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우울 -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 우울의 모든 것
앤드류 솔로몬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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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은 그런 것들을 보게 한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종류의 회복력과 힘과 상상력이 존재하는지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우울증의 끔찍함 뿐 아니라 인간의 생명력의 복잡성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 받을 수 있다.  

우울증을 겪는 동안 꼭 명심해야 할 점은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아무리 기분이 저조하다고 해도 삶을 지속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저자의 말을 경청하게 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지독한 우울증 환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결점투성이의 사람이지만 우울증을 겪고 나서 전보다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우울증을 겪지 않았더라면 이 책도 쓰지 않았을 것이며, 우울증을 통해 가난하고 짓밟힌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심없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간추리면 이렇다. 글쓴이가 스물다섯 살 나던 1989년 8월, 어머니가 난소암 진단을 받으면서 그의 흠잡을 데 없던 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는 말한다. 어머니가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인생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을 것이라고. 그 사건이 조금만 덜 비극적이었더라도 어쩌면 발병은 없이 우울증이 성향들만을 지니고 살거나 아니면 나중에 중년의 위기 때 발병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어머니는 실용주의를 당신의 통제 불가능한 슬픔을 막는 힘의 장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껏해야 부분적인 효과만 있다. 어머니는 당신의 삶을 엄격히 통제하는 방법을 통해 우울증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 이제 생각하니 어머니가 질서에 그토록 맹렬하게 집착했던 것은 고통이 겉으로 표출되지 못하도록 억누르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내가 약물의 도움으로 쉽게 피할 수 있는 고통에 어머니가 평생 시달려 온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프다.

한편으로는 동요성 우울증이 따분할 정도로 전형적인 증상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특히 불안 증세는 끔찍해서 증오, 고뇌, 죄책감, 자기혐오로 가득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평생 그토록 덧없는 느낌에 사로잡혔던 적이 없었다. 잠도 못 잤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무섭게 화를 냈다. 그때 절교한 친구가 여섯 명이 넘는데 그 중 하나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던 여자였다.  


167쪽

정신은 뇌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지만 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것은 생물학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실용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저긴 문제이다. 미시간 대학교의 신경 과학과 명예교수인 엘리엇 벨런스타인의 말이다. 경험적인 것이 물리적인 거에 영향을 미치도록 이용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사우스캐롤라이나 의과대학 제임스 밸린저는 이렇게 말했다.

“심리치료가 생물학을 변화시킨다. 행동치료가 (아마도 약물과 같은 방식으로) 뇌의 생물학을 변화시킨다. 불안증에 효과가 있는 특정 인지 치료들은 약물 치료와 마찬가지로 뇌의 대사 수치를 낮춘다.  

밤마다 잠이 안 오면 잡념을 잊기 위해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모기에 물리기라도 하면 피가 날 때가지 잡아뜯었고 딱지가 앉으면 기어이 뜯어냈다.

218쪽

수면은 생체 주기의 주요 결정 요소이며 수면 패턴이 변화하면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의 분비에 혼한이 온다. 우리는 수면 중에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 상당 부분 밝혀냈고 수면이 우리의 감정을 일시적으로 하강시킬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것들의 직접적인 상관 관계는 알지 못한다. 수면 중에 갑상선 호르몬의 수치가 내려가는데 바로 그 때문에 기분이 저조해지는 것일까?
나는 우울증 시기에 낮잠의 욕구에 시달리곤 했었는데 낮잠은 깨어 있는 동안에 나아진 것을 무효로 만드는 역효과를 낸다.

277쪽

어린이들의 경우, 우울증이 성격 발달을 저해한다. 우울증과의 싸움에 전력을 기울이다 보니 사회적 발달이 지연되고 삶은 점점 더 우울해진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시 되는 세계에서 자신만이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350 쪽

사실 난 술에 취한 밤에 글이 잘 써지고 코카인에 도취해 있을 때 멋진 아이디어들이 떠오른다. 물론 항상 그런 상태에 있는 건 원하지 않는다. 내 임의대로 나의 상태를 조절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쯤이 좋을까? 지금 상태보다는 몇 단계 높여야 할 것은 분명하다. 나는 무한한 에너지와 빠른 정확성과 확실한 탄력성을 소망한다.

361~363쪽

자살은 힘겨운 삶의 정점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의식을 넘어서는 미지의 장소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 자신이 체험했던 유사 자살 시기를 돌아보면 당시엔 온당하다고 믿어 마지않았던 논리가 지금은 몇 해 전에 내게 폐렴을 안 겨 세균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마치 강력한 세균이 내 몸에 들어와 나를 점령했던 듯한 기분이다. 이상한 것에 공중납치라도 당했던 듯 하다.

