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내 주변 혹은 오프에서 나를 아는 이들 중에 내가 인터넷 서점에 책 관련 개인 블로그를 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을 꼽으려면 한 손의 손가락들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 중에서 가끔이라도 실제 들어와 보는 이는 내 짐작으로는 남편 님 외엔 없다. (그래서 이 서재에는 페이퍼 형식이 되었던 리뷰가 되었든 남편 님에 관한 신랄한 뒷담화를 할 수 없다. ㅎ)  지금 그게 화두가 아니고...

 서재에 홀릭 증세를 보였던 때가 6~7년 전이었는데, (지금은 아니지만) 그 당시 곁에서 나를 보았던 사람들 중에 그 때 서재 꾸리는 데 미쳤던 내 근황이 현재 궁금한 사람들 중 열 명에 하나는 접근성이 용이하지 못함에도 어렵게 어렵게 이곳에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서재에 가급적 신변에 관련된 것은 올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 김새고, 다시 찾지 않을 것이다. 아니 누가 찾아오려나 할까.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진심으로 다행한 일이지 뭔가. 아니, 내 측근들의 대다수 성향이 책과 관련된 것에 몹시 애정을 품은 사람들이 아닌 것이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심지어는 나는 회사 사람들이 내가 책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거 별로 반갑지 않다. 그래서 내색 안 한다. 회사에 책을 가져갈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출근해서 꽁꽁 숨겨놨다가 퇴근길에 스윽- 찾아서 들고 가고 이런다. 그래도 티가 나겠지.

최근 들어 방문자가 많아져서 몹시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무슨 목적으로 들어오든지 간에, 일말의 유익함이나 위로(? 요런 수준의 정신 세계로, 요롷코롬 사는 사람도 있구나! 그에 비하면 나는 훌륭한 엄마, 아내, 딸, 언니, 누나, 동생이지... 순전 여성 방문자일거라는 전제군요..) 등등을 얻어 가셨으면 좋겠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제부터인데, 서론 왕창 길어졌다.

어제 밤 우연히 아이 책 검색을 하다가, 너무나 낯익은 닉네임을 발견했다.

닉네임이야 흔한 거니까, 그런데 미리볼 수 있는 앞부분 글에서 그 친구의 아들내미 이름을 발견했다. 내가 잘 아는 사람 맞다. 그 친구의 서재로 들어가서 리뷰 80여편, 페이퍼 10여편을 앉은 자리에서 두 시간 꼼꼼히 읽었다.

이 친구는 내가 아이 낳고, 알라딘 서재와 담 쌓고 살던 시기에 알게 된 친구라 가까워지기는 했어도, 이 온라인 서점에서 제공하는 서재 얘기를 나누지 않았었고, 이 친구에게 서재가 있는지 알아봐야 할 이유는 더더군다나 없었다. 글들을 읽다보니, 내가 아는 그녀의 모습보다 적어놓은 글의 세계에서 그녀는 더 디테일하게 더 아프고 명징하게 다가왔다.

지난 주에도 일 때문에 통화를 했던 그녀인데, 너의 서재를 발견하고 글들의 대부분 읽었노라고 알은 체는 못하겠다.

내가 보았다는 게 그 친구에게 반가울까? 읽혀서 반가운 마음도 있고, 혹은 그녀 또한 나처럼 서재가 주는 익명성이 좋아서 마음껏 자신의 속내도 내보이며 리뷰나 페이퍼를 썼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역으로 그 친구가 내 서재에 와볼테고 그러면, 나는 그게 또 마냥 반가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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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본 우리 동네
마이컨 콜런 글, 아메렌트스커 코프만 그림, 정신재 옮김 / 진선아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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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세용 대개의 동화책이 한 권 읽어주는데 걸리는 시간은 길게 잡아도 15분이면 충분합니다. 이 책? 두 세배의 시간과 집중력을 요하지요. 같이 읽으면서 제시된 마을 사람들이나 건물 등의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들을 찾아내다 보면, 아이와 나의 오감 체험치가 급 상승하고 있는 듯한 충만한 느낌이 들지요. 책을 읽을 때만큼은 자뭇 다소곳하기까지한 아이들인데, 이 책을 읽을 때는 굉장히 엑티브하게 돋보기를 들이대고 마치 탐정 노릇하는 것처럼요, 드디어 찾던 걸 발견하면 엄청난 탄성을 질러대요~

동네 구석구석에 대한 전원적 스토리와 마을 사람들이 하는 일 등이 소박하게 보여지는 느낌도 훈훈하답니다. 지인께서 아이들을 위한 선물로 사 주신 책인데, 나 즐겁고 아이들도 좋아하고 하여,감사하는 마음이 곱절로 늘었답니다.    
 

