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생몽사(醉生夢死)라는 술을 아시나요?

마시면 기억을 잊는 술입니다. 영화 <동사서독>에서는 인간에게 번뇌가 끊이지 않는 이유가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황량한 사막에서 살인청부업자로 살아가고 있는 구양봉(장국영)에게도 번뇌가 끊이지 않는 것은 사랑의 기억 때문이지요. 사랑을 약속했던 여인이 어느 날 형의 아내가 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배신한 거죠.  사막에 살고 있는 구양봉에게 유일하게 찾아오는 손님이라고는 복사꽃 필 무렵 나타나는 떠돌이 무사 황약사가 전부입니다. 황약사는 백타산에 살고 있는 여자와 사막에 사는 구양봉을 이어주는 매개체역할을 하지요. 이 '취생몽사'라는 술은 형수가 구양봉에게 보내는 선물이랍니다.  사랑을 잊기 위해  

기억을 잊을 수 있는 '취생몽사'라는 술을 마시는 것과

'복사꽃을 좋아했다는 기억만 남기고 모두 잊는다는 것,

어떤 것이 쉬울까요?

 

 복사꽃을 좋아했다는 기억만 남겨두고 모두 잊기로 했다<동사서독>의 대사는 멋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사랑했다는 기억마저 사라져도, 사랑하며 얻었던 감각과 세계가 남는 것이다. 잊혀지지 않는 사랑의 기억은 새로운 사랑을 저지한다. 반면 사랑이 나의 신체에 남기고 간 감각과 체험은 새로운 사랑의 모태가 되어준다. 사랑이 진정 하나의 사건이었다 함은, 사람이 떠나도 이미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이 다른 감각과 세계가 내게 남아 있다는 말인 터이다. - 이진경 / ‘삶을 위한 철학수업중에서

 

 

이진경의 <삶을 위한 철학수업>에서 말하는 것처럼 기억은 사라져도 사랑했던 감각과 그 세계는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기억을 지우는 술은 마셔봤자 헛일이고 잊기로 애쓰는 것도 사랑앞에서는 더욱 헛일이죠.  기억은 지워도 사랑은 남습니다. 영화 《이터널 션샤인》에서 이미 봤잖아요? 풋~   사랑의 기억을 클리너로 깨끗이 지웠음에도 자석처럼 이끌리고마는 것이 사랑입니다. 절대 지워지지 않는 , 마모되는 기억속에서도 절대 꺼지지 않는 불꽃이 바로 사랑이니까요.

 

 

 

 

 다시 동사서독의 주인공 이야기를 해 볼까요.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잊었냐는 황약사의 질문에  '가질수는 없어도 잊지는 말자'라고 합니다. 웃기죠. 남자에게는 잊으라고 취생몽사를 보내놓고는 여자는 '절대 잊지 말자'라니, 아이러니하게도 구양봉은 그 취생몽사를 마시지 않아요. 대신 이런 말을 황약사에게 전합니다.  '복사꽃을 좋아했다는 기억만을  남겨두고 모두 있기로 했다'고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사랑했던 기억은 그대로 변하지 않는 사실이 되어 추억으로 두고두고 남습니다. 기억은 왜곡되기도 하고 퇴색하기도 하면서 서서히 잊혀질지라도 사랑했던 사실, 그녀가 좋아했던 무언가는 그대로 변함없이 잔상으로 남아있는 거예요. 결국 구양봉의 이 말은 죽어도 못 잊겠다는 독한 역설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추억)은 고정된 풍경이 아닌, 그것을 담는 자의 마음의 모양에 따라 변화되는 액체성의 풍경이라고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에서 유하 감독이 말했나요?  사랑했던 사람이 무언가를 좋아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건, 가슴 깊이 아로새겨진 진한 노스탤지어인 동시에 그녀를 향한 밀어(은밀한 언어)였던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이 문장을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지금의 제 삶 역시도 추억에 너무 오랫동안 붙잡혀 있었거든요. 서울에서 반평생을 살다가 타향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찌보면 기억을 하나씩 지워가는 일이더군요.  조금씩 잊어가다 보면 지금 사는 이곳을 고향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이 없는 것보다는 낫고 잊으려고 하기 보다는 마음 한켠에 불꽃하나 피어놓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요...후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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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미인초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5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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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발산(力拔山)은 기개새(氣蓋世)요  

힘은 산을 들어 올릴 만하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만하여도

시불리혜(時不利兮)니 추불서(鰍不逝).

