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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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꽤 재미있게 읽었지만, 치밀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든다. 어어어, 하면서 막 스피디하게 책장을 넘기기는 하는데, “주인공 너는 왜? 이렇게 나락으로 나락으로 향하고 있는거니? 뒤에 가면 나오려나?” 싶은 거. 작중 인물이 행동을 이끌어 내는 데 대한 동기 부여랄까, 그런 게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점이 감상을 약화시킬 수도 있겠다.

주인공 미로가 사랑했던 남자 나루세는 왜 미로의 친구 요코를 죽였으며, 미로가 나루세를 어떤 경로로 경찰에 밀고해 버렸다는 것일까? 나루세가 형을 마치게 될 때까지 기다려서 나루세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는 과연 무엇이었으며, 감옥 안에서 임기를 마치고 있을 줄 알았던 나루세가 몇 년전 자살을 했고, 의붓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미로에게 전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의붓아버지를 죽여야겠다는 발상을 하게 되는 것은 또 어떤 사연이 바탕에 깔려서일까?   ------> 정확히 2년이 지나고, 그의 작품 얼굴에 흩날리는 비 라는 이 시리즈의 첫 작품을 읽고 이해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정말 물만두 님 말마따나 첫작품부터 나왔어야 할 것을...

그런데 내가 납득할 법한 사연 같은 것은 없더라는....  내가 납득하고 자시고는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실제 그런 삶도 맹목적인 삶도 있을법하다. 복수만을 생각하며 한걸음 내닫는 삶, 다 접고 손 안의 몇 십만 엔을 밑천으로 낯선 도시 혹은 다른 나라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은 스산한 욕망만 남은 삶.    


/

"왜 자식을 찾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재난이기 때문이야. 내가 버린 자식이 재난을 몰고 돌아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견딜 수가 없어. 말하자면 버린 과거를 세월이 흐른 뒤에 수습해야만 할 시기가 와. 그때를 위한 준비지.”
/

"쌀쌀맞은 소리겠지만, 그 정도 부채를 안고 있는 게 앞으로 살아가기 쉬울 거예요."
/

"방금 사람을 죽인 게 처음이라고 했지만 거짓말이야. 나는 의붓아버지를 죽게 만들어서 도망 다니고 이어. 약을 먹었으면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일부러 못 먹게 했어. 아버지는 괴로워하며 죽었지. 히사에는 아버지 애인이었기 때문에 나를 증오하며 집요하게 뒤쫓은 거야. 사람이 죽으면 재앙이 와."
/

"왜라니? 어떤 얼굴을 한 애가 나오는지 보고 싶지도 않단 말이냐? 재미있어. 어떤 사정이 이는지는 모르지만 남자 따윈 관계없어. 낳으면 여자가 이기게 되어 있어. "
/

갓난애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애를 보니 갑자기 이상한 감정이 솟구쳤다. 내 몸에서 태어난 힘없는 생명을 보호하고 싶다는 욕망과 힘없기 때문에 멋대로 하고 싶다는 욕망. 양쪽 다 비슷한 무게의 욕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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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9-01-09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이 시리즈인지라 첫 작품이 먼저 나왔다면 좋았을텐데요.
거기다 이 시리즈는 독특하게도 시리즈 안에서도 시간이 뒤죽박죽이라고 하더라구요.

icaru 2009-01-12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로 시리즈로 나왔다는 것은 뒤에 옮긴이의 말에서 알 수 있었는데, 그렴 다크를 읽기 전에 무얼 읽었더라면 좋았을까요? 저는 뒤늦게 기리노 나쓰오 같은 대작가를 만나 행복했다는 ^^ .. 최근에 잔학기, 암보스 문도스, 아웃1, 2,를 몰아서 읽었더랬어요~
 
우리 시대의 소설가 박완서를 찾아서
박완서 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나에게 소설은 무엇인가> 중에서 발췌

초기 작품, 그 중에서도 특히 6. 25를 다룬 일련의 작품들은 오빠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보려는 몸부림 같은 작품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한다. 눈물이 마르면 침을 몰래몰래 발라 가며, 기운이 빠지면 박카스를 꼴깍꼴깍 마셔 가며 곡을 하고 문상객을 치르고 , 노름꾼을 치르고, 거지를 치르고, 복잡하고 복잡한 밑도 끝도 없는 여러 가지 절차를 치르고.......

