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잘하는 아이의 집
가게야마 히데오 지음, 이정은 옮김 / 나무수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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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내부가 어떠해야 아이들을 키우기 좋을까 하는 것을 얻고자 책을 보았고, 너무도 당연하겠지만 그것과 더불어 가족들의 생활 습관이 어떠해야 좋을까를 말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초등학교 교사로 오래도록 재직하였고, 자녀 셋을 키웠으며, 그 유명한 길벗에서 나온 <기적의 계산법> 저자이기도 했다. 

유아에서 초등 중등(그 이상도)까지의 연령에 해당하는 아이들을 망라하는 내용이었지만, 당장에 얻고 싶었던 것은 지금 겪고 있는 일들에 대한 조언이었다. 예를 들면,  학력을 높이기 위해 가장 좋은 책상은 가로로 긴 책상이다. 같은 것.

뒷부분에는 일하는 어머니를 대상으로 한 내용이 있었는데, 일을 하면서 가사와 육아까지 겸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육아의 원칙”은 바뀌지 않기에  바뀌는 것은 '일'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이 바쁘니까 효율적으로 육아를 하고 싶다,가 아니라 ‘일을 효율적으로 하고 육아 시간을 만든다’라는 것. 음... 정말이지 말로 하기는 쉬운 거다. 

아이의 학력을 높이려면 가정에서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라는 질문엔 시종일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아침밥 먹기’, ‘읽기, 계산하기, 쓰기’를 철저히 시키세요! 한다. 
 

해법이란 원래 이렇게 단순한 것....?

아버지에게 한마디 남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부모로서, 한 남자로서의 행복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자. 일에 열중하느라 아이를 외롭게 하는 것이 과연 행복일까? 아이는 행복하다고 할까? 행복해지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지, 일을 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본인에게 아이에게 가족에게 행복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사실은 딜레마에 빠진다. 저자의 말에 동감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족마다 분위기랄지 성향이 달라 정말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다르고, 그것이 그 가족만의 비법일 것이다.

 

울보 님, 이 책은 결국 도서관에서 예약해 순서 기다렸다가 대출해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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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보수 일기 - 영국.아일랜드.일본 만취 기행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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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온다 리쿠 씨네 집에는 나무가 하나 있는데, 이 나무에는 주렁주렁 탐스러운 소설 열매가 열린다. 하루키도 그렇고, 가오리 씨도 그렇고, 소설 아닌, 에세이도 잘 나오던데, 온다 리쿠만 없다고 불평하면서, 아마도 소설 나무에서 열매 따는 것도 벅찬 나머지 다른 산문들은 쓸 시간적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첫 에세이가 나와다는 소식에 득달같이 사서 읽었다.
공포의 보수 일기,,  

최근 1년 중에 국내 번역된 것 빼고, 온다 리쿠 작품은 다 읽었는데, 그중에서도 제목이 뭐 이래,, 싶으나 내가 좋아하는 작품, "삼월은 붉은 구렁을" " 흑과 다의 환상" 이 있다. 이 때와 유사한 의아함에 빠지고 만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알아보든가~ 하는 것 같은 제목하고는 정말 온다 리쿠 당신은... 당신답네.  

2년전 네 살짜리와 생후 60여일된 아가까지 있는 주변머리임에도 불구하고, 국제도서전시회에 초청작가로 온다 리쿠가 온다는 말에 연이틀(하루는 사인회, 하루는 간담회) 삼성역으로 가 출근도장을 찍고 했었다. 

간담회 때 온다 리쿠는 자신이 하늘을 나는 교통 수단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 상기된 얼굴이었던 것도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래서 그랬구나 하게 된다.


이 책에서 보면, 온다리쿠는 글을 쓰게 된 뒤로 여행에 대한 생각이 가장 많이 바뀐 것 같다고. 일상 탈출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지만, 느긋하게 망상을 하러 가는 것이 주된 목적이 되었다고.

