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존 반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이십몇 년만에 처음이었다. 초등 시절 다니던 등굣길, 그리고 발걸음을 돌려 그 시절 몇 년을 다녔던 성당에도 가봤다. 평일 오후인지라 조용했다. 길은 가늘어졌고 나이를 잃어버렸고, 널따랗던 교회 마당은 퍽 비좁아 보였다. 별로 변한 게 없는 듯 하면서도 예전의 그 곳이 아니었다. 퍽 이질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한참을 서성거렸다. 성당의 묵직한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문고리를 지그시 잡았다가, 10개월도 안 된 아가를 업고 인적 드문 성당 앞마당에서 서성이다 내 모습의 그림이 좀 그래서, 도로 손을 내렸다.
당시의 우리 부모님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는데, 어떻게 하다가 나는 성당에 나가게 되었을까. 선망의 대상이던 또래 친구 몇이 성당에 다녔었고, 나는 그들 속에 편입되고 싶었다. 그러나 몇 년 다니다 말았으므로 그것은, 신과의 제대로 된 조우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노년의 주인공에게 어린 시절, ‘신들’은 여름이면 바닷가 휴양지에 머물다 가곤 하던 부자 사람들인 그레이스 씨네 남매다. 일상을 꾸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못해 가난에 푹 절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던 나 소년은 그레이스 씨네 가족과 어울리면서 그 신분의 사람들을 동경한다. 신분 상승이라고 해서 비굴과 파렴치를 연상하면 곤란하다. 아이니까 순진하다. 어떤 파멸을 불러오게 되더라도 책임에 대한 면죄부를 주어야 한다.
그의 아내는 얼마 전 죽었다. 아내의 투병기를 얼마간 함께 했다. 아내가 죽고 그는 50여년전 신들을 보낸 강철 같은 그 바다로 찾아온다. 그 바다에 얽힌 하나의 일화는 그에게 마치 낙인처럼 결정적인 흔적을 남겨 주었다.
바닷가 마을이 별로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이제 더 이상 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그 곳이 아니다.
50여년 전 사건이 일어난 현장을 찾아가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꺼내며, 죽음을 앞둔 아내와 보냈던 나날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지나온 생을 돌아보는 일은 참으로 가차없으면서도 담담하다.
나는 신랄하게 대꾸하려다가 말을 끊었다. 사실 그 애 말이 옳았다. 삶, 진정한 삶이란 투쟁, 지칠 줄 모르는 행동과 긍정, 세상의 벽에 뭉툭한 머리를 들이대는 의지,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돌아보면 내 에너지의 많은 부분은 늘 피난처, 위안, 아늑함을 찾는 단순한 일에 흘러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망상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숨겨지고, 보호받는 것, 그것이 내가 진정 원하던 것이다. 자궁처럼 따뜻한 곳으로 파고들어 거기에 웅크리는 것. 하늘의 무심한 눈길과 거친 바람의 파괴들로부터 숨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