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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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은 중세 수도원이다. 주인공 수도사 '나'가 또다른 주인공(?)인 어느 연금술사 피에르 뒤페를 만나면서 사건(어쩜 사건이라고 붙일 수 있는 이 소설의 줄거리 자체보다 '나'의 의문들과 호기심의 흔적들을 따라가 보는 것이, 이 작품에서 더 건질만한 무엇인지도 모르겠다.)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나'는 먼저 연금술사의 강인하고 총명한 모습에 반한다. 그에게서 정신의 위대함을 통찰한다. 그러면서 연금술에 수행되는 이교 철학에 호기심을 느끼는데 이 과정에서는 속속 빨려들듯 읽힌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이 연금술사 피에르가 숲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목격하고, 어느 동굴로 향하는 그의 뒤를 밟게 되는데.....

스티븐 킹의 원작 영화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보면 일식 때에 생기는 잠깐의 어둠을 틈타 아내(클레이본의 엄마)는 시시종종 자식(클레이본)을 성희롱하던 주정뱅이 폭력 남편이 구덩이에 빠져 죽게 만든다. 일식 때에서야 심판 받아 마땅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죄의 대가를 치루게 되었다는 설정으로 보여 진다.
이 소설에서의 '일식', 태양과 지구 사이에 달이 들어가서 태양빛에 의해서 생기는 달의 그림자가 지구에 생겨 태양이 보이지 않고 깜깜해지는 이 때는 어떠했던지....
수도자이면서 동시에 이단자인 '나'. 상반된 두 모습을 함께 지니고 있는 '나'처럼, 남자인 동시에 여자인 안드로규스의 어마어마한 실체가 만천하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것은 영(靈)인 동시에 육(肉)이며, 태양과 달 그 둘의 결합이기도 했다.

쉽게 다가오지 않는 주제다. 상반된 것들의 결합과 관한 것이라니, 그래서 이 소설의 문체가 현학적인 포즈를 취할 수 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혹 이제 막, 히라노 게이치로의 작품을 접하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런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그의 작품 <일식>을 읽은 다음에, 이후 작품인 <달>을 읽는 것이, 작가의 행보를 관찰하기 좋을 것이라고...... 바꾸어 말하면 <달>이 <일식>보다는 좀더 다듬어진 수작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일식>은 <달>에 비해 작품의 뒷부분이 주제의 무거움(영혼과 육체, 남자인 동시에 여자, 금단의 지식 등등)에 깔려서 엉성함을 면치 못했다는 혐의를 남긴다. 그럼에도 <일식>이 아쿠다카와상을 수상한 작품이고, 또 이 작가의 첫 작품이었기 그런지 뒷부분에 심사평과 작가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 염불 보다 잿밥에 더 구미가 당겼던지, 본 작품보다도 이 글을 쓴 어린 작가가 어디서 튀어나왔으며, 어떤 생각을 갖고 무엇무엇을 준비한 끝에 이 소설을 썼으며, 종합하여 어떻게 생겨먹은 작가인지를 말하는 그 부분이 더 읽는 재미를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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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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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에 각종 리뷰를 훑어보았다. 어디에고 똑같이 쓰여 있던 말은 이 이야기에 대한 결말을 듣지 말라는 것(옮긴이 또한 후기에서 줄거리만큼은 절대로 소개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이었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해 그런 평도 있었다. 이 소설의 저자는 말재간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 소설을 아주 지능적으로 썼다는 얘기였다. 일단 읽고 나니 작가가 보통 똑똑이가 아니다라는 것에 대해서는 쌍수를 들고 공감하는 바이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쯤에 보았던 니콜 키드만 주연의 영화 디아더스가 생각난다. 이런 류의 영화는 그 결말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예의임에도 언급을 하자면 (벌써 개봉 한지 1년도 넘었으니, 볼 사람은 다 봤고, 그래 알 사람은 다 안다고 생각되어....)그 영화에서의 마지막 반전은 '네가 귀신이 아니라, 내가 귀신이란 말이더냐'였다. 귀신에게 그토록 시달림을 당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 생지옥을 조성하고 있는 장본인은 바로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기만시켰다는 류의 이야기들을 듣고 나면,
늘상 팔에 솟은 소름을 쓸어내게 된다. 이 소설은 이런 이야기를 촘촘한 대화의 그물망으로 엮어 내었다. 재밌다. 그리고 읽으면서 생각한다. 나 자신은? 또 다른 나 자신 때문에 얼마나 엄청난 지옥불을 선사(?)받고 있는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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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공식 한국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양희승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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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부피에 비해 무척 가볍고, 종이질은 투박하여 편안한 느낌을 준다. 재생 종이인 모양이다. 이 책의 메시지를 반영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오래된 미래'에는 '라다크로부터 배운다'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나는 과연 뭘 배우게 되는 것일까. 글쎄, 특별히 뭘 배웠다기보다는 솔직히 이런 저런 씁쓸한 생각들이 들었다. 앞부분을 읽을 땐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라다크가 관광이다 뭐다 해서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가기 이전, 제 1부 '전통' 읽을 때는 마음 속에 따뜻한 느낌이 차올랐다.

