고, 아레테: 예술의 공공성에 대하여

 

3부 문학의 비시간

8| 니체와 문학적 코뮤니즘

9| 문학의 아나크로니즘: 작은 문학과 소수 문학

10| 소통, 그 불가능성의 가능성

 

 

예술이 정치라는 말은 언어로 표현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이다. 랑시에르의 사유에서 출발한 문학의 아토포스는 진은영의 문학적 실험과 현실적 참여라는 두 가지 실천적 사유로 새로운 문학비평을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문학은 써먹을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유용하다.” 라는 유명한 에피그램을 남긴 김현의 문학비평지점이 더 좋다. 문학이 정치적이기 되기보다 문학이 반추해주는 현실의 유용성이 더 좋기 때문이다.  문학의 아토포스는 정치미학이라는 사유의 여정을 통해서 하나의 문학비평이라는 공간을 제시해 주고 있는 또 하나의 포스트모던 비평의 공간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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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9 12: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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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9 14: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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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9 12: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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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9 14: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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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교 이야기]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세 종교 이야기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믿음과 분쟁의 역사
홍익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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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과 틀림은 어떤 느낌일까. 삶에서 다름이라는 잣대로 정의되는 이분법적 분류가 삶의 수많은 가능성과 다양성을 차단하는 극단의 오류를 범하게 한다. 나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또는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극단으로 치닫는 모습은 굳이 종교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하다못해 세월호 유가족들을 향한 시선에서도  이런 다름의 잣대는 그대로 적용된다. '다름'의 잣대 , 다름이 틀림이 아님에도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점점 높은 벽을 쌓고 있는 것일까?

 

올 여름 내내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가 파괴 되는 장면이 전세계인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세상이 지구촌화 되면서 평화의 시대를 맞이한 듯 보이지만 세계사의 굵직한 획을 그었던 종교전쟁은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뿌리 깊은 반목과 분쟁은 이미 이천년도 더 지난 이야기라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래된 고서적을 뒤적여야 한다. 몇 년전 유대인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라는 유대인이 저술한 <예루살렘 전기>를 읽으며 예루살렘의 역사를 간접적으로 접해 본 적이 있다. 저자는 예루살렘 역사책이 단 두 권만이 존재한다며 보다 더 정확한 자료를 통해 예루살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집필하였다고 하였다. 사이먼 시백은 예루살렘을 축복과 저주가 공존하는 땅이라 표현하고 있었는데 이보다 더 적확한 표현은 없을 듯 하다. 매일 아침 펼쳐지는 진풍경, 세 종교가 예루살렘을 향해 축복의 예배를 드리지만, 서로를 향해서는 저주를 퍼붓는 광경을 매일 아침마다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처음에 세 종교 이야기를 보면서 당연히 외국인 저자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인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역사를 기술할 수 있을 정도의 탁월한 식견을 가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자 홍익희는 KOTRA 에 입사한 후 무역장관을 거쳐 퇴임한 글로벌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저자는 숫자는 많지 않으면서도 전세계에 가장 영향력 있는 민족으로 자리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우수성을 보면서 많은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궤적을 경제사적 관점으로 조명한 '유대인 이야기' 시리즈를 완성하였고 유대인들에 관한 책들을 여러 권 펴낸 저자이다. 이 책은 종교를 통해 보는 유대인들의 역사이기도 하며 세계 3대 종교안에 들어가고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모태로서의 유대교를 재조명함으로 역사에서 다름의 시각이 가져온 작금의 반복과 분쟁의 원인을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종교의 뿌리는 의외로 아브라함으로 시작되고 있다. 수메르 최강의 도시국가 우르가 아브라함의 고향이다. 다신교를 숭배하고 성적행위가 종교의식의 하나였던 시대로 고도로 발달된 물질문명은 타락과 부패와 음란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하나님이 타락한 세상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해 순수의 땅 광야로 보내게 되는 것이 세 종교의 시발점이다. 아브라함이 여종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무슬림의 시조가 되고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들 이삭은 유대인의 시조가 된다. (이슬람교의 주장에 의하면 알라와 여호와 하느님은 같은 신이라고 한다.) 이후 유대교의 역사인 구약성경은 세 종교 모두의 경전이 되고, 이슬람교는 구약성경 중에서 코란에서 상충되지 않는 <모세오경>과 다윗의 시편을 경전으로 믿는다. 세 종교 모두 예루살렘을 성지로 여기며 공통점은 유일신을 믿는 일신교로 창조와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내세라는 종교관 모두 일치한다. 그런 점에서는 세 종교는 원래 하나라는 것이 증명된다.

