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 - 저자교열판
서준식 지음 / 노사과연(노동사회과학연구소)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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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01 18:39



 

 

요며칠 일찌감치 아침을 챙겨먹고 남들이 출근하듯 나도 인근 구립도서관에 나가 이 책을 읽었다. 공무원 시험, 학교 시험, 각종 고시 준비에 기타 등등의 수험서를 펴놓고 공부하랴 여념없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책상 위에 딱 이 두꺼운 책만 펼쳐놓고, 두 손을 꼭 모으고(도서관 안이 조금 싸늘해서) 진종일 웅크리고 앉아서 읽었다. 딱히 정한 것도 아닌데 오전부터 시작해서 오후 다섯시까지 꼬박 있으면 하루에 60페이지 가량을 보게 된다. 이 책은 결코 속도를 내서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마 그럴수가 없는 책이었던 것이다.

형제들과 사촌들 그리고 이모, 고모의 전향 설득에도 비전향을 고집하는 서준식 그를, 그래서 결국엔 스물네살에 들어간 감옥을 사십이 넘어 17년이라는 세월 동안을 보내온 서준식을 보면, 마틴 루터 킹이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생각난다.

“나는 한 개인이 양심이 그에게 부당하다고 명한 법을 위반하고, 그리고 그 부당성에 대해 공동체 전체의 양심을 불러일으키고자 기꺼이 그 형벌을 받아들여 감옥에 머무는 일이야 말로 법에 대한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것이지 싶다”고 말했다던...

그가 감옥 생활의 고독함을 감수하며 온 힘을 다해 사명을 이루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내가 온전히 이해하리란 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서준식(참고로 그는 비기독교인이고, 단순이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함이 아닌)'약자를 위한 예수'를 발견하는 부분(동생 영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을 읽었을 때, 그가 17년간의 감옥 생활 가운데 편지 모음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가를 조금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내가 예수의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가 단순히 '약자의 편'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들이 그 어떠한 강자가 된다 하여도 영원히 약자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예수가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겠다. 예수는 모든 이념이 경직화되고 '자율적'인 것이 되어 버릴 때 그것이 인간을 얼마나 무자비하게 억압하는지를 나에게 가르쳐 준다. 우리들이 이념의 노예가 될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에 대한 개개의 구체적인 사랑'에 굳건히 발 디딜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것이 나 개인이 겪어야 했던 (그리고 어느 의미에서는 지금도 겪고 있는) 그 처참한 정신적 위기에 있어서 얼마나 절실하고도 귀한 가르침인가를 나 자신 이외의 아무도 알 수 없다. 이것은 '영원한 약자의 편'일 수 있는 한 가지 길이다.”

그리고 서준식은 옥중에서 ‘노예’의 결박을 풀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보안감호처분 무효확인소송’이었다. ‘보안감호처분 무효확인소송’이란, 다시 말하면 ‘노예’가 아닌 ‘인간’임을 인정해달라는 요구였다. 서준식의 요구는 절실했다. 그러나 연거푸 세 번을 거절당했다.

사람이라고 무조건 사람인가! 사람답게 살아야 사람이다. 사람답게 살려면 착해야 한다. 그런데 각박한 이 세상에서의 착함이란 ‘약함’의 다름 아니다. 그러한 약함을 고수하며 살기란 그렇다 너무 어렵다.......‘어리석은 자가 끝까지 어리석음을 고수하면 현명한 자가 된다.(윌리엄 블레이크)’라고 내내 읊조리던 그는 부조리한 권력에도 빌붙지 않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에의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그것을 끝까지 지키려했던 우직한 사람이다.

내가, 나같은, 인간으로써 짊어져야 할 고뇌랄까 절망 같은 것을 자주 팽개쳐버리고 싶어하는 이가, 이 옥중에서의 서간들의 아롱아롱 새겨진 따뜻한 글줄들을 정말이지 제대로 감상으로 풀어 낼 수나 있을까, 사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 무척이나 부끄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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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하면서 쓰고, 쓰면서 여행하는 벅찬 즐거움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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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움베르트 에코의 <전날의 섬>을 집어 들어 읽다가, 에코가, 중세 이후의 프랑스 왕정에 대해 그야말로 해박한 썰을 푸는 부분에서 나의 짧은 지식이 글줄을 따라가질 못하여, 그만 앞부분에서 그대로 책을 덮었다. 나의 세계사적인 지식이 어느 순간 안개 걷히듯 환해지는 날이 오면 그때나 읽어 볼까 하고, (그런 날 안 올거다...아마..)