때가 이롭지 못해 추(항우가 타던 명마)는 가려 하지 않는구나.

추불서혜(鰍不逝兮) 가내하(可奈何).

추가 가지 않으려 하니 어찌하리.

우혜우혜(虞兮虞兮)여 내약하(奈若何)!

 

우미인아! 우미인아 ! 그대를 어찌하면 좋으리

 

초패왕 항우가 우미인에게 불러 준 '패왕별희'입니다. 역발산 기개새이지만 유방에게 포위 당하면서 마지막을 예감한 항우는 매우 사랑하여 전장마다 데리고 다닌 애첩 우미인에게 패왕별희 노래를 불러줍니다. 애절함에 눈시울이 절로 붉어지는 노래지요. 노래가 끝나자 우미인은 자결하는 것으로 항우의 사랑에 보답합니다. 이후 우미인의 무덤가에 핀 가녀린 자줏빛 꽃을 우미인초(개양귀비)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은 '시놉시스'가 단순합니다. 별로 꼬여있지도 않고 심플하죠. 등장인물도 두명내지 세명, 이번 소설은 그나마 많은 거예요. 고노와 후지오는 남매지만 서로 핏줄이 섞여 있지 않은 가족이고, 무네치카와 이토코는 남매입니다. 오노는 가난하지만 머리가 좋습니다. 박사 논문을 쓰고 있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고노는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습니다. 친자식도 아닌데 아버지 유산을 상속받게 되자 고노는 상당한 부담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유산을 모두 후지오에게 주고 자신은 절에 들어가려 하죠. 이 소설에서 고노는 나쓰메 소세키 소설에 등장하는 이지와 이타사이에 고민하는 진지 캐릭터라 할 수 있습니다. '높고 어둡고 해가 들지 않은 곳에서 화창한 봄의 세계를, 가까이할 수 없는 먼 데서 바라보는 것이 고노의 세계.'라 하는 것처럼 고노는 세상이치에 통달한 달관자와도 같습니다. 유산도 포기하고 중이 되려 하는 것에서도 그가 고매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일본에서는 결혼한 상대에게 '금시계'를 주는 것이 관례인가 봅니다. 혼기가 꽉 찬 이 청춘남녀에게는 후지오가 시계를 누구에게 줄 것인가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고노의 동생 후지오를 좋아하는 무네치카는 자기가 시계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후지오는 시인 오노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시계를 오노에게 주려하지요. 그것도 모르는 무네치카는 혼자 열심히 김칫국물만 마시고 있죠. 근데 오노에게는 이미 오년 동안 사귀던 애인이 있습니다. 박사 논문을 앞두고 오노는 후지오의 청혼이 결코 싫지 않습니다. 오년 사귄 사요코와 후지오 사이에서 열심히 밀당을 하는 바람에 두 여인네 가슴만 새까맣게 타들어가죠. 고노는 그런 사실을 알지만, 허울뿐인 그 집을 벗어나려면 오노와 같은 데릴사위가 적당하기에 침묵하죠. 친구 무네치카가 후지오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입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세 여성- 이토코,후지오,사요코-는 전혀 다른 성향의 여성들입니다. 많이 배웠지만 번지르르한 외모를 좋아하는 후지오와는 달리 내면을 들여다 볼 줄 아는 '진실한 여성'의 캐릭터로 '학문도 없고 재능도 없지만 고노의 가치와 내면을 볼 줄 아는 여성 이토코'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순종적인 여성으로 사요코가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서로 대비되는 여성 캐릭터는 우미인초의 전설이 비극에서 비롯된 것처럼 후지오의 비극을 암시하는 복선과도 같습니다. 