죽음을 원하는 것과 죽고 싶은 거소가 자살하고 싶은 것 사이에는 미세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따금 죽음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슬픔을 넘어서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우울증에 빠지면 많은 이들이 죽고 싶어 한다. 현재 상태에서 적극적인 변화를 시도하기를, 의식의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살하고 싶어 하는 것은 특별한 에너지와 특정한 방향성을 띤 폭력성을 요한다. 자살은 수동성의 결과가 아닌 행동의 결과이다. 자살을 하려면 현재의 고통이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과 최소한 약간의 충동에 덧붙여 엄청난 에너지와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자살자는 네 부류로 나뉜다.

1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자살을 시도한다. 이들에게 자살은 숨쉬는 것만큼 긴박하고 피할 수 없다. 이 부류는 가장 충동적이며 특정한 외부 사건에 의해 자살에 이르기가 가장 쉽고 이들의 자살은 갑작스럽다. 수필가 앨버레즈가 자살에 관한 빛나는 명상서인 <야만적인 신>에 듯이, 자살은 삶을 통해서는 점차적으로 무디어질 수밖에 없는 고통을 “귀신을 쫓아내듯 몰아내려는 시도”이다.

2. 안락한 죽음과 반쯤 사랑에 빠져 있으며, 자살이란 것이 철회 가능한 행도이기라도 하듯 복수하기 위해 자살을 기도한다. 이 부류에 대해 앨버레즈는 이렇게 설명했다. “여기에 자살의 어려움이 있다. 이것은 야망을 넘어서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야망에 찬 행위이다.” 이들은 죽음을 향해 달려갈 때 삶에서 멀리 달아나지 않는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존재의 종말이 아니라 소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3. 죽음이 견딜 수 없는 문제들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라는 그릇된 논리에서 자살을 기도한다. 이들은 선택 가능한 방법들을 고려하고 자살 계획을 세우고 유서를 쓰고 외계로의 여행이라도 계획하는 것처럼 관련 실무자들과 접촉한다. 이들은 죽음이 자신의 상황을 개선해 줄 뿐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짐도 덜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은 대개 그 반대인데도 )

4 합리적인 논리에 따라 자살을 기도한다. 이들은 육체적인 질병이나 정신적인 불안정이나 환경의 변화로 인한 괴로움을 겪고 싶어 하지 않으며 삶의 기쁨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현재의 고통을 보상하기에 충분하다고 믿는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예단은 정확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지만 망상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아무리 많은 항우울제의 사용으로도 그들의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

사느냐 죽느냐 . 글의 주제로서 이것보다 더 많이 쓰인 것도 없지만, 이것처럼 사람들의 입에 올리기를 꺼리는 화자도 없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그 결정은 그곳에 들어서면 아무도 돌아올 수 없는 미지의 땅 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도, 이상한 체험의 영역으로 기꺼이 모험의 발을 내딛고자 하는 이들도, 전혀 알려진 것이 없는, 두려운 것이 많으면서도 모든 것을 희망할 수 있는 상태로 가기 위해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견뎌야 한ㄴ 이 세계를 그리 기쁘게 떠나지는 않는다. 햄릿의 말처럼 ’분별심은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들며 결단은 창백한 사색으로 인해 본래의 색조를 잃고 흐릿해진다. 여기서 분별심은 의식을 의미하며 겁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존재하고 통제력을 갖고 행동하고자 하는 잠재적인 의지를 통해서도 소멸에 저항한다. 더욱이 스스로를 인정한 정신은 그것을 다시 부정할 수 없고 이것은 자기 성찰적인 삶이 파멸을 부른다는 견해와 반대된다.

“창백한 사색‘은 우리 안에서 자살을 막는 것이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은 아마도 절망에 빠졌을 뿐 아니라 순간적으로 자의식을 잃은 것이었으리라고 볼 수 있다.  만일 자살이 목적이라면 진정으로 의식적인 자아는 옆으로 젖혀 놓아야만 한다. 존재하는 것과 무가 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라고 해도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존재는 체험의 부재는 이해할 수 있지만 주배 그 자체는 이해할 수 없다. 생각이라는 것을 한다면 그건 존재하는 것이니까. 건강한 상태에서의 내 견해는 죽음 저편에는 영광이 있을 수도 평화가 있을 수도 공포가 있을 수도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으며 그것을 알기 전에는 모험을 걸지 말고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이렇게 말했다. “진정 심각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며 그것을 바로 자살이다.” 실제로 20세기 중반에 많은 프랑스인들이 이 문제에 대한 탐구에 생을 바쳤으며 실존주의라는 이름으로 과거에는 종교가 충분한 대답을 제공했던 질문들에 매달렸다.


606쪽

우울증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들 가운데 가장 설득력이 강한 것은 우울증이 유익한 기능들을 수행하는 메커니즘의 불발이라는 주장이다. 우울증은 대개 슬픔에서 생겨나는 슬픔의 변종이다. 멜랑콜리를 애도와 분리해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우울증의 원형은 슬픔 속에 있다. 우울증은 우리에게 유익한 매커니즘인 슬픔이 장애를 일으킨 것일 수 있다. 심장은 우리가 다양한 환경과 기후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온몸에 피를 공급한다. 우울증은 손가락과 발가락에 피를 공급하지 못하는 심장처럼 더 이상 고유의 장점을 갖지 못한 극단 상태이다.