저자는 라다크인들의 얼굴엔 항상 미소를 띠고 있었고, 그토록 험악한 환경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안락을 누리며 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라다크 사람에게 웃음이 많고, 분노나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그들의 가치관과 종교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저자는 점차로 그 사회를 형성하는 외부 구조, 규모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한 구조는 개인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또 그 개인의 신념과 가치관을 강화하며, 가족과 이웃에서부터 다른 마을 사람들과 낯선 사람에 이르기까지 라다크 사람들은 남을 돕는 것이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여기까지가 행복이다. 그 다음은?

그런 라다크가 개발과 관광 개방 따위의 정책에 노출되면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라다크 사람들은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문화를 열등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특히 젊은 세대가 그렇다. 또한 교육의 패턴이 바뀌었다. 라다크의 교육은 아이들을 서구화된 도시 환경 속에서 좁은 전문가가 되도록 훈련시키고 있었다. 결국 라다크인들은 점차로 그들의 문화와 자연으로부터 갈라지게 되었다. 현대 교육은 아이들이 자기들의 주위 상황을 거의 보지 못하도록 하는 눈가리개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자원을 사용할 줄 모르고 그들 자신의 세계에서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학교를 마친다. 그들이 받는 교육은 뉴욕 사람들이 받아야 할 교육의 빈약한 변형이다. 젊은이들은 농사를 짓는 부모 세대를 부끄럽게 여기고, 농사가 아닌 도시에 나가 생활을 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불안정한 현금 수입을 위해 자신의 문화와 독립성을 버리게 된다. 이는 곧 삶의 질의 심각한 저하를 의미한다.

지구촌에서 떠받치는 이상적인 이미지에 도달하기 위한다는 것은 자신의 문화와 뿌리를 거부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거기에 따른 소외는 분노와 원한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오늘날 세계의 많은 폭력이 잔재하고 있음과 무관하지 않으며, 그 모습의 뒤에는 바로 소외가 있다.

라다크보다는 조금 더 산업화된 사회에 사는 우리 또한 상투화된 대중 매체가 주는 이미지의 피해자가 되어 있지만, 현실과 서구적 이상과의 간격이 훨씬 더 넓은 제 3세계에서는 절망적인 느낌이 그만큼 더 강한 것이다.

물론 개발 도상 국가의 사람들 또한 이런 현대화가 종족 간의 적대 관계를 악화시킨다던지 하는 악재로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진보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이 부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듯하다. 저자는 17년 동안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공동체와 땅과의 긴밀한 간계가 물질적인 부나 고급 기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인간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음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정말로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은 자연에 기초를 둔 전통적인 사회가 여러 가지 결함과 한계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선진 사회보다 더 사회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지속가능한 것이라는 점이다.

고도의 기술 문명을 통해 물질적 풍요를 이루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가? 정말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문화적인 생명력과 그것의 다양성이며,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잘 알며, 서로 잘 어울려 사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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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를 수 없는 나라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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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나는 비평계와 세간에서 이 책을 향해 숱하게 쏠리고 쏟아져 내렸던 찬사와 호평을 잘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냥 내 식으로 굳이 이 책에 대한 느낌을 하자면, 이렇다. 스물 한살의 프랑스 작가가 써내린 소설치고 퍽 훌륭한, 18세기 말을 배경으로한 베트남 여행기이네. 라고.

이 소설의 행간 어느 부분도 도발적이고, 문제적이라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만한 부분이 없다. 그저 담담하고, 아릿하며, 고독하고 무상하다.

그래서일까, 마음의 평정을 찾으러 떠나는 여행길에 꺼내 놓고, 행간 사이를 음미하며 읽으면 전율이 오래도록 남을 것 같은 책이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읽던 당시는 절대 그렇지 못한 상황이었다.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졸면서 띄엄띄엄 읽었기 때문인 즉, 감동은 반감하고 말았던 거 같다.