그리고는 언제나 그렇듯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찾았다. <하루키의 여행법>이 눈에 콕 박힌다. 이 책의 표지는 노몬한 전쟁의 전장터였던 어느 몽고의 내륙에서 찍은 사진이라는데, 녹슨 탱크 위에 서서 찍은 것이 아주 가관이다. 양손을 허리에 놓고, 엉거주춤하게 잡은 포즈에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그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는 듯 뵈는 썬글라스하며, 약간 심술스럽게 쳐진 볼의 사진 속 하루키는, <아기공룡 둘리>의 고길동을 연상시킨다. 여기에 나오는 기타 등등의 사진들은 이 모든 여행(고베 도보 여행제외)을 하루키와 함께한 사진사 마스무라 에이조가 찍었다는데, 이 사람은 하루키의 편안한 여행 동반자처럼 보인다. 복받았네 하루키)

이 책은 차례부터가 참 두서없다. 뉴욕의 이스트햄프턴으로의 여행이 처음 장에 나오다가 그게 끝나고, 일본의 어느 무인도 체류기 다음은 멕시코 여행기가 나왔다가 또 느닷없이 일본의 우동 맛 기행을 했다가 다음 편에 몽고 여행, 그 다음에 또 아메리카 대륙 횡단 등이다. 여정 순서가 아니라, 잡지에 기고한 연대 순서에 따른 차례라서 이런가 하고 살펴봤더니 그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편이 엮인 것이 특별히 읽는 데 지장을 주진 않는 것 같다. 워낙 전체적으로 널널하고 편안하게 투덜 댄 그야말로 에세이(잡글)이라 그런가보다.

그 일곱 편의 여행기 중에서도, 아메리카 대륙 횡단기가 제일 싱거웠고(읽는 사람은 싱거운 재미로 읽었지만, 글을 쓰는 하루키는 퍽이나 지루하기 짝이 없어 하고 있었다.), 맛있는 우동집을 찾아 다닌 기행들과 고베까지의 도보 여행 기록이 읽는 맛이 있었다.

왜 재밌다고 생각됐을까? 먼저 우동집 순례는 그 내용을 보조하는, 코믹하고 자세한 삽화가 곁들여져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던 거 같고, 고베 여행은 그야말로 자신의 유년의 기억을 찾아 떠난 도보 여행이라, 마치 맑은 우물에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처럼 담담한 필치의 문장이기에 그랬던 것 같다.

하루키는 물건들을 수시로 도난당하고, 연거푸 식중독에 걸려 혼쭐이났던 멕시코 여행을 기록하면서 '여행의 본질'이라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행 중의 물건 분실과 구토와 설사 등 인간을 피곤하게 하는 온갖 것들을 자연스럽고 묵묵히 받아들여 가는 단계가 바로 여행의 본질'이라고. 그런데 이 말은 너무 극단적이다. 왜냐 하면 이런 종류의 피곤은 구태여 멕시코까지 오지 않더라도 어디서든 얻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멕시코까지 왔던가. 그 물음에 하루키는 또 다음과 같은 명쾌한 답을 내린다. '왜냐 하면 그런 피곤은 멕시코에서 밖에 얻어낼 수 없는 종류의 피곤이기 때문에'라고

생각해 보면 여행은 환상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환상을 좇아 어딘가로 가서 그 환상을 손에 넣는다. 그들은 그 환상을 좇기 위해 적잖은 돈을 쓰기도 하고 시간을 들이기도 한다. 환상을 좇아 다니는 그 사람들. 잘못 되었나? 아니지. 사람들에겐 물거품 같은 그 환상을 누릴 권리가 있다. 있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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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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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29 17:28

 

어제 일요일 저녁, 마지막 장을 덮은 책은 아마존의 밀림을 배경으로 하는 이 책, '연애 소설을 읽는 노인'이고, 어제 오후에 본 비디오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부제 : 부에노스아이레스)'이며, 어그제 본 텔레비젼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파라과이에서 있었던 한인 남매 살인 사건(파라과이의 졸속 형사 사법 처리 제도에 관한 고발이랄까)에 관한 것을 다루었다.