슬픔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나는 슬픔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애착의 형성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두려움을 느낄 만큼의 상실감을 겪지 않는다면 강한 애정을 가질 수 없다. 사랑이 깊고 넓어지려면 슬픔이 개재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존재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려면 (더 나아가 그들을 도우려는) 마음은 종의 보존에 기여한다. 사랑은 우리가 세상의 고난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계속 살아 있게 만들어 준다. 만일 우리가 자의식만 키우고 사랑은 키우지 않았더라면 인생의 돌팔매와 화살을 견딜 수 없었으리라.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결과를 본 적은 없지만 사랑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삶에 대한 집착도 강하고 사랑 받기도 쉬우리란 것이 나의 믿음이다. 케이 제미슨의 말을 들어보자.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문제가 없는 곳이라기보다는 무한한 강렬함과 다양성이 있는 곳으로 여긴다. 우리는 감정이라는 연속체의 극단을 제거하고 싶어 하긴 하지만 그것을 두 동강 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고통을 겪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과 감정의 폭을 갖지 않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미세한 차이만이 존재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받기 쉬운 상태가 되는 것이고, 그런 상태를 거부하는 것은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다.  


631쪽 

나는 이 책에서 내 친구들의 약혼자와 남편 같은 사람들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았다. 자료 조사 과정에서 나는 부정적인 느낌을 주거나 아무 느낌도 주지 않는 우울증 환자들을 많이 만났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쓰지 않기로 했다. 칭찬하고 싶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쓰기로 했다. 그래서 이 책에는 대부분 강인하거나 똑똑하거나 끈질긴 인물들이 등장한다. 나는 표준적인 인간이란 것이 존재한다거나 소위 원이란 것이 모든 진실을 아우른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중략) 나는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한 노인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울증 환자들에게는 이야깃거리가 없어요. 우리는 할 얘기가 없어요.”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으며 특히 진정한 생존자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제공할 수 있다. (중략) 어떤 이들은 가벼운 우울증에도 완전히 무능력자가 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어 낸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물질 남용에 대해 연구하는 데이빗 맥도웰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그런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덜 고통스러워서가 아니다.” 절대적인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638~639 쪽

사실 실존주의는 우울처럼 진실하다. 인생은 헛되다. 우리는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사랑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육체적인 개체성으로 인한 고립은 피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이루든 우리는 결국 죽게 된다. 이런 현실들에 굴하지 않고 인생의 다른 면들을 보면서 계속 추구하고 모색하고 꿋꿋이 견디는 것이 진화에서의 선택적인 이점이다. 나는 르완다에서 학살당하는 투치 족과 방글라데시의 굶주린 무리들을 본다. 그들은 가족과 친구들을 모두 잃었고 돈도, 먹을 것도 없으며 고통스러운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개선의 가망이라곤 없는 이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내가 보지 못하는 미래상 때문일 수도 있고 존재를 위한 싸움을 지속하게 만드는 맹목적인 생명력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울증 환자들은 세상을 너무도 명료하게 보기 때문에 맹목성이라는 선택적 이점을 상실하고 만다. (중략)

우울증을 겪은 뒤 안정을 되찾은 사람들은 일상의 즐거움에 대한 감수성이 강한 경향이 있다. 그들은 삶의 긍정적인 면들이 지닌 진가를 절실히 느끼고 그것들에 대해 쉽게 희열에 젖는다. 원래 너그러운 인물이었다면 우울증을 겪은 후에는 더욱 관대해진다. 물론 다른 질병에서 회복된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만 말기 암에서 기적적으로 희생한 이라도 중증 우울증을 체험한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기쁨을 느끼고 주는 능력’은 갖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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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6 10: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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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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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리 소설, 이야기 전개 및 사건과 복선 모두, 이렇게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면 정말 훌륭한 거라고 본다. 비단 작품의 완결성이랄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태 비판까지 더불어 하고 있는데, 소위 말하는 ‘명문 학교 입시’ 문제다.

여기서 잠깐 딴소리하자면, 이 책도 그랬지만, 갑자기 부모 노릇 한다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이냐 하는 생각이 엄습하는 일이 있었다. 퇴근길에 차를 얻어타곤 했던 차장님이 계시다. 50대 중반의 아줌마 차장님이시다. 차장님에 대해서 회사 사람들은 보통 ‘재력가’, 혹은 ‘재산가’라고 표현한다.