내 처녀 시절,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나는 이렇게 지긋지긋하게 보냈다.

너도 결혼을 해야지. 처자식만 알 착실한 남자하고.

어느 날 어머니가 그랬다. 나는 어머니의 그 말에 대번에 동의했다. 처자식의 먹이를 벌어들이는 것 외에는 자기가 속한 사회에 섣불리 참여하지도 저항하지도 않는 남자. 나도 그런 남자와 결혼하는 게 마치 오빠에게 복수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런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애를 낳고 또 낳았다.

처자식만 아는 남편, 많은 아이들, 그래도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는 게 매가리가 없고 시들시들하고 구질구질하고 답답하고 넌더리가 났다. 사는 즐거움을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마치 망가진 용수철처럼 풀려 있었다.

나는 망령들을 내 내부에 가뒀으니까. 망령은 언젠가는 토해 내지 않으면 치유될 수 없는 체증이 되어 내 내부 한가운데에 가로놓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차차 더 묘한 걸 깨닫게 되었다. 내가 망령을 가둔 것이 아니라 실상은 내가 망령에게 갇힌 꼴이라는 것을. 나는 망령에 갇힘으로써 온갖 사는 즐거움, 세상 아름다움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당하고 있다는 것을.

그 계기는 뒤늦게도 40세가 되어서 왔다. 그땐 내가 생각해도 그렇고, 남보기에도 그렇고, 살림 외에 딴짓을 생각하는 게 가당찮아 보일 만큼 나이도 들고, 주부로서 관록도 붙어 있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도 어렵지만 40세에 어떻게 글을 쓸 마음을 먹었느냐, 습작은 얼마나 했느냐, 누구에게 사사했는가 등등의 구체적인 질문에도 대답이 궁색하다. 사사도 한 바 없고 습작기도 없었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으스대는 것 같아 망설여진다.

모든 예술 분야가 그렇듯이 소설도 타고난 소질 없이는 어느 정도 이상은 갈 수 없는 건 사실이지만 타고난 것만으로 풀어먹을 수 있는 한계는 만들어진 한계보다 훨씬 더 협소하다고 생각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 중에서도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아무도 용훼(容喙)할 수 없는 정의를 가지고 싶어서 조바심한 적이 있다. 그 시기는 내가 소설을 쓰고 나서 훨씬 후였으니까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소설이 뭔지도 모르고 소설을 썼다는 얘기가 된다.

소설에 대한 엄숙한 정의를 가지고 싶어서 조바심할 무렵 비로소 남들은 소설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가에 솔깃하니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난해한 문학론 같은 것도 열심히 읽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저것도 다 옳은 소리 같았다. 하다못해 소설은 마땅히 이런 거여야 한다. 아니다 마땅히 저런 거여야 한다고 싸우는 소리에도 흥미진진하게 귀를 기울였다. 지조 없게도 양쪽이 다 옳은 소리 같았다. 그리고 곧 그런 일에 싫증이 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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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8-12-19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는 게 매가리가 없고 시들시들하고 구질구질하고 답답하고 넌더리가 났다.'
에 밑줄 쫘악 긋고 싶네요.
누구 닮았다는 소리 듣기 싫은 만큼 내 글이 누구 글 닮았다는 소리도 끔찍히 싫어하는데 박완서님의 글을 읽으면 내 일기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자주 들어요.아! 부디 오해는 마시길! 제가 그만큼 출중하게 쓴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고 내 생각이나 내 경험의 일부를 박완서님의 글에서 만난다는 말이었어요. 그럴 때 정말 놀라우면서도 좌절스럽답니다. 어떻게 내 생각을 이렇게 옮겨 놓았지? 하는 착각은 놀라움. 나는 죽었다 깨나도 못 쓸 텐데, 이 분은 이렇게 술술술 자연스럽게 풀어놓는구나 하는 좌절감..거기에 덧붙여 좀 더 귀여운 좌절도 있어요. "이 분이 먼저 이렇게 선수를 치셨으니 나는 나중에라도 못 써먹겠다"대충 요런..ㅎㅎㅎ