 

 

 자존심은 미련을 버지리 못한 사랑을 짓밟는다. -p226

 

 홀연히 삶이 변해 죽음이 되기에 위대한 것이다.- p433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은 스토리가 그다지 큰 반향을 일으키진 않습니다. 다른 소설가와는 달리 스토리가 아닌 서술방식이 매우 독특하죠. 나쓰메 소세키의 《우미인초》는 초패왕 전설에서 알 수 있듯이, 비극입니다. 세 남여(고노와 무네치카, 이토코와 후지오 , 오노와 사요코)가 주인공입니다. 이 소설은 특이하게 주인공들을 제외하고 이야기를 이끄는 또 다른 화자가 있습니다.  바로 '붓'입니다. 자신을 숨기지 않죠. 이렇게 등장하는 서술의 붓을 따라 시간과 공간이 열립니다. 붓질의 움직임은 마치 한폭의 선명한 수채화를 그리는 듯, 색을 입히듯, 소설을 그려요. 분명 눈으로 글을 읽지만 정신은 '붓'의 설명을 따라 열심히 그림을 그립니다. 대표적인 글이 바로 우미인초를 설명하고 있는 이 문장이죠.   

   '잠들어 있는 천지에 봄에서 뽑아낸 진한 자줏빛 한 점을 선명하게 떨어뜨려 놓은 것 같은 여자.'그러니까 이 소설은 그림이 되고, 이야기는 색인 거죠. 마치 풀베개의 화공이 시 속의 사람도 아니고 그림 속의 사람도 아닌 듯, 비인정(非人情 초탈) 세계와 인정 세계(현실)의 경계를 가차없이 허물어 버립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이 소설에서 그림처럼 읽히는 색다른 소설울 선보이고 있습니다.그림처럼 읽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죠. 이것은 또한 비인정과 인정의 경계를 예술로 끌어올리는 새로운 경지이기도 합니다. 삶이라는 백지 위에 죽음이라는 마침표를 찍기 전 피어오르는 자줏빛 사랑이야기 '우미인초'. 여름과 가을이 공존하는 요즈음의 날씨에 딱 어울리는 소설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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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남자가 있다. 그 남자의 삶은 무기력의 최고봉이었으며, 상실과 고통과 절망의 나날이었으며, 체제의 실패자였으며, 사보타주의 도구이자, 낙오자다. 그 남자의 이름은 마르코 포그, 포그는 아이들이 '똘마니, 바보멍청이'  라 놀리기 좋은 이름이었으나, 자신의 이름자를 줄여  원고라는 뜻 ‘ manuscript’을 줄여서 'M.S포그라는 서명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그의 삶이 현재 쓰여지고 있으며, 아직 완료형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달의 궁전》은 포그의 삶을 찾아 써내려간 글이다. 사생아로 태어나 엄마의 이른 죽음과 잇달은 외삼촌의 죽음으로 세계에 혼자 남겨진 포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센트럴 파크에서 노숙자가 아닌 척 살아가는 지성인이었다.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 도시의 방랑자로 살아가는 그에게 쏟아진 폭우는 그의 삶을 모두 앗아가 버린다. 영양실조와 추위, 고열에 시달리며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죽어가던 그를 찾아낸 것은 친구 짐머의 아파트에서 우연하게 만났던 여인 키티였다. 십만분의 일 있을까말까한 우연의 연속으로 포그는 할아버지 에핑을 만나고 게다가 죽었다던 아버지까지 찾게 된다. <달의 궁전>의 계속된 우연, 이 부분에 대해 폴오스터는 어떤 대답을 할까?

 실제로 폴오스터는 비평가들에게 이런 우연의 연속에 대한 비판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당신의 책은 대부분의 픽션에서 발견되는 인과율보다는 우연의 일치에 의존해서 플롯을 이끌고 나가는데, 최근의 작품인 <달의 궁전.<우연의 음악>에서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이렇게 우연을 사건의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삶에 대해 당신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인식의 결과인가요? 아니면 이런 식의 접근이 미학적으로 좀 더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요?