강남 도곡동에 타워팰리스 준하는 그런 아파트에 사신다. 훗날 우리집이 차장님의 퇴근하는 길목에 있다는 - 남부 순환로를 타고 가다가 낙성대 역에서 내려 주시고, 강남 방면으로 주욱 가시면 되니까, - 게 계기가 되어 차를 얻어 타고 퇴근을 하게 되면서 차장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재산가’라 명명되는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차장님의 요지는 그런 거였다. 결혼을 하고 신혼집을 그 쪽에 마련했던 게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지금이야 그렇게까지는 아니지만, 재개발 재건축이 큰 시세 차익을 가져다주었고. 동네를 중심으로 사람들과 교제하다 보니, 펀드라던지 주식으로 수익을 볼 수 있는 정보도 얻게 되었고, 본인의 노력이라기보다는 주변에서 물어다 줬다는 거였다.

또, 돈이라는 게 모으고자 알뜰살뜰 저축해서 되는 게 아니고, 우연찮은 기회에 복이 굴러온다는 그런 이야기가 되겠다. 종자돈 있는 상태에서 큰돈 번 사람들이 으레 하는 얘기라며 귓등으로 들을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올초에 차장님에게 불운한 일이 생겼다. 부군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신 것이다. 심근경색인가 뇌졸중인가 고혈압?? 아무튼 이런 질환으로 급하게 입원을 하셔야 했다. 차장님은 회사일 때문에 간병인을 두어야 했고 차장님 여동생이 번갈아 환자를 돌보고 있다. 

차장님은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그 아이가 올 수능시험을 본 고3이었다.

차장님은 그 전에도 항상 딸에 대한 걱정이 많으셨다. 나이 마흔을 코앞에 두고, 얻은 딸. 결혼이 워낙 늦으셨고, 아이도 가질까 말까 하셨다고. 딸을 낳기 전에 한번 유산이 된터라, 아이를 꼭 낳아야겠다는 간절함도 없으셨단다. 아무튼 그렇게 생긴 외동딸이 이제 대학 가야 하는데, 공부를 안 해서(못해서가 아니고) 큰 걱정이라고 했다. 영어나 국어 같은 언어 계통은 곧잘 하는 것 같은데, 수학이 형편없어서 고액 과외를 시킨다고 했었다. 그렇다고 다른 과목은 안 시키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언어 영역 과외도 중학교 때부터 동네 아이들과 팀을 짜서 하고 있는 거 계속 하고 있고, 영어도 물론이고 말이다.

대학이나 갈 수 있을까 걱정이라고 늘 말씀하시고, 부군 님께서 쓰러지셨던 최근에는 아이가 어른들 경황이 없어 공부하라는 사람 없으니까, 아주 살판났다며 푸념하셨었다.

차장님이 딸의 진학 때문에 걱정하실 때마다 나는 “그래도 문과 계통을 잘 한다니, 수시나 특별 전형엔 유리하지 않을까요?”라며 늘 좋은 쪽으로 말했었는데, 넋두리하시는 차장님에게 딱 잘라 “아이의 실력을 인정하시고, 부담 주지 마시고, 현실을 받아들이셔야죠!”라고 할 수는 없는 거니까. 그런데 정말 이렇게 얘기했더라면 큰일날 뻔했지 뭔가.

수시 1차 합격했다는 ( 수능에서 2과목만 2등급이상이라 최종합격 ) 결과가 나왔단다. 수시 합격? 이대 국어교육과 8명 뽑았다는데.

그 소식을 전해 준 친구에게 “ 차장님 딸 맞아?” 하고 확인했었다. 분명 대학을 들어갈 수 있을까 걱정이라고 하셨었는데, 그 대학이란 어디를 기준으로 해서 말씀하셨던 걸까?

아, 자식의 성적... 이 민감한 사항에 대해 남들에게 이야기할 때는 이렇게 한 자락 깐 다음에 말해야 하는 것이 통상적인 것일까?

본 책 내용하고 관련이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쓸데없는 소리이긴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부모 노릇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하는 것만 절감절감이다. 


286쪽 

“누가 범인인지 우리는 몰라. 우리 스스로가 해온 짓을 생각하면 당연히 아이들이 나쁜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해. 에리코 씨가 우리 비밀을 눈치 채고 증거까지 모아두고 있었던 건 우리에게 치명적이었지. 만약 그녀가 살해되기 전에 그 사실을 알았다면 나도 그녀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주길 바랐을 거야. 그래서 나는 쇼타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자신이 없는 거지. 우리 스스로가 자신이 없어서 아이들을 믿을 수 없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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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가쿠타 미쓰요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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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을 읽는 이의 십중팔구는 나와 책의 개인적인 사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도 리뷰가 될 수 있다면  쓰려고 했었는데 작가의 글을 읽고 나서는 그만... 그녀가 대신 다  해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글

평범하지 않고 좀 이상해 보이는 연인이 있다면, 주위 사람들은 ‘저 사람들 좀 이상하네.’ 또는 ‘정말 좋아하나 봐.’ 그렇게 제멋대로 얘기하다가도 결국 ‘둘의 문제’로 이해해 버리곤 한다. 둘의 관계는 그들 둘 밖에 모른다. 이상하게 보여도, 분명히 그 사람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연인이나 부부라는 게 어떤 건지 우리는 알 도리가 없다. 연애라는 것은 사실 지극히 사적인 것이라, 내 경험을 기준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어떤 순간도 그 기준은 한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다.

