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 개정판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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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06 14:45



 

 

이 책을 읽기를 권하는 사람의 항목 중에 “왠지 모르게 위기감을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막연하고, 분명히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항목이 있는데, 그게 나다. 

경제 성장, 민주주의 , 평화, 지속가능한 문명, 환경오염, 미국의 패권주의 등등...... 지난 수십년간 고도 경제 성장을 경험해온 사회들에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절박한 관심하가 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이 문제들은 저자가 처음 다룬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제기되어 온 논쟁들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 논의들을 어느 책보다도  비교적 잘 지적하고 있고, 대안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게끔 하고 있는 것 같다.


문제의 핵심은 경제 성장에 대한 검토되지 않은 맹목적 신앙에서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부의 분배 방식은 이것이었다. 기술의 발달로 풍부해진 파이를 재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파이 그 자체가 커지면 작은 조각도 그 나름대로 커질 테니 모두 만족할 수 있게 끔 될 것이라는 경쟁 성장 논리이다. 이 논리를 통해 경제적 수치로 환산될 수 있는 물질적인 측면은 제외한 인간적으로서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는 다른 경로들은 없어져 버렸고, 갈수록 빈부의 차이는 극심해져 가며, 민중들이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방법들은 점차로 약화되어 간다. 그 뿐인가. 자연환경은? 지금의 인간 사회의 소비 행태와 사회 구조는 필연적으로 자연을 훼손하고, 자원을 낭비하고, 수많은 쓰레기를 폐기하는 등의 생태계 파괴를 일삼고 있다. 이것이 상식적인 사회의 모습은 분명 아닐 터. 그러나 경제정치 세계론이 패권을 잡고, 그것이 상식이 된 사회에 살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벌써 비극인거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두 가지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방법을 배워 왔다고. 하나는 ‘일 중독’이고 하나는 ‘소비 중독’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대의 사회는 경쟁 사회이다. 경쟁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기본적인 감정은 두려움이라고 생각한다. 암묵 속에 존재하는 두려움이다. 열심히 쉬지 않고 일하지 않으면 가난뱅이가 될지 모른다, 집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공포. 병에라도 걸리면 병원에 가야 하는데 그 병원비를 지불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공포. 결국에는 어떻든 일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개인적인 선택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런 공포가 있다는 것은 사회의 안전구조가 약하기 때문이다. 경쟁사회란 기본적로 그런 구조이다. 즐겁기 때문에 일을 한다 혹은 계속 한다기보다는 공포가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는 사회이다.


저자는 파이의 크기를 늘려 가난한 나라와 국민들에게 돌아갈 몫도 키우자는 눈감고 아웅하는 말에 현혹되지 말고, 경제성장을 부정하는 '대항발전'을 하자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사회 속에서 경제라는 요소를 줄여 나가도 사람들은 최소한의 것만으로도 별 탈없이 살 수 있다고. 산업혁명 이후 줄곧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삼아 왔으면서도 여전히 과로와 스트레스로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그는 서비스와 상품 구입 대신 자신이 스스로 창출할 수 있는 미의식과 감성을 기르라고 한다.


이것은 딴소리 같지만, 나는 배우 임현식이 좋다. 경직되지 않은 털털한 아저씨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달까. 나는 인물 비평가도 아니고 뭣도 아니니 그럴싸한 표현으로 그가 왜 좋은지를 말할 재간이 없지만, 요는 이거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서 보이는 넉넉함이 있는 것 같다. 교외에 있는 집에서 자기 소유의 텃밭과 농장을 아내와 함께 일구는 모습을 모 아침 토크쇼에서 보았다. 악기가 몹시 배우고 싶어서 바이얼린을 배웠다고. 


실천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데에 있다. 세상이 앞으로 점점 경제의 교환 가치 이외의 본래적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감성과 미의식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가 부활한다면, 시장 경제가 우리들의 생활에서 갖는 지배력은 많이 약화될 것이다. 그리고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고 있다는 믿음에서 희망이 솟아나며, 전정으로 일에서도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밑줄 그은 문장


"언어는 단순히 커뮤니케이션 수단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온갖 인간의 경험이라든가 마음이라든가 역사라든가 미의식이라든가 사고방식이라든가 세계관이 들어 있다. 그것은 의미의 창고이자, 감각의 창고이고, 기억의 창고이기도 한 것이다. 어떤 한 언어는 인류 문화와 문명의 일부이자 인간의 한 가지 가능성이 거기에 실현되어 있다. 두 세대라는 짧은 시간에 5000개 이상의 언어를 잃는다는 것은 아마도 역사상 예가 없는 문화적 재난일 것이다."