 

-나는 그동안 우연때문에 평론가들부터 호된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나는 스스로를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합니다. 우연은 리얼리티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연의 힘에 좌우되고 있으며, 우리의 삶 전체에 걸쳐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져 아연실색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는 픽션에서 상상력을 발휘해서는 안 된다는 사고가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타당하게 보이지 않으면 죄다 부자연스럽다거나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해버립니다. 그런 사람들은 비뚤어진 시각으로 책을 읽는데 너무 많은 시각을 소모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른바 리얼리즘 소설의 일반적인 관습에 함몰된 나머지 현실 감각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이런 소설들에서는 모든 인과관계가 매끈하게 설명되므로, 독특함은 사라지고 원인과 결과가 예측 가능한 세계만 보여줍니다. 책에서 눈을 들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둘러볼 수 있을 만큼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런 리얼리즘이 완전히 엉터리라는 것을 알게 되겠죠. 달리 말하면 진실은 픽션보다 더 기이합니다. 내가 추구하려는 건 아마도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만큼이나 기이한 소설을 쓰는 것이겠죠.

 

 

 

당신의 작품에서는 우연의 일치를 사용하는 방식이 다른다는 거군요. ‘매끈하게 넘어가기위한 방편도 아니며. 보편적인 리얼리즘 작가들의 조작된 환상, 그러니까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도 아니라는 말이겠죠. 당신의 책은 미스터리와 우연의 일치에 기반을 둔 거나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미스터리와 우연의 일치가 지배원리로 작동하면서 인과율과 합리성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내가 말하는 우연의 일치란 사건을 교묘하게 조작하려는 욕망이 없습니다. 18세기와 19세기의 수준 낮은 소설들에서 볼 수 있는 기계적인 플롯장치, 모든 일을 매듭짓고자 하는 충동, 등장인물들 모두가 관계되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마침내 맞이하는 해피엔딩 등이 바로 그런 예가 되겠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닌 예측불허의 존재, 인간이 겪게 되는 황당한 경험들입니다. 누구에게든 이런 일은 빈번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철학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우연성의 힘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의 삶은 사실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세계에 속해 있는 거죠. 우리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을 해 본들, 세계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줄곧 이런 미스터리들과 부딪칩니다. 그 결과는 실로 끔찍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코믹할 수도 있겠죠.

 

 

 《달의 궁전》에는 포그 뿐만 아니라 눈이 멀고 다리가 마비된 화가 에핑이 나온다. 그리고 한때 사랑했던 여인을 떠나보내고 살 속에 숨어버린 솔로몬 바버의 이야기도 나온다. 세 명이 주인공인 셈이지만, 세명의 이야기는 다른 장소와 다른 시간일 뿐 모두 같은 내용이다. 인생에서 모두 고독하고 외롭고 방랑자라는 점에서 말이다. 폴오스터는 작가들은 모두 자신의 삶에 바탕을 두고 책을 쓰며 모든 소설은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인생이 지니고 있는 의문을 탐구하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는가, 우리는 매 순간 우리의 과거를 간직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 자신을 관찰하는 행위가 글쓰기였다고 한다. 

 

이 책은 오스터와의 주요 작품들에 대한 소개와 인터뷰 모음집이다. 나에게 소설은 한시적인 장르이기에 소설가 폴오스터가 대중문학에 종횡무진한 작가인줄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 달의 궁전을 읽게 되었는데 정말 아름다운 글이었다. 나의 내면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고, 아주 오래 전 내 황활한 방황기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이 있지 않나- 세상에서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듯한 외로움을 적나라하게 상기시켜 주는 바람에 하마트면 울뻔하기도 하면서 주인공 포그와 함께 철학적 사색놀이에 빠져있었다. 《글쓰기를 말하다》를 통해 작가 폴오스터에게 듣는 생각과 소설적 장치나 그의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우연'에 대한 설명도 재미있게 들었다. 삶에서 우리에게 우연은 얼마나 발생할까? 며칠 전 추석명절에 나는 이런 우연을 경험했다.  서울에서도 만나기 힘든 친구를 10만분의 1의 우연처럼 , 그것도 경상남도 함양에서 만나다니 , 그때의 놀라움이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폴오스터가 말하는 '우연'이 삶의 리얼리티에 가깝다는 주장은 어쩌면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우연이 또 다른 삶을 이어주는 징검다리가 되어주니까. 글쓰기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몰랐다고 말하는 작가 폴 오스터, 그의 삶에서도 이런 우연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가난해서 글을 하나도 쓰지 못했을 때 우연하게 받은 아버지의 유산으로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있게 되었고 우연하게 만난 여인과 사랑에 빠졌고 우연하게 딸에게서 삶의 몸짓을 배웠다고 한다. 그에게  '우연'은 문학의 외연이자 삶을 이어주는 끈이다.