이카루님, 올만이염^^
웬만하면 찬이 사진 좀 올려주시고요~^^

icaru 2009-01-12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박완서 작가나 진주 님이나 커버할 수 있는 영역이랄까 아우라가 비슷하다는 생각 들어요~ 찬이 사진요? ㅎㅎ.. 안 올려 버릇하니깐 그게 잘....
 
어둠 속의 남자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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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 노리코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운다. 마치 수문이 열린 것처럼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마구 운다. 오랫동안 침묵 속에서 고통을 견디어 온 이 젊은 여자, 자신이 선량하다고 믿지 않는 이 젊은 여자. 오로지 선량한 사람만이 자신의 선량함을 의심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선량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쁜 사람은 자신이 선량하다고 생각하지만, 선량한 사람은 자신이 선량함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남들을 용서하면서 삶을 살아 나가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107쪽

30세 생일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지만 브릭은 평생에 단 한번도 자살을 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 후 이틀 동안 아파트에 혼자 앉아서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고통 없이 가장 효율적으로 떠날 수 있는지 그것만 궁리했다.
- 147쪽

인생의 이런저런 순간에, 모든 가족은 아주 기이한 사건을 겪게 된다. 가령 끔찍한 범죄, 홍수와 지진, 기괴한 사건, 기적적인 행운 등이 그런 것이다. 비밀이나 감추고 싶은 약점이 없는 가족은 아무도 없다. 여기자는 그의 얘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많은 가족 혹은 대부분의 가족은 그럴지 모르지만, 모든 가족이 그렇다고 볼 수 없다. 그녀는 자기 가족의 사례를 들면서 단 한번도 기이한 사건, 혹은 예외적 사건이 벌어진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무슨 소리, 알렉이 말했다. 한번 집중해서 잘 생각해 봐. 그러면 뭔가 나오게 되어 있어. 그러자 여기자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래 한 가지 있기는 한데, 라고 대꾸했다.
-167쪽

그녀가 자신의 내부에 많은 고통을 감추고 있다는 걸 알았어. 평상시에 소니아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어. 부드럽고, 상냥하고, 충실하고, 남을 잘 용서하고, 생기발랄하고, 정말 엄청난 사랑의 바탕을 갖고 있었지. 하지만 그녀는 때때로 정신이 딴 데로 팔려 있었어. 심지어 대화 중에도 그러곤 했지. (중략)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녀의 본능이나 충동은 아주 깊었어. 오싹할 정도로 말이야. 그런데 자기 자신과의 관계는 기이할 정도로 천박했어. 그녀는 착한 마음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잘 교육을 받지는 못했어.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고, 그 어떤 것이든 아주 오래 집중하지 못했어.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을 빼고 말이야.
-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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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9-01-12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오스터도 많이 늙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던 작품이다.
 