"오늘날 산업 노동자의 생활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부자유스러운 노예의 삶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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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노엄 촘스키 지음, 드니 로베르 외 인터뷰어, 강주헌 옮김, 레미 말랭그레 그림, / 시대의창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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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27 15:06


 

 

바츨라프 하벨이 제 7회 서울 평화상에 수상되었다고 한다. 서울(?)의 평화(?)를 주는데 저 외국인이 상당히 일조를 했나? 허울좋은 세계화!!! 구호 속에 묻혀 과연 '서울 평화상'의 의미는 무언지.......!!

나는 그 사람을 잘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 한번 주말에 하는 퀴즈 프로(검색 문제로 저 상과 저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를 보고, 서울평화상 수상자라는 하벨이 너무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 본적이 있다.

찾아보니...하벨은 공공연하게 김정일을 “세계 최악의 독재자”라면서 “그는 핵과 미사일 등으로 세계를 협박해 받아 낸 식량을 군대 등 자신의 충성 세력에 나눠줄 뿐 주민들은 굶어죽어도 상관하지 않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비판했다”는 내용의 기사들(하벨과 부시는 토시 하나 안 틀리고 같은 말을 이구동성으로 하고 있는 듯하다...)을 접할 수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벨이 왜 미국이 가장 높이 받드는 ‘유럽의 양심’으로의 상징적 존재인가 라는 점이다. 하벨은 공산주의 치하에서 체코의 민주주의 체제로 바꾼 사람으로, 미국이 대놓고 칭찬하기에 딱 좋은 지식인 계층이다. 그런데 당시 하벨과는 반대 급부(미국의 입장에서)의 엘살바도르 지식인 6명이 소리 소문없이 미국이 훈련시킨 코만도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것은 거의 언론에 노출되지 않았다고.


이 쯤에서 드는 생각은 언론 과연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하는 것이다.


촘스키는 1966년에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지식인의 책무’에서 ‘지식인은 정부의 거짓말을 세상에 알려야 하며, 정부의 명분과 동기 이면에 감추어진 의도를 파악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미국이 자신을 향해 어떤 비난과 질시를 하든 개의치 않고 미국의 ‘외교정책- 언론-지식인’의 유착 관계에 주목하여 그 본질을 폭로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촘스키는 말한다. 통찰력 있는 지식인이라면 대중을 그저 무기력한 구경꾼으로 만드는 이런 흐름을 충분히 꿰뚫어 보았을 것이나, 대부분의 지식인은 입을 다문 채 대중을 국가에 종속시키려는 이런 음모에 가담한다. 왜? 그것이 이들의 밥줄이기 때문이다.


촘스키는 현재의 경제 체제는 엄청난 권력을 지닌 개인 기업들이 서로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강력한 국가 권력에 의존하면서 위험과 비용을 분산시키는 체제라고 말한다. 대중의 각성과 경계 이외에 현 사회의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은 없는 것이다.


아니 그렇다면, 가슴이 벌렁벌렁 뛴다. 그리고 나는 일순 무정부주의자처럼 지배구조와 계급구조는 어떤 형태를 띠더라도 의혹의 대상으로 삼아 그 정당성을 확인해야 한다고 부르짖고 싶어진다.

하지만 나같은 일개 개인이 무슨 힘으로, 어떻게. 알고는 있지만 어찌해 보지 못하는 방관자로..... 남게 된다.


때때로 국민은 세상사를 완벽하게 꿰뚫어보고 있지만, 혁명 세력으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앞장서서 기존 질서를 뒤바꾸려 한다면 그 대가를 호되게 치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노동 조합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당신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고 치면, 나의 동료들은 그 혜택을 누릴 수 있겠지만, 나는 절대 그 열매를 즐길 수 없다. 오히려 나는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행동하고 싶다면 주변의 소리에 귀를 막아야 한다.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자유롭게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촘스키는 이런 곤경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조직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노동 조합을 조직화된다면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희생을 수월하게 넘길 수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민주화의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정치 발전의 결과를 이뤄낸 것들로 생각하기 쉬운 여성 권리 신장이라던지, 인권 개선과 같은 법안들 하나하나는 사실 정치적 공백을 메우려는 의원의 노력으로 이뤄낸 결실이 결코 아닌 것이다. 일개 개인들이 피흘린 희생의 결과물이고 인권을 보호하려는 여론들의 거센 압력을 통해 통과된 것이다. 사회에 영합하지 않는 반체제 인사들의 투쟁물들인 것이다.