지리적으로, 우리 나라와 가장 반대편에 있는 남미는, 인천에서 출발하는 비행길 직항 노선으로 그 거리감을 따지자면 대략 서른두 시간이라는 간격을 두고 있다. 이런 남미는 당연히 나에게는 신비로운 미지의 영역이다.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이 책의 작가 루이스 세풀바다에게 붙는 수식어는 무척 많다. 작가이자, 반체제 운동가, 망명길에 올랐다가, 연극단도 꾸린 적이 있으며, 기자로도 활동했고, 왕성한 여행가에다가 환경 운동가이기까지 하다니. 작가가 무척 바쁘고, 고단하며 험난하고 모험적인 인생을 살아왔으리란 건 눈감고도 알 거 같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의 문체는 약동적이며, 플롯은 분명하고 선이 굵다. 한마디로 읽는 재미가 나는 소설이랄까. 게다가 마지막 부분의 노인과 살쾡이의 대결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이 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아마도 두 등장 인물(?)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으로 대변되는 참으로 매력적인 한 사람(노인)과 동물(살쾡이)이 나온다. 노인은 그림 속에나 남겨진 다정했던 몇십년 전에 죽은 마누라를 가슴 속에 간직하며 살아가는 순애보이자,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읽을 수는 있으며 단어 하나하나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전체적인 이미지를 그려내는 방식의 연애 소설 읽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그는 아내가 죽자, 이후 수십년을 인디오들과 함께 자연과 어울려 살아온 탓에 밀림과 자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이 소설에 언급된 것 중, 인상적인 것 중에 하나는, 소리에 민감한 박쥐들이 위험을 느끼면 재빨리 몸을 가볍게 하고 날기 위해 뱃속에 있는 걸 몽땅 쏟아낸다는 거였다. 즉, 박쥐들을 놀래키면 여지없이 배설물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매력적인 두 번째 주인공(?)은 읍장 뚱보나 밀렵군 양키들 같은 시종잡배, 여타의 인간들보다 훨씬 위풍당당한 살쾡이이다. 물론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살쾡이가 노인과 생사를 가름하는 사투를 벌여야 했고, 결국엔 살쾡이의 죽음으로 이 대결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이 싸움은 지구상에 잡다구리하게 존재하는 오만한 인간들의 치졸한 대결들과는 비할 수가 없다. 이 싸움의 발단은 무엇이었나? 싸움을 먼저 걸어온 쪽은 암살쾡이의 어린 자식들과 수컷살쾡이 마저도 무심코 쏘아 죽게 만든 개발업자이자 밀렵꾼들인 양키들이다. 이 동물은 인간들이 걸어 온 싸움에 맞서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인 후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려 하고 있다. 이 싸움에서 살쾡이는 짐승들 또한 헤아리기 어려운 지혜를 소유하고 있음을 몸소 보여 주고 있다. ('양키들 대 살쾡이'의 대결이면 대결이지, 왜 우리의 다크 호스인 '노인'과 위풍당당 '살쾡이'의 대결이 되어야 하는지 이 역설적인 모순은 이 책을 읽고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다.)

이 책을 번역한 정창이라는 역자는 꽤 실력있는 번역가인 것 같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 취향의 견해이다. 그럼에도 내가 실력있는 번역가라고 단언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의 번역서 바르가스 요사의 <궁둥이>와 로사 몬테의 <시대를 앞서 간 여자들의 거짓과 비극의 역사>를 그의 무난한 번역 덕분으로 꽤 수월하고도 쉽게 읽어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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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이유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제인 구달 지음, 박순영 옮김 / 궁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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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16 16:47



 

며칠 전까지만도 모진 황사 바람 때문에, 목구멍이 깔깔해지고, 눈이 뻘개져 오는 나날을 보냈었다. 텔레비전을 틀면, 해가 갈수록 중국의 내몽고 지역에 사막화되어 간다고 뉴스 앵커는 전한다. 덧붙여 이 사막화의 원인은 피할 수 없는 자연 재해가 아니라, 산림의 남벌 때문에 숲이 사라지는 등의 어디까지나 인재(人災)임을 강조하여 전하고 있다. 땅이 지탱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땅에 사람들과 가축들이 살고 있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이 사막화 현상을 내몽고 지역에 사는 주민들의 탓으로 돌려야 할까,

하지만 이들은 다른 곳에서는 식량이나 땔감을 구하기 쉽지 않을 만큼 가난한 사람들이다. 아프리카의 숲들이 서서히 사막으로 변해가는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런 수난을 겪지는 않는 선진 국가들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을까? 지구 전체적으로 보면,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무지와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한편의 사람들과, 잔인함과 탐욕스러움으로 지구 환경의 오염을 불러일으키는 다른 무리들이 있는 것이다.

제인 구달은 이 양대 그룹, 나아가 지구상의 (사랑과 연민과 심지어 잔혹성까지 우리 인간과 흡사한) 침팬지보다는 (감정과 감정에 따른 행동에 대한 의미를 인식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면에서) 나은 족속인 인간들에게 깨달음을 구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구절은 이를 집약적으로 보여 준다.'나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는 것은 바로 인간의 사랑과 연민과 자기 희생의 자질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종종 정말 잔인하고 악해질 수 있다. 누구도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행동뿐만 아니라 말을 통해서도 서로를 고문하고 싸우고 죽인다. 하지만 또한 가장 고결하고 관대하며 영웅적인 행동들을 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지구 환경이 위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럼에도 나 하나의 힘으로 도데체 무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속수무책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제인 구달은 말한다.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단순히 기도만을 하지 않는다고, 그는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전투에 자신을 투신할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도 주변의 생명들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제인 구달은 사람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작은 행동 하나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그리고 그녀 자신이 몸소, 행동은 말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 책은 40년간 야생 침팬지들과의 생활과 동물 보호 운동을 등을 행하며 겪는 실천적인 깨달음 보여 주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한 권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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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양억관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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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전에 썼던 그러니까, 알라딘 리뷰로 써 올린 글을 다시 올린다. 뭐 잘썼다고 그런 수고를~,, 이 아니라, 어떤 시스템 오류가 작동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서재에서 뒤지면 나오는데, 책으로 검색하면 절대 딸려 나오지 않는 리뷰이기에 꺼내 놓는다. 아,, 그리고 보니, 알라딘에 리뷰를 올리기 시작한지 16년이 넘어간다. 2000년 2월 16일에 첫리뷰가 올려졌더라. 이제와 보니, 모종의 발전을 이뤘나 하고 보니까, 그다지 =.=;;