이야기를 지어서 먹고 살고 있으니, 평소에도 망상은 한다. 매일 똑같은 회로를 써서 생각하다 보니, 아무래도 마모되게 마련이고, 이윽고 경직되어 에너지가 늘 똑같은 부분만 통과하게 된다고. 또 그렇게 해서 나온 망상도, 기상천외한 것은 이야기로 꾸미는 데 노력을 요하기 때문에 자꾸만 쓰기 편한 것, 실용적인 것만 우선하게 된단다. 그러면 이미지가 빈곤해져 죄 이미 어디서 본 것만 같고, 난 이제 글렀구나, 하고 한숨을 쉬고 싶어진다단다. 아, 그렇군요. 당신도 절망하는 나날이 있군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작가가 여행을 많이 하는 것은, 평소 앉아서 하는 일이니 변화가 없는 단조로운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또 시간을 융통할 수 있는 직업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다들 여행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

라고 말하는 온다리쿠는 취재차 떠나는 영국 아일랜드 기행을 통해서 몇년후 영국과 일본의 전통이 혼합된 문화를 갖고 있는 가상의 나라 "V.파."가 나오는 작품 <네크로폴리스>를 낳은 것 같다.  

여행이 몇년 후 작품으로 지불이 된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가 그렇게 무서울 수 없었다. 끊어지지 않고 완벽하게 이어지는 선이 무서웠고, 군더더기 없는 플롯 바깥쪽에 있는 뭔가가 무서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데즈카 오사무 세계의 상층부에 있는 신의 시선이 무서웠던 것 같다.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에는 아주 높은 곳에서 인간을 내려다보는 냉엄하고 무색투명한 존재가 있다. 그 냉엄함이 어린 마음에도 무섭게 느껴졌던 것이리라. (중략)

그러나 논픽션이나 에세이의 경우는 다르다. 그곳에서 신은 그야말로 만물에 보편적인, 투명하고 냉엄하며 인간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높은 곳에 있는 존재이다. (중략)

나는 허구의 힘을 믿지 않는 작가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허구이기에 진실을 그릴 수 있다는 역설을 인식하지 못하고 ‘현실은 허구를 넘어섰다며’며 현실과 겨룬다든지, 허구 밖으로 나가 현실에 어중간하게 발을 담근다던지. 내 눈에는 ‘현실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은 되레 허구가 갖는 강한 힘을 부정하는 일처럼 보인다. "

"소재를 찾으러 가는 사람도 있을테고, 취재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처음 전업 작가가 됐을 때는 직접 여행지에서 본 것, 들은 것을 소재로 이용했는데, 근래에는 직접적으로 소재를 삼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오로지 뭔가 재미있는 이미지를 얻기 위해 돌아다닌다는 생각이 든다. "

"이상하게도 아이디어나 이미지는 늘 수면 밑에서 어른거리는데, 그것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은 우연히 그리고 갑자기 찾아온다.

잡을 듯 말 듯 잡히지 않는다. 모양이 잡히지 않아 애가 바짝바짝 탄다. 그래 놓고 일단 잡히면 세세한 부분까지 한눈에 보인다. 그렇기에 그 순간부터는 기쁘지만, 그때를 제외하면 거의 언제나 어두운 절망감에 시달리며 지낸다.

“다나베 세이코가 그것을 일컬어 ‘고양이 쓰다듬는 것 같다’고 쓴 것이 인상에 남아 있다. 고양이가 거기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양이는 좀처럼 순순히 쓰다듬게 해주지 않는다. 손을 살며시 뻗어 고양이를 쓰다듬는다. 그러면 고양이는 훌쩍 달아나버리고 손 끝에 감촉만 어렴풋이 남아 있다. 쓰다듬게 해주면 그나마 나은 편이고, 이쪽에서 다가가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손이 닿기 전에 달아나버리는 일도 왕왕 있다. 소설을 쓴다는 행위는 그런 느낌과 비슷하다는 이야기이다. 동감이다.

여행을 떠나면 고양이가 내내 곁에 있으면서 쓰다듬게 해 주는 것 같다. 게다가 한 마리가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고양이가 다가온다. 그렇기 때문에 고양이가 쓰다듬는 황홀감에 빠져 기분이 고조된다. "


"나는 별로 치밀하게 생각해놓지 않고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글을 쓰는 타입이다. 내내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처음부터 구상은 완성되어 있었습니까? 세세한 부분이 완성되도록 복선을 깔았습니까? 인터뷰에서 그런 질문을 자주 받는데, 거의 감에 의지해서 쓴다고 설명해도 이해를 못한다. "


"쓰지다 히데오 왈, 각본을 쓰는 것은 땅속에 묻힌 것을 파내는 일과 비슷하다. 그곳에 뭔가가 묻혀 있다는 것을 안다. 끄트머리는 보인다. 파다보면 무늬가 있다든지 돌기가 있다든지 한다. 그러나 전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끝까지 파봐야 안다. "