 

 

 

  

다른 점은 예수를 보는 관점이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예수를 신의 아들로 보지 않고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보고, 기독교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다. 세 종교의 모태는 유대교로 아브라함이 직접 신과 계약을 맺은 것을 믿는 유대민족의 종교가 된다. 반면 기독교는 하느님의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으면 기독교이다. 이보다 늦게 생긴 이슬람교는 예수를 구세주가 아닌 예언자로 인정하고 무함마드를 최후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로 보는 종교다. 뿌리가 같기 때문에 당연히 이들 종교 모두 <구약성경><신약성경>, 이슬람교는 <토라>와 다윗의 시편, 예수 복음서 그리고 <코란>이 경전이다. 그런데 이슬람교에서는 <코란>을 제외한 세 개는 후대에 일부 내용이 변절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 작은 차이에서 오는 역사의 광풍은 지나치게 배타적인 유대교를 향한 세계인들의 반감을 가져왔고 가장 오래된 종교 전쟁인 십자군 원정과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잔인하였던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초래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음은 삶에서 많은 다양성이나 가능성에 대한 시선을 차단시킨다. 다름은 결국 틀림으로 간주되어 극단으로 치닫게 되고 , 이러한 모습은 현실의 정치문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한 뿌리에서 나왔지만, 이천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분쟁의 역사를 쓰고 있는 예루살렘을 볼 때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어리석음은 종교적 도그마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말이다. 배타적인 기독교 문화에서 파생된 이 글귀는 신앙 또는 신조에 입각한 도그마의 위험성을 잘 알려주고 있다. 대부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런 교조주의와 근본주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채 종교적 도그마에 취해 극단적인 사고를 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들은 모두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짓곤 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천당과 지옥을 벗어나 예수님 그 자체의 모습을 바라볼 때 가치 있는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삶에서 옳고 그름의 잣대가 중요하지 않듯, 천당과 지옥이라는 규정 역시도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그릇 된 가치이다. 이러한 종교적 도그마로 인해 더욱 배타적이고 극단적으로 변해가는 종교에서 벗어나 이성적이고 바른 시각으로 보기 위해서는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종교의 알파와 오메가인 예루살렘의 역사가 다름이 아닌 틀림으로 인하여 이천년의 세월을 반목과 분쟁으로 역사를 써왔다. 평화와 공존의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틀림을 다름으로 인정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비단 종교만이 아닌 삶의 모든 부분에서 이러한 노력이 필요하다. 니체가 말한 한 번의 삶에서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길이라는 차이를 발견해야 한다는 진리는 어쩌면 평생 추구해야 한 번 닿을까말까한 유일한 진실이 아닐까.

 

 

"사물을 바라보는 데는 천 개의 눈이 있으며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길에는 천개의 길이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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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나무 2014-10-26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익희 이분 유대인에 관한 책을 많이 썼는데 세종교에 관한 책도 나왔구나.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아주 민감한 문제,
지금도 진행중인 분쟁..
보니까 저자가 유대인에 관한 관심이 많더라구.

책에 대한 열정 여전하네~^^

드림모노로그 2014-10-27 11:59   좋아요 0 | URL
홍익희 이분 글을 참 맛깔나게 쓰시는 것 같아.
예루살렘 전기가 최고의 책으로 기억되는데
한국인이 이런 방대한 분량의 역사를 기술할 수 있다는 데 감탄이 절로 나오더라구.
조금 시간이 여유로와지면 저자의 다른 책도 구입해서 읽을까해.
나에게도 종교는 미완의 학문이니까.~

요즘 업무와 연계된 일들로 인해 골치 아픈 일들이 많아서
머리 식히려고 일부러 책에 집중하는 중 ㅋㅋㅋ
21세기 자본, 보내준다는 걸, 아직도 못 보내고 있네. 쏘리 ~
댓글을 오늘에야 봤어.... 정신없이 지내는 나날이라,,, ㅠㅠㅠ
보낸 후 연락할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