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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로 산다는 것 - 잃어버리는 많은 것들 그래도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
제니퍼 시니어 지음, 이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의무에 무릎을 꿇으면, 정서적인 보상을 최대화하려는 끊임없는 압박에서 해방된다.
175~176
"장치로서의 스트레오는 사물로서의 스테레오와 대조된다. 사물은 실천을 요구하지만 장치는 소비를 유혹한다."
오늘날 어린아이들의 책상 서랍에는 온갖 장치들이 가득 들어 있다. 땡땡 소리를 내는 장치, 슉슉 소리를 내는 장치, 삑삑 소리를 내는 장치, 반짝거리는 장치, 음악이 나오는 장치, 동영상이 나오는 장치, 그냥 손을 대기만 해도 반응하는 장치... 그러나 아동기는 우리가 문화적인 차원에서 여전히 사물의 우월성을(그리고 아울러 '사물'에 대한 정복을) 강조하는 시기 가운데 하나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부수라고 망치를 사다 주고, 목걸이를 꿰라면서 염주를 사다준다. 또 핑거페인트를 사다 줘서 손가락으로 아무 데나 마구 그림을 그리게 만들고, 조립용 플라스틱 장난감을 사다 준다. 또한 거실 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아이들과 함께 철길을 깔고, '팅커 토이' 탑을 쌓고, 담배 파이프 청소 용구로 꽃을 만든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기용 변기를 선물로 사다 주는 친지가 꼭 있게 마련이다. 아기가 대변을 가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취학 시기에 모든 아이는 음악을 배우고, 미술가 공작을 배우며, 블록을 사용하고, 공받기 놀이를 하며, 춤을 춘다. 부모들은 흔히 자기 아이가 드라이버를 가지고서 온갖 장치들을 분해하는 걸 보고는 장치들 그 자체뿐만 아니라 이 장치들을 분해하는 데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
유아기의 아이들은 자기의 신체적인 경험과 결코 떼어 놓을 수 없는 방법들을 통해서 지식을 습득한다 이 시기는 크로포드가 주장하듯이 우리 인간이 진정으로 "천성적으로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 혹은 실용주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보기 가장 쉬운 발달 단계이다. 어린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냄으로써(즉, 함께 레고블록으로 자동차를 만들고, 빵을 만들고, 야구를 하고, 모래성을 쌓음으로써) 우리는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돌아갈 기회를 허락받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 본연의 모습이다.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 무언가를 창조하는 존재, 무언가를 쌓는 존재....
286쪽
어떤 아이의 인생에서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진행된다면 이 아이는 행복하까?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매우 비현실적이지 않을까? 내가 쓴 '비현실적'이라는 표현은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어떤 조건이 달려 있다는 뜻이다.인생 자체가 행복한 게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행복은 아이에게 요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른이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방식으로, 자기 부모가 자기에게 행복하라고 가하는 압박감, 부모를 불행하게 혹은 지금보다 더 불행하게 만들지 말라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게 아닐까 싶다.
395쪽
기쁨과 같은 감정은 우리의 기본을 드높이는 만큼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의무와 같은 다른 것들은 우리 삶에 배경으로 소리 없이 흐르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더 힘들게 만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전반적인 삶을 보다 가치 있게 만들어주며, 우리가 각자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보다 많이 공명하도록 해 준다.
"실제로 누군가는 부모가 되어 부모 노릇을 하면서 살아보면 행복에 대해서 우리가 가진 집착이 (이런 집착은 보통 즐거움이나 축복을 추구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얼마나 피상적인지 알 수 있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우리는 이런 집착을 재평가하게 되고, 어쩌면 행복이 무엇일까 하는 본질적인 의문을 재규정하게 된다.
407~408
"우리는 흔히 무능한 친척을 돌보는 것과 같은 행위를 마땅히 해야 하는 어떤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보살핌' 혹은 '보살피는 사람'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누군가의 더러운 속옷을 갈아입히는 행위를 보살핌의 노동이라고 부르면, 당사자가 그 일을 스스로 원해서 한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의무 차원에서 이런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 일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한결 멀어지며, 따라서 (나의 주관적인 생각일수도 있지만) 짐은 보다 가벼워진다. 이때 당사자는, 자기가 옳은 일을 한다는 느낌은 여전히 가지면서도 자기가 하는 일 자체를 싫어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 "
그런데 아이들은 무능한 친척들과는 다르다. 그리고 위 인용문의 저자가 이런 말을 하는 의도는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이 즐겁지 않을 수도 있다는 주장, 혹은 어떤 사람이 하고 싶어 안달을 내는 그런 일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 방정식에서 즐거움을 제거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어떤 기대도 하지 않을 권리를 허용함으로써) 우리가 가지는 기대의 내용을 바꾸어 놓는다.
아이를 가지려고 그렇게나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얻은 소중한 아이라면 부모로서는 그 아이를 기르는 경험에서 행복을 기대하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물론 행복을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행복만을 계속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또한 그 행복도 늘 자기들이 기대하던 방식이나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오로지 의무라는 발상 속에서만 즐거움을 찾고자 한다면, 이 과정은 매우 멀리까지 이어간다.
너에게 맡겨진 일을 성심을 다해서 하되 보상에 마음을 두지 말라.
현재 읽고 있는 중이다... 원제였다는 "모든 게 기쁨, 재미는 전혀 없음"에 깊에 매료되어 고른 책.