"하늘을 나는 교통 수단을 좋아하지 않는 탓도 있지만, 내가 철도를 좋아하는 것은 연속되는 감각이 좋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항상 중단되고 얼기설기 기워지고 누군가에게 시간을 빼앗긴다. 하나의 선을 이동하는 철도 여행은 자신의 인생이 연속된 한 순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흔치 않은 기회다. 차창 밖 풍경에는 온갖 이미지가 숨어 있고, 평소 쓰지 않는 뇌의 부분을 자극한다. 밤의 차장에는 자신의 솔직한 맨 얼굴이 비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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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3 16: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손톱 깨물기 지원이와 병관이 3
고대영 지음, 김영진 그림 / 길벗어린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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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아이가 좋아할 법한 책을 권하고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취향의 것을 읽히는 게 아닌가.




고대영 작가의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김영진 작가의 그림이 좋다. 실사에 가까운 그림이란 대개 사이버틱해서 정감이 쉽게 가지 않는데, 이 작가의 그것은 아주 따뜻하다. 이 작가의 그림이 에니메이션으로 나온다면, 아이들보다 내가 더 열광할 듯...




보통 그림책을 읽어주다보면, 세 살 터울 두 아이의 수준 차이 때문에 형 책 읽고, 동생 책을 읽거나, 그것도 협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누구 하나는 울고항의하면서 끝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고대영, 김영진 콤비의 책들은 세 살 아이도 형과 같이 본다. 책이 너무 고맙다. 

손톱 깨물기에 관해서라면, 육아를 하는 엄마 중 절반 이상은 애먹는 부분이 아닐까? (이거 또 일반화의 오류일까! ㅎ) 우리 아이들이 그랬다. 큰아이 다섯 살 때는 아이 손톱을 깎아준 기억이 없을 정도...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초조하거나 불안할 때는 잘근잘근한다.




이 책에도 지원이가 손톱을 깨물게 될 일련의 서사들 그리고 엄마의 당근책을 통해서 해결해 가는 과정이 보인다. 손톱을 깨물게 하지 않으려고, 붕대를 감거나 약을 바르다니, 그런 방법들은 생각해 본 적 없고,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못하게 해야 할 당위를 찾지 못했었는데, 내가 둔감한 엄마여서 그랬나 보다. 일주일 동안 손톱을 깨물지 않아 그게 자라면, 엄마가 상으로 48색 크래파스를 사주겠노라 비장의 카드를 제시한다.




육아란 그렇다. 회유와 협박의 적절한 하모니~




이 책을 읽고, 손톱 깨무는 버릇을 고쳤어요~ 하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이다. 당연하지.

되려, 이 책 속에서 누나 지원을 따라하는 병관이처럼, 책을 덮자마자 세 살짜리 둘째 아이가 대번 손가락을 입에 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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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생각해
이은조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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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쓰려고, 책 검색을 했는데, 책이 안 나온다. 이런 '나를 생각해'라고 읽고, 책 제목을 '너를 생각해'로 검색했다.  

일찍 퇴근을 한 날이면, 애들 밥 차려 주느라 동동거린다. 아이들을 봐 주고 계신 친정어머니가 하실 때도 있고, 그런데 오늘 저녁은 엄마가 외출을 하셔서 내가 저녁 준비로 부산했다. 아이들을 위한 영양식단은 아니고, 어쩌다 먹고는 하는 짜파게티- 짜장면 먹는 데이에 알라딘 특가로 주문한 것-. 중국 음식 시켜 먹는 분위기 내면서 맛있게 먹어주길. 이것은 ‘나를 생각해’ 차리는 식단이다. 얼른 니들 밥 먹이고, 나 볼일 있거든~ ‘나를 생각해’를 마저 읽고 싶거든!

작가의 첫 장편은 대개 자전적 이야기라고 하던데, 이 작가님도 약간의 자전적 요소를 가미했을 것이다. 그래서 연극하는 작가이자 기획자의 이야기를 엿듣게 된다. 무엇이 되었든 그 직업 세계에 대한 디테일함이라던지 통찰이 드러난 글이 좋다. 이 책에서도 있다! 협찬사를 만나는 자리에 대한 내용이 눈길을 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는 투자할 가치가 없을지언정 인간적 동정과 연민으로 투자할 수 있다 이런 계산이 나올 수도 있겠지요, 물론 소수이고 희박하다고 보는 게 맞지만 말입니다.”