대중을 얌전한 방관자로 만드는 정책에 편승하지 말아야겠다. ‘대중은 각자의 삶을 영위하는 데 전념할 것이고, 순간적으로 유행하는 소비재와 같은 피상적인 것에 열중하게 될 것이다. 모든 단계의 정책 결정에서 ‘참여자’가 아니라 구경꾼에 머물게 될 것이다.‘라는 생각 따위 여지없이 깨 주어야 한다.  


“대중이 저항하고 싸워서 때때로 승리를 거둘 때에야 진정한 변화가 있을 뿐이다.”


밑줄 그은 문장


“정치 투쟁은 거짓말을 폭로하고, 그에 관련된 주역들과 꼭두각시들을 구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또한 우리 모두가 관련된 문제를 합리적으로 제기하면서 그 문제를 현실적 차원에서 분석하는 것도 정치 투쟁의 한 부분이다.


“세계화는 결코 자연스런 현상이 아닙니다. 분명한 목표점을 지향해서 정치적으로 고안된 현상입니다.”


“군부가 이처럼 특별 대우를 받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회가 자유로워질수록 지배 계급이 공포심을 조장하고 선전에 열을 올리기 때문이다. 모두가 두려움에 떨며 산다. 범죄자를 두려워하고, 마약 밀매자를 무서워한다. 심지어 흑인과 외국인까지 무서워한다. 미국의 테러에 대한 두려움을 유럽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


“코소보 사태의 경우 인공 청소를 종식시키기 위해  그랬을까...미국과 유럽은 발칸 반도의 국가들이 제 3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일치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값싼 노동력을제공하는 국가여아 한다는 뜻이다. 보스니아를 원조하면서 외국인의 투자를 개방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 것이 그 증거이다. 요컨대 발칸 반도의 국가들은 유럽의 멕시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조만간 세르비아의 산업기지와 광산이 다국적 기업의 소유가 될 것이다. 경제 정책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금융기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독립을 쟁취한 후에도 수십 년 동안 실질적으로 식민 지배를 받았던 세계의 다른 지역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구 소비에트 연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토 군이 주도한 전쟁은 미국이 주도권을 쥐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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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 제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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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8 13:47

 


 

 

 

이 소설 속에서 동구라는 아주 착한 소년을 만났고, 그 녀석의 가족 이야기 때문에 나는 울고, 웃었다. 동구네 할머니를 보면서 엄청 무서우셨던 살아생전 우리 친할머니도 생각났고, 나를 가르쳤던 초등학교 적 선생님 생각도 났고, 이상하게도, 지금은 이빠진 호랑이신 우리 아버지가 내가 동구만할 때의 젊으셨을 적 생각까지 부쩍 많이 났다.  이 소설은 동구의 이야기를 따라서, 잠깐 나를 어린 시절로 돌려 놓았던 듯하다.


사람이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내면적인 성숙을 불러오게 하는 ‘부조리하고 흉폭한 세계’와의 맞닥뜨림이 필요한 듯하다.

한 친구에게 나는 그런 것을 물은 적이 있다.

“너는 니가 언제부터 부쩍 철이 들었다고 생각하나.”

친구가 말했다. “나는 열한 살이 되도록 산타클로스가 실제로 있는 줄 알았다. 엄마 아빠가 그만큼 곱게만 키워 주셨는데, 중학교 1학년 때 아빠가 사업에 크게 실패하시자, 이후 가족들이 전셋집을 전전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그동안 얼마나 곱고 편안하게만 자라왔는지 알았다.”

이 친구에게 내면적 성숙을 위한 “흉폭한 세계”와의 대면은 바로 아버지의 사업 실패라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여기 착한 동구에게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각설하고......


심윤경의 글은 ‘언어의 마력을 갖고 있다’ 둥의 책 뒷표지의 평론가들의 칭찬이 하나도 과장이 아니다 싶게, 글을 잘 썼다.