 

 

글쓰기를 통해 서서히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해 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p57

 

하지만 폴오스터는 작가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나는 글쓰기를 누구에게도 권하고 싶지 않아요. 젊은이들이 글을 쓰고 싶다고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신중하게 다시 잘 생각해 보라고, 글쓰기에서 돌아오는 보상은 거의 없습니다. 돈 한 푼 만져볼 수 없을지도 모르고, 유명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방구석에 틀어박혀 어떻게 살아남을지 걱정할 것입니다. 당신에게 엄청난 고독의 경지를 사랑하는 취향이 있어야 합니다."

 

<내인생의 글쓰기>에서 시인 안도현이 시를 읽고 쓰는 것은 세상과 연애하는 일이라며 문학은 외로운 자들의 몫이라고 하였던 것처럼  폴오스터가 전해주는 글쓰기 역시도 자신에게 던져진 고독의 몫을 감당할 수 없다면 글을 쓰지 말라고 한다. 역시나 글쓰기는 쉽지 않다. 나에게 글쓰기는 외로움도 뭣도 아닌, 그저 이야기의 날줄에 불과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고독이라는 씨줄이 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삶이라는 원고를 완성하기 위해서 작가  폴오스터의 글쓰기는 좋은 시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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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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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레지스탕스였던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에서 민주주의의 최대의 적은 무관심이며 이 무관심의 표현 자체는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를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 분노하라' 한 단어가 그토록 강렬한 것인지 그때 처음 알았었다.   분노의 표출은 참여로만 증명될 수 있다고 하였던가. 그때 그 책을 읽었을 때만 해도 비장한 결의를 다지며 주먹을 불끈쥐고는 했으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감동은 시간의 썰물에 휩쓸려가 버렸다. 정치란 것이 그런 것 같다. 울분이 쌓이다가도 먹고 사는 일에 잠시 잊고 살아도 괜찮다는 변명을 하게 되는 것.

 

작년 고인이 되신 노장 스테판 에셀보다는 젊은 편에 속하지만, 지혜와 연륜이 바탕이 된 정치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책이다. 미국 현대사를 수놓았던 굵직한 사건들을 온 몸으로 겪었던 사회운동가이자 교육학자인 파머의 아홉번째 책으로 행간에 뿌려져 있는 '민주주의'의 통찰은 온몸에 전율을 느끼게 할만큼 강렬하다.  

 

이 시대의 정치는 분노의 정치를 넘어선 비통한 자들의 정치가 되어야 한다.

 

스테판 에셀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분노하라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파커J.파머는 비통하라라는 주문을 한다. 이 비통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시대의 정치는 비통한 자 the brokenhearted [직역을 하자면 마음이 부서진 자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의 정치다. 이 표현은 정치학의 분석 용어나 정치적 조직화의 전략적인 수사학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 대신 인간적 온전함의 언어에서 그 표현이 나온다. 오로지 마음만이 이해할 수 있고 마음으로만 전달할 수 있는 경험이 있다.”

마음이 부서진 자, 저자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분노' 의 단계를 넘어서 현 민주주의가 잃어가고 있는 '공화'라는 개념의 민주주의의 회복이 바로 이 '비통'이라는 마음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물결로 위협당하고 있는 개인성과 공동체성, 그리고 합리성과 덕성은 민주주의를 이루는 핵심개념이다.  '무한경쟁의 논리'를 표방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광풍은 자본의 비호아래 빈부 간의 극심한 격차를 가져왔다.  민주주의는 긴장을 끌어안기 위한 제도이다.  저자는 신자유주의가 표방하고 있는 '소비주의'와 민주주의의 거짓 치료제 역할을 하고 있는 '희생양만들기'를 경계하라한다. 이 두가지를 경계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마음의 역동을 다룰 줄 아는 건강한 자아를 지니라고 한다. 이러한  건강한 자아를 지닐 수 있는 근원은 우리 사회를 '비통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주어진다. 

 

 저자가 건강한 자아를 위해 권하는 다섯 가지 습관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이 안에서 모두 함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2, 우리는 다름의 가치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3, 우리는 생명을 북돋는 방식으로 긴장을 끌어안는 능력을 계발해야 한다.