나는 헤어진 애인과 대부분 친구가 된다. 현재 애인과도 만나게 하고 둘이 술을 마시게도 한다. 나는 그런 게 일반적이라고 생각했다. 헤어졌으니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쪽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것 같다. 아직 미련이 남아서, 다시 만나면 마음이 흔들릴까봐 못 만나는 게 아닐까? 나는 헤어진 사람에게는 눈곱만큼도 미련이 없고 만나도 상관할 게 없으니 그저 평범한 친구가 된다. 하지만 몇몇 친구는 그런 내 생각을 이상하다고 했다. 옛 애인과 만나야 하는 현재 애인이 아무렇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애인도, 전 애인을 만나는 일이 평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아무 문제도 없다. 전 애인과 친구가 되는 게 이상하다는 사람은 전 애인과 헤어지면 만나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경우 ‘당연’하다는 것은 커플인 두 당사자가 공통적으로 인식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쩌다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책과의 관계도 이와 똑같다고 얘기하고 싶다.

운동을 한다, 게임을 한다,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온천에 간다. 그런 일들과 책을 읽는 것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운동이나 게임을 하지 않아도,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아도, 온천에 가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뭔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 중에는 책 읽는 행위도 포함된다.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은 그런 행위 속에서 가장 특수한 사적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누군가와 일대일로 교환될 정도로.




책을 읽는 가장 큰 재미는 그 작품 세계에 들어가 온 힘을 다하는 것이다. 한번 책의 세계에 빠지는 흥분을 알 게 된 인간은 평생 책을 읽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 가장 원시적인 기쁨을 이미 유치원에서 얻었던 것이다.




내가 사는 집 옆에는 작은 서점이 하나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시골에 종종 있는, 책을 팔지 않는 서점이었다. 만화와 주간지, 여성잡지에 만화 잡지, 거기에 문방구, 계산대에는 향기가 나는 지우개 함이 있는.

버스를 타고 도시로 나가면 책을 파는 서점이 있었다. 아주 큰 서점. 옷은 필요 없으니 책을 사 달라고 졸랐을 때 어머니가 데려갔던 곳이었다. 책이 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가장 좋아했던 곳도 도서관이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노란색 카펫,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던 수많은 책, 유리창과 그곳에서 들어오는 햇살, 도서 담당 선생님의 목소리와 웃는 얼굴.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시시하고 재미없는 책과 만났다. 그때 나는 입원해 있었는데, 이모가 그 책을 가져다 주었다. 책이라면 무엇이든 좋았기 때문에 받자마자 읽었다.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내게 재미없다는 말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였다. 크고 컬러로 된 책이었다. 마지막까지 읽고 재미없다는 결론을 내린 나는 그 책을 놓아두고 다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책은 읽었다. 읽긴 읽었지만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때의 밀월과는 조금 달랐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책의 세계보다 현실이 더 정신없었던 것 같다. 나는 아주 작은 세계에서 살았는데도 나이와 나 자신, 매일, 친구, 늘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는데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더 쉽게 표현하면 책보다 새 옷이 필요했고, 대형 서점보다 더 가슴 뛰게 하는 장소가 곳곳에 출현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친한 친구가 책 한 권을 주었다. 그림이 있는 작은 책이었다.

나는 그것을 단숨에 읽고 굉장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세계로 데려다 주는 것만이 아니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그것은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내가 병원 침대에서 재미없다면 내던진 <어린 왕자>였다. 8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받게 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재미없는 책을 읽어도 ‘시시하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게 됐다. 이것도 역시 사람과 같다. 100명이 있으면 그만큼의 개성이 존재하고, 또 그만큼의 얼굴이 존재한다. 시시한 사람이란 없다. 유감스럽게도 서로 맞지 않는 사람이 있고 외모에 대한 취향도 다르지만, 그것은 상대가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쪽이 안아야 하는 문제이다. 시시한 책은 그 내용이 시시한 게 아니라 서로 맞지 않거나 이쪽의 편협한 취향에서 벗어났을 뿐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나면 맞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상대와 우연한 기회에 무척 가까워지는 경우도 있고, 이쪽 취향이 변하는 경우도 있다. 시시하다고 치부해 버리는 것은(그것을 쓴 사람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책에 실례를 범하는 일이다.




그건 그렇고, 조금씩 책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나는 대학생이 되어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맛보게 된다. 나는 문학부의 문예 전공이었다. 같은 문학 수업을 듣는 동기나 전공 동기 모두 나보다 50배나 많은 책을 읽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이 당연하게 입에 올리는 작가 이름을 전혀 몰랐다. 그들의 입에 오르는 책 제목도 거의 들은 적이 없었다. 책이 너무 좋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 생각하며 그 대학의 그 과에 들어갔는데 내가 읽은 책이란 턱도 없는 수준이었다.