작가의 글이 빛나는 부분은 그러니까, 작가가 이건 정말 잘 하는구나 하고 생각되는 부분은 ‘서사’이다.

주리 삼촌과 선생님의 등 뒤로 훔쳐본 어지러운 어른들의 세상을 들어내는 방식이라든지, 소설 속 등장 인물의 성격을 섬세한 내면의 변화를 ‘서술’하거나 일일 ‘직접 표현하는’ 방식을 쓰지 않았다. 그는 독자들이 탄복하며 알아차릴 정도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쉽게 유추할 수 있도록 글을 썼다. 이걸, 사람들은 ‘밀도 높은 서사’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동구는 어른스러워서"라는 박 선생님의 칭찬에, 선생님이 자신을 어른으로 생각한다며, 기뻐하는 동구의 모습.   흡...동구가 나로 하여금 오랜 동안 미소짓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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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이명원 지음 / 새움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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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5 13:54



 

 

 

그의 글을 편히 읽지 못한다. 문학 평론을 하는 그가 쉽게 글을 써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몇 줄만 읽어도 알 수 있기에, 나도 편안하게 그의 글을 읽어내지 못하는가 보다.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라는 이명원의 이 책.

마음이 소금밭인 것은 어떤 것일까. 대충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이 소금밭일 때, 이명원은 책을 읽고, 글을 썼지만 나는 어떻게 대처했던가 생각해본다. 나는 그저 조용히 무덤 속 같은 몇일 보내고는 서서히 나를 괴롭힌 심각한 사안에 대해 잊어버리는 방식을 택하며 살았던 거 같다.


지금의 내 마음도 전전긍긍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책은 내 이해의 맥락에 닿는 부분에 한해서는 아픈 곳을 위무해주고 또한 깊은 울림까지 주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직함은 문학비평가이지만, 이 책은 그가 문학을 포함 여러 분야의 책들을 읽고, 영화를 보고, 여러 매체를 접하면서 품은 여러 단상이랄까 생각들을 엮은 책이라서, (소금밭 같은 마음으로 도서관에 가, 책을 읽고 쓴 이 글들일지라도) 사실은 허리끈 조금 풀고, 편안한 자세로 읽어도 된다.

 

 

그의 지적에 크게 공감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던 부분은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다.


문학계에서의 통칭 ‘후일담 문학’이라는 용어에 대한 그의 말. 이 용어는 80년대에 정력적으로 진행되었던 진보적 실천행위를 냉소적으로 부정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90년대 이후의 현실을 환멸적으로 추수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끄덕끄덕...)

 

영어를 공용화해야 한다는 복거일의 주장과 유사한 것이 수백년전 박제가에게서 있었다. (그의 책 <북학의>를 읽고) 복거일의 주장과는 또 조금 다른 뉘앙스지만, 시대적인 맥락은 이랬다. 당대 조선사회의 위기를 청나라 문명의 적극적인 수용을 통해 돌파하고자 했던 박제가의 의욕에서 나온 주장이라고. 박제가는 중국어가 문자의 근본이며, 문명어이며, 언문의 일치가 중요함을 강조, 조선이 청나라와 같은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언문으로 표상되는 조선어를 버리고, 중국어를 국어로 활용할 필요하기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리고  인재 등용의 루트를 다변화할 것을 주장했다. 

박제가의 이 글을 통해 한 사회의 타락과 몰락을 제어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은, 사회적 모순이 심각하게 돌출되고 있는 그 순간에 이미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고, 이 등잔 밑의 정책 대안을 지배층이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민중의 고난은 감당할 수 없이 심화되곤 했다는 사실이다.

박제가가 고뇌 속에서 정책적 대안을 구상하고 있던 때나,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지금의 현실이나 민중들의 고통은 여전하지만 지배층들의 한심하기 짝이 없는 권력 투쟁은 그 끝을 모르고 전개되고 있다. (끄덕끄덕...)


이 책이 흥미를 발하는 결정체를 사실 나는 다음과 같은 장에서 꼽고 싶다. 무언고 하면, 비평을 하는 비평가 자신(이명원)이 도데체 독자들이 비평을 읽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스스로하고, 답한  것.  이것은 어쩜 비평가 스스로에게 거는 가혹한 질문일 수도 있다. 그는 스스로의 질문에 대한 답을 다음과 같이 한다.