4, 우리는 개인적인 견해와 주체성에 대한 의식을 가져야 한다.

5, 우리는 공동체를 창조하는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민주주의가 지닌 기본이념을 향한 노력은 공론의 장이 될 수 있다. 조용한 논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모순과 갈등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길이 바로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파머는 이 지점을 통해 사람들이 오늘날 정치 세계를 개선하고자 가져야 할 마음의 습관으로 뻔뻔스러움겸손함을 제안한다나에게 표출할 의견이 있고 그것을 발언한 권리가 있음을 아는 것이 뻔뻔스러움이고 내가 아는 진리가 언제나 부분적이고 전혀 진리가 아닐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겸손함이다. 이 '뻔뻔스러움'과 '겸손함'은 '찢어진 민주주의의 직물을 다시 짜기 위한' 마음이다. 깨어있는 시민의 참 뜻은 바로 이렇게 자신의 견해와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인과 함께하는 공화주의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무심한 상대주의, 정신을 좀먹는 냉소주의, 전통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경멸, 고통과 죽음에 대한 무관심, 자신과 의견이 다르면 배척과 따돌림을 불사하지 않는 극단주의자들이 넘쳐나고 있는 현실의 정치문화에서 말할 수 없는 비통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면 읽어보길 권한다. 비통함의 틈새에서 발견하는 희망이란 , 비록 작을지라도 그 작은 힘이 역사의 물레방아를 돌리는 힘이라는 것을 믿게 된다. 세상의 중심에는 쓰이지 않는 역사가 있다. 그리고 그 쓰이지 않는 역사는 작은 냇물이 모여서 만드는 강물처럼 유구하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자연의 위대한 원리처럼, 사회의 가장 낮고 그늘진 곳, 빼앗기고 궁핍한 곳, 내팽개쳐지고 억눌리고 무시된 곳에 소생과 부활의 봄을 가져다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도정일 교수의 말은 그래서 더 둔중한 울림으로 남는다. 우리의 봄은 어디메쯤 오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공정할 수 있는가? 우리는 너그러울 수 있는가? 우리는 단지 생각으로써가 아니라 전 존재로 경청할 수 있는가? 살아있는 민주주의를 추구하기 위해 용기있게, 끊임없이,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동료 시민을 신뢰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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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아이들 2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0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0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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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후진국에 불과하던 인도가 독립과 동시에 추진한 5개년 계획의 수립이 한창일 때 살림 시나이는 타고난 초자연적인 능력 텔레파시라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깨닫게 된다. 낡은 시계탑으로 숨어 들어 보게 된 세상을 바라보며 마치 예술가가 된 듯 한 착각에 빠져 이 땅에 존재하는 온갖 현실을 재능의 원료로 여기게 되는 과대망상의 아홉 살의 시기를 지나고 열 살로 향하고 있는 살림이 1권의 마지막이었다.

 

내가 말한 역사에서는 1947815일부터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다른 형태의 역사에 의하면 이 불가피한 날짜도 암흑기 칼리유가의 덧없는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칼리유가는 -우리나라가 주사위를 잘못 던진 시대, 모든 것이 최악인 시대, 재산이 인간의 지위를 결정하고 부를 미덕과 동일시하는 시대, 욕정이 남녀를 묶어주는 끈이 되어버린 시대, 그리고 거짓이 성공을 부르는 시대.... -(중략)

 