이 책의 등장 인물들은 다 죽었다. 베트남에서 온 어린 왕자는 멀고도 낯선 이국 땅 프랑스에서 외롭게 죽었고, 프랑스에서 출발하여 여러달에 걸친 뱃길로 미지의 세계, 베트남에 도착한 선장과 선교사 수녀들도 우여곡절 끝에 모두 죽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숲속에서 살해당하거나 부상으로 죽었고, 선교사와 수녀 몇은, 프랑스에서 어린 아들을 외롭게 죽도록 한 데 대해 상심한 왕의 폭정으로 살해당하거나, 풍토병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물론 이 모든 죽음이 참혹하고 슬픈 것이긴 하지만, 이 소설의 초점은 그 참혹한 슬픔을 강조하는 데 있지 않다. 죽음과 가까워지고 죽어 잊혀지는 것이 생의 의미라는 것을 미학적으로 보여 준다고나 할까.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프랑스 선교사와 수녀들은 프랑스어를 가르치거나 베트남말을 배우는 등 논밭을 함께 경작하는 등 프랑스에서 지니고있던 모든 것을 잊고 이곳에서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베트남 원주민과 더불어 평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 책에서 마지막까지 살고 있었던 도미니크 신부와 까트린느 수녀 일행은 다른 지역에 선교를 할 목적으로 일부 선교사와 수녀 몇을 처음 정착한 마을에 두고, 다른 곳으로 길을 떠났다. 그러나 고된 여행길에서 도미니크 신부와 까트린느 수녀만이 살아남게 된다. 종교적인 목적으로 베트남에 왔지만, 이들의 일행은 모두 죽었으며 이 둘만이 고립되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 두 사람은 구체적인 생의 본질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들이 항상 나누던 기도와 복음과 말씀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만나 사랑을 하게 된 것이었다. 7년이 지난 후, 이 둘은 한 날 같은 시간에 병으로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사족을 좀 달자면, 나는 이 책을 통해 베트남의 지역색도 아울러 맛볼 수 있기를 바랬다. 푸른 벼와 연잎에 찐밥, 코끼리를 타고 밭을 경작하고, 어린 아이들도 담배를 피우는 모습. 순박한 원주민, 풍토병. 그것 이상의 무언가를 말이다. 하지만 '다다를 수 없는 나라'라고 하는 제목이 보여 주듯...... 알 듯 말 듯 모호하고 정적인 느낌으로 베트남의 풍광 묘사를 메우려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원체가 이것이 이 소설의 미학이라고 하니, 뭐 그런 줄 알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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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양장) - 유년의 기억 소설로 그린 자화상 1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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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소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하나, 분단 문제를 다루는 작품. 둘, 소시민적 삶에 대한 비판이 드러난 작품. 셋,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작품.

이 작품은 첫번째와 세번째가 속할 수 있는 작품이다. 분단 이전 어린 여자아이의 성장 소설의 성격을 보이면서, 분단을 겪으면서 주인공의 삶의 모습을 형상화한 점.

 

우리 아버지는 노래를 잘 부르시지도 않고, 그다지 음악을 즐겨하기는 것 같지도 않은데, 예전부터 [가요무대]라는 프로를 좋아하셨다. (지금도 그 프로가 월요일 밤 10, 11시 무렵이 시작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면, 아무리 무뚝뚝하고 완고한 지엄하신 어르신이라도 옛날 노래를 대하노라면 어린아이처럼 순한 얼굴이 되어 알싸한 추억에 잠겨드시는 것처럼 보인다.

참 의외인 것도 1930년에서 1950년도 당시를 살아본 일이 없는 내가, 이 책을 읽고 작가의 유년 시절과 장년 시절의 이야기 골짜기에서 헤어날 줄 모르고 빠져 읽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작가 박완서의 입을 빌자면 순전히, 그렇다. 순전히 기억에 의한 소설이라고. 그래서 요즘에 마구 쏟아져 나오는 장르 혼합의 포스트 모던한 소설들이나, 황당무계하다 싶은 역사 소설, SF장르의 소설과 많이 다르다. 작가가 서문에서 했던 말이 자꾸 속에서 밀치고 들어오는 것 같다. '기껏 활자 공해나 가중시키기 위해 진을 빼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위안이다.'라던. 그렇다. 그의 이 소설은 결코 일회용품일 수 없다.

'그 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휙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위의 인용 부분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주인공(작가)은 자신의 벌레의 시간(공산주의에 물든 오빠로 말미암아 집안은 풍비박산되고, 주인공과 모녀가 겪는 시간의 과정)을 증언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글을 쓰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을 하는데, 자신의 숙명을 예감하는 이 부분이 나에게 묘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소설은 '나'라는 영혼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고 했던 말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니.....

그 밖에도 인상적인 부분은 많다. 특히 유년기를 보낸 박적골에서의 할아버지와의 추억담이 그렇다. 주인공(작가)을 '요 입 속의 혀 같은 것'이라며 이뻐하는 모습말이다. 그리고 도깨비와 화장실에 얽힌 이야기 같은 것이 참 맛깔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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