첫째, 인식의 새로움에 기여하는 비평을 발견하기 힘들다.

지적 쾌락을 선사하는 좋은 비평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관습적이고 상투적인 사유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둘째, 육성이 담겨 있는 비평을 찾기가 힘들다.

깊은 감동을 주는 비평은 싸늘한 분석적 논리에 기반을 한 것들이 아니라, 비평에서 비평가 자신의 고통스런, ‘육성’을 발견하고 자신의 체취를 내뿜는 것이었다. 비평에서 육성이 사라질 때, 한편의 평론은 수학능력시험 대비용의 문학 자습서와 비슷한 운명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셋째, ‘지식 잡화상’과 같은 비평가의 태도도 문제다.

지식 잡화상인 비평가는 기이한 열정으로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잡다한 지식을 동원하여, 지랄탄을 쏘아 댄다고. 독자들은 이러한 비평에서 자신의 무식이 추궁당하는 느낌에 빠졌다가, 시간이 지나 그것이 한갓 언어의 사기술에 불과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비평에 대한 자신의 시선을 거두어 들인다. 무관심이 복수라고.


넷째, “주례사” 비평의 토양에서 자라난 비평 전반에 대한 독자들의 불신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밖에 끄덕여지는 구절들이 많았다. 모방송사의 <느낌표!>라는 프로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는 생각들. 아, 그리고 언론상에서 ‘사회지도층’이라는 표현을 접할 때마다 한국사회가 언어 생활의 측면에서 보자면 중세적 신분사회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진다는 이야기도. ('지도층'이라니, 누가 누구를 지배한다는 것인지.)


‘사회지도층’과 같은 시대착오적인 표현이 이 뿐일까. '경쟁력, 퇴출, 왕따, 조폭, 홍위병'과 같은 유쾌하지 않은 단어가 세상에 버글버글하다.

언어를 순화한다는 것. 글쎄.....

언어가 바뀐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나 세상이 더욱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또 그러한 세상을 열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이 제대로 존중받는 사회가 온다면, 우리들의 국어사전도 풍요로워질 것이다. 왜냐 하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니까.


밑줄 친 문장

 

 

"그들(김현과 김윤식)이 패배자인 것은 그들의 문학과 삶의 실천이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라, 승리를 불가능하게 하는 놀라운 것은 그들이 패배자임을 인정하는 순간, 그들은 오만한 승리의 잔을 들게 된다는 사실에 있다. 스스로 패배를 자인하는 것은 운명을 거역하는 자의 오만함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 오만함은 인상을 찡그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패배에 우리가 마음 깊이 공감하게 만든다. 비평에 깃들인 이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가장 예민하게 사유한 비평가는 김현이다."


 

 

"멋부린 문체라는 것이 뻔히 보이는 글을 읽기에 내 인내심은 걸맞지 않다.

기형도의 어조를 흉내내, 잘 있거라, 짧았던 읽기여! 이렇게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느낌표가 따발총으로 이어지는 문자들을 발견하면, 숨가쁘기보다는 안쓰러워진다. 전혜린이 살던 시대나 어울릴 법한 새벽의 감상은, 역시 완연한 올드 패션이다. 소설가 김훈의 문체를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은 많으나, 그 아득한 뱀을 연상하게 만드는 문장들은, 언어적 페티시즘이다. 적어도 소설은 문체의 충만을 넘어서는 곳에 존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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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 신판
조영래 지음 /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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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27 16:31

 


 

 나의 친한 벗이 말하기를, 자신이 살아온 나날 중에서 들었던 가장 상처가 되는 말은 고등 학교 다닐 적 어느 선생님의 우연한 다음과 같은 한마디였다고 한다.

 

“너희들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공사장에서 일하는 인부가 되거나 그런 인부의 아내가 될 것이다.”


친구의 아버지는 건축업을 하시는 인부였다. 친구의 아버지는 우직한 농사꾼이셨지만 자식들의 학업을 위해 시골에서 농사를 접고 서울로 상경하시었었다. 배움이 없고, 가진 기술이 없어 공사장 막일로 아내와 자식들을 건사하셨지만, 부지런하시고 정직한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를 사회에서 패배한 낙오자 정도로 일갈하는 선생님에게 친구는 뭔가를 보여 주고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고, 기분이 퍽 가라앉음을 느꼈다. 이 글은 전태일 자신인 ‘나’를 아는 모든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에 대해 고(告)함이다. 전태일은 독자인 나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사람이기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전태일에게, 그리고 이 평전을 기술하기 위해 혼신을 다한 조영래의 사랑과 투쟁과 지혜에 깊은 감동을 느낀다.