충격을 받은 나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과는 친구가 되지 않기로 했다. 상처만 받았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이야기나 연애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어울려 놀러 다녔다. 그리고 얻어들은 미상의 작가나 책을 남몰래 읽었다.

무식해서 좋았던 점은 이 시기,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책을 만났다는 것이다. 나는 동기들이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작가의 소설을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작가들의 품만 샅샅이 뒤져 읽었다.

이제까지 나는 말을 잘하기 위해, 순수하게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읽은 경우는 없다. 15년에 걸쳐 깨달은 것이다. 세상에는 나보다 500배, 1000배나 많은 책을 읽은 사람이 존재하고 그런 사람을 쫓아가려 해도 소용없다. 그런 일을 할 여력이 있다면 지식 같은 건 없어도 상관없는, 나를 부르는 책 한 권을 읽는 게 낫다.

그래, 책은 사람을 부른다.

아주 재미있는 책을 만나면 나는 읽으면서 자주 생각한다. 혹시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어찌 되었을까?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이 책이 없었다면, 이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확실히 내가 본 세상은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이 있어서 좋았다. 다행이다. 친구가 없는,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한, 덜 떨어진 아이처럼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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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 미술, 패션, 인테리어 취향에 대한 내밀한 탐구
박상미 지음 / 마음산책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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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쪽

취향은 때로 심오하게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어떤 것이다. 어떤 친구와 같이 놀고 싶지 않으면 “넌 왜 그렇게 옷을 못 입니?”라든가 “너의 독서 취향은 왜 그 모양이니?”라고 취향을 무시하는 몇 마디를 던지면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 차별적으로 좋아한다는 것은 내가 타인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딸기를 좋아한다고 치자. 딸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나를 얼마나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줄지는 의심스럽지만, 누군가 내가 딸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이에 대해 비판적이라면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상하고 만다. 어떤 음식을 차별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한 개인의 엄숙한 선언과도 같고, 어떤 불가침의 영역처럼 존중되는 것이다.

 

56~57쪽

이번 뉴 뮤지엄의 전시가 신선했던 건 보여주고자 하는 톤 때문이다. 현재 예술계를 정의하는 트렌드와는 달리 이 저시는 어둡고 심각하다. 지난 아무리 쇼에서도 후마 바바의 작품을 보았지만, 번쩍거리는 아무리 쇼에서 그 작품은 팔리기 위해 존재했다. 이번 전시회의 어두운 조명 아래서 비로소 작가의 작품이 제대로 보였다. 새삼스런 얘기지만 미술관의 일이란 우리가 작품을 감상하는 적절한 환경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적당한 공간, 온도와 습도, 조명, 그리고 맥락. 어떤 전시를 하는 것 자체가 이 세상 속에 특정 작품들이 설 수 있는 맥락을 제공하는 것이고, 각각의 작품들은 그 속에서 어떤 식으로 기획된 전시라는 맥락을 갖는다. 어떤 전시냐에 따라, 관객들이 작품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작품의 존재와 의미는 변한다. 그렇게 해서 변용을 거친 작품은 다시 작품을 보는 관객과 전시와 세상의 각도를 조금 틀어놓기도 하는 것이다. 




72쪽 

한 벌의 드레스에 대한 환상이 꼭 황당한 건 아니다. 엄청난 양의 쇼핑을 일삼던 여성이라도 결국은 고작 몇 벌, 대개 한 벌의 드레스로 기억된다. 코코 샤넬조차 수많은 옷을 만들었지만 정작 그녀를 떠올리면 진주 목걸이를 내려뜨린 검정색 드레스가 떠오르지 않는가. 실제로 19세기 프랑스 작가 조르주 상드의 ‘패션’ 전략은 한 벌의 드레스였다. 말 그대로 딱 한 벌만 입었던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같은 스타일의 검정색 실크 드레스만 입었다. 이유는 패션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것. 시간뿐 아니라, 다른 여성들과 경쟁하듯 치장하는 데 드는 정신적 에너지조차 아까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티에 초대를 받을 때는 꼭 내실을 요청했다. 현명한 사상가들과 친지들을 따로 불러, 쓸데없이 치장을 할 빌미 자체를 없애기 위한 거였다. 조르주 상드가 돈이나 취향이 없어 한 벌만 입은 게 아니라 일종의 전략으로 그렇게 했기에 내가 패션이란 말을 썼지만, 한 벌의 옷만 입는 건 엄격한 의미에서 패션이 아니다. 패션이란 것의 전제가 새로운 스타일에 대한 갈망과 ‘필요’ 이상의 것들을 소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78~81쪽 

그 여자의 옷 입기 - <토니 타키타니>(2004)

책장을 넘기는 속도로 진행되는 영화 <토니 타키타니>엔 하루키의 원작엔 없는 장면이 살짝 삽입되어 있다. 토니가 슈퍼마켓에서 쇼핑을 하는데, 옆에서 쇼핑을 하던 젊은 여자가 오렌지 더미 옆을 지나자 갑자기 오렌지가 와르르 무너진다. 주인이 달려오자 그녀는 옆에 이떤 토니를 보며 붇는다. “내가 그런 거 아니죠? 맞죠?”