 

다만, 마치 일기라는 게 그러하듯  변화많은 생각과 일상의 기록물에 지나지 않은 것만 같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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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나이를 먹을수록 많이 보고 느껴야 한다. 젊은이의 감수성이란, 정신적인 나태에 빠진 어른들의 일시적인 항복 상태의 징표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예민하고 깊은 감수성은 진실로 어른들에게만 허락되는 신의 선물이 아닐까.”


어른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고 했지. 떡 얻어먹을려고 그러는 건 아니고, 연륜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명쾌한 통찰력 때문에 귀담아 듣게 된다.


시오노 나나미가 자신처럼 생각하기를 강제한 것도 아닌데, 이 작가의 확신에 찬 발언,이 문장의 끝에는 일말의 주저함을 보여 주지 않는 문체에 넙쭉 “소데스까~” 하고 응수해줘버릴 것 같은 압도하는 뭔가가 있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걸 시종일관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퍽 쉽고 즐겁게 책장을 넘기게 된다고나 할까.


그녀는 영화를 소재로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사랑에 대해, 스타의 실상과 허상에 대해, 남녀간의 우정, 불륜, 학교 교육, 남창, 차별, 전쟁, 파워와 품격, 작가에 대해, 주거(의식주의 주)에 대해, 실업, 여가에 대해.


시오노 나나미의 글은 이 책이 처음인데, 이 에세이만 읽고도 어쩐지 그녀를 많이 안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서는 확실히 피력하고, 이건 이래서 좋은 반면 나쁘기도 하다. 저건 저렇기 때문에 이해해 줘야 한다 식의 옹호를 한다거나 두루뭉실하게 포용하지 않고, 어떤 이야기를 꺼내든지간에 주저하거나 머뭇거림이 없다. 아주 자신 만만하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작가로서의 스티븐 킹은 별로였지만, 영화 속에서 그가 그리는 작가상은 재밌었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부분(왜냐 하면 그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은 늘 작가인데다가 제3자가 묘사하는 작가가 아니라 작가가 그리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라르 드파르디외 주연의 프랑스 영화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과거 남자 이야기를 곁들인다. 이탈리아 와서 이제 막 눈을 반짝이며 유럽을 즐기기 시작하던 시절에 미남에다가 케임브리지 출신다운 예절을 갖춘 그, 그는 동쪽 베이루트에서 서쪽 런던까지 화려한 유럽 사회를 맛보게 해 주었다고,. 그러나 그녀에게 역사 이야기를 쓸 마음이 없느냐는 제안이 들어오고부터 그녀의 생활은 바뀌었다고 한다. 오전에는 도서관이나 고문서고에서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미술관에 다니면서 그녀는 사색했으며 사색의 내용을 이야기하고 싶어졌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그 남자는 대단히 좋은 사람이긴 하였으나 대화 상대로서는 만족스럽지가 않았다고.... 그때 한 의대생을(그녀가 결혼한 이탈리아인 전 남편인 듯...) 만나고, 그는 가난한 학생이었지만 대화 상대로 더없이 좋았다고 .... 그리고 그녀는 이 의대생과 결혼을 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 책에서도 너무 제1급의 인물들을 사랑하는 것 같다. 그녀가 그냥 유명인이라면 무조건 좋아하기 때문에, 위인이나 영웅이 아니면 존경할 수 없다는 속물주의에 빠졌기 때문도 아닌, 그들에게서 피가 통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고,인간성에 대한 진정한 태도를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진실로 상냥한 인물에게 더 많은 사람이 따르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한다고.


괴테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수수께끼 같은 로마 영웅의 이야기를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모두 만들어낸 것이라고 규정해버린다. 아마도 사실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재미없는 걸 지적해서 뭘 하겠단 말인가. 그보다는 그런 멋진 이야기를 그냥 그대로 믿어주고 우리도 멋진 존재가 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천재가 아니라도 '멋진' 사람 정도는 되어 보자. 고 하면서 시오노 나나미는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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