‘팔을 흔들고 다리도 흔들고 머리도 흔들며 춤을 추었다. 몸을 흔들수록 알코올 기운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더 세게 몸을 흔들었다. ’  -협찬사와의 노래방에서... 안 처절한 것 같으면서도 처절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리고 또, 여자들의 연대 혹은 새로운 가족상을 생각하게 한다. 특히 첫째 딸이자 주인공의 언니 재영의 모습이...

나는 이 작품의 면면에서 작가가 <걸>이나 <마돈나>의 오쿠타 히데오 만큼이나 재밌게 직업인 삶을 풍자하는 소설을 쓸만한 저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암스테르담의 이언 메퀴언과 같은 섬세한 감수성과 잘 읽히는 문장을 쓰는 능력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같은 업종에 있는 사람하고는 연애 안 한다는 우리 주인공의 말에 토달 생각 없지만, 유안이가 오 연출가에게 여지를 두기를,,, 했는데, 이 정도면 열린 결말로 봐도 될 것이다. 옛사랑이 지나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사랑이 차지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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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1-05-20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꾸준하게 읽으시고 글을 올리시는구만요.
전 여행기도 하나 못쓰고 있답니다.ㅠㅠ

icaru 2011-05-23 08:37   좋아요 0 | URL
잉과장님도 꾸준히 읽고 있으실 것 같은데, 저도 마찬가지로 읽는 일은 하지만,,, 리뷰 쓰기는 잘 안 되더라고요~ 정색하고 쓰자면 쓰겠는데, 그건 또 품이 많이 들고~
그래도 항상 지향하는 마음은 '아주 얇팍한 글이라도 리뷰로 남겨야지' 하는거죠

프레이야 2011-05-22 0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 오랜만에요.
리뷰 반갑구요.^^
이 책 전 반쯤 읽었어요.

icaru 2011-05-23 08:39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 님, 저는 님의 댓글이 무척, 그리고 항상 반갑네요~
반쯤이시면, 오! 곧 리뷰를 만나리라..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배수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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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승전결도 갖추지 않았고, 시작은 있으되 끝은 알 수 없는 기존을 형식을 파괴한 소설을 잘 읽지 못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논외로 두고, 나 개인적으로는 그렇다. ‘이렇게 써놓으면, 참으로 포스트모던하구나 라고 느끼는 줄 아는가 본데, 뒷심이 딸리는 것마저 이것은 자기가 걷는 길은 모두 프론티어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자신감에서 나온것일 거야.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 책은 그런 의구심이 듦에도 불구하고, 책장 덮고도, 다시 열어보게 한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방금 그 흔히 말하는 센세이셔널 한 글을 읽었구나 하면서 느낌 충만해한다.

내가 한국 작가들은 읽어놓은 게 원체 부박해서 가난에 대해 천착한 작가의 글로서는 두 번째인 것 같다는 생각이다.

첫째는 단연 공선옥이고.

배수아 씨의 작품과 나의 인연은 그러니까, 대학 초년생 시절부터 거슬러올라가는데, 처음 읽은 작품은 “푸른 국도의 사과...” 어쭈구(제목을 검색해 보기조차 귀찮음은 뭔지) 하는 작품이다. 작가 사진에서 풍기는 어쩌면, 불온한 이미지도 이 작가의 글에 대한 호기심을 동하는 데 한몫했고. (작가 사진들은 하나같이 뭐랄까 정이현 만큼이나 예쁘다, 라는 소리는 쉽게 나오지 않는데, 길게 죽 이어진 눈꼬리 하며 딱 팜므파탈 같아 보여서 ^^;;;)

그 이후로 부주의한 사랑이라던가, 나는 네가 지겨워 같은 작품들을 읽었다. 꽤 가독성 있게!

나는 배수아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그녀가 지나치게 노후를 걱정하는 것이 작품에 반영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특히 푸른 국도에서 사과를 파는 할머니를 자신(작중 화자)의 미래와 오버랩시키는 부분이라던지....

아니나 다를까 작가의 말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도 이 생각과 맥락을 같이 한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만났거나 혹은 직접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빈곤을 읽었다. 가난을 겪은 사람이나 심지어는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 말고는 사람에게서 아무 것도 읽은 것이 없다고 말할 수조차 있다. 

그리고 이 작품에 나오는 인물 중 하나인, 예술계 저널리즘에 몸담은 20대 초반의 결혼을 앞둔 글자 노동자 또한 어디서 만난 것 같은 전형성을 띤 인물이다. 다음은 이 인물이 남긴 일종의 자기 고백 같은 글이다.