노예로서의 고통과 굴욕으로 가득 찬 지루한 나날을, 아무런 의의도 보람도 기쁨도 없는 껍데기의 삶을 애걸하며 또 애걸하며 비루하게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이 절대로 변화될 수 없는 영구불변한 현실이라는 미신에 쉽게 사로잡혀 있는 약한 자인 나에게 “인간의 존엄을 버리지 않고 인간다운 대접을 요구하며 싸우는 것은 바보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었다. 

 

왜 밑바닥 인생들은 항상 밑바닥 생활을 하게 되는가? 왜 눌린자는 계속 눌리어 살아가는가?

 

 

여기 고통 받는 한 사람의 의식을 살펴보자. 그가 태어났을 때 고통에 찬 현실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 현실 속에서 자라나면서 그는 그 현실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하여 자신에게 강요된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사실은 바로 ‘인간’이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을 똑똑히 보지 못하게 된다. 이 거대한 힘에 비하여 볼 때, 자기 자신은 너무나도 약하고 초라하고 무력한 존재로 느껴진다. 조만간에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현실의 사회 구조와 질서 앞에 무조건 머리를 수그리고 거기에 순응해야만 생존이 보장된다고 느끼게 되며, 따라서 현실 앞에서 위축되고 기가 죽어서 비굴해진다. 현실에 대한 모든 비판은 그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무모한 짓으로 되며, 자신에 대해서는 불성실하게 되고 나중에는 부도덕으로까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그는 비판 정신의 싹은 자신의 의식 속에 싹트기도 전에 잘라버리고, 사회가 강요하는 모든 명령, 모든 가치관, 모든 선전을 받아들여 순한 양이 된다.

 

전태일이 위대한 것은 순한 양이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든 가정에서 자랐으면서도, 스스로 “불행한 과거를 원망한다면 그 과거는 너의 영역에서 영원한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정도로 불우한 환경 때문에 좌절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오히려 불우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그들의 처지를 개선해주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

 

장기표 씨의 후기에서 “인간이 명석하다는 것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 부분과 맥락을 같이 한다.   

 

전태일을 보면서 민주화를 생각한다. 민주화란 무엇일까? 이 글에서 조영래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흔히 수없이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 줌도 못되는 소수의 억압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고 말하며 또 그러한 사례를 수없이 본다. 영화 같은 데서 수많은 노예들이 채찍에 시달리며 묵묵히 중노동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볼 때 어째서 저 많은 노예들이 불과 몇몇의 감독자들에게 굴종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어 본다. 인간 사회가 형성된 이래 이러한 실태는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그러한 요소들이 사회적 민주화의 장애가 되고 있는 나라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원인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 특히 들어볼 만한 설명은 억눌리는 사람들이 수적으로는 아무리 많아도 조직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조직된 소수’에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이야기해야 할 것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노예 의식인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노예 의식을 벗어던지고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정당한 권익을 위하여 주장하고 투쟁할 결의에 차 있다면 그들의 조직화는 시간 문제일 것이며 조만간에 그들은 ‘조직화된 다수’로서 ‘조직된 소수’인 억압자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것이 바로 민중 운동의 전진이며, 이것이 바로 민주화이며, 어떻게 보면 이것이 바로 진보인 것이다.

 

 

밑줄 그은 문장

 

 

사실 그 사람이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세.

그 때에 절은 모자가 하고 있는 것일세.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얼마나 불쌍한 현실의 패자냐!

얼마나 몸서리치는 사회의 한 색깔이냐!


   -재단사 일자리에서 쫓겨난 전태일이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가 어느 인부를 보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아의 좁은 환상에 집착하여, 그 속에 밀페되어 껍질을 쌓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아무 것도 참으로 사랑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참으로 소망할 수 없다. 일상 생활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많은 것을 희망하고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처럼 착각한다. 부와 권력과 명예와 미모의 이성과...... 그러나 그것들은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고 더욱 처절한 고통과 고독의 심연으로 몰아넣는 허구의 욕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탐욕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전태일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라고 썼던 것이다.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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