함께 수록되어 있는 볼록렌즈와 오목렌즈 두 종류의 돋보기도 정말 센스 만점이고 말이죠.  

단, 세번째 챕터에서, 배와 선장님등이 나오는 부분이 있는데, 배의 엔진 위에 뭔가가 있어요. 두 개의 빨간 알이에요. 바다갈매기의 둥지일까요? 그런데 그 부분이 펼친 접지 제본 부분에 접혀 들어 있는 관계로 긴가민가 하고 말았습니다. 무지 아쉬웠죠. 원서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번역을 하고 제본하는 과정에서 미쳐 고려되지 못한 부분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재인쇄를 하게 될 경우에 이 부분이 보일 수 있도록 재판되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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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전에 티비를 보던 둘째가 배고프다고 한다. 무려 새벽 1시인데, 그래서 식은 밥에 저녁 반찬이었던 스팸반감자반으로 해서 올리브유에 볶은 것과 멸치볶음을 비벼서 한 숟가락씩 떠먹였다. 먹이다가, 멸치볶음에 든 깨소금 때문인지 제법 맛있게 보여서 결국, 나한입, 너한입 그렇게 밥 한 그릇을 비우고 말았다.   

야밤에 세살박이 아이의 위를 그득하게 채우는 행위는 이성 있는 엄마라면 주저할 행동이다만, 이 엄마가 밤이 되면 살짝 이성을 놓고는 하는 위대한 인간이라 그래....

마빈 해리스라는 문화인류학자가 말하기를, 당신이 먹는 것을 얘기해 주면, 당신이 어떤 인간이 말해 줄 수 있다고 했던가? 나는 말이지, 갓지은 밥에 스팸 한 조각을 사랑한다. 나는 어떤 인간입니까? 미군부대를 연상시키는 인간입니까?  

자야겠다. 어차피 향후 몇년은 나는 고용주의 노예인 것을 내일 나가서 할일이 무려~~~ 흠,,, 얼른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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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고용주의 노예나 될법한 저녁잠 많은 인간형이 되기 싫어, 이 시간에 안 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 티비로 바뀌면서 고안된 메뉴얼을 찬찬히 둘러볼 계기가 없었는데, 오늘 보다가 데이타 방송으로 애들한테 보여 줄 만한 무료 프로그램들을 몇 개 발견했다.  

지금 참으로 늦게 취침 드시는 둘째가 맹렬하게 연속으로 보고 있는 중이다. 그 녀석이 스스로 자겠다고 나설 때까지, '엄마는 일해(인터넷 하라는 의미)' 모드이다.  

요즘엔 나의 건강염려 증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내 자리에서 일할 때도, 사내식당에서 밥먹을 때, 집에 있을 때,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 조차 남의 눈을 의식 못하고 겨드랑이 언저리를 외과 의사가 촉지로 진료보듯 하곤 한다. 때도 못 가리고.... 내가 그러고 있는 모습을 제 3자가 되어 지켜본다고 했을 때 좀 추한 그림이..ㅎㅎ 그리고는 시도때도 없이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 지식인으로 검색을 한다. ***의 초기 증상 따위를 ...  

한번은 검색하다가 사람들이 올린 답변글 중에, 자신의 병에 대해 인터넷으로 답변에 의지하는 것은 바람직한 대처방안이 아닌듯한 사안이니, 당장 전문의에게 진료받으라...는 글을 보고 그 말에 강하게 긍정한 나머지 기함을 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오늘 독감 예방 접종을 병원에서보다 60%나 저렴한 가격에 단체 접종한다고 했는데도, 맞지 않았다. 작년까지는 해마다 꼬박꼬박 맞았었는데, 오늘은 어쩐지 주사 따위 맞을 기분이 아니었다고 하면 너무 궁색한 변명인가?  

오늘은 몸을 사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집을 나와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다가 오른쪽 뒤꿈치가 헛방을 치는 바람에 몸이 헛스윙을 했다. 구두의 뒷굽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뒷굽을 어느 길목에서 잃어버린 것일까. 절뚝이며 가던 길 멈추고 뒤돌아봤다. 구두 바닥을살폈더니, 뒷굽과 밑창 접착 부분이 너덜하게 떨어져 있었다. 대롱거리는 뒤축을 이끌고 집으로 갔다. 오늘 무슨 일이 있으려나, 말도 행동도 삼가 절제하자 하며, 구두를 갈아 신고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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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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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도가니’를 읽으면서 이 책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떠올리게 되었다. 두 책 모두 공통의 카르텔은 전자의 경우는 검찰, 고위공무원, 위시한 정치계 인사로 대표되는 상류 기득 권력층들에게 고함이라면, 후자는 사회 속 남성 권력층들에게 고함이다. 폐단은 정작 읽혀야 할 그들은 읽으려 들지 않고, 우리 같은 사람들(사회적 약자? ㅎ)만 들입다 읽는다는 점이긴 했다.  공지영은 책 한 권으로(정확한 표현은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책 속의 ‘자애학원’이 재조명되게 하였고, 남들이 돌아보려 하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조용히 약자를 돕는 사람들 이야기 또한 세상에 알려지게 하였다. 사람들의 관심 하나, 말 한마디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란 이야기, 그리고 책 한 권이 바꿔가고 있는 이 사회가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봐야지 않을까? 