30년 넘게 살아오면서 나는 스스로를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나는 예술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원인으로 가장 큰 것은, 물론 내가 타고나지 않았다는 것도 있지만, 지금까지 일생 동안을, 그리고 중요한 성장기를 빈곤한 환경에서 보냈다는 점이다. 나는 물론 마음만 먹는다면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예술 노동자로 살아갈 수는 있다. 작문이나 미술 성적이 좋아서 학교에서 상을 탄 적도 적지 않다. 나는 글을 쓰고 단어를 선택하고 문장을 다듬고 어디선가 들은 듯한 구절이나 견해가 아니라 내 스스로의 언어로 말하려고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술가가 아니다.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문장이나 원고를 쓸 때, 그리고 그것이 발표되었을 때 나는 내가 어떤 카테고리 내의 답안을 쓰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했다. 나는 통용되는 기준에 적합한, 그러면서도 뛰어나 보이는 답안을 은연 중에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통용되는 것이 아닌, 즉 이리저리 배워서 알게 된 것이 아닌, 내 스스로의 기준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감히 바라지도 않았다. 나는 현세의 중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분명히 알 수 있는 문제이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예술가가 되고자 욕망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단지 분명히 알고 있는 것뿐이다. 나는 예술가가 아니다. 나는 빈곤의 기억에서 이렇듯 자유롭지 못하며 내 예술적인 행위의 흉내는 모두 그 기억에 대한 직접, 간접 반응일 뿐이다. 결국 환경의 영향에 반응한 결과물은 아무리 근사한 문장으로 잘 포장되어 있어도, 댄디인 척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어도 수동태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사고라고 믿고 있는 것이 열등감이든, 피해의식이든 허세이든 간에 바로 내 인격적 가난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것이 내 한계였다. 내 집안에는 알려진 한도 내에서는 지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중략

내가 본격적인 충격을 받은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였고, 내 토양이 황폐하여 인위적인 훈련이나 의지로 극복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대학 졸업학기부터 일하기 시작한 직장에서 아르바이트로 글을 쓰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나 또한 그것을 사적인 비밀로 간직하고 싶은 것은 진주를 만나게 되면서부터였다. 진주와의 결혼을 그토록 오랬동안 망설인 것은 가정을 가지고 허울뿐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편입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지만 아이를 낳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그것은 역시 다른 내 인생의 모든 견해들과 결정들과 마찬가지로 가난 때문이었다. 나는 내 사촌들이 반복되는 가난을 대부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을 보았다. 그 중에는 가장 안정된 일자리를 구한 케이스로 공무원이 된 사촌과 중학교 교사로 취직한 사촌이 있지만 굳이 사무직의 직업을 가졌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뭐 그다지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부모대부터 내려온 빚을 가지고 있었고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데다가 결혼해서 아이까지 딸린 상황이었다. 물론 그들이 지금 빈곤에 빠져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굳이 반복되어야 할 만큼 대단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것이다.




작가의 말

이것을 쓰게 된 가장 직접적인 동기는 빈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분명한 빈곤인 개인적으로 겪는 가난, 궁핍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지금 가장 중요하게 보이는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인한 자기애의 치명적인 상처 등이다. 어떤 시각으로 본다면 현재 빈곤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다. 보통의 경우라면  말이다. 그것은 더 이상 보편적으로 중요한 화제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내 경우를 말한다면 좀 다르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만났거나 혹은 직접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빈곤을 읽었다. 가난을 겪은 사람이나 심지어는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 말고는 사람에게서 아무 것도 읽은 것이 없다고 말할 수조차 있다.

모든 사람이 '일반적인 것'만을 써야 한다면 아마도 내가 잘못됐을 수도 있다. 한 전문가로부터는 '만일 네가 그랬다면, 정말로 빈곤한 것은 이 지상에서 너 하나뿐'이라는 조언을 들은 적도 있지만 뭐 나에게는 그렇다 해도 상관 없는 일이다. 빈곤의 범위는 점점 넓어지고 그 경계는 모호해지고 개념은 다양해져서 사회가 진보하고 복잡해질수록 빈곤 또한 따라서 팽창하는 듯하다. 게다가 심지어는 점차 추상적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빈곤의 모습들은 이것을 쓰는 내내 나를 자극했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터무니없는 욕심을 갖고 있기도 했는데, 빈곤과 마찬가지로 이 원고를 영원히 끝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두번째 유감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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