<토니 타키타니>의 인물들은 ‘오렌지가 무너지는 세상’과 직접적인 연루를 피해 가며 사는 사람들이다. 영화에선 폐쇄된 공간, 감옥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영화 속 인물들이 각자 나름의 상자 안에 갇혀서 살고 있다는 걸 암시하는 듯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금씩 그렇겠지만, 이는 특히 일본인들의 삶의 조건을 보여주는 데 적당해 보인다. 벤토 박스에 점심을 먹고 성냥갑처럼 작은 집에 들어가 잠을 자는.

태어난지 며칠 만에 엄마를 잃은 토니는, 미국식 이름 때문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다. 혼자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나중에 미술 대학에 진학하는데, 다른 학생들처럼 데모도 안 하고, 인간의 감정을 담은 예술에 대해선 ‘조악하고 미숙하고 부정확하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복잡한 기계를 사실적으로 그리는 일에 몰두한다.

그러던 토니가 “외로움은 감옥과도 같다.”라는 사실을 처음 느낀 건 사랑에 빠졌을 때다. 그런데 토니는 다른 것도 아니고 한 여자의 아름다운 옷 입기에 매료된다. 그는 여자가 “먼 곳을 향해 날아오르는 새처럼 옷을 입고 있었다.” 라고 자신의 인상을 고백한다.

토니가 옷 입기를 칭찬했을 때 여자는 옷은 자신의 빈곳을 채워주며 월급의 대부분을 옷 사는 데 써버린다고 고백한다. 토니가 여자와 결혼하고 자폐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누군가와 함께 있는 행복감에 젖는 순간, 아내의 쇼핑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내가 다른 것엔 관심이 없고 쇼핑에만 몰두하는 것도 자폐적이지만 좀 다른 데가 있다. 토니는 아내가 쇼핑을 할 때면 “얼굴 표정이 변하고 목소리까지 변한다”는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녀가 샀던 옷을 되돌려주고 돌아오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는 것은 “쇼핑을 그친 여자는 존재할 수 없다.”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토니의 아내에게 패션과 쇼핑은 그 자체로 실제하고 텅 빈 현실을 대체해줄 수 있는 하나의 ‘자족적’인 생존 방식이다. 직장이나 집에서의 일들이 존재의 유일함을 매순간 거스르는 하잘것없는 것이어도 쇼핑몰을 찾으면 애기가 달라진다. 브랜드 이미지가 가장 앞서가면서도 배타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약속해주고, 크레디트카드의 구매력은 그 세상 속에서 그녀의 위치와 권력을 보장해 준다.  




96~97쪽

아침에 그라놀라에 얹어 먹거나 팬케이크에 곁들여 먹기에 딸기만큼 예쁘고 맛있는 것이 없다. 친지를 불러 저녁 식사를 할 때도 디저트로 가장 만만하다. 딸기와 산딸기, 블루베리와 블랙베리를 화이트 와인과 설탕에 절여 하룻밤 재운 후 민트 잎사귀를 띄워 내면 그럴 듯한 디저트가 된다. 이도 저도 귀찮을 때는 딸기를 한 아름 사다가 커다란 그릇에 가득 담아낸다. 여기서 포인트는 사람들이 작게 ‘와’ 할 정도로 많이 담아내는 것이다. 모두들 그저 한두 알 집어 먹어도 상관없다. 그 탱탱하고 빨간 딸기들이 놀랄 정도로 많이 담겨 있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디저트는 먹는 거나 다름없다. 꽃이 있는 식탁에선 밥을 조금 먹어도 배부르고 행복한 것과 비슷한 이유다.




106~107쪽

사람들이 좀 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서 개인 차원의 미적 분별력이 중요성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17~18세기경 영국인들의 취향에 관한 발언들을 보면 재미있다. 영국의 한 철학자는 취향이란 영혼에 달린 액세서리 같은 것이라 했고, 한 작가는 취향이 생기는 순간 악덕과 무지는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 했다. 그 시대는 취향이라는 말이 교양이나 사회적 매너까지 아울렀다고 할 수 있다.

취향이 갖고 있는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오늘날 취향은 대개 소비의 문제로 귀착된다. 취향이란 결국 내가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 소비할 때 드러나는 것이다. 

숨길 수가 없다는 건 취향의 나쁜 점이자 좋은 점이다. 언제든지 돈으로 ‘좋은 취향’을 살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그 취향이 근거가 없다면 어디서든 드러나게 된다. ‘고급 취향’을 통해 자니의 경제 능력이나 지위, 뛰어난 감각을 뽐내려 노력할 때 조차 그 상대에 따라 하릴없이 자신의 몰취향을 드러낼 수도 있으니 얼마나 낭패인가.