22~23쪽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받을 때보다 사랑할 때, 더 행복하고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사랑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크기, 깊이를 깨닫는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포함해 모든 대화는 최음제이며, 인생에서 깨달음만한 오르가슴은 없다. 상처는 그 쾌락과 배움에 대해 지불하는 당연한 대가이다. 사랑보다 더 진한 배움을 주는 것이 삶에 또 있을까. 사랑 받는 사람은 배우지 않기 때문에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다. 사랑은 대상으로부터 유래-발생하는 에너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내부의 힘이다. 사랑하는 것은 자기 확신, 자기 희열이며, 사랑을 갖고자 하는 권력 의지인 것이다. 그래서 사랑 이후에 겪는 고통은 사랑할 때 행복의 일부인 것이다.  

35쪽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120쪽
결국 사람들은 또 무엇이 더 결정적이냐고 결론 내고 싶어한다. 마치 민족 모순이나 계급 모순처럼 '큰' 문제를 우선시하는 사람은 구조적 파시즘을 강조하고, 소수자들은 일상적 파시즘에 더 무게를 두는 것처럼 논의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일상적 파시즘도 구조적 파시즘도 극복하기 어렵다. 구조적 파시즘은 일상적 파시즘을 전제로 작동하는데, 두 가지 파시즘이 어떻게 구별될 수 있단 말인가?

140쪽
한국 남성에게 성폭력당하면 '개인적인 일'이고, 일본 남성에게 당하면 '민족의 아픔'인가? 성폭력은 가해 남성이 누구인지에 따라 그 성격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에 의한 폭력이라는 사실이 더 본질적인 문제이다. 그러므로 여성을 '순결한' 피해 여성과 '타락한' 성판매 여성으로 구분하는 것은 남성 사회에서 여성의 가치를 정하는 방식이다. 남성의 입장에서 성매매와 성폭력은, '자발'과 '강제'라는 '반대' 현상이지만, 여성의 시각에서는 구별될 수 없는 연속선이다.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이 현실이 바로 성폭력과 성매매의 원인이다. 남성의 성욕은 통제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여성을 남성의 성 권력의 희생자와 '자발적으로 남성의 욕구에 부응한' 여성으로 나누는 것은 누구의 논리인가? 성폭력 피해 여성이나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 모두, 결국은, 남성을 위한 제도의 '희생자'들이다.

177~179쪽
그러나 인간이 원하는 것은 개인의 고유한 의지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며, 몸은 단순히 그 몸을 '소유한' 개인의 판단 대상이 아니다. 여성의 자기결정은 여성의 정신에 의해 투명하게 구성되거나, 약자인 여성의 결정이기에 그 자체로 올바른 것이 아니다. 성적 자기 결정론은, 개인의 자기 몸에 대한 결정 내용이 사회 혹은 상대방과의 상호 작용과 사회적 맥락 안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추상적, 현실 초월적인 논리이다.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바로 나다. 성적 자기 결정권을 주창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성폭력이 사적인 피해라는 자유주의 이론 비판에서 출발했지만, 몸을 주체의 소유물, 주체의 재산으로 간주하는 근대 자유주의 철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
같음의 기준이 남성의 경험에 근거한 것일 때, 여성은 남성과 같음을 주장해도 차별받고 다름을 주장해도 차별받는다. 이것이 소위 '차이와 평등의 딜레마'이다. 예를 들어, 여성이 남성과의 차이를 주장하면 남성 사회는 그것을 차별의 근거로 삼고, 같음을 주장하면 사회적 조건의 다름은 무시한 채 남성의 기준을 따르라고 요구한다. (...)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평등'은 장애인이 장애를 '극복'하고 비장애인과 같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회적 강자의 기준을 강요하는 것이지, 평등이라고 볼 수 없다.

250쪽
의무는, 수행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을 수는 있어도, 이행했다고 해서 보상받을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군 가산제 제도는 여성과 장애인 등 처음부터 국방의 의무가 면제된 사람들에게 그 면제된 의미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처벌하는 격이다. 면제의 기분을 문제삼아 여성과 장애인의 징병을 주장할 수는 있어도, 처음부터 면제된 의무를 안 했다고 해서 개인의 권리와 생존권(취업권)을 박탈하거나 감수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 여성은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 것이 아니라 배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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