금지된 낙원
온다 리쿠 지음, 현정수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8년 8월
절판


34~35쪽
그녀도 뭔가 창조하는일을 하고 있었다. 뭔가를 창조해 내는 인간이 되고 싶다고 소망했다. 그녀가 만들고 있는 것은 조소(彫塑)였다. 그녀의 대범하면서도 편안한 작품 분위기는 일부에서 상당한 주목을 모으고 있었고, 촉망받고 있다고 말해도 거짓말이 아닐 정도다.
창조해 내는 것이 무엇이건, 그 작품에는 작자의 내면이 드러난다. 그러나 뭔가를 만들기 위해 그 험한 길을 나아간다면 어떤 작풍의 결과물이더라도, 어떤 장르의 예술이더라도, 도달하는 곳은 똑같다고 리츠코는 믿고 있었다. 결국 하나의 존재를 여러 가지 방향에서 찾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나무통을 만드는 장인도, CF를 만드는 감독도, 오페라 가수도, 그 도달점은 한 곳인 것이다.
그러나 교이치가 만들어 낸 작품과 자신이 만든 작품의 도착점이 같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34~35쪽쪽

72~74쪽
재능이란 과잉이다. 이 말은 그녀의 스승이 한 말이었다. 형식도 스타일도 잊어라. 그저 계속 손을 움직여서 뭐든 만들어라. 너희들에게 그런 건 20년은 일러. 머리를 써서 만드는 동안에는 개인의 스타일 어쩌고 말해도 소용없다. 스타일이라는 것은 나중에 따라 붙는 것이고, 스무 살 언저리에 ‘이것이 나의 스타일’하면서 깝죽대는 녀석은 단순히 그것밖에 할 수 없거나 그것 밖에 해 본 적이 없는 것뿐이야. 개성이란 스스로 신고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충동에 마구 휘둘리도록 해. 항상 그게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어라. 그 작품을 마지막으로 남긴 것에 만족하고 죽을 수 있나 없나 자기 자신에게 물어봐. (생략) 이윽고 그들은 코가 납작해진다. 숫자와 양, 그리고 스피드를 요구받으면, 자신들이 해야 할 이야기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부족한지, 그때까지 자신이 만들어왔던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왜소한 것이었는지를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72~74쪽쪽

리츠코는 순순히 받아들인 쪽이었다. 옛날부터 "리츠코는 물 같은 애야." 하는 말을 듣고 살았다. 어떤 장소에 있어도 친숙해지고, 시키는 말은 심플하게 받아들인다. 리츠코는 스승의 가르침을 열심히 실천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따금씩 자신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일상생활 속에서 열심히 과제를 소화해 내고 있을 때면, 리츠코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시냇물이 되어 있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졸졸, 졸졸, 상류에서 맑은 물이 흘러 내려오고, 그녀의 안에서 팔을 타고 대상을 향해 흘러 나간다. 흐르는 물은 그녀의 손안에서 멈춰, 형체가 된다. 그것은 익숙해진 편안한 소리였다. 지금 이렇게 저 멀리서 들려오는 프레스 기계 소리처럼.
그러나 때때로 물줄기가 뚝 끊겨 흐르지 않을 때도 있다. 졸졸거리는 포근한 선율이 그치고, 마른 공기만 펼쳐져 있다. 뭘까,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아도 새하얀 세계가 이어지고 있을 뿐, 어디에도 물은 흘러오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기다릴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든 많든 적든 그런 때가 있다. 기다리는 것은 아주 어렵다. 기다리지 못하고 자멸해 버리는 아티스트도 무수히 존재한다.
-72~74쪽쪽

낙천주의자인 리츠코도, 때때로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에 절망했다. (중략)
한편, 어른이 된다는 것은 강바닥에 언젠가부터 퇴적물이 쌓인다는 뜻이다. 퇴적물은 강의 흐름을 변화시키고 수질에도 영향을 준다. 잊어버린 중요한 것이 가라앉아 있는 일도 있다. 리츠코는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의 작품을 계속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이따금씩 퇴적물을 치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략)
리츠코는 망설이고 있었다. 순진무구하고 대범하며 원시적인 생명력이 넘친다고 평가받는 자신의 작풍이, 이대로 계속될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다. 어린애의 그림은 근사하다. 그러나 비참한 사생활이나 장절한 인생을 뛰어넘어, 그것들을 이해한 뒤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몰라도, 자신은 그저 현실에 귀를 막고 눈을 감고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의 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친구는 말했다.
-72~74쪽쪽