말하자면, 주사위를 잘못 던진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 살림을 포함하여 천명하고도 한명이 태어나 1957년까지 살아남은 581명의 아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몰랐으나,  자전거 사고로 큰 충격을 받게 되자 살림 시나이는 자정에 태어난 아이들의 존재 모두를 알아차리게 된다. 마치 영화 엑스맨에서 강한 텔레파시의 소유자 찰스 사비에 박사를 중심으로 초능력자들이 모이듯이  살림을 중심으로 한밤의 아이들이 모이게 된다. 이들은 모두 초능력자들로 신기한 특징이나 능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탄생 시각이 자정에 가까울수록 더 큰 재능을 타고 났다. 병을 낫게 하는 마력의 소녀와 보거나 들은 것은 어떤 것도 잊어버리지 않는 기억력의 소유자나 가장 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 소녀, 시간여행의 능력을 타고난 소년등 모두 변신, 비행, 예언 , 마법 등의 능력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신화가 지배하는 인도에서 시대에 역행하는 온갖 구태의연한 것들의 마지막 잔재였고,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엄연하게 존재하는 현실이라는 (살림의 주장대로), 자유의 희망이자 인도의 희망을 투영하는 미래이자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살림의 한밤의 아이들 협회는 특별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혼란한 시대에 아무런 영향을 행사하지 못한다. 살림이 사회정치적 동향과 사건들에 아주 조금씩 영향을 미쳤고 (능동적으로, 직설적으로) 국가적 사건이 살림의 삶에 직접적인 (수동적으로-비유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과는 달리 한밤의 아이들은 이러한 연결방식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역사와 하나로 맺어지는 것에 실패하였다. 이들의 실패는 20세기 근대화로 가는 길목의 인도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밤의 아이들은 인도에 공존하는 현실, 신화와 미신의 나라를 대변하고 있는 시대의 아이들이였기에 근대화가 시작되는 무렵, 이들의 초능력은 이미 구태의연한 능력이나 다름없었기에 격동하는 시대에 휩쓸리는 개인의 삶의 비극만을 재현해 주는 장치에 불과하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고 살림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한밤의 아이들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이자 기억과 왜곡의 역사에 존재하는 아슬아슬하고도 추상적인 존재이다. 이것은 기존의 역사가 하나의 사실에만 의존하여 기록되지만, 실제로 역사의 거대한 흐름은 하나의 시점이 아닌 여러가지 시점과 기억속에서  선택하고 생략하고 변경하고 과장하고 축소하고 미화하고 헐뜯는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 현실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각각의 사건에 대해 나름대로 복합적이면서도 대체로 일관성이 있는 해석을 하는 것이 역사에 필요한 시각이다.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파키스탄과 인도가 세 번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메리 페레이라가 저지른 아기 바꿈질의 폭로로 인해 살림은 인도 붐베이에서 파키스탄의 라왈핀디로 4년간 추방되고 한밤의 아이들과도 교류가 끊어진다.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중국과의 전면전으로 인해 인도가 풍비박산이 나게 되자 두 번째는 온 가족이 붐베이를 떠나 파키스탄의 카라치에 정착하게 된다. 파키스탄에 체류하는 동안  동생 자밀라 싱어는 국민가수가 되어  구멍 뚫린 침대보가 아닌 구멍 뚫린 금색-흰색 침대보를 통해서 노래하게 되었는데  파키스탄은 열 다섯 살 먹은 소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집안의 역사가 또다시 한 나라의 운명이 되는 사건이었다. 인도와의 수많은 전쟁으로 인해 파키스탄에서 이중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자신의 조국이 인도임을 잊지 않는 살림에게서  무지비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도 나라가 주는 의무와 정체성은 개인의 삶을 뛰어넘는 이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너의 삶은 우리 모두의 삶을 비춰주는 거울이니까.'

 

계속된 전쟁으로 나라가 혼란과 분열의 역사를 쓰게 되면 개인의 삶 역시도 똑같은 혼란과 분열을 겪게 되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개인의 삶과 역사, 기억과 왜곡이 서로 교차하며 촘촘하게 시간의 역사를 짜고 있으며 ,  세상의 모든 것이 상호작용하여 서로 영향을 주며 현실의 장을 이루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려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각 장의 이야기를 언어와 피클을 이용하여 기억을 영원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조차도 왜곡이 따를 수 밖에 없다는 살림의 이야기는,  결국 독자들에게 매혹적인 인도의 역사에 절로 스며들게 하여 개인의 삶과 역사라는 톱니를 잇따라 맞물려 굴리는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올라타게 한 뒤  우리의 역사를 다시 돌아보고 꿰매는 '시간'이라는 피클을 선물로 남겨 주고 있다.  그가 남겨준 서른 가지 맛의 피클과  남겨진 하나의 빈병, 이 미래라는 빈병에 우리는 어떤 피클을 담글 수 있을까. 아브라카다브라! ~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는 이렇게 불완전의 그늘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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