어린 시절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아는 것은 자신의 ‘타고난’ 방향성을 자신과 남에게 알리는 차원에서 유의미하지만 어른이 되어서까지 단순히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로 버틸 수는 없다. 느끼고 배우지 않은 인간을 상상할 수 없듯이, 미적 경험과 교육으로 연마되지 않은 취향이란 취향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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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神신 엄마가 만든다 - 수학으로 서울대 간 공신 엄마가 전하는 수학 매니지먼트 노하우!
임미성 지음 / 동아일보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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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도서]  

 

이 책은 크게 다섯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내 맘대로 구분)

첫째, 수학 상위 3퍼센트, 수학의 신 만드는 엄마의 전반적인 노하우
둘째, 세 살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수학적 바탕을 완성해 주는 노하우
셋째, 초등학교 1, 2, 3학년 수학 실력 키우기의 실제
넷째, 수학 메니저, 어떻게 할 것인가?
다섯째, 케이스별 맞춤 상담(Q&A)

올해로 네 살이 되는 29개월짜리 아이가 있는 엄마로서, 셋째, 넷째 파트는 아직 큰 실감을 느끼지 못하는 내용이기는 하다.

그리고 둘째 파트 ‘세 살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수학적 바탕을 완성해 주는 노하우’ 부분에서 “ 은물(恩物)과 가베는 공간 지각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거의 모든 기하학적 개념의 출발은 그 교구들을 통해 설명이 가능하다. 가베 등 교구를 많이 가지고 논 아이들은 수나 언어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진다. 지능 발달, 창의력 계발, 정서적 안정, 집중력 향상 등 다양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실제로 교구를 많이 다뤄본 아이들은 크기, 거리, 위치 등의 이해가 빠르고, 고학년이 되어서도 도형 부분에서 어려워하지 않는다.” 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사실 많이 부담스럽다. 요는 수학적 바탕을 완성해 주기 위해서는 물심양면의 부모의 뒷받침이 필요한데, 이 부분은 물적인 제공에 대한 부분이다. 모든 교구는 하나하나 다 유용하니, 능력이 되는 한도 내에서는 다 사주라는 의미가 되겠다.

셋째, 넷째 파트는 집에 아이가 자람에 따라 좀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는 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전반적으로 크게 공감했던 내용은 아이와 수학 공부를 시작할 때에는 머릿속을 비우고 아이에 대한 선입견은 모두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만해도 아직 어린 아들이 또래보다 퍼즐이나 블록 쌓기 놀이 등에 흥미를 전혀 보이지 않아, “혹시 쟤가 날 닮아 수학머리는 꽝 아니야!” 하고 지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건 엄마 자신이 수학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최소한 다음과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

아이와 함께 실생활에서 수학이 활용되는 것들을 찾아보고, 우리의 삶이 수학 덕분에 어떻게 편리해지고 유익해졌는지 알아본다. 수학에 관심이 있는 엄마들의 아이일수록 수학을 더 잘하는 것은 생활 전반에서 수학을 접할 기회를 더 많이 주기 때문이라나.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수학을 못하는 첫 번째 이유는 수학 공부를 안 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공부하는 습관이 전혀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란다. 수학 공부에 지름길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가야 할 길을 끝까지, 행복하게 잘 갈 수 있도록 고민하는 것이 엄마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사실 영어를 공부시키기 위해 갖은 아이디어를 다 짜내면서도 수학을 공부시키기 위해 그런 노력을 하는 엄마는 드물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아이와 함께 실생활에서 수학이 활용되는 것들을 찾아보고, 우리의 삶이 수학 덕분에 어떻게 편리해지고 유익해졌는지 알아볼 수 있는 실제 구체적인 사례들이 많이 등장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다섯살 이상 초등3학년까지의 자녀를 둔 부모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잠시라도 엉덩이를 붙이고 있지 못하는 아이들은 종이 접기, 블록이나 칠교판 등 이왕이면 좋아하는 놀이를 통해서 공부 같지 않게 공부를 하도록 유도하는 게 좋다. 간간이 숫자 노래도 부르고 문제와 연관된 게임도 만드는 등 처음엔 엄마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대체적으로 수학을 잘하는 아이들은 특유의 근성을 지니고 있다. 자존심이 강해서 스스로 생각해서 풀려고 하지 가르쳐달라는 소리를 잘 하지 않는다. 이렇게 수학적 근성이 강한 아이로 키우려면 생활 속에서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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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설 2009-01-12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찬이 월령에서는 <국제적 우등생은 10살 이전에 키워진다> 보시면 수학에 관해 조금 더 도움되는 말이 있을거예요. 제목이 거시기 해서 그렇지 기회되시면 빌려 보시든지 하면 좋을거예요.

icaru 2009-01-12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설 님, 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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