그런 소리를 하자면, 아티스트는 모두 파멸형이어야만 한다는 얘기잖아. 비참한 현실이 예술을 낳는 원동력이 되는 일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트라우마가 있는 녀석은 모두 아티스트가 될 수 있다는 거야? 난 그런 착각은 정말 싫어. 어린애들이 ‘나는 불쌍한 고아지만 사실은 어느 나라의 공주님이야.’ 하는 꿈을 거나 마찬가지 아냐.
-72~74쪽쪽

젊은이는 젊은이를 싫어한다. 그렇지만 그런 한편, 자기와 비슷한 녀석들이 많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이렇게 같은 세대의 인간들이 잔뜩 있는 곳에 몰려든다. 왜 젊은이는 도회지에 모여드는 걸까?
리츠코는 옛날부터 같은 세대의 인간에 위화감을 느꼈다. 같은 세대가 공유하고 있을 친근감이나 공감이란 것을 별로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 젊음을 향유하는 것에 저항감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동떨어져 있다거나 소외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 유연하고 소박한 성격은 다른 이들에게 사랑받았고, 좋은 친구들도 많았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마지막에는 도무지 연대감을 맛볼 수가 없었다.
반짝반짝하는 오픈 카페 제일 앞자리에 앉아, 그 장소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그들이 리츠코에게는 우주인처럼 보였다.
나는 자의식과잉일까? 리츠코는 생각했다. 어째서 저런 식으로 순순히 자기 주장을 하고 자기 표현을 할 수 없는 것일까? 어째서 자연스럽게 즐거운 일을 할 수 없는 것일까? 어째서 젊음을 구가하는 것에 꺼림칙함을 느끼는 것일까?
-102쪽쪽

다만, 이 사람들처럼 할 수 없는 부분, 이 사람들이 다른 곳에 사용하는 에너지가, 내 경우에는 창작에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에게 둘러대며 어떻게든 마음을 정리한다. 내가 이 사람들처럼 있는 그대로 청춘을 만끽할 수 있었다면 지금쯤 창작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102쪽쪽

애초에 광고 자체가 그런 효과를 노리고 있는 거잖아요. 정부 광고든 뭐든, 주입하기 위해 광고를 흘려보내는 거예요. 이름을 기억하게 만들지 않으면 상품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이에요. 소비자는 같은 내용의 상품이 있으면 모르는 상표의 물건보다는 반드시 아는 상표의 물건을 골라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주입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주입이 아닌가 하는 것은 미묘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131쪽

보잘것없는 존재인 인간에게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광기보다도 제정신이다. 광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평안이며 방어이기도 하다. 그것에 비해, 제정신으로 현실과 마주하는 것은 인간에게 얼마나 괴로운 일일까? 이 남자가 두려운 이유는 이 남자가 항상 누구보다도 제정신이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고 거하게 취했을 때, 술에 취하지 않은 멀쩡한 사람에게 가만히 관찰당하는 것만큼 창피한 것은 없다. 쿄이치의 시선에서는 그것에 그것에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마음이 편하지 못하고 불안해지는 것이다.

이 아이도 이상한 아이네. 리츠코는 생각했다. 순진하고, 곱게 자란 성격에 총명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요령부득한 구석이 있었다.
-268쪽

예술품을 느끼는 센스.
본인은 뭔가를 창작할 수 없고, 예술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일을 하고 있는데도 가끔 굉장한 심미안을 가진 사람이 있다.
정말로 유행의 첨단을 걷는 사람이란 그런 사람인지도 모르지. 리츠코의 은사가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때때로 예술이라는 것은 예술가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무의식속에 가라앉아 있는 거 아니겠어? 대중의 무의식이 어느 날 한 사람의 아티스트 속에서 그것을 발견한 거야.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들은 그저 붓 같은 존잴, 대주의 무의식에서 떠오른 것을 그저 그려 내고 있는 것뿐이지 않은가 싶어. 최종적으로 예술이라는 것은 역시 대중 쪽이지, 우리들이 아닌 거야. 우리들은 우연히 발견되고 있을 뿐, 어떠한 이단이더라도 어차피 대중의 일부를 그려내고 있는 것뿐인 거라고."

리츠코는 아티스트라는 존재와 자신의 존재가 도무지 겹쳐지지 않았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남이 보면 틀림없는 예술 활동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재능이 있다든가 아티스트라든가 하는 말을 듣는 것에는 커다란 위화감이 느껴졌다. 아티스트는 자각하는 것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269쪽

이 산속에 아츠시가 살고 있다니,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그는 도회적이고, 업무를 신속하게 처리하는 타입이며, 상승지향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그 나이에, 그리고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이런 촌구석의 산속에 갑자기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들어앉아서 혼자서 살고 있다고? 아웃도어 활동을 좋아하기라도 했던 건가?
-424쪽

그 사람은 우리들을 시험하고 있는거야. 우리들은 그가 발견한 보기 드문 흙 같은 거야. 여기는 그 사람의 가마야. 그 사람은 흙을 발견하고, 가마에 집어넣는 거야. 그 다음에는 불에 굽는 거지. 그 사람은 우리들이 가마에서 나왔을 EO에 어떻게 되어 있는지 보고 싶은 것 뿐이야.
-458쪽

인간이란 어쩌면 이렇게나 모순된 생물일까? 리츠코는 마음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인간은 공포를 사랑한다. 공포를 갈망한다. 무시무시한 것, 비참한 것을 사랑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게 특정 부류 인간들의 진실임을 마음 한구석에서 알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으로 끝이었을까? 그 게스트 하우스에서.
-475쪽

교이치가 눈에 보이는 카리스마라면, 아츠시는 항상 보이지 않는 카리스마였다. 지적이고 느낌 좋은 청년, 누구에게라도 신뢰받고, 호감을 사고, 적이 없다. 선두에 서서 이끄는 타입은 아니지만 조용히 인망을 모으는 타입. 그런 인간에게는 모두가 마음을 허락하고 조언을 구하지 않을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빌려 주게 되지는 않을까.
-501쪽

사람은 누구에게 키워지지 않은 존재다. 그렇게 생각했다. 어린애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 사는 곳도 입는 것도 먹는 것도 전부 어른에게 받아야만 한다. 가정이란 우리 안에서는, 항상 부모에게 예속되어서 어른의 에 들 만한 생활을 해야만 한다. 철이 들 무렵부터 집안 분위기는 말도 못할 지경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뚤어지거나 난동을 부리는 방향으로 갈수는 업어다. 주위에는 그런 아이도 있었지만, 결국 세상에 적을 늘릴 뿐이라는 걸 금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자신은 힘을 축적하고, 언젠가는 세계를 지배하는 쪽에 서 보이겠다. 언젠가는 항상 나를 지배하려고 했던 어른들을 자신에게 복종시켜 보이겠다.
-5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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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드라마 - 여자가 꿈꾸는 사랑의 모든 것
가쿠타 미쓰요 지음, 안윤선 옮김 / 예담 / 2007년 4월
절판


드라마 거리

내게는 젊은 사람으로 분류되는 연령이었다.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고, 현실과 상상 속의 자화상과의 괴리감을 알지 못하는 나이.

내게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상대를 만나기 위해 초조하게 기다리는 시간도, 잠자는 것도 아까워하며 상대를 바라보는 밤도, 갑작스러운 선물에 가슴이 방망이질하는 순간도, 다시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결정할 때 반드시 적극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면서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무언가가 결정되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난 외국에 가본 적이 없어. 이 나이에 이젠 무리겠지. 남편이 25년 전에 죽었는데, 보험금이 쪼금 나와서 그것을 착수금으로 맨션을 지었어. 내가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임대료 수입으로 태평하게 생활해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주 큰 착각이었지. 집주인 따위 할 만한 게 못된다네. 번번이 말썽이 생겼고 대출금 갚는 것도 힘에 부치고 25년이나 얼간이마냥 저 건물한테 휘둘렸던 거라고."
-#쪽

목표의 거리

클래식 음악을 트는 곳은 별로 안 좋아해. 감정이 그쪽으로 치우쳐서. 곤토라 씨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고, 그때 나는 ‘전원’ 같은 가게를 차리겠다는 목표를 접었다. 생활의 농도에 억눌린 사람이, 섬세한 단어를 주야장천 떠올릴 수 있는, 지나치게 곤란할 정도의 그런 가게를 차려야지, 라고 생각했다.

"당신들 지금 너무 외로워서 불안하지. 하지만 잘못하고 있는 건 당신들이야. 좋아하는 것만 골라 취하기 때문에 안 되는 거라고. 그대들의 공통점은 무제한 케이크 먹기에 도전한 욕심 많은 아가씨들 같다고 할까. 무엇부터 먹을까, 어떻게 하면 본전을 채울까, 라는 생각을 하는 동안 제한 시간이 끝나 버리지. 그대로라면 패배할 거야. 그 사실을 깨달았으면 틀림없이 잘 풀릴 거고. 미래는 밝아. 정말 살길 다행이라고 매일 감탄하게 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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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거리

네가 지금 임신하면 우리 아이들은 같은 학년이 될 거야, 라는 언니의 말을 듣고 나니 언니와 같은 학년의 아이를 맹렬하게 갖고 싶어졌다. 언니보다 약간 늦게 아이를 낳아 공동으로 육아를 하면, 불안감도 스트레스도 줄어들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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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욕의 거리

누구보다 평범한 여자였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줌마였다. 지성이라든가 섬세함이라든가 나긋나긋함이라든가, 또는 예리함이라든가 개성이 강하다든가, 타인과 비교해 특출난 곳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손가락으로 꼽아 볼수록 그것은 나 스스로를 형용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사랑하는 남자의 집을 염탐하러 온, 그런 행동을 불사하였으면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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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거리

나는 엄마를 모르고 성장했다. 기억 속의 엄마는 점점 희미해졌고 어렴풋한 윤곽에 이상형이 첨가되어, 엄마를 떠올릴 때는 항상 조용한 미소를 머금은 낯선 여인이 나타났다.
나는 시어머니의 과거를 모른다. 그녀가 어떤 아가씨였고, 어떠한 결혼 생활을 했으며, 어떻게 육아를 했는지 모른다. 그녀의 삐뚤어진 성품이 도대체 어느 시점에서 형성되었는지, 아니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러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내 어머니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어떻게 자랐고 어떤 어머니가 되고자 했는지. 자신이 그린 이상적인 어머니 상과 현실의 자신 사이에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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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화의 거리

포스터를 바라보면서 나는 ‘승화’라는 말을 가슴 속으로 되풀이했다. 사춘기의 남자가 넘치는 성욕을 운동으로 발산하는 것을 승화라 하지 않던가. 나도 저돌적으로 운동하면 승화되지 않을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로드 쇼는 한 쪽 집의 비디오가 되었고, 레스토랑은 근처의 술집이 되었으며, 이따금 생각난 듯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신경을 쓰지 않게 되면 상대의 결점이나 자신과의 차이점이 보다 명확하게 보인다. 어느 한쪽이 그것을 참지 못하게 되거나 또는 좀더 맞는 상대를 발견하거나 하면, 연애는 끝장이 났고, 다시 새로운 상대를 찾아 디즈니랜드에서 새롭게 시작했다.
그런 것에 나는 진력이 나 있었다. 결승점이 없는 마라톤 같다고 생각했다. 교제하던 남편이 우연히 로드 쇼에서 홈 비디오로 전환했을 때, 결혼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여기고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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